무라카미 마사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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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라카미 마사쿠니는 1932년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노동조합 활동과 대학 시절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도요보 자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퇴사 후, 생장의 집에 입교하여 정치에 입문했으며, '원호법' 제정을 주도했다. 1980년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자민당 내 매파로 활동했고, 노동상으로 입각하기도 했다. '참의원의 실력자'로 불리며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KSD 사건에 연루되어 의원직을 사퇴하고 수뢰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은퇴하여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정책에 반대했으며, 2020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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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마사쿠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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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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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32년 8월 21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후쿠오카현 가호군 |
사망일 | 2020년 9월 10일 |
사망지 | 일본 사이타마현 아사카시 |
종교 | 생장의 집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무소속 |
학력 및 경력 | |
출신 학교 | 다쿠쇼쿠 대학 정경학부 졸업 |
전직 | 도요보 레스포와르 종업원 |
정치 경력 | |
직책 | 제57대 노동대신 |
내각 | 미야자와 개조내각 |
취임일 | 1992년 12월 12일 |
퇴임일 | 1993년 8월 9일 |
직책2 | 참의원 의원 |
선거구2 | 전국구 → 비례구 |
당선 횟수2 | 4회 |
취임일2 | 1980년 7월 8일 |
퇴임일2 | 2001년 2월 26일 |
기타 직책1 | [[File: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23대 자유민주당 참의원 의원회장 (총재: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
취임일6 | 1999년 |
퇴임일6 | 2001년 |
2. 생애
무라카미 마사쿠니는 1932년 후쿠오카현 가호군에서 태어나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다쿠쇼쿠 대학 졸업 후 도요보에 입사했으나 회사가 도산하여 퇴사했다. 이후 생장의 집과 인연을 맺고 정치에 입문했다.[32][4][34][36]
1964년 생장의 집 정치연합 국민운동본부장 등을 맡았고,[40] 1974년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41] 이후 원호법 제정 운동을 주도하여 1979년 국회에서 제정되도록 하였다.[42][43]
1980년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 4선을 기록했다.[45]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지하는 등 우익 성향을 보였으며,[46] 1992년 미야자와 내각 (개조)에서 노동상을 지냈다.[47]
1995년 '전후 50년 부전 결의안' 채택을 반대하는 우익 세력과 연대하여 결의안 채택을 무산시켰다.[49]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참패 후 참의원 간사장에서 물러났으나, '참의원의 실력자'로 불리며 영향력을 행사했다.[1]
2000년 오부치 게이조 총리 사후 5인조 밀실 회담을 통해 모리 요시로를 총리로 추대했다.[51] KSD 사건에 연루되어 2001년 의원직 사퇴 후 체포, 2008년 징역형이 확정되어 수감되었다.[1]
2020년 9월 10일, 사이타마현 아사카시에서 88세로 사망했다.[31][2]
2. 1. 초기 생애 및 학창 시절
1932년 8월, 후쿠오카현 가호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무라카미 요조는 에히메현 사이조시 출신으로, 유흥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고향에서 쫓겨나 지쿠호 탄광에 정착했다. 무라카미는 탄광 노동자인 부모 밑에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32]낮에는 다가와군 소에다정의 탄광 노동조합 사무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가와사키정의 야간 학교에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노동조합 활동 중 서기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4]
1952년, 은사의 권유로 다쿠쇼쿠 대학 정치학부에 입학했다.[4] 대학 시절, 민족파 정치 운동에 참여하고, 군국주의 미화 논란으로 교명이 변경될 위기에 처한 대학의 교명을 되찾는 데 앞장섰다.[5]
2. 2. 도요보 입사 및 퇴사
대학 졸업 후 신문기자를 희망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브라질에 가고자 토요보 자회사에 입사했다. 영업부에 배속되어 양복, 셔츠, 여성복 옷감 등의 판매에 종사했다. 거칠었던 대학 응원단 시절과는 다른 분위기에 처음엔 당황했으나 화려한 옷감들을 아카센 업자에게 판매하면서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34]1959년, 탄광 시절에 알게 된 고향 여성과 결혼했다.[35]
2. 3. 정치 입문 및 생장의 집
1960년 도요보가 도산하자 무라카미는 퇴사했다. 학창 시절 동급생과의 인연으로 국회 의원회관을 드나들게 되었는데, 이때 중의원 의원 하야카와 다카시의 소개로 자유민주당 청년부에서 일하던 다마키 가즈오를 만났다. 당시 다마키와 무라카미는 훗날 지지 기반이 되는 종교법인 생장의 집과는 관련이 없었다.두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자고 의기투합하여 함께 하수도 사업을 했다. 이 무렵 정계 진출에 관심은 있지만 적당한 후보자를 찾지 못한 종교 단체가 생장의 집이었다. 하야카와는 미키 다케오의 소개장을 가져와 다마키와 무라카미를 생장의 집 총재 다니구치 마사하루와 만나게 해주었다.[36] 무라카미는 "그 당시의 나는 거짓말이 한 번에 다 들통났다는 느낌이었다. 어찌 됐든 표를 원해서 만나러 간 거니까. 다니구치 선생님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었다"라고 회상했다.[37]
이를 계기로 다마키는 생장의 집에 들어가 간부 교육을 받았다. 자민당 공천과 생장의 집 추천으로 1957년 참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지만, 신도들은 다마키가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 입교한 거짓 신도라며 신뢰하지 않았고, 생장의 집 신도가 70만 명이라고 알려졌지만 다마키는 30만 표만 얻고 낙선했다.
이후 다마키와 무라카미가 함께하던 하수도 사업도 도산했다. 다마키는 점점 진지하게 생장의 집 교리를 공부했고, 무라카미도 다마키의 설득으로 1962년에 정식으로 생장의 집에 입교했다.[38] 무라카미는 유흥에 빠져 살던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느꼈고 인생관도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39]
2. 4. '원호법' 제정 운동 및 정치 활동
1964년, 무라카미 마사쿠니는 생장의 집 정치연합 국민운동본부장 및 일본을 지키는 모임 국사대책국장을 맡았다.[40] 1965년, 다마키 가즈오가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자 그의 비서로 활동했다.[40] 1971년 다마키 가즈오가 재선에 성공한 뒤에는 교단으로 돌아와 생장의 집 정치연합에서 일했다.1974년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55만 표를 얻어 낙선했다.[41]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당선에 필요한 표가 부족하다며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후쿠다 다케오 파벌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41]
무라카미는 쇼와 천황 재위 50년 봉축 행사를 추진하면서 '원호법' 제정 운동을 시작했다.[42]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함께 이 운동을 추진한 주체는 생장의 집 학생회 전국총연합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일본청년협의회였는데,[14] 이 운동은 훗날 일본회의의 모태가 되었다. 무라카미는 가바시마 유조 등과 함께 운동을 전개했고,[42] 1979년 국회에서 원호법이 제정되었다.[43]
'원호법' 제정 과정에서 결집한 원호법제화 실현 국민회의는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로 조직이 개편되었다.[44] 사무국은 메이지 신궁 관계자와 생장의 집 관계자들로 구성되었다.[44]
한편, 1977년 다마키 가즈오가 창설한 종교정치연구회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2. 5. 참의원 의원 당선 및 활동
1980년 참의원 선거 전국구에 출마하여 110만 표를 얻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후쿠다파 가입을 희망했으나, 다마키 가즈오와의 관계 때문에 무소속으로 남았다.[45] 이후 참의원에서 4선을 기록했다.1981년 '다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사무국장을 맡는 등[46] 우익 성향을 보였다. 당시 자민당 참의원 의원들 중에서는 매파로 분류되었다. 198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나카가와 이치로를 지지했으나 실패했다.
1983년 나카가와 이치로가 자살한 후, 다니구치 세이초의 중개로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이끄는 정책과학연구소(나카소네파)에 가입했다. 1986년 양원 동시 선거에서 나카소네의 유세에 동행하며 자민당 전국조직부위원장을 맡았고, 자신도 재선에 성공했다.
1987년 다마키 가즈오가 사망한 후, 참의원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을 맡아 일본사회당, 민사당 등 야당과의 협상을 주도하며 참의원 내 영향력을 확대했다.
생장의 집이 정치와 거리를 두게 되자, 중소기업정치연맹을 새로운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1991년 중소기업경영문제의원연맹 간사장에 취임했고, 이후 회장이 되었다. KSD중소기업경영자복지사업단의 국제기능공예대학(현 모노즈쿠리 대학)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국제기능공예대학 설립 추진 의원연맹 회장을 맡았다.
2. 6. 노동상 취임
1992년 12월, 미야자와 내각 (개조)이 발족하자 노동상으로 취임해 처음 입각했다. 당시 참의원 의원 중에서는 이노우에 다카시와 함께 두 사람이 입각했는데, 나카소네 내각에서 방위정무차관을 지낸 적이 있던 무라카미는 처음엔 방위청 장관을 희망했다. 그런데 참의원 의장 사이토 주로가 노동상을 제안하자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나카소네도 노동상을 권했고 총리대신 미야자와 기이치가 생활 대국의 일환으로 노동 시간 단축 등을 추진하려 하는데 국회대책위원장 경험을 살려 야당을 설득해줄 것을 부탁했다. 결국 무라카미는 이를 받아들였다.[47]당시 내각관방장관이던 고노 요헤이는 무라카미에게 "무라카미 선생, 선생이 방위청 장관이 되면 총리가 안심하고 외유를 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당신이 총리가 부재중인 틈을 타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면서요"라고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47] 이는 무라카미의 매파적 성격을 보여준 것인데, 프로 국대 정치인을 자임하는 무라카미는 당내 반대파와 야당 설득에 진력하여 "매파인 무라카미가 이렇게까지 하나"라며 반대파들의 협력을 이끌어냈다.[48]
2. 7. 전후 50년 결의 무산
1995년,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에 취임한 무라카미 마사쿠니는 자사사 연립 정권 하에서 '전후 50년 부전 결의안' 채택을 둘러싼 당내 갈등을 겪었다. 무라카미는 결의안에 반대하는 우익 세력과 연대하여 결의안 채택을 무산시켰다.[49]당시 자민당 내에서는 결의안 찬성파와 신중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무라카미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995년 6월 6일, 우익 정치 운동가들과 민족파 간부 약 50명이 무라카미의 참의원 간사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22] 이들은 결의안에 반대하며 무라카미와 협상을 요구했다.
가토 고이치 등은 민족파와 교섭에 나섰지만 난항을 겪었다. 최종적으로 '세계 근대사상 수많은 식민지 지배나 침략적 행위를 생각하며'라는 문장을 삽입하고, '우리나라가 과거에 저지른 행위나 다른 나라,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국민들에게 입힌 고통을 인식하고 깊이 반성하는 마음을 표명한다'라는 문장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49]
그러나 나중에 '우리나라가 과거에 저지른 이러한 행위나 다른 나라 … (후략)'로 '이러한'이라는 문구가 추가되어, 일본이 침략 전쟁을 했음을 인정하는 듯한 문구로 바뀌었다. 이에 민족파는 격노했고, 무라카미는 참의원에서 결의안이 의결되지 않을 것이라며 민족파를 설득했다. 실제로 참의원은 전후 50년 부전 결의안을 부결시켰다.[49][21]
훗날 무라카미는 자신이 50년 결의를 통과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무라야마 담화를 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50][22]
2. 8. '참의원의 실력자'
1997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후생대신과 후생성 간부가 무라카미에게 알리지 않고 참의원 후생위원회 간사들과 식사를 한 사건이 발생했다. 무라카미는 원활한 참의원 심의를 위해 참의원 상임위 간사의 일정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에서, 사전에 알리지 않고 개인적인 약속을 잡는 것은 곤란하다며 반발했다. 그는 후생위원장에게 의사권 발동을 촉구하여 후생성 간부의 출석을 요구했다.[1]자민당 집행부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무라카미를 참의원 간사장에서 경질하려 했으나, 무라카미는 참의원의 독자성을 내세워 저항했다. 결국 고이즈미가 무라카미에게 사죄하는 것으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1]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자, 무라카미는 책임을 지고 참의원 간사장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정책과학연구소 회장을 이어받아 무라카미파를 이끌게 되었다. 이는 자민당 역사상 최초로 참의원 의원이 파벌 영수가 된 사례였다.[1]
1999년, 가메이 시즈카 그룹과 합류하여 지수회(무라카미·가메이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같은 해, 자민당 참의원 의원회장에 취임하면서 '참의원의 법왕', '무라카미 천황' 등으로 불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
2. 9. 5인조 밀실 회담
2000년 4월,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중태에 빠지자, 후임 총재로 유력했던 가토 고이치와 야마사키 다쿠를 배제하기 위해 이른바 5인조라 불리는 밀실 회담이 열렸다. 회담 구성원은 무라카미 외에 모리 요시로 간사장, 아오키 미키오 내각관방장관,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 대리, 가메이 시즈카 정조회장이었다. 이들은 차기 총재를 논의하던 중 무라카미가 모리에게 "당신이 하면 되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다른 구성원들도 동의하여 모리가 후임 총리로 결정되었다.[51]훗날 모리 내각이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자, 무라카미는 모리를 총리로 추대한 것을 "가장 큰 실수"였다고 비판했다. 그는 "신의 나라 발언 등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하고, 사임 후에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올림픽 위원장 같은 걸 한다"라고 말했다.[23]
2. 10. KSD 사건 및 몰락
2000년 10월, KSD(현 안심 재단)의 부정 경리 의혹(KSD 사건)이 발생했다.[1] 이듬해 2001년 1월, 무라카미의 정책 담당 비서를 지낸 고야마 다카오 자민당 참의원 의원이 체포되는 등, 무라카미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확산되자 무라카미는 참의원 의원회장직을 사임했다.[1] 2월에는 무라카미가 KSD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다.[1] 무라카미는 2월 28일에 자민당을 탈당하고 의원직을 사퇴했으며,[1] 3월 1일에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되었다.[1]2003년 5월 20일, 도쿄지방재판소는 무라카미에게 징역 2년 2개월, 추징금 72.88억엔의 실형을 선고했다.[1] 2005년 12월 19일, 도쿄고등재판소도 1심과 같은 판결을 내렸고,[1] 2008년 3월 27일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1] 이의신청도 4월 14일 각하되어, 5월 15일 도쿄고등검찰청에 의해 도쿄 구치소에 수감되었다.[1] 이후 6월 10일 도치기현 기쓰레가와 사회복귀촉진센터로 이감되었다가[1] 2009년 10월 28일 가석방되었고,[1] 2010년 5월 5일 형기가 만료되었다.[1]
2. 11. 은퇴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대신이 되어 추진한 일본의 우정민영화를 비롯한 정책과 정치 수단에 반대했다. 2005년 참의원 본회의에서 우정민영화 법률안이 부결된 것은 무라카미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의혹도 제기되었다.[31]2011년 6월, 자민당 참의원 의원들에게 당의 결정 사항에 구속되지 말고 양심을 좇아 정치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 총무대신정무관에 취임한 하마다 가즈유키가 자민당을 탈당했는데(탈당계를 제출했지만 수리되지 않고 제명되었다), 그 후 국민신당 대표 가메이 등과 함께 참의원 자민당 의원들을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으로 빼내는 공작을 진행했는데(2010년 참원선에서 패배해 참의원에서 과반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 흑막이 무라카미였다는 의혹이 있다.
2020년 9월 10일 4시 30분, 사이타마현 아사카시의 병원에서 사망했다.[31][2] 향년 88세.
3. 평가 및 비판
- 카메이 시즈카는 무라카미 마사쿠니를 "2,000미터 지하에서 기어 올라온 남자"라고 표현했다.[26]
- 2006년 4월 30일, TV 아사히 계열 뉴스 프로그램 "슈퍼 J 채널"에 출연하여 호리에 타카후미 보석 뉴스 중 도쿄 구치소 구치 경험이 있는 스즈키 무네오, 사토 마사루와 함께 나라현 요시노를 방문, 고다이고 천황릉을 참배하고 재기를 다짐하는 모습이 방송되었다.
- 야마다 요코 사건으로 체포된 모리야 타케마사에게 물품을 전달하는 등, 체포 및 기소된 형사 피고인들과 인맥을 구축했다.
- 좌파 논단지 『세계』에서 우오즈미 아키라와 인터뷰를 진행, 2007년 10월 『우리, 국가에 배신당하더라도 증언 무라카미 마사쿠니』를 출간했다.
- 미야자키 마나부의 Web 매거진 『직언』에도 등장했다.
- 2007년 5월, 히라노 사다오, 후데사카 히데요와 함께 『참의원은 필요없다』를 출간, 같은 해 11월 『자민당은 왜 망하지 않는가 격동하는 정치를 읽는 법』을 출간했다.
- 정계 은퇴 후에도 정치 활동 재개에 대한 의욕을 보였으며, "일본의 사법을 생각하는 회"를 개최했다.[27]
- 인공 임신 중절에 비판적이었으며, 의원 퇴임 후에도 낙태 불법화를 주장했다.
- "성장의 집 정치 연합" 출신으로, 일본회의 결성에 관여했으며,[28] 창가학회를 모체로 하는 공명당의 정권 진입이 일본회의 설립의 계기였다고 한다.[29]
- 작가 사토 마사루가 도쿄 구치소에 구류 중일 때, 2주 동안 매일 사과를 1개씩 넣어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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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山談話、削られなかった“4文字”の文言 元「参院のドン」村上正邦氏が激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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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惜別)村上正邦さん 「日本会議」結成をよびかけた元自民党参院議員会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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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歴代最低の総理大臣」調査、3位は鳩山由紀夫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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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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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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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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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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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日本会議を形成する生長の家人脈
http://webronza.asah[...]
朝日新聞社
2024-01-18
[39]
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40]
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41]
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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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43]
간행물
官報 (号外)
https://kokkai.ndl.g[...]
国会会議録検索システム
2017-03-28
[44]
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45]
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46]
뉴스
(惜別)村上正邦さん 「日本会議」結成をよびかけた元自民党参院議員会長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20-09-26
[47]
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48]
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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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証言・村上正邦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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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日本会議を作った男」・村上正邦に聞く、「安倍談話」と「戦後50年決議」の真相――シリーズ【草の根保守の蠢動 番外編第5回】
http://hbol.jp/57851
2015-08-27
[51]
뉴스
"「戦後歴代最低の総理大臣」調査、3位は鳩山由紀夫氏"
https://www.news-pos[...]
週刊ポス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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