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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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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15 사건은 1932년 5월 15일 일본에서 발생한 군사 쿠데타로, 해군 청년 장교, 육군 사관후보생, 우익 민간인들이 연합하여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를 암살하고 정부 요인과 시설을 공격했다. 이 사건은 세계 대공황, 만주사변,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등 당시 일본 사회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발생했으며, 극우 민족주의와 군부의 영향력 확대를 배경으로 한다. 5·15 사건은 일본의 정당 정치를 종식시키고 군부의 정계 진출을 가속화했으며, 군국주의 사상을 강화하여 2·26 사건,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사건 가담자들은 가벼운 처벌을 받았으며, 이 사건은 소설, 영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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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사건
지도 정보
사건 개요
명칭5·15 사건
일본어 명칭五・一五事件 (고이치고 지켄)
발생 장소도쿄부도쿄시
발생 날짜1932년 5월 15일
사건 유형해군 청년 장교들의 내각총리대신 관저 등 습격
수단권총, 수류탄, 단도
사망자이누카이 쓰요시, 경찰관 1명
부상자수 명 (경비 경찰관 등)
범인9명
이미지
5·15 사건을 보도하는 [[아사히 신문]]
5·15 사건을 보도하는 아사히 신문

2. 배경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경제는 심각한 경기 후퇴를 겪었고, 기업 도산이 잇따르며 사회 불안이 커졌다. 1931년에는 이시와라 간지가 지휘하는 관동군만주사변을 일으켰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민주주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지식인, 사회주의자 등 혁신파들은 군 축소와 군을 비판했고, 이러한 분위기는 일반 시민에게도 퍼져 군인들이 위축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으로 일본 제국 해군의 규모가 제한되면서, 정부를 전복하고 군부 통치를 하려는 하급 장교들의 움직임이 커졌다.[2] 이들은 극우 민족주의자인 이노우에 니쇼와 그의 "혈맹단"과 접촉하여, "쇼와 유신"을 위해 주요 정치 및 재벌을 암살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에 동의했다.[2] 1932년, "혈맹단 사건"에서 이노우에의 그룹은 전 재무대신이자 ''헌정민정당'' 대표인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미쓰이 부흥회사 총재 다나카 슈쿠마를 암살했다.[1]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에서는 기업 도산이 잇따르고 사회 불안이 확대되었다. 1931년 관동군 일부가 일으킨 만주사변을 일본 정부는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체결에 대한 해군 강경파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2]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으로 일본 제국 해군의 규모가 제한되면서, 정부를 전복하고 군부 통치로 대체하려는 하급 장교들 사이에서 움직임이 커졌다.[2]

다이쇼 데모크라시민주주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지식인과 사회주의자 등 혁신파는 군 축소와 군 비판을 주장했고, 이러한 분위기는 일반 시민에게도 퍼져 군인들이 위축된 마음을 갖게 되었다.

1932년 "혈맹단 사건"에서 이노우에 니쇼의 그룹은 전 재무대신이자 헌정민정당 대표인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미쓰이 부흥회사 총재 다나카 슈쿠마를 암살했다.[1]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에서는 기업 도산이 잇따르며 사회 불안이 커졌다. 1931년 이시와라 간지가 지휘하는 관동군 일부가 만주사변을 일으켰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으로 일본 제국 해군의 규모가 제한되자, 정부를 전복하고 군부 통치를 하려는 하급 장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2] 이들은 육군 내 비밀 결사인 벚꽃회와 유사하게, 극우 민족주의 세력과 연계하여 쇼와 유신을 위해 주요 정치 및 재계 인사를 암살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2]

1932년에는 극우 민족주의자 이노우에 니쇼와 그의 "혈맹단"이 전 재무대신이자 ''헌정민정당'' 대표인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미쓰이 부흥회사 총재 다나카 슈쿠마를 각각 2월 9일과 3월 5일에 살해했다.[1] 당초 이들은 20여 명의 재계 및 정치 지도자를 암살할 계획이었다.[1]

2. 1.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 불안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경제는 심각한 경기 후퇴를 겪었고, 기업 도산이 잇따르며 사회 불안이 커졌다. 1931년에는 이시와라 간지가 지휘하는 관동군만주사변을 일으켰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민주주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지식인, 사회주의자 등 혁신파들은 군 축소와 군을 비판했고, 이러한 분위기는 일반 시민에게도 퍼져 군인들이 위축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으로 일본 제국 해군의 규모가 제한되면서, 정부를 전복하고 군부 통치를 하려는 하급 장교들의 움직임이 커졌다.[2] 이들은 극우 민족주의자인 이노우에 니쇼와 그의 "혈맹단"과 접촉하여, "쇼와 유신"을 위해 주요 정치 및 재벌을 암살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에 동의했다.[2] 1932년, "혈맹단 사건"에서 이노우에의 그룹은 전 재무대신이자 ''헌정민정당'' 대표인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미쓰이 부흥회사 총재 다나카 슈쿠마를 암살했다.[1]

2. 2. 정치권에 대한 불신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에서는 기업 도산이 잇따르고 사회 불안이 확대되었다. 1931년 관동군 일부가 일으킨 만주사변을 일본 정부는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체결에 대한 해군 강경파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2]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으로 일본 제국 해군의 규모가 제한되면서, 정부를 전복하고 군부 통치로 대체하려는 하급 장교들 사이에서 움직임이 커졌다.[2]

다이쇼 데모크라시민주주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지식인과 사회주의자 등 혁신파는 군 축소와 군 비판을 주장했고, 이러한 분위기는 일반 시민에게도 퍼져 군인들이 위축된 마음을 갖게 되었다.

1932년 "혈맹단 사건"에서 이노우에 니쇼의 그룹은 전 재무대신이자 헌정민정당 대표인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미쓰이 부흥회사 총재 다나카 슈쿠마를 암살했다.[1]

2. 3. 군부 및 극우 세력의 발호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에서는 기업 도산이 잇따르며 사회 불안이 커졌다. 1931년 이시와라 간지가 지휘하는 관동군 일부가 만주사변을 일으켰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으로 일본 제국 해군의 규모가 제한되자, 정부를 전복하고 군부 통치를 하려는 하급 장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2] 이들은 육군 내 비밀 결사인 벚꽃회와 유사하게, 극우 민족주의 세력과 연계하여 쇼와 유신을 위해 주요 정치 및 재계 인사를 암살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2]

1932년에는 극우 민족주의자 이노우에 니쇼와 그의 "혈맹단"이 전 재무대신이자 ''헌정민정당'' 대표인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미쓰이 부흥회사 총재 다나카 슈쿠마를 각각 2월 9일과 3월 5일에 살해했다.[1] 당초 이들은 20여 명의 재계 및 정치 지도자를 암살할 계획이었다.[1]

3. 사건의 전개

1932년 5월 15일, 해군 청년 장교들이 육군 사관후보생 및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도야마 미쓰루(頭山満), 다치바나 고자부로(橘孝三郎) 등이 포함된 우익 시민 세력의 도움을 받아 혈맹단 사건에서 시작된 것을 완료하려는 시도를 했다.

3월 31일, 고가 기요시(古賀清志)와 나카무라 요시오는 쓰치우라(土浦)의 하숙에서 만나 제1차 실행 계획을 세웠다. 당시 계획안에서는 습격 대상이 총리대신 관저, 마키노 내무대신 관저, 헌정유신회(立憲政友会), 헌정민정당(立憲民政党), 일본공업클럽(日本工業倶楽部), 화족회관의 6곳이었고, 습격 후에는 토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원수에 의한 계엄령 정부를 수립하고, 켄도우 시게요시(権藤成卿),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육상대신 등에 의한 군벌 내각을 수립하여 국가 개조를 하는 쿠데타 계획이었다. 이후 계획은 여러 차례 바뀌었고, 5월 13일, 쓰치우라의 요정 산스이각(山水閣)에서 최종 계획(제5차안)이 결정되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참가자를 4개 조로 나누어 5월 15일 오후 5시 30분을 기해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 제1단계로, 해군 청년 장교들이 이끄는 제1조는 총리대신 관저, 제2조는 내무대신 관저, 제3조는 헌정유신회(立憲政友会) 본부를 습격한다. 이어서 쇼와 유신에 공명하는 대학생 2명(제4조)이 미쓰비시 은행 본점에 폭탄을 던진다.
  • 제2단계로, 제4조를 제외한 다른 3개 조는 합류하여 경시청을 습격하여 결전을 벌이고, 그 후 헌병대 본부에 자수한다.
  • 이와 별도로 농민 결사대를 별동대로 하여, 오후 7시경 일몰을 기해 도쿄 근교에 전력을 공급하는 변전소 여러 곳을 습격하여 전기를 끊고 도쿄를 암흑화한다.
  • 또한 혈맹단의 잔당인 가와사키 나가미쓰(川崎長光)에게 의뢰하여, 시기상조라고 반대하는 니시다 세이(西田税)를 계획 실행을 방해하는 배신자로서 이 기회에 암살한다.

라는 것이었고, 당초 계획에 있던 계엄령 정부 수립과 그 후의 군사 정권에 의한 국가 개조라는 쿠데타 구상은 사실상 포기되고 집단 테러 계획으로 바뀌었다.[9] 5월 15일이 결행일로 정해진 것은, 육군 사관후보생들이 만주 시찰 여행에서 돌아오는 것이 전날인 14일이었고, 15일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휴가 외출을 할 수 있으며, 또한 방일 중인 채플린 환영회가 총리대신 관저에서 열릴 예정이기 때문에 총리가 관저에 있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봉기를 위해 준비한 무기는 권총 13정, 수류탄 21발, 단도 15자루 정도였다.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Inukai Tsuyoshi)는 11명의 젊은 해군 장교들(대부분 20세 전후)에 의해 총리 관저에서 총살당했다. 이누카이의 마지막 말은 hanaseba wakaru/話せば分かる일본어 이었고, 암살자들은 mondō muyō/問答無用일본어라고 답했다.[2]

원래 암살 계획에는 1932년 5월 14일 일본에 도착한 영국 영화 배우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을 이누카이 총리가 계획한 채플린 환영회에서 살해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채플린의 살해는 미국과의 전쟁과 일본의 불안을 야기하고, 천황의 이름으로 "복고"를 가져올 것이었다.[3] 총리가 살해되었을 때, 그의 아들 이누카이 다케루(Inukai Takeru)는 찰리 채플린과 함께 스모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아마도 두 사람의 목숨을 구했을 것이다.

반란군은 또한 칙인이자 헌정회(Rikken Seiyūkai) 정당의 수장인 마키노 노부아키(Makino Nobuaki)의 관저를 공격하고, 도쿄의 미쓰비시 은행 본점과 여러 변전소에 수류탄을 던졌다.

총리 암살 외에도, 쿠데타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반란 전체는 실패로 판명되었다. 참가자들은 택시를 타고 경찰 본부로 가서 별다른 저항 없이 ''헌병대(Kempeitai)''에 자수했다.

사건 당시 찰리 채플린(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스모 선수들

3. 1. 쿠데타 세력의 구성

1932년 5월 15일에 일어난 5·15 사건의 쿠데타 세력은 크게 세 그룹으로 구성되었다.[9] 해군 청년 장교 10명,[9] 육군 사관후보생 11명,[9] 그리고 민간인 농본주의자들이 그들이다.[9] 이들은 혈맹단을 비롯한 극우 단체와 연계되어 있었다.[9]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도야마 미쓰루(頭山満), 다치바나 고자부로(橘孝三郎) 등 극우 사상가들은 쿠데타 세력에게 자금과 무기를 지원했다.[9] 고가 기요시(古賀清志) 해군 중위는 오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를 방문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자금과 권총 5정, 실탄 약 150발을 제공받았다.[9] 무라야마 가즈유키(村山格之) 해군 소위는 구축함 우스이(薄)에 승선하여 상하이로 출정하고, 4월 16일 상하이에 정박 중인 해방함 이즈모(出雲)에서 타사키 모토타케(田崎元武) 해군 대위[10]로부터 브라우닝 권총 1정, 탄환 50발을 입수하여, 당시 통신정으로 상하이-사세보(佐世保) 간을 왕복하고 있던 구축함 니레(楡)의 승무원 오오바타 하루오(大庭春雄) 소위에게 부탁하여 사세보로 가져오게 하고, 같은 달 29일에 스스로 이것을 코가에게 건네주었다.[11]

오카와 슈메이(Ōkawa Shūmei)


5·15 사건은 쇼와 천황의 동생인 다카마쓰노미야는 그 일기에 5.15 사건에 대해 "주로 후지이(히토시) 소좌의 계통으로 오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씨의 계보를 잇는 무리들이다. 타사키(모토타케)는 니타나메 나오토시(新田目直寿)[12]의 계승자인 공산 계열이었다. 니타나메는 본격적인 공산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라고 적고 있다.[13]

쿠데타 가담자들은 헌병대 본부에 자수하였다.[9] 주요 가담자들은 다음과 같다.

  • 삼상 다쿠(三上卓) - 해군 중위
  • 야마기시 히로시(山岸宏) - 해군 중위
  • 무라야마 카즈유키(村山格之) - 해군 소위
  • 쿠로이와 이사무(黒岩勇) - 해군 예비 소위
  • 노무라 사부로(野村三郎)(군인) - 육군사관학교 본과생
  • 고토 에이한(後藤映範) - 육군사관학교 본과생
  • 시노하라 시치노스케(篠原市之助) - 육군사관학교 본과생
  • 이시즈키 사카에(石関栄) - 육군사관학교 본과생
  • 야기 하루오(八木春雄) - 육군사관학교 본과생
  • 고가 기요시(古賀清志) - 해군 중위
  • 사카모토 켄이치(坂元兼一) - 육군사관학교 본과생
  • 스가 킨(菅勤) - 육군사관학교 본과생
  • 니시카와 타케토시(西川武敏) - 육군사관학교 본과생
  • 이케마쓰 타케시(池松武志) - 전 육군사관학교 본과생
  • 나카무라 요시오 - 해군 중위
  • 나카지마 타다아키 - 육군사관학교 본과생
  • 킨 키요토요 - 육군사관학교 본과생
  • 요시하라 마사미 - 육군사관학교 본과생
  • 가츠라 코우사부로(橘孝三郎) - 「아이교우주쿠」(愛郷塾) 주재
  •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 혼마 켄이치로(本間憲一郎) - 「시바야마주쿠」(柴山塾) 주재
  • 토우야마 슈우조(頭山秀三) - 겐요샤(玄洋社) 사원

3. 2. 주요 습격 대상

1932년 5월 15일, 쿠데타 세력은 총리 관저,[14][15][16][17][18][19][20] 내대신 관저,[21] 정우회 본부,[22] 경시청,[17][18] 일본은행,[23] 변전소 등을 습격했다.[23]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2] 마키노 노부아키 내대신 등 정부 요인 암살을 시도했다.

해군 장교들은 육군 사관생도 및 우익 시민 세력(오카와 슈메이, 도야마 미쓰루, 다치바나 고자부로 등 포함)의 도움을 받아 총리 관저를 습격,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총살했다.[2]

반란군은 마키노 노부아키 내대신의 관저를 공격하고, 도쿄의 미쓰비시 은행 본점과 여러 변전소에 수류탄을 던졌다.

오후 5시 5분, 미카미 중위가 이끄는 제1조 9명은 야스쿠니 신사에 집결하여 택시 2대에 나눠 타고 총리 관저로 향했다. 정문조 5명은 정문을 돌파하여 관저에 진입, 경비 경찰관에게 총격을 가하고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찾았다. 정문조와 후문조는 일본식 건물 내에서 합류, 미카미는 식당에서 총리를 발견하고 총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는 응접실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려 했으나, 야마기시의 "문답 무용, 쏴라, 쏴라"라는 외침과 함께 쿠로이와와 미카미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총리는 즉사하지 않았고, 하녀 테루에게 "불러와라, 지금 젊은 놈들, 이야기해줄 것이 있다"고 말했으나, 오후 11시 26분 사망했다.

제2조는 내각총리대신 관저에 수류탄을 던져 폭발시켰다. 고가는 경비 경찰관에게 발포하여 부상을 입혔다. 이들은 마키노 노부아키 내상 살해 계획을 포기하고, 내각총리대신 관저에 대해서는 위협으로 그치기로 했다.

제3조는 정우회 본부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나카지마 타다아키 육군사관학교 본과생이 다시 투척하여 현관 일부에 손상을 입혔다.

오쿠다 히데오는 단독으로 미쓰비시 은행 본점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나무에 맞고 길에서 폭발하여 외벽 등에 손상을 입힌 것에 그쳤다.

경시청에서는 각 조가 제각각 행동하여 연계가 되지 않아 “결전”은 실패로 끝났다.

흑암(黒岩) 등 1조 4명은 일본은행을 습격, 수류탄을 던져 폭발시켜 돌 paving 등에 피해를 입혔다.

별동대의 농민 결사대는 도쿄부 관내 변전소 6곳을 습격하여 “제도 암흑”을 기도했으나, 변전소 내 설비 일부를 파괴하는 데 그쳤고 정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3. 3.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암살

1932년 5월 15일, 혈맹단 사건에 이어 극단적 우익단체인 혈맹단은 쿠데타를 일으켰다.[2] 해군 청년 장교 10명, 육군 사관후보생 11명, 민간 농본주의자 일파로 구성된 쿠데타군은 정우회 본부, 경시청, 일본은행 등을 습격했다.

오후 5시 반경, 해군 중위 미카미 다쿠가 이끄는 해군 사관 4명과 육군 사관생도 5명은 총리 관저를 침입했다.[16] 이누카이 쓰요시는 도망치라는 측근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쿠데타군과 대화를 시도했다.[16] 이나가키 쓰요시 총리는 토노마(床の間)를 등지고 테이블에 앉아 자신의 생각과 앞으로 일본의 방향 등을 이야기하려 했다. 미카미가 총리와 몇 가지 문답을 나누는 도중, 야마기시가 갑자기 "문답 무용, 쏴라, 쏴라"라고 외쳤고, 이에 늦게 응접실에 들어온 해군 소위 구로이와 이사무가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의 머리 왼쪽을, 미카미 다쿠가 머리 오른쪽을 총격했다.[17][18] 야마기시는 철수를 지시했고, 9명은 일본식 건물 현관으로부터 외정으로 나왔지만, 거기에 히라야마 야소마쓰 순경이 나무칼을 들고 맞서려고 했기 때문에, 쿠로이와와 무라야마가 히라야마 순경을 한 발씩 총격하여 부상을 입히고 관저 후문으로 달아났다.[18]

미카미 일행은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즉사했다고 생각했지만, 총리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19] 곧바로 의사단이 달려와 수혈 등의 처치를 받았지만,[20] 점점 쇠약해지다가 오후 11시 26분 사망했다.

암살 당시 이누카이 쓰요시와 야마기시 히로시 사이에 오간 "말하면 알 거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쏴!"라는 말은 유명하지만, "말하면 알 거다"는 이누카이 쓰요시의 마지막 말은 아니었다. 총탄을 맞은 후에도 이누카이 쓰요시는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암살 계획에는 찰리 채플린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채플린은 스모 경기를 관람 중이어서 암살을 피했다.[3]

4. 사건의 결과 및 영향

일본의 정당 정치는 군사 쿠데타인 5·15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 끝을 맞이했다. 이후에 군부의 정계 진출이 이루어지면서, 재벌들은 군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였으며, 군국주의 사상의 강화로 인해 독일과 같은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막이 올랐다.[4]

1920년대까지 일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사회주의 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치안유지법을 제정하면서 모습을 감췄고, 상징적인 의미로만 존재했던 일본 천황을 절대 권력의 중심에 두면서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나갔다.

이와 같은 군부의 영향력 확대는 1936년에 일어난 2·26 사건을 통해 입증되었다.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를 살해한 11명의 장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재판을 통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선포하고, 정부와 경제 개혁을 호소하며 대중의 동정을 얻으려 했다. 재판이 끝날 무렵 법원은 전국 각지의 지지자들로부터 11만 건의 감형 청원서를 받았는데, 이 청원서들은 서명이 되어 있거나 전부 피로 적혀 있었다.[4] 또한, 니가타의 젊은이 9명은 피고인 대신 자신들이 재판을 받겠다며,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는 행위로 절단한 절인 새끼손가락 9개가 담긴 항아리를 법원에 보냈다.[5][4]

법원이 내린 형벌은 매우 가벼웠고, 일본 언론에서는 이누카이 총리 살해범들이 몇 년 안에, 아니면 그보다 더 빨리 석방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5·15 사건의 음모자들을 엄벌하지 못한 것은 일본의 법치주의와 민주정부의 군부에 대한 대항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간접적으로 이는 2·26 사건일본 군국주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6]

4. 1. 정당 정치의 종말

일본의 정당 정치는 1932년 5·15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 막을 내렸다.[4]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된 후, 11명의 해군 장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이들은 재판을 통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고 정부와 경제 개혁을 호소하며 대중의 동정을 얻으려 했다.[4] 재판이 끝날 무렵 법원은 전국 각지의 지지자들로부터 11만 건의 감형 청원서를 받았으며, 니가타의 젊은이 9명은 피고인 대신 자신들이 재판을 받겠다며 절인 새끼손가락 9개가 담긴 항아리를 법원에 보내기도 했다.[5][4]

이누카이 쓰요시의 장례식


법원은 이들에게 매우 가벼운 형벌을 내렸고, 언론에서는 이들이 곧 석방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이러한 5·15 사건 주모자들에 대한 미온적인 처벌은 일본의 법치주의와 민주 정부의 군부에 대한 대항력을 약화시켰으며, 간접적으로 2·26 사건일본 군국주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6]

이누카이 총리 암살 이후,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니시혼지 가미노부는 쇼와 천황의 의중과 군부의 압력 등을 고려하여 정당 내각 대신 사이토 마코토를 총리로 추천했다. 사이토는 거국일치 내각을 구성하였으나, 이는 일시적인 조치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8년간 지속된 헌정의 상도에 따른 정당 정치는 붕괴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부활하지 못했다. 이후 군부의 정계 진출이 가속화되면서 재벌들은 군부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군국주의 사상이 강화되면서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4] 1920년대까지 활발했던 사회주의 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치안유지법 제정으로 억압되었고, 일본 천황 중심의 군부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4. 2. 군부의 영향력 확대

일본의 정당 정치는 5·15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 끝을 맞이했다.[4][5][6] 이후 군부의 정계 진출이 이루어지면서, 재벌들은 군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였으며, 군국주의 사상의 강화로 인해 독일과 같은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막이 올랐다. 1920년대까지 일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사회주의 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치안유지법을 제정하면서 모습을 감췄고, 상징적인 의미로만 존재했던 일본 천황을 절대 권력의 중심에 두면서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나갔다.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를 살해한 11명의 장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는데, 피고인들은 재판을 통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선포하고, 정부와 경제 개혁을 호소하며 대중의 동정을 얻으려 했다. 재판이 끝날 무렵 법원은 전국 각지의 지지자들로부터 11만 건의 감형 청원서를 받았고, 니가타의 젊은이 9명은 피고인 대신 자신들이 재판을 받겠다며,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는 행위로 절단한 절인 새끼손가락 9개가 담긴 항아리를 법원에 보냈다.[4][5] 법원이 내린 형벌은 매우 가벼웠고, 일본 언론에서는 이누카이 총리 살해범들이 몇 년 안에, 아니면 그보다 더 빨리 석방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5·15 사건의 음모자들을 엄벌하지 못한 것은 일본의 법치주의와 민주정부의 군부에 대한 대항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는 간접적으로 2·26 사건일본 군국주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6]

4. 3. 군국주의 강화와 대외 팽창

5·15 사건으로 일본의 정당 정치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4][5][6] 이후 군부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재벌들은 군부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군국주의 사상이 강화되며 독일과 같은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4]

1920년대까지 일본에서 활발했던 사회주의 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치안유지법 제정으로 쇠퇴했고, 일본 천황을 절대 권력의 중심에 두면서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1936년에는 2·26 사건이 일어나 군부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4]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를 살해한 11명의 장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이들은 재판을 통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선포하고 정부와 경제 개혁을 호소하며 대중의 동정을 얻으려 했다. 법원은 전국 각지의 지지자들로부터 11만 건의 감형 청원서를 받았고, 니가타의 젊은이 9명은 피고인 대신 자신들이 재판을 받겠다며 절단한 절인 새끼손가락 9개가 담긴 항아리를 법원에 보내기도 했다.[4][5]

법원은 이들에게 매우 가벼운 형벌을 내렸고, 이는 일본의 법치주의와 민주정부의 군부에 대한 대항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결과적으로 5·15 사건은 2·26 사건일본 군국주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6]

4. 4. 한국에 미친 영향

5·15 사건으로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강화되면서, 일제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고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하며 억압과 탄압을 자행했다.[4][5][6]

5. 재판

5·15 사건 가담자들은 군사재판과 민간재판에 회부되었다.[4] 해군 군인들은 요코스카 진수부 군법회의에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육군 군법회의에서, 민간인들은 도쿄지방법원에서 각각 재판을 받았다.[9]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애국심'과 '국가 개혁'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중의 동정을 얻으려 했다.[4] 특히 해군 측 피고인들은 공판에서 정당 정치와 재벌 등 특권 계급을 비판하고 천황 친정에 의한 국가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육군 측 피고인들 역시 도호쿠 지방 농촌의 곤궁한 실정을 호소하며 정계·재계의 부패를 규탄했다.[9]

5·15 사건 가담 민간인에 대한 재판


전국적으로 감형 탄원 운동이 일어났고,[4] 법원은 피고인들에게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선고했다. 해군 군법회의는 주모자인 고가 중위와 미카미 중위에게 금고 15년을 선고했고, 육군 군법회의는 피고인 전원에게 금고 4년을 선고했다. 민간인에 대한 판결은 상대적으로 무거웠지만, 당시 정당 정치의 부패에 대한 반감으로 범인인 장교들에 대한 사면 탄원 운동이 일어났다.[24] 이러한 관대한 처벌은 군부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키고, 이후 2·26 사건 등 군부 쿠데타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6]

재판에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해군 군법회의 판사장은 고스 시로(高須四郎) 해군대좌, 육군 군법회의 판사장은 니시무라 타쿠마(西村琢磨) 육군포병중좌, 도쿄지방법원 재판장은 카가키 슈로쿠(神垣秀六) 판사였다. 검사로는 키우치 소에키(木内曽益), 야마모토 코우지(山本孝治) 등이 참여했고, 변호인으로는 키요세 이치로(清瀬一郎), 하야시 이츠로(林逸郎), 하나이 타다시(花井忠) 등이 참여했다.

6. '흑막'설

5·15 사건에는 배후에서 개입한 “흑막”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사건 당일 밤, 총리 관저에 달려온 사무차장 모리 가쿠(森恪)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모리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은 사건 직후부터 정계에 퍼져나갔다.[9] 모리는 이누카이 총리 습격의 급보를 받고 즉시 관저로 달려왔지만, 직접 사무차장실로 들어가 틀어박힌 채 중태에 빠진 이누카이 총리를 문병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리의 부하였던 우에하라 에츠지로(植原悦二郎)가 증언하고 있다. 외무대신 요사와 켄키치(芳澤謙吉)는 사건 당일 밤 관저에서 모리가 "청년 장교들을 대량으로 파면하려던 이누카이 총리가 잘못되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보아, 육군과 친분이 있던 모리가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의심했다. 또한, 신문 기자인 키샤 이쿠사부로(木舎幾三郎)는 사건 당일 밤 관저에서 모리를 만났을 때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했기 때문에 의심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모리가 이누카이 총리의 죽음을 기뻐하는 듯한 태도였다는 증언이 여러 건 있으며, 모리가 사건의 배후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퍼져나갔다.[9]

이누카이의 손녀인 이누카이 미치코(犬養道子)도 저서에서 “모리가 병사들에게 죽이도록 하고 있다”는 정보가, 세이유카이 간사 쿠하라 부스케(久原房之助)로부터 친족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작가 마쓰모토 세이쵸(松本清張)는 습격자들이 이누카이 총리의 동향을 알고 있었거나 총리 관저의 평면도를 가지고 있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내부 정보 제공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누카이 총리 암살로 유명한 사건이지만, 총리 관저・입헌정우회(정우회) 본부・경시청과 함께,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 내무대신도 습격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군측의 간신”의 핵심 인물로, 사전 계획에서 이누카이에 이은 두 번째 표적으로 여겨졌던 마키노 저택에 대한 습격은 왜인지 중도에 그쳤다. 마쓰모토 세이쵸는 계획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와 마키노의 접점을 지적하고, 오가와를 통해 정계 인사, 특히 이누카이와 중국 문제로 대립하고 군부와 통했던 모리 가쿠 등이 배후에서 실을 쥐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28]

하지만, 나카타니 무네요시(中谷武世)는 고가로부터 “5·15 사건의 모든 계획과 날짜 결정은 우리 해군 청년 장교들끼리 자주적으로 결정한 것이며, 오가와로부터는 금전과 권총을 제공받았지만, 행동 계획이나 결행 날짜 결정에는 어떠한 명령이나 시사도 받은 적이 없다”는 오가와의 지도력을 부정하는 증언을 얻었고, 또한 나카타니는 오가와와 정당 인사와의 관계가 희박했던 점을 지적하며, 모리와 오가와에게는 관계가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29]

또한 모리는 오가와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기타 이치키(北一輝)와 더 친했기 때문에, 오가와로부터 모리에게 계획이 알려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애초에 계획의 주목적이 이누카이 총리 암살이 아니었기 때문에, 총리 주변의 내통자의 존재 자체가 필수적이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9]

7. 대중문화 속 5.15 사건

5·15 사건은 소설, 영화, 드라마, 만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뤄졌다.[7][34][35] 특히, 이누카이 총리의 "말하면 알 것이다(話せばわかる)"와 쿠데타군의 "문답무용(問答無用)"은 유명한 대사로 회자되지만, "말하면 알 거다"는 이누카이의 최후의 말이 아니었다. 이누카이는 총탄을 맞은 후에도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7]

사건 당시 이누카이와 산안굉(山岸宏) 사이에 오간 대화, 삼상탁(三上卓)의 재판 증언, 견양도자(犬養道子)의 저서 『화々と성々と』에 인용된 현장 증언 등은 사건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보여준다.[7]

이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는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스탠드 얼론 콤플렉스'' 2기 5화,[7] 영화 『중신과 청년장교 육해군 유혈사』(1958년),[34] 『동란』(1980년), 드라마 『꽃과 별과』(일본방송협회(NHK), 1978년), 『뜨거운 폭풍』(TBS, 1979년), 『채플린 암살 계획』(요미우리TV, 1980년),[35] 『경세제민의 남자 다카하시 고세이』(NHK, 2015년), 『이다텐~도쿄 올림픽 이야기~』(NHK 대하드라마, 2019년), 만화 『쇼와 천황 이야기』(저자: 노죠 준이치)(2021년) 등이 있다. 소설로는 『찰리 채플린을 쏘아라』, 『찰리 채플린 암살 계획』, 『쇼와 혁신: 소설 5.15 사건』, 『5월 15일의 찰리 채플린』, 『푸른 테러의 날개』, 『찰리 채플린 암살 명령』, 『울며 찰리 채플린』 등이 출간되었다.

8. 평가 및 역사적 의의

참조

[1] 논문 Nationalist Extremism in Early Shōwa Japan: Inoue Nisshō and the 'Blood-Pledge Corps Incident', 1932 https://www.jstor.or[...] 2001
[2] 서적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
[3] 서적 Erotic Grotesque Nonsense:The Mass Culture of Japanese Modern Times Univ of California Press 2006
[4] 서적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 Random House 1970
[5] 서적 Eagle Against the Sun
[6] 서적 The Rise of Modern Japan
[7] 웹사이트 Ghost in the Shell – A Primer for the Anime Series https://www.ign.com/[...] 2023-04-18
[8] 웹사이트 五・一五事件 https://kotobank.jp/[...] 코토뱅크 2019-05-15
[9] 서적 五・一五事件 海軍青年将校たちの「昭和維新」 중공신서
[10] 기타 해병 52
[11] 기타 五・一五事件 육해군 대공판기
[12] 기타 해병 52, 쇼와 4년 11월 적화 사건으로 면관
[13] 서적 고마쓰궁 일기 제2권 중앙공론사
[14] 서적 쇼와의 오카야마·정치와 사람 상(전전·전중편) 산요신문사 1979
[15] 뉴스 1년 만에 드디어 큰 불상사의 진상 명백 : 육해군인, 애향학원생들이 이누카이 수상 암살, 제도 교란 : 보라, 무서운 폭거 : 오늘 기사 차단 해제 0100281478 오사카 아사히 신문 1933-05-17
[16] 뉴스 고토 이하 모든 피고에게 금고 4년(구형 8년) 선고 : 각 미결 구류 150일을 통산 : 니시무라 재판장 엄하게 단죄 0100281950 고베 신문 1933-09-20
[17] 뉴스 법을 어기는 그 죄는 크다 : 애국의 정은 이해한다 : 36년으로의 위기 우려가 폭발 : 정리가 갖춰진 판결 이유 0100281931 시사 신보 1933-11-10
[18] 뉴스 공소장 0100281474 중외상업신보 1933-07-25
[19] 서적 쇼와의 오카야마·정치와 사람 상(전전·전중편) 산요신문사 1979
[20] 서적 쇼와의 오카야마·정치와 사람 상(전전·전중편) 산요신문사 1979
[21] 기타 헌고비 제904호'에서 '5월 사건에 관한 보고(통첩)'(쇼와 7년 5월 20일 헌병 사령관 하타 신지)
[22] 서적 메이지 대학 백년사 학교법인 메이지 대학 1994
[23] 서적 쇼와사 이와나미 쇼텐 1959
[24] 웹사이트 5.15 사건~왜, 해군 청년 장교들은 테러리즘에 빠졌는가 https://shuchi.php.c[...] 2021-05-15
[25] 뉴스 야마기시 등 해군측 3명도 가석방 도쿄 아사히 신문 1938-02-02
[26] 뉴스 고가, 미카미, 쿠로이와가 마지막으로 가석방 도쿄 아사히 신문 1938-07-06
[27]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32-05-15
[28] 서적 쇼와사 발굴
[29] 서적 쇼와 동란기의 회상
[30] 뉴스 혈맹단, 2.26 사건 등의 기록 제출 명령(쇼와 20년 12월 16일 아사히 신문) 아사히 신문 1945-12-16
[31] 서적 쇼와사 탐방 2
[32] 서적 쇼와 혁신 : 소설 5.15 사건 https://iss.ndl.go.j[...] 신인물왕래사 2000
[33] 서적 쇼와 혁신 : 소설 5.15 사건 https://iss.ndl.go.j[...] 신인물왕래사 2000
[34] 웹사이트 영화 중신과 청년 장교 육해군 유혈사(1958)에 대해 영화 데이터베이스 - allcinema https://www.allcinem[...] 2023-09-27
[35] 웹사이트 찰리 채플린 암살 계획 - 드라마 상세 데이터 - ◇텔레비전 드라마 데이터베이스◇ http://www.tvdrama-d[...] 202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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