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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1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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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G1 전차는 1930년대 프랑스에서 개발이 시도된 중형 전차 프로젝트로, 1935년 20톤 전차 요구 사항에서 시작되었다. 여러 회사가 설계안을 제출했으나, 기술적 문제와 프랑스군의 전차 운용 교리에 대한 논쟁,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등의 이유로 개발이 중단되었다. G1 전차는 ARL3 포탑과 400마력 엔진 등 전후 프랑스 전차 개발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AMX-30 개발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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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1 (전차)
Char G1
유형
승무원
길이
높이
무게
장갑
주무장
부무장
엔진
엔진 출력
현가 장치
속도
항속 거리
개발 국가

2. 개발 배경

2. 1. 프랑스군의 전차 개발 상황 (1930년대 중반)

2. 2. 20톤 전차 요구 (1935년)

1935년 즈음에 프랑스 보병 부대는 만족스러운 중형전차를 아직 개발하지 못했다. B1과 같은 비교적 효과적인 중(重) 돌파 전차가 있었고, 르노 R35, 호치키스 H35, FCM 36 같은 여러 경(輕) 보병 지원 전차가 곧 생산될 예정이었다.[1] 그러나 훌륭한 중형 전차는 아직 설계되지 않았는데, 샤르 D1은 명백한 실패작이었고 샤르 D2는 그 전작보다 약간 개선되었을 뿐이었다.[1] 이러한 중형전차는 전략적 공격 또는 방어 기동을 수행할 수 있는 주요 보병 부대인 5개 기계화 보병 사단의 유기적인 전차 대대에서 최소 250대 규모로 필요했다.[2]

프랑스 기병대는 이미 훌륭한 중형 전차인 SOMUA S35를 개발 중이었지만, 보병은 기술적인 이유, 즉 등판 능력이 제한적이라는 점과 전차 설계 분야에서 기병대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이 유형을 거부했다.[3]

1935년 12월 18일, 보병은 "20톤 중형 보병 전차"에 대한 최초 사양을 발표했다. 요구사항은 최고 속도 50km/h, 비포장 도로 속도 20km/h, 항속 거리 400km, 참호 통과 능력 2m, 도섭 능력 120cm, 등판 능력 80cm, 경사 45°였다. 무장으로는 47mm 주포 및 7.5mm 기관총, 40mm 장갑, 방독면, 무전기를 갖춘 전차를 요구했다. 20톤의 무게 제한은 철도, 교량 수송 및 폰툰의 중량 제한 등 수송상의 제약 때문에 선택되었다.[4] 전반적으로 이러한 특징은 SOMUA S35와 유사했다.[4][41]

2. 3. 새로운 요구 사항 (1936년)

1936년 5월, 무장 자문 위원회(Conseil Consultatif de l'Armement)는 프랑스 군수 산업에 "적 전차와의 전투에 충분한 화력과 장갑을 갖추면서 저비용과 높은 기동성을 위해 20톤 이하의 경량 전차 개발"을 요청했다. 당시 주력 전차였던 르노 B1은 주조나 용접이 아닌 리벳 고정 차체를 채택하여 예상보다 2톤 더 무거웠고, 복잡하고 대형이어서 생산 비용이 높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42] 이에 따라, B1보다 가볍고 빠르며, 저렴하고 생산이 용이하며 승무원 훈련도 용이한 신형 20톤 전차는 향후 주력 전차 역할을 맡아 기존 중전차를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결정되었다.[42]

10월, 특별 위원회는 최고 속도 40km/h, 항속 거리 200km, 르노 B1 비스와 동등한 전면 60mm 장갑, 250cm 참호 돌파 능력, 화학 무기 방어, 철도 수송에 지장이 없는 크기, 2정의 기관총과 모든 적 중(中)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고속포를 갖춘 "20톤 전차"의 새로운 사양을 발표했다.[43] 이 사양은 신형 전차가 기존 프랑스 전차를 능가하는 강력하고 진보적인 전차가 될 것임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의욕적인 요구 사항으로 인해 단기간에 완성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도 분명했다.

당시 프랑스 군 내부에서는 샤를 드 골과 같은 장교들이 독일 기갑사단(Panzerdivision)처럼 기계화 보병과 자주포를 갖춘 독립적인 전차 사단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장교들은 보병 사단 내 독립 전차 대대에 경전차를 배치하여 제병 협동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전차 부대 운용 교리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신형 전차는 높은 기동성과 중장갑을 동시에 요구받았지만, 이는 독일식 전차 사단 창설 시에만 필요한 특성이었고,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이러한 논쟁의 결론이 필요했다.

이러한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신형 전차 개발 계획은 프랑스 군의 장래 주력 전차 개발 계획이었기 때문에, 세계 대공황 속에서 어려움을 겪던 기업들은 대규모 수주를 통한 이익을 기대하며 경쟁적으로 참여했다. 1936년 말부터 1937년 초까지 7개 회사가 설계안을 제출했고, 위원회는 1937년 2월 20일 각 회사의 제안에 대한 보고서를 발행했다.

1937년 후반, 이 계획은 '''샤르 G1'''으로 개명되었고, 각 설계안에 '''G1L''', '''G1R''' 등 공식 명칭이 부여되었다. 1938년 2월 1일, 보병과는 최대 중량 35톤, 포탑에 32구경 75mm 포 탑재라는 새로운 사양을 발표했다. 이러한 요구 사항 변경은 설계 지연을 야기했고, 프랑스 정부는 1938년 6월 8일 기술자 모리스 라비로트를 파견하여 개발을 지원했다.[49] 1938년 7월 12일에는 더욱 상세한 사양 목록이 제공되었는데, 여기에는 강력한 무장, 대전차포에 대한 방어력, 우수한 기동성 외에도 구체적인 치수 제한, 장갑 및 승무원 장비에 대한 요구 사항이 포함되었다.[51][52]

3. 개발 과정

3. 1. 각 사의 설계안 (1937년)

1936년, 뱅센 위원회(Commission de Vincennes)는 여러 회사에 G1 전차 설계안을 제출받았다. 이 설계안들은 1937년에 걸쳐 검토되었으며, 각 회사의 설계 특징과 문제점이 드러났다.[17][18][19]

  • '''SEAM G1 P:''' SEAM사의 G1 P는 가스 전기 방식 변속기를 채택하고, 경사 장갑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설계였다.[17] 차체 오른쪽에 75mm 주포를 장착할 공간이 있었고, 승무원은 지휘관, 운전수, 포수, 무전병 4명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다.[17] 1936년 12월, 뱅센 위원회(Commission de Vincennes)에 미완성 프로토타입을 제시했는데, 280마력 엔진 대신 120마력 엔진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로에서 시속 14km, 지형에서 시속 10km의 속도를 냈다.[17] 변속기 무게만 2.4톤에 달해 기계식 변속기보다 1.5톤 더 무거웠지만, 조향이 쉽고 신뢰성 문제가 없었다.[17] 1937년과 1938년 동안 차량을 재건하고 현가를 변경했으며, ARL과 협력하여 280마력 엔진을 설치했다.[18] 1939년 초, 위원회는 약 250대의 차량을 주문할지 여부를 고려했지만, SEAM의 재정 문제와 75mm 주포를 포탑에 탑재해야 하는 새로운 요구사항으로 인해 개발이 중단되었다.[20]

  • '''푸가 G1 F:''' 푸가사의 G1 F는 Char B1처럼 차체에 주포를 고정하고 차체를 회전시켜 조준하는 방식을 제안했다.[21] B1에 사용된 뇌더 변속기 대신 영국의 윌슨 기어 박스를 사용할 계획이었다.[21] 위원회는 카덴-로이드 궤도의 사용을 거부했지만, 푸가는 시제품 생산 주문을 받았다.[21] 1938년에는 75mm 포탑이 추가될 경우 무게가 35톤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1939년 동안 개발이 중단되었다.[22]

  • '''BDR G1 B:''' 보데-도농-루젤(Baudet-Donon-Roussel)사의 G1 B는 르노 B1과 유사한 외형을 가졌지만, 매일 그리스를 칠할 필요가 없는 밀폐형 볼 베어링을 사용하는 로드 휠을 사용했다.[23] 궤도는 연속적인 고무 내피를 갖도록 설계되었다. 차체에 75mm SA35 곡사포를 장착할 예정이었고, 1937년 설계에서는 APX4 포탑에 47mm SA35 포를 장착했다.[25] 위원회에서 포탑에 75mm 주포를 설치하라는 변경된 사양을 발표했을 때, BDR 프로젝트는 이미 선체가 너무 커서 무게 문제가 심각했다.[26] 1939년 9월 10일에 중단되었으며, 나무 모형만 완성되었다.[26]

  • '''로렌 G1 L:''' 로렌 드 디트리히사의 G1 L은 1933년 경전차 설계를 기반으로 했으며, 카덴-로이드 궤도와 클리블랜드 변속기를 장착하자는 초기 제안은 위원회에서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코탈 변속기로 대체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주조 장갑 외에 여러 개의 용접 강철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대부분의 프로젝트와 달랐다. 1937년 말에 이 프로젝트가 채택되어 로렌은 개발 계약을 체결했지만, 1939년의 사양 변경으로 75mm 포탑을 장착하면서 무게 문제가 발생했다. 1939년 4월, 위원회는 G1L 프로젝트를 포기할 것을 권고했지만 국방부는 이를 거부했고, 9월 10일 최종적으로 중단되었다.

  • '''르노 G1 R (ACK 1):''' 루이 르노는 르노 R35를 기반으로 한 G1 R 설계안을 제시했다.[28] 초기에는 47mm 주포를 "가짜 포탑"에 장착하는 혁신적인 방식을 제안했지만,[30] 1937년 위원회는 토션 바 서스펜션, 클리블랜드 변속기, 이중 궤도 기능을 거부했다. 1938년 사양 변경으로 다른 회사들은 설계를 대폭 수정해야 했지만, 르노는 넓은 전투실 덕분에 비교적 쉽게 새로운 요구사항을 충족할 수 있었다.[31] 1939년 9월, G1 R은 유일하게 추가 개발될 예정이었지만, 실제 생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 '''소뮤아 G1 S'''와 '''FCM G1 F'''는 초기 설계안으로, 각각 SAu 40와 FCM 36을 기반으로 한 형태였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부족하다.

3. 2. 설계 변경과 문제점

3. 3. Char G1 명칭 부여 (1937년 말)

1937년 말, 각 설계안에 G1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로렌 드 디트리히(Lorraine de Dietrich) 설계안은 G1L, 보데-도농-루젤(Baudet-Donon-Roussel)은 G1B, SEAM은 G1P, 푸가(Fouga)는 G1F, 소뮤아(SOMUA)는 G1 S, FCM은 G1 F로 명명되었다.[21][23][24][25] 이 중 소뮤아, FCM의 설계안은 기각되었다.[21]

G1 B는 ARL 40 대전차자주포 개발에 차체가 활용될 수 있도록 허가가 내려졌다.[26] G1 L은 1939년 AMX에서 기각되었으나 프랑스 국방부 장관이 이를 거절, 전쟁 발발 직전까지 개발이 보류되었다.[21]

3. 4. 새로운 사양 발표 (1938년)

1936년 5월, 무장 자문 위원회는 프랑스 산업계에 20톤 이하의 중량으로, 다른 장갑차와 싸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방어력과 무장을 갖춘 전차 개발을 요청했다. 그러나 샤르 B1이 너무 복잡하고 비싸며, 주조 또는 용접 장갑 대신 리벳 장갑판을 사용하여 필요 이상으로 무겁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졌다. 이에 따라 더 가볍고, 빠르며, 저렴하고, 생산 및 훈련이 용이한 20톤 전차가 향후 주력 전차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42]

1938년 2월 1일, ''육군 보병''은 새로운 사양을 발표했는데, 이는 최대 중량을 35톤으로 늘리고, 포탑에 L/32(구경 32) 75mm 포를 장착하는 것을 포함했다. 10월에 특별 위원회는 프랑스 산업에 "20톤 전차"에 대한 변경된 사양을 공개했다. 최소 40km/h의 최대 속도, 200km의 항속 거리, 샤르 B1 비스와 동일한 방어력(즉, 모든 면에서 60mm), 250cm의 참호 통과 능력, 가스 공격에 대한 완전한 방어, 치수는 철도 운송을 방해하지 않아야 하며, 무장은 모든 예상되는 적의 중(中)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고속포와 두 정의 기관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43]

이러한 새로운 요구 사항은 대부분의 회사가 설계 프로세스를 늦추는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불확실한 전망을 가진 복잡한 시스템에 많은 돈을 투자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1938년 6월 8일에 ARL 군 엔지니어 모리스 라비로트를 파견하여 노력을 지원하고 진행을 가속화하도록 명령했다. 회사에서 장갑판을 구할 수 없는 경우,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기 위해 보일러 판을 사용하도록 허용했다.[49]

1938년 7월 12일에는 훨씬 더 자세한 사양 목록이 제공되었다. 일반 요구사항으로는 강력하게 무장하고, 표준 대전차포에 면역이며, 뛰어난 전술적 및 전략적 기동성을 갖춘 전차였다. 세부적으로는, 긴 고속 반자동 75mm 주무장, AA-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는 포탑에 7.5mm 기관총, 차체 또는 포탑 전면에 기관총, 포탄 100발과 기관총 탄창 30개 이상의 최소 탄약, 공차 중량 30톤 및 전투 중량 32톤을 요구했다. 엔진은 전기적,수동으로 시동할 수 있어야 했고 궤도는 완전히 접근 가능해야 했다. 노상 속도는 최대 40km/h, 장거리 평균 30km/h, 비포장 도로에서는 20km/h의 속도를 낼 수 있어야 했다. 연료 탱크 2개는 200km 또는 8시간의 비포장 도로 주행 범위를 허용해야 했다. 등판 능력은 90cm, 단단한 경사면에서는 85%, 젖은 경사면에서는 65%여야 했다. 참호 통과 능력은 250cm, 도하 능력은 120cm였다. 처음으로 치수 제한이 포함되어, 철도 운송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너비는 294cm를 초과해서는 안 되었고,[51] 전투실의 절대 높이는 120cm를 초과해서는 안 되지만 측면 문을 장착하기에 충분해야 했다.[52]

방화 장갑 사양은 두께는 60mm로 유지되었지만, 덧붙이는 장갑 제작 기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 사항이 추가되었으며, 볼트 또는 가급적이면 갱목으로 연결된 부분 또는 전기 용접을 할 수 있는 장갑을 주조할 수 있다는 세부 요구 사항이 추가되었다. 자동 소화기가 있어야 한다는 요구 사항도 추가되었다.

승무원은 진보된 시야 및 사격 통제 장비를 갖추어야 했다. 2차 7.5mm 기관총으로 무장한 큐폴라는 주 포탑을 연결할 수 있는 대형 시준경을 갖추어 사령관이 직접 75mm 포를 표적에 맞출 수 있도록 하여 사령관이 포수 역할을 겸할 수 있도록 했다. 큐폴라는 또한 광학 원격 측정 거리 측정기를 장착해야 했다. 주포는 L/32 75mm 포였으며, 에드거 윌리엄 브란트가 개발한 텅스텐 탄심을 사용한 철갑탄(APCR)을 사용하여 높은 포구 초속을 실현했다.[53]

1938년 여름의 프로젝트는 근본적인 재설계 없이는 이러한 사양을 충족할 수 없었다.

3. 5. 상세 사양 (1938년)

1938년 7월 12일에 제공된 상세 사양은 다음과 같다.[14]

  • 무장:
  • 긴 고속 반자동 75mm 주포[14]
  • 대공 무기로도 사용 가능한 포탑 장착 7.5mm 기관총[14]
  • 차체 또는 포탑 전면 기관총[14]
  • 탄약:
  • 최소 100발의 포탄[14]
  • 30개 이상의 기관총 탄창[14]
  • 중량:
  • 공차 중량 30톤[14]
  • 전투 중량 32톤[14]
  • 엔진:
  • 전기 및 수동 시동 가능[14]
  • 궤도에 완전히 접근 가능[14]
  • 속도:
  • 최대 속도: 40 km/h[14]
  • 장거리 평균 속도: 30 km/h[14]
  • 비포장 도로 속도: 20 km/h[14]
  • 항속 거리:
  • 200 km (2개의 연료 탱크 사용)[14]
  • 비포장 도로 기준 8시간[14]
  • 등판 및 도하 능력:
  • 등판 능력: 90 cm (단단한 경사면 85%, 젖은 경사면 65%)[14]
  • 참호 통과 능력: 250 cm[14]
  • 도하 능력: 120 cm[14]
  • 치수 제한:
  • 너비: 294 cm 이하 (철도 운송 목적)[14]
  • 전투실 절대 높이: 120 cm 이하 (측면 문 장착 가능)[15]
  • 화학 무기 방어:
  • 가스 공격에 대한 완전한 방어[6]
  • 장갑:
  • 두께 60 mm 유지
  • 덧붙이는 장갑(appliqué armour) 사용 불가
  • 볼트, 갱목(tenon)으로 연결, 또는 전기 용접 가능한 주조 장갑
  • 자동 소화 장치:
  • 자동 소화기 장착
  • 시계 및 사격 통제 장비:
  • 주 포탑에 연결 가능한 대형 조준경을 갖춘 큐폴라 (지휘관이 75mm 포 조준 가능)[16]
  • 큐폴라에 광학 원격 측정 거리 측정기 장착[16]
  • L/32 75mm 주포: 브란트 텅스텐 철갑탄을 사용하여 좋은 포구 속도 제공[16]


1938년 여름, 이러한 사양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재설계가 필요했다.

3. 6. 각 사의 개발 상황 (1939년)

1936년, 여러 회사가 G1 전차 개발에 참여했다.

  • '''보데-도농-루셀 (BDR):''' 샤르 B1과 유사한 외형으로, 밀폐형 볼 베어링을 사용하는 7개의 로드 휠과 연속적인 고무 내피를 가진 궤도를 특징으로 했다.[60][61] 무게 문제와 철도 수송 문제, 부교 한계 초과 등으로 1939년 9월 10일에 개발이 중단되었으며, 나무 모형만 제작되었다.
  • '''푸가 (Fouga):''' 차체에 주포를 장착하고 영국의 윌슨 기어 박스를 사용할 계획이었다.[58] 카덴-로이드 궤도가 너무 약하다고 판단[58]되어 개발이 중단되었다.[59]
  • '''로렌 드 디트리히 (Lorraine de Dietrich):''' 로렌 37L 견인차의 서스펜션을 사용하고, 클리블랜드 변속기 대신 코탈 변속기를 장착했다. 엔진/포탑 문제, 국방부 반대 등으로 개발이 중단되었다.
  • '''SEAM (Société d'Études et d'Applications Mécaniques):''' 경사 장갑을 사용하고 차체 오른쪽에 75mm 주포를 장착할 예정이었다.[54] 1936년 12월 3일 뱅센 위원회(Commission de Vincennes)에 실제 프로토타입을 제시했으나, 재정 문제와 무기 자문 위원회(Conseil Consultatif de l'Armement)의 ARL 협력 명령[57]으로 개발이 중단되었다.
  • '''루이 르노 (Renault ACK1):''' 르노 R35를 기반으로 했으며, 6개의 로드 휠과 이중 궤도를 가졌다.[66] 토션 바 서스펜션과 클리블랜드 변속기를 갖추고 있었다.[66] 혁신적인 무기 장착 방식을 고려하여 시제품 주문[69]을 받았으나, 1939년 9월 10일 개발이 계속된 유일한 설계였다.


각 회사의 개발은 다양한 문제에 직면했으며, 특히 무게, 엔진, 포탑, 궤도 등의 기술적 문제와 재정 문제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최종적으로 루이 르노의 설계만이 개발이 지속되었다.

4. 포탑 설계

1930년대 프랑스에서는 전차의 포탑들이 전차의 차체와 함께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만들어지는 일이 보통이었다. 1938년 6월 1일, ARL, FCM, 르노사가 새로운 제원 하에 G1 전차에 장착할 수 있는 새로운 포탑에 대한 개발 과정을 맡기로 결정했다.[81] 이 세 회사는 필수 변경점을 적용하고 이미 존재하거나 새로운 효율적으로 빠른 사격속도를 지닌 75 mm 포를 연구하는 것에 응했다.[82]

1939년 7월, ARL이 G1 전차에 장착될 포탑의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것은 5.7 톤에 달하는 ARL3 포탑이었으며 포탑공구함이 달려 있었고 188 cm 둘레의 포탑링에 주포까지 달렸다. 또한 이것은 FCM F1 계획 하에서 나왔다. FCM은 FCM F1 중전차의 용접장갑형 팔각 모양의 부포탑에서 개량된 7.5 톤 형식을 사용할지 고민 중에 있었다. 이 포탑은 185 cm 둘레의 포탑 링을 가지고 있고 진보한 자동 장전 장치를 탑재하였다. 프랑스군의 후퇴 작전 때에도, FCM에서는 비슷하게 생긴 팔각형의 용접포탑형 F4 포탑을 G1 전차 포탑으로 사용할 것을 고려 중에 있었다. 이 포탑은 표준 75 mm 야포가 장착되어 있었고 2C 전차용으로 개발되었던 것이었다.

4. 1. ARL3 포탑

1930년대 프랑스에서는 전차의 포탑이 차체와 별도로 설계되는 경우가 많았다. 1938년 6월 1일, ARL, FCM, 르노사는 G1 전차에 장착할 새로운 포탑 개발을 맡게 되었다.[81] 이들은 기존에 존재하거나 새로 개발될 고속 발사 75mm 포를 연구하는 데 합의했다.[82]

1939년 7월, ARL은 G1 전차에 장착될 ARL3 포탑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ARL3 포탑은 5.7톤에 달했으며, 포탑 바스켓과 188cm 포탑 링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FCM F1 계획의 일환이기도 했다. FCM은 FCM F1 중전차의 용접 장갑형 팔각 부포탑에서 개량된 7.5톤 형식의 포탑(185cm 포탑 링, 반자동장전기 탑재)을 사용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프랑스군 후퇴 중에도 FCM은 2C 전차용으로 개발되었던 표준 75mm 야포가 장착된 F4 팔각 용접 포탑을 G1 전차 포탑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4. 2. FCM 포탑

1930년대 프랑스에서는 전차의 포탑이 차체와 별도로 설계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81] 1938년 6월 1일, ARL, FCM, 르노사는 G1 전차에 장착할 새로운 포탑 개발을 시작했다.[81] 이들은 빠른 사격 속도를 지닌 75mm 포를 연구했다.[82]

1939년 7월, ARL은 5.7톤의 ARL3 포탑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이는 188cm 포탑 링과 포탑공구함을 갖추고 있었으며, FCM F1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FCM은 FCM F1 중전차의 용접장갑형 팔각 모양 부포탑에서 개량된 7.5톤 형식의 포탑을 고려했는데, 이 포탑은 185cm 포탑 링과 반자동장전기를 탑재했다. FCM은 2C 전차용으로 개발되었던 표준 75mm 야포가 장착된 F4 포탑도 고려했다.

5. 전술적 역할

1939년형 제원을 기준으로 G1 전차는 더 이상 편성된 보병사단에서 운용 가능한 보병 지원 전차(Char d'accompagnement)가 아니었다.[83][34][73] 이 역할은 AMX 38이 담당할 예정이었다.[83][34][73] G1 전차는 르노 B1 전차를 대체할 예정도 아니었는데, 임박한 전쟁 위협으로 인해 대부분의 생산 능력이 기존 전차 생산량을 늘리는 데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이다.[34][73]

G1 전차의 전술적 역할은 불분명했다.[83][34][73] 전략적 관점에서 G1 전차는 독일 격파를 위한 전략적 공세 계획의 세 번째 단계에서 투입될 예정이었다.[83][34][73] 1940년에 기존 전차로 독일군을 저지하고, 1941년에 FCM F1 초중전차로 지크프리트 선을 돌파하며, 1942~43년에 G1 전차를 투입하여 최종 승리를 거둔다는 계획이었다.[83][34][73]

6.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영향

6. 1. 전차 연구위원회 (1940년)

6. 2. 르노의 노력과 개발 중단

1939년 9월 전쟁 발발로 전차 설계 정책이 변경되어, 전차 연구 위원회는 Char G1이 ''Char d'Accompagnement''와 ''Char de Bataille''의 중간에 위치하여 생산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했다.[35]

루이 르노는 이 결정을 번복하고자 노력했다. 1940년 4월 1일, 르노의 수석 엔지니어 세르는 위원회에 Char G1 프로젝트가 거의 완성 단계이며, 첫 번째 장갑 세트가 1940년 7월에 ''슈나이더''에서 제조될 예정이고, 서스펜션과 변속기가 거의 완성되었으며, 350마력 엔진이 테스트 중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무게는 35톤 미만, 어쩌면 32톤까지 낮아질 수 있으며, 5월에 모든 이론 연구를 완료하고 9월에 첫 번째 차량을 완성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프로토타입 완성은 허가했지만, 생산은 제외된다고 답변했다. 1940년 6월 휴전으로 모든 개발이 중단되었다.

프랑스 장갑차 역사학자 스테판 페라르는 르노 프로젝트가 지속적인 개발 대상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상황이 허락했다면 Char G1R이 ARL 3 포탑과 400마력 엔진으로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36] 더 나아가 3인승 ARL 42 포탑과 L/40 75mm 포를 장착하여, 소련의 T-34와 미국의 M4 셔먼과 동등하면서도 거리 측정기 및 포 안정화와 같은 더 발전된 기술을 갖춘 전차가 되었을 것이며, 이는 전후 AMX 30을 예고하는 것이었다고 평가한다.[37]

7. G1 전차의 유산

G1 전차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개발이 중단되었지만, 전후 프랑스 전차 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9년 9월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랑스 전차 검사단은 신형 중형 보병 전차, 신형 중전차, 신형 초중전차의 세 가지 유형을 제외하고는 기존 전차의 생산을 제한하기로 결정했다.[35] G1 전차는 이 두 유형의 중간에 위치하여 생산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으나, 르노는 G1 전차 프로젝트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을 들어 개발 지속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1940년 6월 휴전으로 인해 G1 전차의 개발은 완전히 중단되었다.[75]

G1 R에 장착될 예정이었던 ARL3 포탑은 3인승 포탑, 장포신 중형포 등 당시 프랑스 전차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진일보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85] 특히 포신 안정기, 광학 거리측정기, 자동 장전 장치, 그리고 400마력의 강력한 엔진은 냉전 시기 AMX-30 개발에 큰 영향을 주었다.[85]

프랑스의 전차 사학자 스테판 페라르는 G1 전차가 프랑스의 패전이 없었다면 ARL3 포탑과 400마력 엔진을 장착한 형태로 양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76] 또한, 3인승 ARL 42 포탑과 75mm L/40 포로 무장하여 T-34M4 셔먼과 동등한 성능을 가지면서도 거리 측정 장치 및 포 안정화 장치와 같은 더 발전된 기술을 갖춘 전차가 되었을 것이며, 이는 전후 AMX 30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76]

7. 1. 전후 프랑스 전차 개발에 미친 영향

G1 전차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개발이 중단되었지만, 전후 프랑스 전차 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9년 9월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랑스 전차 검사단은 신형 중형 보병 전차, 신형 중전차, 신형 초중전차의 세 가지 유형을 제외하고는 기존 전차의 생산을 제한하기로 결정했다.[35] G1 전차는 이 두 유형의 중간에 위치하여 생산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으나, 르노는 G1 전차 프로젝트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을 들어 개발 지속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1940년 6월 휴전으로 인해 G1 전차의 개발은 완전히 중단되었다.[75]

G1 R에 장착될 예정이었던 ARL3 포탑은 3인승 포탑, 장포신 중형포 등 당시 프랑스 전차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진일보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85] 특히 포신 안정기, 광학 거리측정기, 자동 장전 장치, 그리고 400마력의 강력한 엔진은 냉전 시기 AMX-30 개발에 큰 영향을 주었다.[85]

프랑스의 전차 사학자 스테판 페라르는 G1 전차가 프랑스의 패전이 없었다면 ARL3 포탑과 400마력 엔진을 장착한 형태로 양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76] 또한, 3인승 ARL 42 포탑과 75mm L/40 포로 무장하여 T-34M4 셔먼과 동등한 성능을 가지면서도 거리 측정 장치 및 포 안정화 장치와 같은 더 발전된 기술을 갖춘 전차가 되었을 것이며, 이는 전후 AMX 30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76]

7. 2.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 (간접적)

8. 덧붙임

8. 1.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월드 오브 탱크에서 프랑스 중형전차 르노 G1으로 개발 가능하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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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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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서적
[71] 서적 Stéphane Ferrard, 2008b, p. 76
[72] 서적 Pierre Touzin, 1979, p. 168
[73] 서적 Stéphane Ferrard, 2008b, p. 72
[74] 서적 Pierre Touzin, 1979, p. 186-190
[75] 서적 Stéphane Ferrard, 2008b, p. 79
[76] 서적 Stéphane Ferrard, 2008b, p. 77
[77] 서적 Pierre Touzin, 1979, p. 165
[78] 서적 Stéphane Ferrard, 2007a, p. 38
[79] 서적 Stéphane Ferrard, 2007a, p. 39
[80] 서적 Stéphane Ferrard, 2007a, p. 40
[81] 서적 Pierre Touzin, 1979, p. 168
[82] 서적 Stéphane Ferrard, 2008a, p. 52
[83] 서적 Stéphane Ferrard, 2008b, p. 72
[84] 서적 Pierre Touzin, 1979, p. 186-190
[85] 서적 Stéphane Ferrard, 2008b, p.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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