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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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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독일 해군의 마지막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1905년 진수되어 1908년 취역했다. 28cm 주포 6문과 17cm 부포 14문 등으로 무장했으며, 19.1노트의 속력과 14,218톤의 만재 배수량을 가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했고, 이후 개수를 거쳐 훈련함으로 사용되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폴란드 침공의 시작을 알리는 베스테르플라테 포격을 가했다. 덴마크 침공에도 참여했으며, 1944년 영국 공군의 공습으로 침몰했다. 이후 소련에 인양되어 표적함으로 사용되다 잔해만 남았다.

2. 설계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의 지휘 아래 1900년 독일 해군법이 통과되면서 향후 17년간 20척의 새로운 전함을 건조할 자금이 확보되었다. 이에 따라 건조된 첫 번째 그룹인 5척의 급 전함 이후, 후속 설계에 대한 작업이 시작되어 급 전함이 탄생했다.

|thumb|left|도이칠란트de급의 평면도 및 측면도|alt=양쪽 끝에 대형 함포 포탑이 있고 측면에 소형 함포가 배열된 대형 함선의 측면도와 상단도. 세 개의 높은 굴뚝이 두 개의 높은 돛대 사이에 배 중앙에 서 있다.]]

도이칠란트de급 함선은 브라운슈바이크de급과 전반적으로 유사했으며, 장갑 방어력이 점진적으로 개선되었다. 또한 중량 절감을 위해 2차 주포 포탑을 전통적인 케이스메이트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1906년 12월, 10문의 12인치 (30.5 cm) 함포를 장착한 영국 전함 가 취역하면서 혁신적인 설계로 인해 도이칠란트de급을 포함한 독일 해군 함정이 구식이 되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의 전체 길이는 , 폭은 , 흘수는 였다. 배수량은 통상 이었고 전투 시 적재량은 최대 였다. 3개의 삼단 팽창 기관과 12개의 석탄 연소 수관 보일러를 갖추어 정격 을 생산하고 최고 속도는 이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은 동급 함선 중 두 번째로 빠른 함선일 뿐만 아니라 연료 효율도 두 번째로 높았다. 의 순항 속도로 를 항해할 수 있었다. 표준 승무원은 장교 35명과 사병 708명이었다.

이 함선의 주요 무장은 2개의 쌍열 포탑에 4문의 28 cm SK L/40 gun으로 구성되었다. 포탑 1개는 전방에, 다른 1개는 후방에 배치되었다. 공격 무장은 개별적으로 케이스메이트에 장착된 14문의 SK L/40 함포로 구성된 부포로 보완되었다. 단일 마운트에 22문의 SK L/45 함포 배터리는 어뢰정에 대한 방어를 제공했다. 이 함선은 또한 6개의 어뢰 발사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모두 수선 아래에 있었다. 1개는 선수에, 1개는 선미에, 4개는 현측에 있었다.

벨트 아머는 선체 중앙부의 장갑 시타델에서 두께였고, 두께의 장갑 갑판을 가지고 있었다. 주포 포탑의 측면은 두께였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다양한 구경의 함포와 어뢰 발사관으로 무장했다. 주 무장은 Drh LC/1908 포가 장착된 28cm SK L/45 함포 6문이었다. 이 함포는 2개의 포탑에 3문씩 장착되었으며, 각각 선수와 선미에 1개씩 배치되었다. 함포는 -8도에서 13.5도까지 올릴 수 있었으나, 1915년에는 포탑을 수정하여 최대 16도까지 올릴 수 있도록 개선했다. 이 함포는 분당 3발의 발사 속도로 405.5kg의 포탄을 발사했으며, 최대 사거리는 18,100m였고, 고각 개량을 거친 후에는 최대 사거리가 20,400m로 늘어났다. 함포는 총 720발의 포탄을 적재할 수 있었다.

부포로는 17cm SK L/45 함포 14문이 탑재되었다. 이 함포는 casemate mount에 장착되었으며, 분당 5~7발의 발사 속도로 60kg의 포탄을 발사했다. 함포의 최대 사거리는 16,250m였으며, 총 1,960발의 포탄을 적재할 수 있었다. 대공 방어를 위해 8.8cm L/45 함포 4문이 장착되었으며, 어뢰 공격에 대비하여 50cm 어뢰 발사관 6문이 선체에 장착되었다.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다양한 두께의 장갑을 사용하여 방어력을 확보했다. 벨트 장갑은 주 갑판 아래에서 240mm 두께였으며, 주 갑판과 하부 갑판 사이에서는 140mm로 얇아졌다. 선수와 선미에서는 장갑 두께가 100mm로 더 줄어들었다. 이 장갑은 나무 판자 위에 설치되었다.

갑판 장갑은 경사면에서 40mm 두께였고 평평한 부분에서는 55mm였다. 어뢰 격벽은 25mm 두께였다. 전방 지휘탑의 측면은 200mm, 지붕은 50mm 두께였다. 후방 지휘탑은 측면이 100mm, 지붕이 20mm 두께로 보호되었다. 11인치 포탑의 측면은 280mm, 지붕은 50mm였다.

2. 1. 배경

1900년, 독일 제국 의회는 독일 해군을 확장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두 번째 해군법을 통과시켰다. 이전의 1898년 해군법은 1904년까지 19척의 전함이라는 전력을 규정했었다. 새로운 법안은 1920년까지 총 38척의 전함으로 그 규모를 거의 두 배로 늘렸다. 이 프로그램은 그 후 6년 동안 여러 차례 수정되어 최종적으로 1908년까지 연간 3척의 전함 건조를 의결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브라운슈바이크급 전함의 약간 개량된 형태였다. 브라운슈바이크급은 독일 해군이 보유한 이전의 전함 설계에 비해 향상된 성능을 제공했지만, 설계상의 결함은 여전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브라운슈바이크급의 주포와 부포의 배치가 구식으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SMS 도이칠란트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이 전함은 브라운슈바이크급을 뒤이어 건조되었지만 여전히 동일한 포 배치 방식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해군 사령부는 여전히 대구경 함포를 추가하는 데 주저했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함포를 위한 충분한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1906년 말, 영국 해군의 혁신적인 드레드노트가 취역했다. 드레드노트는 모든 함포가 대구경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전함이었으며, 다른 모든 전함들을 즉시 구식으로 만들어버렸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이미 기공된 상태였기 때문에 설계를 변경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드레드노트가 등장한 이후 독일 해군이 건조한 구식 전함이 되었다.

2. 2. 제원

다음은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제원이다.

전체 길이는 127.6m (418ft 8in)이고, 폭은 22.2m (72ft 10in)이며, 흘수는 8.6m (28ft 3in)이다. 만재 배수량은 14,828t에 달한다.

추진 기관으로는 3단 팽창 기관 3기와 석탄 보일러 12개를 사용했다. 이를 통해 13,800마력의 출력을 내며, 최고 속력은 18노트 (33km/h)이다. 10노트 (19km/h)의 속력으로 4,800해리 (8,900km)를 항해할 수 있다.

승무원은 장교 41명과 사병 633명으로 구성되었다.

2. 3. 무장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다양한 구경의 함포와 어뢰 발사관으로 무장했다. 주 무장은 Drh LC/1908 포가 장착된 28cm(11인치) SK L/45 함포 6문이었다. 이 함포는 2개의 포탑에 3문씩 장착되었으며, 각각 선수와 선미에 1개씩 배치되었다. 함포는 -8도에서 13.5도까지 올릴 수 있었다. 1915년에 포탑을 수정하여 최대 16도까지 올릴 수 있도록 개선했다. 이 함포는 분당 3발의 발사 속도로 405.5kg의 포탄을 발사했으며, 최대 사거리는 18,100m였다. 고각 개량을 거친 후에는 최대 사거리가 20,400m로 늘어났다. 함포는 총 720발의 포탄을 적재할 수 있었다.

부포로는 17cm(6.7인치) SK L/45 함포 14문이 탑재되었다. 이 함포는 casemate mount에 장착되었으며, 분당 5~7발의 발사 속도로 60kg의 포탄을 발사했다. 함포의 최대 사거리는 16,250m였으며, 총 1,960발의 포탄을 적재할 수 있었다. 대공 방어를 위해 8.8cm(3.5인치) L/45 함포 4문이 장착되었으며, 어뢰 공격에 대비하여 50cm(19.7인치) 어뢰 발사관 6문이 선체에 장착되었다.

2. 4. 장갑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다양한 두께의 장갑을 사용하여 방어력을 확보했다. 벨트 장갑은 주 갑판 아래에서 240mm 두께였으며, 주 갑판과 하부 갑판 사이에서는 140mm로 얇아졌다. 선수와 선미에서는 장갑 두께가 100mm로 더 줄어들었다. 이 장갑은 나무 판자 위에 설치되었다.

갑판 장갑은 경사면에서 40mm 두께였고 평평한 부분에서는 55mm였다. 어뢰 격벽은 25mm 두께였다. 전방 지휘탑의 측면은 200mm, 지붕은 50mm 두께였다. 후방 지휘탑은 측면이 100mm, 지붕이 20mm 두께로 보호되었다. 11인치 포탑의 측면은 280mm, 지붕은 50mm였다.

3. 함선 생애

1905년 8월 18일 킬의 Germaniawerftde 조선소에서 기공되어 1906년 12월 17일 진수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독일 해군의 마지막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다. 진수식에는 독일 황후 아우구스타 빅토리아와 빌헬름 2세가 참석했으며, 에른스트 귄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이 취역 연설을 했다.

1908년 7월 6일 해상 시운전을 위해 취역했으며, 승무원은 대부분 자매함 에서 차출되었다. 9월 21일에는 자매함과 함께 공해 함대의 제2전투전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5년간 발트해에서 함대 훈련을 반복했으며, 1909년 7월 7일부터 8월 1일까지는 대서양으로 순항하기도 했다. 1910년 9월부터 프리드리히 뵈디커가 함장이 되었고, 1913년에는 황제의 사격상을 수상했다. 1914년 7월 14일 노르웨이로 향하던 중 유럽의 전쟁 위협으로 인해 빌헬름스하펜으로 회항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했으며, 종전 무렵에는 인력 부족으로 숙박함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독일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붕괴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군이 구식 전함 몇 척을 보유하게 되었다.

1926년까지 개수 작업을 거쳐 굴뚝이 3개에서 2개로 통합되었고 부포 교체와 고사포 증설 등이 이루어졌다. 1926년부터 1935년까지는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의 기함으로 활동하며 주력함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은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건조를 시작했다. 기술 혁신으로 장비가 노후화되면서 1936년에 연습함으로 변경되었고, 나치당의 권력 장악 후 독일 재군비 선언에 따라 독일 국방군 해군으로 편입되었다.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구스타프 클라인캄프 함장의 지휘 하에 발트해에서 독일 육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콘라트 알브레히트 해군 상급 대장이 작전을 지휘했다. 1939년 8월 25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침몰한 순양함 마그데부르크 추도식 참가 명목으로 자유 도시 단치히에 도착, 폴란드령 베스테르플라테 인근에 정박했다. 9월 1일 오전 4시 45분, 그단스크만에 정박 중 폴란드 육군의 요새 수비대를 향해 포격을 개시하며 베스테르플라테 공방전을 시작, 제2차 세계 대전의 첫 포성을 울렸다. 해군 돌격 보병 중대가 요새 공략에 나섰으나 폴란드군의 반격에 고전했으며,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도 벌어졌다.

9월 7일 베스테르플라테 요새가 함락된 후에는 자매함 슐레지엔과 함께 헬 반도 등 단치히 일대의 폴란드군 진지를 포격했다. 9월 19일에는 단치히에서 폴란드군 진지에 함포 사격을 가했으며, 같은 날 아돌프 히틀러가 단치히에 입성하여 다음 날 함락된 요새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시찰했다. 폴란드 전역 이후에는 항만 업무와 연습함 임무로 복귀했다.

1940년 4월 9일에는 베저 작전의 일환으로 덴마크 침공에 참여했다. 이후 다시 연습함으로 돌아갔으나 인원 부족으로 1940년 8월부터 예비함이 되어 고텐하펜에 계류되었고, 발트해에서 쇄빙함으로도 사용되었다.

1944년 9월 대공포를 증설하여 고텐하펜에서 부유 포대로 사용되던 중, 12월 18일 영국 공군의 공습으로 3발의 폭탄을 맞아 착저했다. 12월 20일 화재로 함의 기능을 상실하고 1945년 1월 25일 퇴역했으며, 승무원들은 육상전에 투입되어 마리엔부르크 방어전에 참여했다. 이후 항구 입구로 예인되어 폐쇄선으로 자침했으며, 3월 27일에는 전함 그나이제나우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옆에 자침했다. 다음 날 고텐하펜은 소련군에 점령당했다.

3. 1.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7월 전쟁 발발 당시,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SMS Schleswig-Holstein)은 나머지 함대가 동원되는 동안 엘베강 하구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0월 말,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자매함들은 어뢰기뢰에 더 강하게 대처하기 위해 수중 방어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킬로 보내졌으며, 이후 제2전투전대는 함대에 합류했다. 제2전투전대는 1914년 12월 15~16일 프란츠 폰 히퍼 제독의 순양전함인 제1정찰전대가 스카버러, 하틀풀, 휘트비 공격을 하는 동안 이를 엄호했다. 작전 중, 12척의 드레드노트급과 8척의 전기 드레드노트급을 포함하는 독일 전함대는 6척의 영국 전함으로 구성된 고립된 전대에서 10해리(19km) 이내로 접근했다. 그러나, 적대적인 구축함 스크린 간의 교전으로 독일 사령관인 프리드리히 폰 인게놀 제독은 자신이 전체 그랜드 함대와 마주하고 있다고 확신했고, 교전을 중단하고 함대를 귀항시켰다. 1916년 4월, 이 함은 8.8cm 포 2문을 제거하고 8.8cm Flak 포로 교체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은 1915년 4월 21~22일 도거 뱅크로의 함대 진격에 참여했다. 9월 11~12일 제2정찰전대는 제2전대가 지원하는 가운데 스바르테 뱅크 근처에서 기뢰 부설 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 후 10월 23~24일 함대가 또 한 번의 수색 작전을 수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제2 및 제3 전투전대 드레드노트급은 1916년 3월 5~7일 북해로 진격했으며,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과 제2전대의 나머지 함선들은 독일 만에 남아 지원 출항할 준비를 했다. 그들은 4월 24~25일 야머스와 로우스토프트 포격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함대에 재합류했다. 이 작전 중, 순양전함 가 영국 기뢰에 의해 손상되어 조기에 항구로 귀환해야 했다. 시야가 좋지 않아 영국 함대가 개입하기 전에 작전이 신속하게 중단되었다.

대양 함대(High Seas Fleet) 사령관 라인하르트 셰어 제독은 즉시 북해로의 추가 진격을 계획했지만, 제이들리츠de의 손상으로 인해 작전이 5월 말까지 연기되었다. 2차 전대 4전대의 마지막 함으로, 독일군 대형의 가장 뒤쪽에 위치한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은 대열의 마지막 전함이었다. 2차 전대는 프란츠 마우베 제독이 지휘했다. "북쪽으로의 질주" 동안 셰어는 함대에 영국 제5전대의 퇴각하는 전함들을 최고 속도로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과 자매함들은 드레드노트보다 훨씬 느렸고 빠르게 뒤쳐졌다. 이 기간 동안 셰어 제독은 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 뒤에 위치하도록 지시하여 대형의 양쪽 끝에 기함이 있도록 했다. 19시 30분 경, 그랜드 함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셰어 제독에게 상당한 수적 우위를 점했다. 독일 함대는 더 느린 도이칠란트de급 함선의 존재로 인해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만약 셰어가 즉시 독일로의 선회를 명령했다면, 그는 탈출하기 위해 더 느린 함선들을 희생해야 했을 것이다.

셰어 제독은 함대의 진로를 {{llang|de|게페흐츠케르트벤둥]](Gefechtskehrtwendung)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독일 전열의 모든 부대가 동시에 180° 회전해야 하는 기동이었다. 뒤쳐진 2차 전대 소속 함선들은 회전 후 새로운 진로를 따를 수 없었고, 독일 전열의 교전이 없는 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마우베 제독은 자신의 함선을 3차 전대 드레드노트의 후방으로 이동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그 움직임이 히퍼의 순양전함 기동에 방해가 될 것을 깨닫고 반대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함선을 전열의 선두에 배치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2차 전대가 전열의 선두 위치에 도달했을 때, 셰어는 또 다른 게페흐츠케르트벤둥de을 명령하여 독일 함대의 후방에 위치하게 했다. 21시경, 셰어는 함대를 세 번째로 돌렸지만,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과 전대 동료들의 느린 속도로 인해 함대에서 벗어나 함대의 비교전 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전투 첫날 늦게, 히퍼의 심하게 손상된 순양전함들은 영국 경쟁자들과 교전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과 소위 "5분 함선"들은 상대 순양전함 전대 사이로 진입하여 그들을 도왔다. 이 함선들은 매우 짧게 교전했는데, 이는 주로 시계 불량 때문이었다. 시계가 너무 나빠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에 탑재된 포수들은 목표물을 식별할 수 없었고, 주포를 발사하지 않았다. 21시 35분, 대구경 포탄이 함선의 좌현을 강타하여 폭발하기 전에 약 40cm 너비의 구멍을 뚫고 내부 포탑 장갑에 부딪혔다. 그것은 상부 구조 갑판의 4.50m를 찢어냈고 좌현 포탑 중 하나를 무력화시켰다. 3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당했다. 마우베 제독은 훨씬 더 강력한 순양전함과의 전투를 중단하고 8-방위 우현 선회를 명령했다.

31일 늦게, 함대는 독일로의 야간 항해를 위해 다시 대형을 갖추었는데,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은 대열의 후방, , 하노버de, 순양전함 및 의 앞에 위치했다. 03:00경, 영국 구축함들은 함대에 일련의 공격을 가했고, 일부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을 향했다. 그 직후, 폼메른de은 구축함 에서 발사된 최소 하나의 어뢰에 맞아 탄약고가 폭발하여 함선이 엄청난 폭발로 파괴되었다. 공격 중,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은 구축함의 어뢰를 피하기 위해 방향을 돌려야 했다. 05:00 직후, 하노버de와 몇몇 다른 함선들은 영국 잠수함이라고 잘못 믿은 물체에 여러 번 발포했다.

야간 전투의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대양 함대는 영국 구축함 세력을 뚫고 6월 1일 4시에 혼스 리프에 도달했다. 독일 함대는 몇 시간 후 빌헬름스하펜에 도착했는데, 손상되지 않은 및 의 드레드노트들이 방어 위치를 점했다. 전투 과정에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은 단 20발의 17cm 포탄만을 발사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SMS Schleswig-Holstein)은 1916년 6월 10일부터 25일까지 수리를 위해 도크에 들어갔다. 그 후 해군은 폼메른de(SMS Pommern)의 손실에서 드러났듯이, 낡고 수중 공격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남은 4척의 도이칠란트de(Deutschland)급 전함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1917년 2월 12일부터 23일까지 경비함으로 사용된 시기를 제외하고, 이 배는 잠수함의 표적으로 사용되었다. 4월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은 엘베강 하구의 알텐브루흐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5월 2일에 퇴역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은 그 후 무장 해제되어 제5잠수함 기동대에 배속되어 브레머하펜에서 병영선으로 사용되었다. 1918년에 이 배는 킬로 옮겨졌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3. 2.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독일 해군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국방 해군으로 개편되었다. 새로운 해군은 181조에 따라 연안 방어를 위해 8척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그 중 2척은 예비로 보관)을 보유할 수 있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자매함 ''하노버'', ''슐레지엔'', 그리고 여러 척의 ''브라운슈바이크''급 전함과 함께 유지된 함선 중 하나였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1926년 1월 31일, 새로운 사격 통제 장치와 제독의 지휘부를 위한 확장된 후부 상부 구조를 갖춘 광범위한 개조를 거쳐 새로운 함대 기함으로 재취역했다. 2차 17cm 주포는 15cm 포로 교체되었으며, 수중 어뢰 발사관을 대체하여 주 갑판 포탑에 4개의 50cm 어뢰 발사관이 앞뒤로 장착되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과 자매함 하노버de는 1926년 5월 14일부터 6월 17일까지 대서양으로 훈련 항해를 떠났고, 항해 중 5월 22일부터 30일까지 지중해의 팔마 데 마요르카를 방문했다. 6월 1일부터 7일까지 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정박한 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비고로 이동하여 헤센de, 엘자스de, 하노버de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함대 사령관 콘라트 맘센 해군 중장은 알폰소 13세 국왕을 만났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은 1927년 3월 30일부터 6월 14일까지 대서양에서 또 다른 훈련 항해를 떠났다. 그녀는 포르투갈 대통령 오스카르 카르모나의 환영을 받은 포르투갈 리스본을 포함한 일련의 이베리아 항구를 방문했다. 1927년 12월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은 도크로 돌아가 1928년 1월에 재등장했는데, 그녀의 앞쪽 굴뚝은 두 번째 굴뚝으로 연결되었고, 남아있는 두 개의 굴뚝은 이전 자매함 슐레지엔de과 같이 높이가 높아졌다.

1933년부터 새로운 Panzerschiffede(장갑함)의 인도로 인해, 구형 전함들은 점차 최전선에서의 임무에서 물러났다. 1935년 5월, 아돌프 히틀러가 창설한 국방군의 개혁으로 국방 해군은 해군으로 개편되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은 1935년 9월 22일 함대 기함의 역할을 멈추었고, 1936년 1월-3월과 5월-7월 동안 사관생도 훈련함으로 개조되었다. 변경 사항에는 갑판 상부의 남아있는 15cm 포와 어뢰 발사관의 제거, 그리고 두 개의 후부 보일러실을 유류 연소 모델로 개조하는 것이 포함되었지만, 전방 보일러는 석탄 연소 방식을 유지했다. 선박의 표준 승무원도 35명의 장교와 708명의 사병에서 31명의 장교와 565명의 해군으로 줄었다. 승무원은 175명의 사관생도로 보충되었으며, 그들은 슐레지엔de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de에서 장기간 항해를 했다. 후자는 1936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남미와 카리브해로 항해했다. 이듬해 그녀의 항해는 아프리카를 돌았고, 1938-1939년의 항해는 다시 남미와 카리브해 해역으로 향했다. 구스타프 키제리츠키는 1938년 6월부터 1939년 4월까지 함선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1930년대 중반, 히틀러는 점점 더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936년 그는 라인란트 재무장을 시행했고,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Anschlussde와 주데텐란트 병합을 완료했다. 그는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자유 도시가 된 단치히에 대한 독일의 통제를 요구했다.

3.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1일 이른 아침,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8월에 의례적인 방문을 가장하여 단치히 항구에 배치되어, 베스터플라테에 있는 폴란드 탄약고 가까이에 정박해 있었다. 9월 1일 약 04시 47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베스터플라테에 있는 폴란드군 진지에 주포를 발사했고, 이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의 첫 포성을 울렸다.[1] 이 포성은 지상군이 시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라는 신호였지만, 베스터플라테 전투에서 독일군의 첫 지상 공격은 곧 격퇴되었다.[1] 두 번째 공격은 그날 아침 늦게 시작되었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지원을 받았지만, 정오까지 시설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1]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9월 4일에 어뢰정 ''T196''과 폰 데어 그뢰벤이 합류했다.[1] 독일 보병과 공병 부대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강력한 화력 지원을 받으며 탄약고를 점령하기 위해 상륙했다.[1] 폴란드군은 9월 7일 10시 30분에 항복할 때까지 독일군을 막아냈다.[1] 폴란드가 항복한 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헬과 레드워보에 있는 폴란드군 진지를 포격하기 시작했으며, 이 작전은 9월 13일까지 지속되었다.[1] 9월 25일부터 27일까지, 이 노후 전함은 자매함 슐레지엔과 함께 헬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폴란드군 진지에 대한 추가 포격을 실시했다.[1] 9월 25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헬에 있는 폴란드 해안 포대에 의해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1]

그 후 독일군은 서쪽으로 시선을 돌려, 1940년 4월 덴마크를 침공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덴마크 침공을 위한 독일군의 해군 구성 요소의 일부인 제7집단에 배정되었다. 어뢰정 클라우스 폰 베버른과 여러 보조 선박과 함께, 그녀의 목표는 코르쇠르와 뉘보르의 점령을 지원하는 것이었다.[1] 침공 중에, 이 함선은 아게르쇠 서쪽의 그레이트 벨트에서 잠시 좌초되었다.[1] 작전 이후, 그녀는 훈련 부대 사령관으로서 훈련 임무로 다시 배치되었다.[1] 1943년 말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재활성화가 다시 고려되었다. 그녀에게 유리한 점은 악화되는 석유 공급 상황을 감안하여, 그녀가 일부 석탄 연소 보일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44년 2월 1일에 그녀는 다시 재취역되었고, 처음에는 생도 훈련선으로서 이전 역할을 맡았고, 그 해 말에는 고텐하펜(그디니아)에 정박하여 개조를 받았다. 그녀는 대공 무장을 대폭 강화한 호송 호위함으로 개조될 예정이었지만, 1944년 12월 18일에 영국 공군 폭격기에 세 번이나 피격된 후, 결국 얕은 물에 침몰했다.[1] 함선이 영구적으로 손상되었으므로, 승무원은 마리엔부르크의 방어를 돕기 위해 상륙했다.[1]

소련군이 그 도시를 점령한 후, 남은 승무원은 3월 21일에 함선의 잔해에 자침 폭약을 터뜨려 함선을 추가로 파괴했다.[1] 전쟁 후, 함선은 1945~1946년에 소비에트 해군에 의해 인양되어 탈린으로 이송되었다. 참고 서적에서는 오랫동안 그녀가 그곳이나 마리엔부르크에서 폐기되었다고 기술했지만, 실제로는 1948년에 예인되어 핀란드만의 오스무사르 섬 근처의 얕은 물에서 장기간 표적으로 사용되었다.[1] 1966년경 마지막으로 사격 훈련에 사용되었으며, 잔해는 현재 수중에 있다.[1] 그녀의 종은 1990년 현재 드레스덴에 있는 독일 연방군 군사사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보관되었다.[1]

슐레스비히-홀슈타인(SMS Schleswig-Holstein, 함장 구스타프 클라인캄프)은 폴란드 침공 작전 발동에 따라 발트해에 파견되어 독일 육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작전에 참여한 독일 함대를 지휘한 것은 콘라트 알브레히트 해군 상급 대장이었다.

1939년 8월 25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침몰한 순양함 마그데부르크(SMS Magdeburg) 추도식에 참가한다는 명목으로 자유 도시 단치히에 도착하여 폴란드령 베스테르플라테 근처 수로에 정박했다. 1939년 9월 1일 오전 4시 45분, 그단스크만에 정박 중이던 본함은 폴란드 육군의 요새 수비대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이 베스테르플라테 공방전에서 본함이 발사한 28cm 포탄이야말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었다. 함포 사격과 동시에, 본함에서 해군 돌격 보병 중대(빌헬름 헤니크센 중위)가 요새 공략을 위해 출격했지만 폴란드군 수비대의 반격에 고전하고 있었다. 단치히 시가에서도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이 일어났다.

9월 7일, 베스테르플라테 요새는 함락되었다. 본함과 지원하러 온 자매함 슐레지엔은 옥시비에, 레드워보, 그디니아 해전, 헬 반도의 헬 요새 지대(헬 전투)등, 단치히 일대의 폴란드군 진지를 포격했다. 9월 19일 아침에도 본함은 단치히에서 폴란드군 진지에 함포 사격을 가했지만, 같은 날 오후에는 히틀러 총통이 단치히에 입성했다. 다음 날인 20일, 히틀러는 함락된 요새를 방문했고, 본함도 시찰했다. 폴란드 전역 후, 양 함 모두 "늙은 역마가 연금과 함께 목장으로 은퇴하는 것처럼" 항만 업무와 연습함이라는 본래의 직무로 돌아갔다.

1940년 4월 9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베저 작전의 일원으로서 덴마크 침공 작전에 참여했다(베저 작전, 독일군 전투 서열)。 그 후 다시 연습함으로 돌아갔지만, 인원 부족으로 인해 1940년 8월 말부터 경비반 등 소수의 유지 인원을 남긴 예비함이 되었고, 대공포가 철거된 상태로 얼마 동안 고텐하펜에 계류되었다. 발트해에서는 보조적인 쇄빙함으로도 사용되었다.

1944년 9월, 본함은 대공포를 증설하여 고텐하펜에서 부유 포대로 이용되었다. 1944년 12월 18일, 같은 장소가 영국 공군의 공습을 받았을 때 3발의 폭탄이 명중하여 수심 12m의 항구 내에 착저했다. 그 시점에서 상부는 수면 위에 있었기 때문에 무장은 사용 가능했지만, 12월 20일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함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1945년 1월 25일에 퇴역한다. 함을 내린 승무원들은 육상전에 투입되어 마리엔부르크 주변의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항구 입구로 예인되어 폐쇄선으로서 자침했다(폐쇄 작전). 3월 27일에는 폐선 상태가 된 전함 그나이제나우가 침몰한 본함 옆으로 예인되어 폐쇄선으로 자침했다. 그로부터 24시간 후, 고텐하펜은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4. 최후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6년 6월 10일부터 25일까지 수리를 받았고, 이후 해군은 폼메른 침몰에서 드러났듯이 노후하고 수중 공격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남은 도이칠란트급 전함 4척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1917년 2월 12일부터 23일까지 경비함으로 사용된 기간을 제외하고 잠수함 표적으로 사용되었으며, 4월에는 엘베강 하구의 알텐브루흐로 보내져 5월 2일에 퇴역했다. 이후 무장 해제되어 제5잠수함 기동대에 배속되어 브레머하펜에서 병영선으로 사용되었고, 1918년에는 킬로 옮겨져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군에 인양되어 탈린으로 예인된 후 '''보로디노'''(러시아어: '''Бородиноru'''Borodino)로 개명되었다. 1948년발트해 오드섬 근처에 침몰했으며, 이후 1960년대까지 표적함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선체 잔해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1967년 영화 《베스터플라테》와 2013년 영화 《베스테르플라테의 수수께끼》에서 폴란드군을 공격하는 모습, 베스테르플라테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포격을 가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또한, 게임 《전함소녀 R》에서는 독일 전함으로 등장하여 플레이어가 획득하고 운용할 수 있다.

드레스덴의 독일 연방군 군사사 박물관에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사용되던 선종이 보존되어 있다.

5. 대중 문화 속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여러 대중 문화 작품에 등장하며, 그 모습은 다양하게 그려진다.

1967년 제작된 영화 베스테르플라테는 역사 드라마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대지 포격을 하는 실사 영상이 사용되었다. 2013년 공개된 역사 영화 에서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CG로 재현되었다.

함선 의인화 게임인 《전함소녀 R》에서는 모니터함으로 등장한다. 게임 내에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독일 전함으로 등장하며, 플레이어가 획득하고 운용할 수 있다. 성능은 준수한 편이며,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개조를 통해 더욱 강력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캐릭터 디자인은 함선 자체의 특징을 반영하여 독일 해군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었다.

5. 1. 영화

1967년 영화 《베스터플라테》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 우체국을 배경으로 한다. 이 영화에서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폴란드군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이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2013년 영화 《베스테르플라테의 수수께끼》에서도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베스테르플라테 전투를 다루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포격을 가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건을 극적으로 재구성하여 관객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전달하고자 했다.

5. 2. 게임

《전함소녀 R》: 게임 내에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독일 전함으로 등장하며, 플레이어가 획득하고 운용할 수 있는 함선이다. 게임 내 성능은 준수한 편이며,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개조를 통해 더욱 강력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캐릭터 디자인은 함선 자체의 특징을 반영하여 디자인되었으며, 독일 해군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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