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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S 비디오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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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BS 비디오 문제는 1989년 TBS가 옴진리교 비판 인터뷰 비디오를 옴진리교 간부에게 보여준 사건이다. 이로 인해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의 진실이 은폐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TBS는 초기 부인했지만 하야카와 메모 공개로 비디오 유출 사실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TBS의 보도 윤리 위반, 내부 조사 실패, 시청자와의 신뢰 훼손을 초래했으며, TBS는 프로그램 개편, 조직 개혁, 심야 방송 자숙 등 조치를 취했다. 또한, TBS의 보도 와이드쇼가 중단되고, TBS가 유족에게 불성실하게 대응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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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S 비디오 문제
개요
명칭TBS 비디오 문제
다른 명칭TBS 비디오 사건
위치서울 종로구 과학기술관 (TBS 치요다 분실)
발생일1989년 10월 26일
시간일본 표준시 기준
설명TBS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3시에 만나요" 취재진이 반 오움진리교 파 변호사 사카모토 쓰쓰미의 인터뷰를 녹화한 후, 오움진리교의 수행을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인터뷰 내용에 대한 이견으로 갈등이 발생하자, 요일 담당 프로듀서 다케치 이사오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비디오를 보여주는 것을 제안했다. 10월 26일 심야, 오움진리교의 하야카와 기요히데 등이 과학기술관을 방문하여 종합 프로듀서 다라 히로노리의 명령에 따라 하야카와 등에게 사카모토의 비디오를 시청하게 하고 기획 자체의 방송을 취소하기로 약속했다. 이 사건이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 발생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보도 윤리 문제이다.
원인
원인TBS가 저널리즘의 철칙인 "정보원 보호" 및 보도 윤리를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
대응
대응프로듀서 다라 히로노리 및 다케치 이사오의 징계 해고
이사자키 요조 사장 등 경영진의 인책 사임
와이드쇼 프로그램에서 일시 철수
심야 방송의 일시 중지
사과
사과1996년 4월 30일 19시부터 19시 20분까지 이사자키 요조 사장의 특별 프로그램 "시청자 여러분께" 방송, 19시 20분부터 22시 54분까지 "비디오 문제 검증 특별 방송 '증언・사카모토 변호사 테이프 문제로부터 6년 반'" (진행: 스기오 히데야) 방송.
5월 20일 특별 프로그램 "시청자 여러분께"에서 당시 스나하라 유키오 사장으로부터 경과 보고와 향후 대책 및 사과 방송 진행.

2. 사건의 전개

1989년 10월 26일, TBS의 프로그램 『3시에 만납시다』는 옴진리교 비판의 선봉에 섰던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인터뷰를 녹화했다. 같은 날, TBS 취재반은 후지산에 있는 옴진리교 도장에서 아사하라 쇼코(마쓰모토 지즈오)의 "수중 쿵바카"[18] 시연을 취재했다. 이 과정에서 옴진리교 측은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인터뷰 영상을 사전에 보여달라고 요구했고, TBS는 이를 수용하여 옴진리교 간부들에게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하야카와 기요히데는 이때의 일을 '''메모''' 해두었다. 결국 TBS 측 스태프는 인터뷰를 방송하지 않는다는 것을 승낙, 약속하고 옴진리교 측 간부는 그 자리를 떠났다.

10월 31일, 하야카와 기요히데, 조유 후미히로, 아오야마 요시노부 3명은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를 찾아갔지만, 사카모토 쓰쓰미가 교단을 고소하겠다는 뜻을 밝혀 협상이 결렬되었다.

11월 4일,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 (당시에는 '실종 사건')이 발생했다.

1995년 9월 5일, 가나가와현 경찰은 TBS에게 수사 협력을 의뢰했다. 9월 중에 도쿄지검이 TBS 관계자로부터 사정 청취를 실시했다. 10월 9일, TBS는 사내 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10월 12일, TBS는 도쿄지검의 요청에 따라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테이프를 임의 제출했다.

10월 19일, 닛폰 TV는 TBS가 방영 전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를 옴진리교 간부에게 보여준 것을 보도했다. 같은 날 TBS는 저녁 뉴스 프로그램인 『JNN 뉴스의 숲』에서 그에 대해 부정한다는 성명을 방송했다.

1996년 3월 11일, TBS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를 보여준 사실은 없었다고 말하며 "사내조사개요"를 발표했다. 3월 12일 하야카와 기요히데 피고 공판에서, TBS 프로듀서 및 하야카와의 진술조서 요지가 공개되었고(''하야카와 메모''),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는 TBS에게 공개질문장을 보냈다. TBS는 회견에서 부인을 되풀이했다. 3월 19일, TBS는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의 공개질문서에 대한 회답서를 제출하며,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를 보여준 일은 없었다고 회답했다. 같은 날 TBS 오가와 상무는 중의원 법무위원회에 참고인으로 소환되어 사내조사개요에 따라 발언했다.

3월 23일, '''하야카와 메모'''의 전모가 밝혀졌다.

3월 25일, TBS 이소자키 히로조 사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를 옴진리교 하야카와 일행에게 보여준 것을 인정했다. 동시에 A의 징계·해고 처분을 발표했다. 3월 28일, TBS 오가와 전 상무는 중의원 법무위원회에 사과했다.

4월 2일4월 3일, TBS 이소자키 히로조 사장 등은 중의원 체신위원회에 참고인으로 소환되었다.

4월 30일, TBS는 사카모토 변호사 인터뷰 테이프 문제에 대해 사내조사개요 등을 발표했다. 19시부터 19시 20분까지 이소자키 히로조 사장의 특별방송 "시청자 여러분에게", 19시 20분부터 22시 50분까지 "비디오 문제검정특번『증언·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테이프 문제로부터 6년 반』"[19]을 방영했다. 우정성[20]에 최종보고서를 제출하고, B의 징계 해고와 이소자키 히로조 사장 등 3명은 사임했다.

5월 1일, 이소자키 히로조 사장이 사임하고, 후임 스나하라 유키오 사장이 취임했다.

5월 20일, TBS는 23시 50분부터 5분간 특별 방송 "시청자 여러분에게"에서 스나하라 유키오 사장이 경과 보고, 이후 대책 및 사과 방송을 했다.

5월 20일부터 5월 24일까지, TBS는 심야방송을 중단했다.

5월 24일, TBS는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에 공개질문장에 대한 회답서를 다시 제출했다. 3월 19일 회답서를 전면 철회하고 사카모토 변호사 인터뷰 비디오를 보여준 것을 인정, 유족과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 등에 사죄했다.

12월 18일, TBS "앞으로의 방송을 생각하는 모임"은 보도 현장에 "개인의 확립"을 요청했다.

2. 1. 1989년: 비디오 유출과 살해 사건 발생

1989년 10월 26일, TBS의 프로그램 『3시에 만나요』는 다음 날 방송 예정이었던 옴진리교 관련 내용을 위해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인터뷰를 녹화했다. 같은 날, 취재반은 후지산에 있는 옴진리교 도장에서 아사하라 쇼코(마쓰모토 지즈오)의 "수중 쿵바카"[18] 시연을 취재했다. 이 과정에서 옴진리교 측은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영상을 사전에 보여달라고 요구했고, TBS는 이를 수용하여 옴진리교 간부들에게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하야카와 키요히데는 이때의 일을 '''메모''' 해두었다.[1]

10월 31일, 옴진리교 간부 3명은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를 찾아갔지만, 사카모토 변호사가 교단을 고소하겠다는 뜻을 밝혀 협상이 결렬되었다.

11월 4일,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

TBS 비디오 문제 관련 사건 경과 (1989년)
날짜사건 내용
10월 26일
10월 31일하야카와 키요히데 등,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 방문. 사카모토 변호사, 교단 고소 의사 밝힘.
11월 4일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 발생.


2. 2. 1995년: 수사 재개와 TBS의 은폐 시도

1995년 9월 5일, 가나가와현 경찰은 TBS에게 사카모토 변호사 인터뷰와 관련하여 옴진리교와 주고받은 내용에 대한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1] 9월 중에는 도쿄지검이 TBS 관계자들(A, B, 그리고 '수중 초능력'을 함께 취재한 보도국 사회부 기자 포함)로부터 사정을 청취했다.[1]

10월 9일, TBS는 사내 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1] 10월 12일에는 도쿄지검의 요청에 따라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 테이프를 임의 제출했다.[1]

10월 19일, 닛폰 TV는 TBS가 방영 전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를 옴진리교 간부에게 보여주었다고 보도했다.[1] 같은 날 TBS는 저녁 뉴스 프로그램 『JNN 뉴스의 숲』에서 이를 부정하는 성명을 방송했다.[4] 그러나 니혼 TV는 TBS의 부정 성명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보도 자세를 바꾸지 않았고, 하야카와의 진술을 계속 보도했다.[1]

1996년 3월 11일, TBS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를 보여준 사실이 없었다는 내용의 "사내조사개요"를 발표했다. 3월 12일, 하야카와 피고 공판에서 TBS 프로듀서 및 하야카와의 진술 조서 요지가 공개되었고,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는 TBS에 공개질문장을 보냈다. TBS는 회견에서 부인을 반복했다. 3월 19일, TBS는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의 공개질문서에 대한 회답서를 제출하며,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를 보여준 사실이 없다고 답변했다. 같은 날 TBS의 오가와 상무는 중의원 법무위원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하여 사내조사개요에 따라 발언했다.

3월 23일, '''하야카와 메모'''의 전모가 밝혀졌다.

2. 3. 1996년: 진실 폭로와 TBS의 사과

1996년(헤이세이 8년) 3월 23일, '하야카와 메모'의 전체 내용이 공개되면서 TBS가 옴진리교 측에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18] 이 메모의 내용은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내용과 일치하여 TBS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3월 25일, TBS의 이소자키 히로조 사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옴진리교 간부인 하야카와 등에게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를 보여준 사실을 인정했다. 이와 함께 관련자 징계 해고 처분을 발표했다.[19]

3월 28일, TBS의 오가와 전 상무는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이전에 했던 발언을 정정하고 사과했다.

4월 2일4월 3일, 이소자키 사장 등은 중의원 체신위원회에 참고인으로 소환되었다.

4월 30일, TBS는 사내 조사 개요 등을 발표하고, 특별 방송을 통해 사건을 검증하고 시청자에게 사과했다. 이소자키 사장을 포함한 3명의 임원이 사임하고, 우정성(현 총무성)에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다.[20]

5월 1일, 이소자키 사장이 사임하고 스나하라 유키오가 후임 사장이 되었다.

5월 20일, TBS는 특별 방송을 통해 다시 한번 사과하고, 5월 24일까지 심야 방송을 중단하는 자숙 조치를 취했다.[5]

5월 24일, TBS는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에 재답변서를 제출하여 이전의 답변을 철회하고, 사카모토 변호사 인터뷰 비디오를 옴진리교 간부에게 보여준 것을 인정하며 유족과 법률 사무소에 사죄했다.

12월 18일, TBS는 '방송의 미래를 생각하는 모임'을 통해 보도 현장에서 '개인의 확립'을 요구하는 제언을 발표했다.

3. 국회 참고인 초치

1996년 3월 19일, TBS 오가와(大川) 상무는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TBS의 자체 조사 결과, 옴진리교 측에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3월 28일, 오가와 상무는 이전 발언을 정정하며 TBS 사원이 옴진리교 간부에게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인터뷰 테이프를 보여준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1][2]

4월 2일4월 3일, 이소자키 요조 사장 등이 중의원 체신위원회에 참고인으로 소환되었다. 이 모습은 4월 3일 니혼TV와 TBS에서 중계되었다.

4월 30일, TBS는 사내 조사 개요 등을 발표하고, 이소자키 사장의 특별 프로그램과 사내 검증 프로그램 "비디오 문제 검증 특별 방송 '증언 · 사카모토 변호사 테이프 문제로부터 6년 반'"을 방영했다. 우정성에 최종 보고서를 제출하고 관련 임원들의 사임을 발표했다.

5월 20일, 스나하라 사장은 특별 프로그램 "시청자 여러분께"에서 경과 보고, 향후 대책 및 사죄 방송을 했다. 5월 24일까지 심야 방송을 중단하고,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에 재답변서를 제출하여 사카모토 변호사 인터뷰 비디오를 옴진리교 간부에게 보여준 것을 인정하고 사죄했다.

5월 30일, 중의원 체신위원회에서 스나하라 사장은 "슈퍼 와이드" 종료와 정보 계열 프로그램 재검토를 언급했다.[6] 5월 31일, 문제의 발단이 된 프로그램들과 "모닝 Eye" 방송을 종료하고, 사회 정보국을 폐지하여 와이드 쇼 프로그램 제작에서 철수했다.

12월 18일, TBS "방송의 미래를 생각하는 회"는 보도 현장에서 "개인의 확립"을 요구하는 제언을 했다.

3. 1. 1996년 3월 19일: 오가와 상무의 부인

1996년 3월 19일, 오가와(大川) 상무는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TBS 사내 조사 결과를 보고하면서, 조사가 엄정하고 공정하게 처리되었으며 결과는 숨김없이 발표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옴진리교 관계자 3명에게 대응했던 사원 2명과 당일 건물 내에 있던 외부 스태프 등에게 상황을 청취한 결과, TBS는 옴진리교 측에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또한 검찰청 수사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지만, 사내 조사에서는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줬다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1]

하지만 1996년 3월 28일, 오가와 상무는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이전 발언을 정정하며 사과했다. 그는 3월 19일 보고한 사내 조사 결과와 달리, TBS 사원이 옴진리교 간부 3명에게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인터뷰 테이프를 보여준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오가와 상무는 이전에 보고한 내용이 착오였다고 인정하고, 정정하면서 사죄했다.[2]

3. 2. 1996년 3월 28일: 오가와 전 상무의 사과

1996년(헤이세이 8년) 3월 23일 "하야카와 메모"의 전모'''(원본의 존재)'''가 밝혀져, 그 내용이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내용과 일치하면서 TBS가 인터뷰 비디오를 보여준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3월 25일 TBS 이소자키 요조 사장은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를 옴진리교 하야카와에게 보여준 것'''을 인정하는 긴급 기자 회견을 열었다. 3월 28일 TBS 전무였던 오가와는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3월 19일 발언과는 다른 내용을 말하며 사죄했다.

4. TBS에 대한 비판과 과열

1989년 10월 26일 TBS 비디오 문제가 발생했고, 같은 달 31일 옴진리교 간부가 사카모토 변호사를 방문했으며, 11월 4일부터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가 행방불명되었다. 하지만 TBS는 공개 수사가 시작된 11월 15일에도 이 사건을 경찰에 통보하지 않았다.

TBS가 비디오를 옴진리교 간부에게 보여준 탓에 사카모토 변호사가 살해되었다는 비난이 있었고, 다른 언론사와 여론도 이를 인정하며 TBS를 비판하고 책임을 추궁했다. TBS는 옴진리교 간부 공판에서 관련 진술과 메모가 공개된 후에도 5개월 이상 '내부 조사'를 내세워 의혹을 부인했다. 이 과정에서 TBS가 사실을 알고도 숨긴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부실한 대응은 TBS에 대한 비판을 더욱 키웠다.

1996년 3월 25일, TBS는 결국 비디오 테이프 공개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구마모토 데쓰야는 「뉴스 23」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96년 3월 29일 '다사쟁론'에서는 시청자들이 TBS에 보낸 3천 건의 의견 중 "왜 비디오를 보여줬는가", "사카모토 변호사 가족 실종 당시 왜 경찰과 요코하마 변호사 사무소에 알리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 가장 많았다고 소개했다.

TBS의 대응과 사내 조사에 대해서는 "'본사의 부실한 조사'가 아니라 '본사의 거짓말'이라고 해야 한다", "칫소나 미도리 십자, 후생성, 재무성 등 관료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TBS의 책임과 신뢰 회복을 위해 "최소 일주일 방송 중단", "국민이 알 수 있는 조사 실시 및 사장, 임원 총사퇴" 등의 요구도 있었다.

한편, "TBS가 비디오를 보여줘서 사카모토가 살해되었다"는 비난에는 "사카모토는 이전에 라디오에서 아사하라 쇼코와 토론했고, 'TBS 테이프가 살해 동기'라는 보도는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반론과 "TBS 비난에 몰두해 문제의 본질을 놓친다"는 의견도 있었다. 또한, 취재 테이프를 보여주는 행위는 당시 여러 방송국에서 있었고, 비디오 공개 시점에 옴진리교의 살해 가능성을 예상하기 어려웠기에 '''"우연히 TBS에서 일어난 일일 뿐, 어느 방송국에서나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었다.

4. 1. 보도 윤리 위반

TBS 측 스태프가 옴진리교 간부에게 비디오를 보여준 것은 정보원의 비밀 유지라는 저널리즘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였다.[1] 이는 보도 윤리를 크게 벗어나는 행위로 비판받았다. TBS도 검증 프로그램에서 "정보원의 비밀 유지"에 대해 언급하며, 취재 협력자에게 무단으로 대립 상대에게 테이프를 보여준 행위는 취재 원칙을 벗어났으며, 프로그램 제작 윤리에 반하는 행위였다고 인정했다.

더욱이 TBS가 비디오를 옴진리교 간부에게 보여준 탓에 사카모토 변호사가 살해되었다는 비난이 있었으며, TBS 외의 보도 기관과 여론도 이를 인정하고 TBS를 비판하며 책임을 추궁했다. 심지어 TBS는 옴진리교 간부 등의 공판에서 당사자의 진술과 메모가 드러난 것을 인지하고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5개월 이상 "내부 조사"를 근거로 의혹을 계속 부인했다. 이 기간 동안 조사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TBS가 사실을 파악하고도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이러한 허술한 대응으로 인한 위기 관리 실패도 TBS 비판을 더욱 가속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당시 TBS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유족에게도 불성실한 대응을 보였다. 다음은 사카모토 변호사의 아내인 사카모토 도코의 아버지 오야마 토모유키의 저서 내용 중 일부이다.

4. 2. 내부 조사의 파탄

1995년 10월 19일 닛폰 TV는 하야카와 피고가 "(사건 전에) TBS에서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를 보고, 그 내용을 아사하라 대표에게 보고했다"고 진술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1] 이로 인해 TBS는 초기 자체 조사에서 비디오 유출 사실을 부인하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TBS는 즉각 "사실무근"이라며 닛폰 TV에 항의했지만, 닛폰 TV는 보도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1996년 3월 11일, TBS는 사내 조사 개요를 발표하며 비디오를 보여준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3월 12일 하야카와 피고의 공판에서 '하야카와 메모'가 공개되면서 TBS의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TBS는 3월 19일 중의원법무위원회에 참고인으로 소환된 TBS 상무는 "사내 조사는 엄정하고 공정하게 진행되었다"고 주장하며, "테이프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확신한다"고 증언했다.[4]

당초 조사위원회는 보도국 중심으로 설치되었으나, 닛폰 TV의 보도 이후 경영 간부 중심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조사는 해당 프로듀서 등의 진술만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론'이었고, 일부 스태프는 TBS 내부 조사와 검찰 조사에서 다른 증언을 했음에도 TBS 조사위원회는 이를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TBS의 불투명한 조사 과정은 국민의 불신을 더욱 키웠고, 경영진 중심의 부실한 조사는 진실 은폐 의혹을 증폭시켰다.

4. 3. 매스미디어와 시청자 간의 신뢰 관계 훼손

지쿠시 데쓰야는 TBS의 간판 프로그램 《NEWS 23》에서 "매스미디어가 시청자와의 신뢰 관계 위에 존재하는데, 이를 위반했다"며 '''"TBS는 오늘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오후 저는 이 프로그램을 마지막으로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발언했다.[21][22] 이는 TBS가 시청자와의 신뢰 관계를 훼손했음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으로, 매스미디어와 시청자 간의 신뢰가 근본적으로 무너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TBS는 처음에 옴진리교 간부에게 비디오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이후 입장을 번복하며 시청자와 국민의 신뢰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1] 1996년 4월 30일, TBS 특별 프로그램 "시청자 여러분께"에서 사장이 직접 사과하며 이러한 사실을 인정했다.

4. 4. 잇따른 파문과 과도한 비판

TBS에 대한 비판 여론은 옴진리교 비판에서 TBS 비판으로 옮겨가면서 과열 양상을 보였다. 일부에서는 TBS 비판에 매몰되어 옴진리교 사건 자체의 진상 규명이 소홀해졌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23] 이는 언론 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이다. 당시 텔레비전 제작자였던 모리 타츠야는 이 사건으로 인해 옴진리교 보도가 위축되었다고 보고 있다.[13]

또한, "TBS가 비디오를 옴진리교 간부에게 보여줘서 사카모토가 살해 당했다"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사카모토는 그 이전에 라디오에 출연하여 아사하라와 전화 토론을 했고 'TBS가 보여준 테이프 내용이 살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보도는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반론과 "TBS 비난에 몰두함으로써 (보도 윤리로서의)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는 의견도 있었다.[23]

4. 5. 피해자 유족에 대한 불성실한 대응

TBS는 피해자 유족에게도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아내 미야코(쓰쓰미의 부인)의 아버지인 오야마 도모유키(大山友之)의 수기 《미야코 들립니까》(2000년, 신조사)에 따르면, TBS는 유족의 진상 규명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등 불성실한 모습을 보였다.[1] 이는 TBS의 윤리 의식 부재를 드러내는 또 다른 사례로 비판받았다.[1]

5. 그 후의 TBS

1995년 9월 5일 가나가와현 경찰이 TBS에게 수사 협력을 의뢰하면서 TBS 비디오 문제가 불거졌다. 1996년 3월 25일, TBS 사장 이소자키 히로조는 옴진리교 간부에게 비디오를 보여준 사실을 인정하고 A의 징계 해고를 발표했다.[19] 이후 TBS는 사내 조사, 특별 방송, 사장 인책 사임 등 후속 조치를 취했다.[19]

1996년 5월 1일 이소자키 사장이 물러나고 스나하라 유키오가 후임 사장이 되었다.[19] TBS는 특별 방송을 통해 경과를 알리고 사과 방송을 했다.[19]

1996년 12월 18일, TBS의 '앞으로의 방송을 생각하는 모임'은 보도 현장에서 '개의 확립'(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을 요청했다.[19]

TBS는 '보도의 TBS'로 불렸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프로그램 편성 개혁이 늦어지면서 닛폰 TV, 후지 TV에 시청률 경쟁에서 밀렸다.[19] 비디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발생했고, TBS는 1996년 6월 이후 편성 및 조직 개혁을 단행했다.

이 사건은 와이드쇼 제작 현장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TBS는 슈퍼 와이드를 5월 31일, 모닝 아이를 9월 27일 종영했다.[14] 1996년 5월 20일부터 24일까지는 심야 방송을 중단하고, 구시키 테츠야 뉴스23도 단축 방송했다.

아사하라 재판 판결문에는 이 사건이 간략하게 언급되었지만, 그 영향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15]

TBS는 비디오 문제 이후 2015년 봄 비빗토를 시작하기 전까지 '와이드 쇼'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16]

5. 1. 프로그램 대폭 개편

TBS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사내 인원 구성 고령화 등으로 프로그램 편성 개혁이 늦어지면서 닛폰 TV후지 TV에 시청률 경쟁에서 밀려났다. 특히 평일 정오 시간대는 '죽음의 틀'이라고 불릴 정도로 시청률 부진을 겪었다. 밤 10시 뉴스 프로그램도 TV 아사히의 '뉴스 스테이션'에 밀려 2년 만에 폐지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9]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옴진리교 비디오 문제가 발생하면서, TBS는 1996년 6월 대대적인 프로그램 개편을 단행했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던 와이드쇼 '모닝Eye', '슈퍼 와이드' 등이 폐지되고, 새로운 정보 프로그램들이 신설되었다. 이는 편성 및 조직 개혁의 일환이었다.[19]

5. 2. 보도 와이드쇼 중단

TBS는 1996년 옴진리교 사건과 관련하여 발생한 비디오 문제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각 네트워크 방송국에 미친 큰 타격을 고려하여, 보도 와이드쇼 프로그램 제작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24] 이는 언론 윤리 문제에 대한 자성의 의미로 해석되었다.

TBS는 이 문제가 와이드쇼 제작 현장에서 발생했음을 감안하여, 1996년 5월 31일 와이드쇼 《슈퍼 와이드》를 종영하고, 9월 27일에는 《모닝 아이》를 종영했다.[14] 또한, 1996년 5월 20일부터 5월 24일까지는 예정되어 있던 오전 0시 이후의 심야 방송 프로그램들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기간 동안 《구시키 테츠야 뉴스23》도 23시 50분까지 (5월 24일 금요일만 0시 20분까지)의 제1부만 방송하고 중단되었다. 제2부를 네트워크 방송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다큐멘터리 DD》 등, TBS에서 송출하는 뒷방송 프로그램을 방송하거나, 임시로 지연 방송 프로그램이나 재방송, 자사 제작 프로그램 등의 자체 편성을 편성하는 등의 대응을 했다.

5. 3. 심야 방송 자숙

TBS는 옴진리교 비디오 문제에 대한 자숙의 의미로 1996년 5월 20일부터 5월 24일까지 심야 방송을 중단했다.[14] 이 기간 동안 구시키 테츠야 NEWS23은 제1부만 방송되었고, 제2부를 네트워크 방송하는 지역에서는 다른 프로그램이 대체 편성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오전 0시 이후의 심야 방송 프로그램들도 중단되었다. 이는 TBS 비디오 문제로 인해 발생한 불상사에 대한 자숙 조치였다.

5. 4. 기구 개혁

TBS는 비디오 문제와 관련하여 '보더리스' 조직 문화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19] 사회정보국을 폐지하고, 뉴스 프로그램은 보도국으로, 그 외 프로그램은 제작국으로 이관했다. 이는 훗날 TBS가 제작, 스포츠, 라디오 부문 등을 분사하는 원인이 되었다.[19] 2000년에는 TBS 엔터테인먼트, TBS 스포츠, TBS 라디오&커뮤니케이션즈가, 2001년에는 TBS 라이브가 분사되었다. 2004년에는 분사되었던 회사들이 다시 도쿄 방송으로 통합되었다. 2009년, TBS는 회사명을 '주식회사 도쿄 방송(약칭 : TBS 홀딩스, TBSHD)'로 변경하고, 방송 면허를 포함한 텔레비전 방송 사업 등을 분할하여 순수 지주회사가 되었다.

TBS의 이러한 조직 개편은 다른 방송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TV 도쿄를 제외한 도쿄의 다른 방송국들도 부서 정리 및 재편을 시작하여, 닛폰 TV 방송망(사회정보국)과 후지 TV(편성국 사회정보부)는 단계적으로 폐지되거나 일반 프로그램 제작 부문에 흡수되었다. TV 아사히(정보국)는 개편 없이 유지되었으나, 2007년 보도국으로 흡수되었다.

5. 5. 노선 변경과 반복되는 개편

TBS는 1996년 이후 시청률 회복을 위해 여러 시도를 했지만, 잦은 프로그램 개편과 리뉴얼은 오히려 혼란을 야기했다. 특히 '저스트'와 '베스트 타임'은 이전의 '보도 와이드쇼'가 사실상 부활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25]

2005년에는 "TBS 평일 와이드 대개편"을 실시하여 이브닝5, 미노몬타의 아사즈밧!, 오늘발 플러스!(2006년 9월 종영)를 시작했다. 2006년 10월에는 핑퐁!, 2시 차오!(모두 2009년 3월 종영)를 시작했지만, 모두 정보 프로그램으로 분류되었다.[26] 그러나 아사즈밧!의 TBS 후지가(家) 날조 보도 문제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2시 차오!는 제작비 문제로 2007년 9월에 중단되었다. 이후 간사이 로컬에서 전국 넷으로 올라온 정보 라이브 미야네가게(요미우리 TV)가 간토 지방에서도 방송되면서 시청률 경쟁에서 밀려 2009년 3월 종영했다.

2009년에는 대대적인 개편을 통해 THE NEWS, 총력보도! THE NEWS, 히루오비!, 사카스상 등을 시작했지만, 시청률은 오히려 더 하락했다. 심지어 TV 도쿄에게도 뒤지는 날이 생기면서, '역사를 배우지 못한다'는 비판까지 제기되었다.[28] 결국 히루오비!와 총력보도! THE NEWS는 각각 축소되면서, 1996년 노선 변경 직후 수준으로 후퇴했다.

참조

[1] 뉴스 視聴者の皆様へ TBS 1996-04-30
[2] 문서 비디오 문제 검증 특별 방송 ‘증언・사카모토 변호사 테이프 문제로부터 6년 반’에서 방영된 하야카와 진술 조서 내용
[3] 문서 사카모토 변호사 테이프 문제 및 관련 조사서 株式会社東京放送 1996-04-30
[4] 뉴스 東奥日報 1996-05-01
[5] 간행물 インフォメーションファイル 電通 1996-07-25
[6] 회의록 衆議院 逓信委員会 https://kokkai.ndl.g[...] 1996-05-30
[7] 서적 뉴스 캐스터 集英社 2002-06-14
[8] 웹사이트 News23 多事争論 3月25日(月) 「坂本弁護士事件とTBSの問題」 http://www.tbs.co.jp[...] TBSテレビ 1996-03-25
[9] 서적 田原総一朗の闘うテレビ論 文藝春秋 1997-03-01
[10] 서적 太郎が飛んだ 国際ニュースの現場 東京新聞出版局 1997-05-01
[11] 서적 TBS事件とジャーナリズム 岩波書店 1996-07-22
[12] 서적 TBSザ・検証 総力取材 局にかわって私がやる!! 鹿砦社 1996-06-01
[13] 웹사이트 진실과 거짓이 양극화되는 위험성―오움 사건으로 격변한 일본 사회 https://webronza.asa[...] 朝日新聞社
[14] 회의록 제136회 국회 택배위원회 제9호 https://kokkai.ndl.g[...] 1996-05-30
[15] 판결문 平成7合(わ)141 殺人等 https://www.courts.g[...] 2004-02-27
[16] 뉴스 TBS가 와이드쇼를 부활시킨 이유 https://www.daily.co[...] 2015-03-10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웹인용 뉴스 23시 관련 내용(TBS 홈페이지) http://www.tbs.co.jp[...] 2007-11-25
[23] 문서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27] 웹인용 TBSリポーターを書類送検 http://www.nhk.or.jp[...] NHK 시가 현(滋賀) 2009-10-21
[28] 웹인용 TBSの研究 (4)低迷続く視聴率 : M&Aと企業防衛 : 特集 : マネー・経済 : YOMIURI ONLINE(読売新聞 http://www.yomiuri.c[...] 2007-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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