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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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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마쿠라 문고는 태평양 전쟁 중 문학가들의 생활난을 해결하고 전후 일본의 인심을 밝게 하기 위해 1945년 5월 가마쿠라 시에 설립된 책 대여점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출판사로 전환하여 문예지 《인간》을 창간하고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게재하는 등 전후 일본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여성 잡지 《부인문고》를 발행하고 여류 문학자회를 결성하여 여성 문학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1950년에 도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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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문고
개요
이름가마쿠라 문고 (鎌倉文庫)
종류출판사, 서점, 잡지사 (과거)
설립1922년
해산1949년
설립자오사라기 지로
위치가나가와현가마쿠라시
상세 정보
역사적 배경다이쇼 시대 후기
신사상 운동의 영향
주요 사업서적 출판 및 판매
잡지 '가마쿠라' 발행
강연회 및 문화 행사 개최
관련 인물아라하타 간손
가와바타 야스나리
고바야시 히데오
시가 나오야
무로오 사isei
나카야 우키치로
야마모토 유조
특징
진보적 성향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자유주의적 분위기 반영
문예 잡지 '가마쿠라'신진 작가 발굴 및 다양한 문학 사조 소개
사회 비판적 시각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 논평 게재
대중적 인기저렴한 가격과 다양한 장르의 책 출판
해산 및 영향
해산 이유쇼와 시대 전시 체제 하의 언론 통제 및 경영 악화
문학사적 의의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자유로운 문학 정신을 대표
현대적 재평가진보적 출판사로서의 가치 재조명
추가 정보
참고 문헌가마쿠라 시 역사
관련 단체가마쿠라 문학관

2. 전쟁 중의 책 대여점

태평양 전쟁이 일본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출판계 사정이 악화되면서 문학계 인사들도 생활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해소하고 전쟁으로 황폐화된 일본 국내의 인심을 밝게 할 목적으로 1945년 5월 1일, 가나가와 현 가마쿠라 시에 거주하던 문인들이 각자 장서를 내놓아 수천 권을 모아 가마쿠라 하치만구의 도리이 근처에 다이혼야(貸本屋) 즉 책 대여점을 열었다. 발안자에 구메 마사오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있었고, 협력자로 고바야시 히데오, 다카미 준, 구메 마사오, 사토미 톤, 나카야마 요시히데 등이 있었다. 요코야마 류이치가 독서권 도안을 맡았고, 고지마 마사지로, 오부세 지로, 나가이 다쓰오, 하야시 후사오 등이 장서를 냈다. 설명 및 안내역으로 가와바타, 구메, 나카야마, 다카미나 그 부인들이 교대로 가게에 나왔다. 활자에 굶주려 있던 시대상을 배경으로 많은 독자들이 모여 들었고, 공습일 이외는 연일 개점되어 경영은 성공을 거뒀다.

2. 1. 가마쿠라 문고의 설립

태평양 전쟁이 일본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출판계 사정이 악화되면서 문학계 인사들도 생활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해소하고 전쟁으로 황폐화된 일본 국내의 인심을 밝게 할 목적으로 1945년 5월 1일, 가나가와 현 가마쿠라 시에 거주하던 문인들이 각자 장서를 내놓아 수천 권을 모아 가마쿠라 하치만구의 도리이 근처에 다이혼야(貸本屋) 즉 책 대여점을 열었다. 발안자에 구메 마사오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있었고, 협력자로 고바야시 히데오, 다카미 준, 구메 마사오, 사토미 톤, 나카야마 요시히데 등이 있었다. 요코야마 류이치가 독서권 도안을 맡았고, 고지마 마사지로, 오부세 지로, 나가이 다쓰오, 하야시 후사오 등이 장서를 냈다. 설명 및 안내역으로 가와바타, 구메, 나카야마, 다카미나 그 부인들이 교대로 가게에 나왔다. 활자에 굶주려 있던 시대상을 배경으로 많은 독자들이 모여 들었고, 공습일 이외는 연일 개점되어 경영은 성공을 거뒀다. 이들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문인 또는 진보 진영의 문인들로, 민족주의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3. 전후 출판 사업

1945년 9월, 다이토 제지 사장 하시모토 사쿠오의 제안으로 가마쿠라 문고는 출판사로 새롭게 발족하였다.[1] 초기에는 마루 빌딩에 사무실을 두었으며,[1] 이후 니혼바시 시로키야 백화점,[1] 가야바 정 등으로 이전하였다.[1]

1945년 12월 가와바타와 구메가 문예지 《인간》을 창간하였고, 편집장으로 개조사(改造社) 시대 《문예》(文藝)의 편집장이었던 기무라 도쿠조(木村徳三)가 취임하였다.[1] 매출은 호조를 보였으며, 1946년 6월에는 가와바타의 지지로 당시 무명이었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단편 「담배」(煙草)를 게재하여 반향을 일으켰다.[1] 《인간》 외에도 《현대문학선》(現代文学選), 《대중문학선》(大衆文学選)을 간행하였다.[1]

1946년 10월에는 일반 사회인을 위한 잡지 《사회》 및 유럽 문학을 소개하는 잡지 《유로파》를 창간하였다.[1] 1949년에는 구메의 발안으로 대중 문예지 《문예왕래》를 창간하고, 편집장으로 이와야 다이시(巖谷大四)가 취임하였다.[1]

1947년, 다이토 제지가 종이 부족을 이유로 자본을 철수하고, 종이 통제가 시작되면서 경영난이 심화되었다.[1] 1949년에는 종이 사정이 좋아지자 구메의 발안으로 대중 문예지 《문예왕래》를 창간하고, 편집장으로 이와야 다이시가 취임하여 경영 회복을 노렸다.[1] 그러나 경쟁사의 증가와 주요 전통 출판사들의 부흥으로 인해 경영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1]

다이토 제지 출신의 오카자와 전무가 사장으로 취임하고 구메가 회장, 가와바타가 부사장이 되었으나, 《사회》와 《여성 문고》의 부진을 이유로 정리해고 방안에 반대하여 파업 소동이 벌어지는 등, 오카자와의 독단 전행과 조합 문제 분규 등이 겹쳐 결국 1950년에 도산하였다.[1] 유일하게 판매 호조를 보였던 《인간》지는 메구로 서점에 250만 엔에 매각되었고,[1] 도산한 가마쿠라 문고의 재고는 조키본으로 시중에 유통되었다[1]

3. 1. 문예지 '인간' 창간

1945년 12월,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구메 마사오의 주도로 문예지 《인간》을 창간하였다.[1] 편집장은 개조사(改造社)에서 《문예》(文藝) 편집장을 맡았던 기무라 도쿠조(木村徳三)였다.[1] 《인간》은 매출 호조를 보이며 '문사의 출판 상법'으로 주목받았다.[1]

1946년 6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지지로 당시 무명이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 「담배」(煙草)를 게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1] 《인간》은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문예지 중 하나로, 진보적 성향을 띠며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상을 옹호하는 글들을 주로 게재했다.

3. 2. 다양한 출판 활동

1945년 12월 가와바타와 구메가 문예지 《인간》을 창간하였고, 편집장으로 개조사(改造社) 시대 《문예》(文藝)의 편집장이었던 기무라 도쿠조(木村徳三)가 취임하였다.[1] 매출은 호조를 보였으며, 1946년 6월에는 가와바타의 지지로 당시 무명이었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단편 「담배」(煙草)를 게재하여 반향을 일으켰다.[1] 《인간》 외에도 《현대문학선》(現代文学選), 《대중문학선》(大衆文学選)을 간행하였다.[1]

1946년 10월에는 일반 사회인을 위한 잡지 《사회》 및 유럽 문학을 소개하는 잡지 《유로파》를 창간하였다.[1] 1949년에는 구메의 발안으로 대중 문예지 《문예왕래》를 창간하고, 편집장으로 이와야 다이시(巖谷大四)가 취임하였다.[1]

3. 3. 경영난과 도산

1947년, 다이토 제지가 종이 부족을 이유로 자본을 철수하고, 종이 통제가 시작되면서 경영난이 심화되었다.[1] 1949년에는 종이 사정이 좋아지자 구메 마사오의 발안으로 대중 문예지 《문예왕래》를 창간하고, 편집장으로 이와야 다이시가 취임하여 경영 회복을 노렸다.[1] 그러나 경쟁사의 증가와 주요 전통 출판사들의 부흥으로 인해 경영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1]

다이토 제지 출신의 오카자와 전무가 사장으로 취임하고 구메가 회장, 가와바타가 부사장이 되었으나, 《사회》와 《여성 문고》의 부진을 이유로 정리해고 방안에 반대하여 파업 소동이 벌어지는 등, 오카자와의 독단 전행과 조합 문제 분규 등이 겹쳐 결국 1950년에 도산하였다.[1] 유일하게 판매 호조를 보였던 《인간》지는 메구로 서점에 250만 엔에 매각되었고,[1] 도산한 가마쿠라 문고의 재고는 조키본으로 시중에 유통되었다[1]

4. 부인문고

1945년 12월, 가마쿠라 문고요시야 노부코, 마스기 시즈에, 나카자토 쓰네코, 무라오카 하나코 등이 상담하여 여성 잡지 《부인문고》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1946년 5월에 창간되었으며, 창간 당시 편집국장은 요시야 노부코가 맡았고 편집장 실무는 호조 마코토가 맡았으며, 요코하마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1945년 8월 출소한 와카쓰키 시게루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부탁을 받고 편집 차장을 지냈다. 창간호는 132페이지에 가격은 4엔 50전이었고, 표지는 오카 시카노스케가 그렸다. 권두에는 요코미쓰 리이치의 '봄날',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나카 고타로, 나카노 요시오, 가토 시즈에의 좌담회 '새로운 여성의 재건에 부쳐', 기쿠치 간의 '상애기' 등을 게재하였다.

'상애기'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을 묘사한 부분의 일부가 GHQ의 검열로 삭제되기도 하였다. 다음 6월호에서도 가와바타 야스나리, 세리자와 고지로, 곤 히데미, 가와모리 요시조의 좌담회 '결혼과 도덕에 대해'에서 일본 진주군 병사의 소행에 대한 비판 부분이 삭제되었다. 7월호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생명의 나무'에서 가미카제 특공대원에 대해 언급한 부분과, 시마키 겐사쿠의 소설 '선곡일기초'에서 프랑스를 비판한 부분, 히라바야시 타이코의 '인바 군에서'에서 외국 담배를 피우는 묘사 등이 삭제되었다. 처음에는 2 ~ 3만 부가 발행되었다.

3호에서 편집인이 와카츠키, 표지를 나카하라 준이치가 맡게 되었다. 1948년 9 · 10 월 합병호에서는 다자이 오사무의 죽음을 둘러싼 특집 '사랑과 죽음의 문제'를 실었다. 이 무렵 5만 부를 찍어냈는데, 이때가 《부인문고》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1949년 7월호에서 5개월의 공백을 두고 최종호를 발행하고 《부인문고》는 파산하였다.

가마쿠라 문고의 주선으로 1946년 7월에는 여류 문학자회가 발족하고, 하야시 후미코, 우노 지요, 요시야 노부코, 사타 이나코, 마스기 시즈에 등이 참가하였다. 《부인문고》는 여류 문학자상을 주최하였는데, 1947년 제1회 수상자는 히라바야시 타이코였다.

와카쓰키는 1950년 12월에 히마와리샤에서 《부인문고》를 복간시키지만, 2호 만에 종료했다.

4. 1. 창간과 활동

1945년 12월, 요시야 노부코, 마스기 시즈에, 나카자토 쓰네코, 무라오카 하나코 등이 여성 잡지 《가마쿠라 문고》 발간을 협의하였고, 1946년 5월에 '부인문고'라는 이름으로 정식 창간되었다. 편집국장은 요시야 노부코가 맡았고, 호죠 마코토가 편집 실무를, 와카쓰키 시게루가 편집 차장을 맡았다. 창간호는 132페이지에 가격은 4엔 50전이었으며, 표지는 오카 시카노스케가 그렸다.

창간호에는 요코미쓰 리이치의 '봄날', 기쿠치 간의 '상애기' 등이 게재되었다. '상애기'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검열로 인해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 묘사 일부가 삭제되었다. 6월호에서도 일본 진주군 병사의 소행에 대한 비판 부분이 삭제되었고, 7월호에서는 가미카제 특별 공격대 관련 언급, 프랑스 비판, 외국 담배 묘사 등이 삭제되었다.

《부인문고》는 여성 독자들을 위한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여성 문학가들의 작품 발표 장을 마련하였다. 특히 진보 진영 여성 문학가들의 작품을 적극 게재하고, 여성의 권익 신장과 사회 참여를 독려하는 내용을 담았다. 창간 초기에는 2~3만 부가 발행되었으며, 1948년에는 5만 부를 발행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1946년 7월, 가마쿠라 문고의 주선으로 하야시 후미코, 우노 지요, 요시야 노부코 등이 참여하는 여류 문학자 협회가 발족되었다. 《부인문고》는 여류 문학자상을 주최하여 1947년 제1회 수상자로 히라바야시 타이코를 선정했다.

4. 2. 여류 문학자회 결성과 여류 문학자상 제정

1946년 7월, 가마쿠라 문고의 주선으로 여류 문학자회(女流文学者会)가 결성되었다.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우노 지요(宇野千代), 요시야 노부코(吉屋信子), 사타 이나코(佐多稲子), 마스기 시즈에(真杉静枝) 등 당대 대표적인 여성 문학가들이 참여하였다. 가마쿠라 문고에서 발행한 여성 잡지 《부인문고》는 여류 문학자상을 제정하여 여성 문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1947년 제1회 여류 문학자상 수상자는 히라바야시 다이코(平林たい子)였다.

4. 3. 폐간과 복간 시도

《부인문고》는 1949년 7월호를 끝으로 5개월의 공백을 두고 최종호를 발행한 뒤 파산하였다. 이 무렵 5만 부를 발행하던 때가 《부인문고》의 전성기였다.

1950년 12월, 와카쓰키 시게루(若槻繁)는 히마와리샤에서 《부인문고》 복간을 시도했지만, 2호 만에 종료되었다.

5. 가마쿠라 문고의 의의와 영향

5. 1. 전후 일본 문학의 발전에 끼친 영향

5. 2. 여성 문학의 발전에 끼친 영향

5. 3. 사회적, 문화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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