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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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몬(家紋)은 일본의 가문(家)을 나타내는 문장으로, 헤이안 시대부터 귀족과 무사 계급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개인과 가문을 식별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의복, 깃발, 장비 등 다양한 곳에 활용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퍼져, 상인, 장인, 가부키 배우 등 다양한 계층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가몬은 동물, 식물, 자연, 건물, 도구 등 다양한 모티프를 가지며, 각 모티프는 고유한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에는 기모노, 전통 공예품, 기업 로고 등에 사용되며, 가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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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몬 - 미츠바아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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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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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개요 | |
![]() | |
유형 | 문장 |
사용 국가 | 일본 |
관련 항목 | 깃발 문장 목록 일본의 기 목록 |
역사적 배경 | |
기원 |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문양 사용 |
발전 | 가마쿠라 시대 무사 계급의 상징으로 발전 |
에도 시대 | 문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확립 다양한 디자인과 규칙 등장 |
메이지 시대 이후 | 법적 규제 완화 일반인 사용 증가 |
문장의 종류 | |
형태 | 식물 (오동, 벚꽃, 국화, 모란 등) 동물 (용, 봉황, 새, 잉어 등) 자연 (해, 달, 별, 물결, 산 등) 인공물 (화살, 칼, 수레바퀴, 부채 등) 기하학적 무늬 |
가몬 | 각 가문 고유의 문장 상징적인 의미 부여 |
조몬 | 가몬의 기본 형태 다양한 디자인 존재 |
정몬 | 정몬(죠몬): 가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대표 문장 |
가에몬 | 가에몬(카에몬): 필요에 따라 변경하여 사용하는 보조 문장 |
온나몬 | 온나몬(온나몬): 여성들이 사용하는 문장 |
디자인 요소 | |
원 | 테두리 유무, 모양, 굵기 등 |
배치 | 중심, 좌우대칭, 반복 등 |
색상 | 전통적으로 검정, 흰색, 빨강, 파랑, 노랑 사용 |
문장의 의미와 상징 | |
가문 상징 | 가문의 역사, 가치관, 업적 등을 상징 |
사회적 지위 | 문장의 종류, 디자인, 색상 등으로 사회적 지위 표현 |
종교적 의미 | 특정 종교와 관련된 문양 사용 |
문장의 활용 | |
의례 및 행사 | 제례, 결혼식, 장례식 등 |
복식 | 기모노, 하오리 등에 사용 |
건축 | 가옥, 사찰, 신사 등에 장식 |
공예품 | 도자기, 칠기, 금속 공예품 등에 사용 |
현대의 문장 | |
기업 및 단체 | 기업 로고, 단체 엠블럼 등으로 활용 |
개인 | 개인적인 상징으로 사용 |
디자인 |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된 문장 디자인 |
기타 정보 | |
겐페이토키쓰 | 겐페이토키쓰(源平藤橘): 일본의 주요 가문들을 지칭하는 용어 |
참고 문헌 | 일본의 문장 (집문당 출판) 가몬 도감 |
관련 서적 | |
참고 서적 | 정문 대사전 |
외부 링크 | |
참고 사이트 | 가몬 목록 |
2. 역사
## 헤이안 시대 - 가마쿠라 시대
헤이안 시대 중기(900–1000년경), 귀족들은 개인과 가문을 식별하기 위해 문장(몬/紋일본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7] 몬은 계급 서열을 나타냈으며, 길에서 소달구가 서로 지나갈 때 낮은 지위의 사람이 길을 비켜야 했다. 헤이지의 난을 묘사한 헤이지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平治物語絵巻)에는 소달구에 그려진 몬이 나타나 있다.[6][7]
점차 귀족들은 의상에도 몬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가마쿠라 시대(1185–1333)에 권력을 잡은 무사 계급 또한 몬을 사용했다.[6][7] 12세기에는 몬이 깃발, 천막, 장비 등에서 군대 문장기로 사용되었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6][7] (참고: 사시모노/sashimono일본어, 우마지루시/uma-jirushi일본어)
## 남북조 시대 - 무로마치 시대 - 센고쿠 시대
무로마치 시대(1336–1573)에는 상인들이 가게 간판에 문장을 그렸고, 이는 문장이 하위 계급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6][7]
남북조 시대에는 '다이몬'과 같은 히타타레에 가문을 수놓은 의복이 무사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문장을 붙인 의복을 예복이라고 불렀지만, 예복에 반드시 가문을 붙인다는 생각은 일반화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무로마치 시대 중기 동산 문화가 번성했을 무렵 스오나 가타기누와 같은 의복이 나오면서 정착되기 시작했다.
전국 시대에는 동족끼리 싸우는 일이 잦아지면서 적과 아군을 쉽게 구별하기 위해 가문의 종류가 급격히 늘어났다. 동시에 '효몬'이라고 불리는 2, 3가지 색으로 무늬를 구분한 가문이 유행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조선에 출병한 무장 가토 기요마사의 효몬 무늬 도라지를 소매에 붙인 초상화가 교토 칸지인에 남아 있다. 이 무늬는 에도 시대 겐로쿠 무렵 화려한 가문이 유행하던 시기에 민중에게 특히 선호되었다.
## 에도 시대
에도 시대(1603–1867)에는 가부키 배우들이 가몬을 사용했고, 일반 대중도 자신이 좋아하는 가몬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 겐로쿠(元禄, 1680–1709) 시대에는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가몬의 사용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그러나 황실에서 사용하던 국화 가몬과 도쿠가와 씨족(徳川氏, 도쿠가와 막부)에서 사용하던 접시꽃 가몬의 사용은 금지되었다.[6][7] 가몬은 상인과 장인의 길드, 사찰, 극단, 심지어 범죄 조직과 같은 다양한 조직에 의해 채택되었다. 문맹 사회에서, 가몬은 인식을 위한 유용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일본 전통 예복은 일반적으로 착용자의 가몬을 표시한다. 가몬이 없는 평민들은 종종 후원자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것을 사용했다. 그러한 것이 없을 경우, 그들은 때때로 "저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몇 안 되는 가몬 중 하나를 사용하거나, 원하는 가몬을 발명하거나 채택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가게와 가게 주인이 자신을 식별하기 위해 가몬을 개발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때때로, 후원 씨족은 자신의 가몬 사용을 가신에게 보상으로 부여했다. 후원자의 성씨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매우 높은 영예로 여겨졌다. 또는, 후원 씨족은 자신의 가몬의 요소를 가신의 것에 추가하거나, 그들을 위해 완전히 다른 가몬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던 에도 시대에는, 가문의 용도는 상대의 신분이나 가격에 따라 자신이나 가족의 옷차림을 바르게 하거나, 집안의 격식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거나,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거나 보인다는 등의 목적으로 변화했다.
일반적인 백성·상인은 성씨의 공칭이 불가능했지만, 가문을 사용하는 것은 규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집·일족의 표지로서 기능해 갔다[17]。 겐로쿠시대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차츰 화려해져 가고, 가문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가문을 필요로 하는 기회가 생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길례에 의해 "'''고산의 기리'''" 문양이 하층 서민에게 선호되었다. 또한 일반 가문도 장식화되어, 무가나 서민이 사용하는 가문도 화려하고 우미한 형태로 정돈되었다. 그 때문에, 좌우나 상하 대칭이 된 가문이나, 둥글게 둘러싸인 가문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라고 생각된다. 막부 말기경 유럽에서는 자포니즘으로 가문의 디자인성이 평가되어, 아르 누보의 회화 등에 사용되었다.
##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시대가 되자 서양 문화가 유입되었지만, 상류 계급을 제외하고 양복이 급속도로 보급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분 규제가 없어짐에 따라 서민들이 문복(紋服)을 착용하거나, 묘석 등에 가문을 새겨넣는 일이 늘어났다.[6][7] 또한 당시 성행했던 국수주의나 가문 의식의 표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 한 예로, 주문 제작된 군도의 손잡이 쇠붙이에 은세공으로 소유자의 가문을 새겨넣는 일이 있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후 - 현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몬(家紋)은 '''"군국적"'''·'''"봉건적"'''인 개념으로 부정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또한 구미 문화에 대한 관심 증가와 몬푸쿠(紋服) 착용 감소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서 가몬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나 2023년 (레이와 5년) 현재에도 대부분의 집에 하나씩은 전해지고 있으며, 관혼상제 등에서 착용하는 예복에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또한 전통 예능이나 노포에서는 2023년 (레이와 5년) 현재에도 정문(定紋)을 내세워 활동하는 사람이 많다. 최근에는 셔츠, 바지, 손수건 등에 가몬을 새겨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옷 가게도 있다.
2. 1. 헤이안 시대 - 가마쿠라 시대
헤이안 시대 중기(900–1000년경), 귀족들은 개인과 가문을 식별하기 위해 문장(몬/紋일본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7] 몬은 계급 서열을 나타냈으며, 길에서 소달구가 서로 지나갈 때 낮은 지위의 사람이 길을 비켜야 했다. 헤이지의 난을 묘사한 헤이지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平治物語絵巻)에는 소달구에 그려진 몬이 나타나 있다.[6][7]점차 귀족들은 의상에도 몬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가마쿠라 시대(1185–1333)에 권력을 잡은 무사 계급 또한 몬을 사용했다.[6][7] 12세기에는 몬이 깃발, 천막, 장비 등에서 군대 문장기로 사용되었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6][7] (참고: 사시모노/sashimono일본어, 우마지루시/uma-jirushi일본어)
가문의 기원은 헤이안 시대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라 시대부터 조도나 기물에 장식 목적으로 다양한 문양이 그려졌지만, 헤이안 시대에는 귀족 가문 고유의 표식으로 사용되었다. 사이온지 사네스에는 "칼집 그림"을, 토쿠다이지 사네요시는 "목과"를, 스가와라 일족 등은 매화 문양을 가문으로 사용했다.
무가의 가문은 헤이안 시대 말기에 생겨났다. 겐지는 흰 깃발, 헤이시는 붉은 깃발을 사용했으며, 무사시 7당인 고다마 당은 "군배 부채 문양"의 "당 부채"를 군기에 그렸다. '''가마쿠라 시대 중기 무렵에는 거의 모든 무사가 가문을 갖게 되었고, 가문의 문화는 무가 사회에 정착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합전이 늘어나면서 무사들이 무훈을 세울 기회가 많아졌다. 따라서 적과 아군을 구별하고 자신의 공적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막, 깃발, 말 표지, 칼집 등 모든 물건에 가문이 들어갔다.
공가 사회에서는 무사처럼 가문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설 무렵에는 거의 쇠퇴했다. 공가의 가문은 "무가를 본받아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2. 2. 남북조 시대 - 무로마치 시대 - 센고쿠 시대
헤이안 시대 중기(900–1000년경)에 귀족들 사이에서 개인과 가문을 식별하기 위한 방법으로 문장(紋, mon일본어)이 시작되었다.[6][7] 문장은 계급 서열을 나타냈으며, 소달구가 길에서 서로 지나칠 때 낮은 지위의 사람이 길을 비켜야 했다. 소달구에는 문장이 그려져 있었는데, 헤이지의 난을 묘사한 헤이지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平治物語絵巻)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점차 귀족들은 자신의 의상에 문장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가마쿠라 시대(1185–1333)에 권력을 잡은 무사 계급 또한 문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7] 12세기에는 문장이 깃발, 천막, 장비 등에 사용되어 전투에서 아군을 식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장에서 문장은 군대 문장기로 사용되었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고, 고유하게 디자인된 군대 표준(예: sashimono일본어, uma-jirushi일본어)도 흔했다.무로마치 시대(1336–1573)에는 상인들이 가게 간판에 문장을 그렸고, 이는 문장이 하위 계급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6][7] 에도 시대(1603–1867)에는 가부키 배우들이 문장을 사용했고, 일반 대중도 자신이 좋아하는 문장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 겐로쿠(元禄, 1680–1709) 시대에는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문장의 사용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그러나 황실에서 사용하던 국화 문장과 도쿠가와 씨족(徳川氏, 도쿠가와 막부)에서 사용하던 접시꽃 문장의 사용은 금지되었다.[6][7] 문장은 상인과 장인의 길드, 사찰, 극단, 심지어 범죄 조직과 같은 다양한 조직에서도 사용되었으며, 글을 모르는 사회에서 인식을 위한 유용한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일본 전통 예복에는 일반적으로 착용자의 문장이 표시된다. 문장이 없는 평민들은 후원자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장을 사용했으며, 그러한 것이 없을 경우, 원하는 문장을 만들어 사용하거나 후손에게 물려주기도 했다. 가게와 가게 주인이 자신을 식별하기 위해 문장을 개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원 씨족은 자신의 문장 사용을 가신에게 보상으로 부여하기도 했는데, 이는 매우 큰 영예로 여겨졌다.
남북조 시대에는 '다이몬'과 같은 히타타레에 가문을 수놓은 의복이 무사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문장을 붙인 의복을 예복이라고 불렀지만, 예복에 반드시 가문을 붙인다는 생각은 일반화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무로마치 시대 중기 동산 문화가 번성했을 무렵 스오나 가타기누와 같은 의복이 나오면서 정착되기 시작했다.
전국 시대에는 동족끼리 싸우는 일이 잦아지면서 적과 아군을 쉽게 구별하기 위해 가문의 종류가 급격히 늘어났다. 동시에 '효몬'이라고 불리는 2, 3가지 색으로 무늬를 구분한 가문이 유행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조선에 출병한 무장 가토 기요마사의 효몬 무늬 도라지를 소매에 붙인 초상화가 교토 칸지인에 남아 있다. 이 무늬는 에도 시대 겐로쿠 무렵 화려한 가문이 유행하던 시기에 민중에게 특히 선호되었다.
2. 3. 에도 시대
헤이안 시대 중기(900–1000년경)에 귀족들 사이에서 개인과 가문을 식별하는 방법으로 가몬(紋일본어)이 시작되었다.[6][7] 가몬에는 계급 서열이 있었고, 소달구(牛車, 깃샤)가 길에서 서로 지나칠 때 낮은 지위의 사람이 길을 비켜야 했으며, 가몬은 소달구에 그려졌다. 헤이지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平治物語絵巻, 헤이지 모노가타리 에마키)는 헤이지의 난을 묘사한 로, 소달구에 그려진 가몬을 보여준다. 점차 귀족들은 자신의 의상에 가몬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헤이안 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가마쿠라 시대(1185–1333)에 권력을 잡은 무사 계급 또한 가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7] 12세기에는, 특히 전투에서 사용하기 위해 문장이 구별되는 특징으로 구현되었음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자료가 있다. 깃발, 천막, 장비 등에서 볼 수 있으며, 전장에서 가몬은 군대 문장기로 사용되었지만, 이 사용법은 보편적이지 않았고, 고유하게 디자인된 군대 표준은 가몬 기반 표준만큼 흔했다(참고: , ).무로마치 시대(1336–1573)에는 상인들이 가게 간판에 문장을 그렸는데, 이것이 가몬이 되었다. 에도 시대(1603–1867)에는 가부키 배우들이 가몬을 사용했고, 일반 대중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몬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 겐로쿠(元禄, 1680–1709) 시대에는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가몬의 사용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그러나 황실에서 사용하던 국화 가몬과 도쿠가와 씨족(徳川氏, 도쿠가와 막부)에서 사용하던 접시꽃 가몬의 사용은 금지되었다.[6][7] 가몬은 상인과 장인의 길드, 사찰, 극단, 심지어 범죄 조직과 같은 다양한 조직에 의해 채택되었다. 문맹 사회에서, 가몬은 인식을 위한 유용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일본 전통 예복은 일반적으로 착용자의 가몬을 표시한다. 가몬이 없는 평민들은 종종 후원자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것을 사용했다. 그러한 것이 없을 경우, 그들은 때때로 "저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몇 안 되는 가몬 중 하나를 사용하거나, 원하는 가몬을 발명하거나 채택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가게와 가게 주인이 자신을 식별하기 위해 가몬을 개발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때때로, 후원 씨족은 자신의 가몬 사용을 가신에게 보상으로 부여했다. 후원자의 성씨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매우 높은 영예로 여겨졌다. 또는, 후원 씨족은 자신의 가몬의 요소를 가신의 것에 추가하거나, 그들을 위해 완전히 다른 가몬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던 에도 시대에는, 가문의 용도는 상대의 신분이나 가격에 따라 자신이나 가족의 옷차림을 바르게 하거나, 집안의 격식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거나,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거나 보인다는 등의 목적으로 변화했다.
일반적인 백성·상인은 성씨의 공칭이 불가능했지만, 가문을 사용하는 것은 규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집·일족의 표지로서 기능해 갔다[17]。 겐로쿠시대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차츰 화려해져 가고, 가문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가문을 필요로 하는 기회가 생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길례에 의해 "'''고산의 기리'''" 문양이 하층 서민에게 선호되었다. 또한 일반 가문도 장식화되어, 무가나 서민이 사용하는 가문도 화려하고 우미한 형태로 정돈되었다. 그 때문에, 좌우나 상하 대칭이 된 가문이나, 둥글게 둘러싸인 가문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라고 생각된다. 막부 말기경 유럽에서는 자포니즘으로 가문의 디자인성이 평가되어, 아르 누보의 회화 등에 사용되었다.
2. 4.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시대가 되자 서양 문화가 유입되었지만, 상류 계급을 제외하고 양복이 급속도로 보급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분 규제가 없어짐에 따라 서민들이 문복(紋服)을 착용하거나, 묘석 등에 가문을 새겨넣는 일이 늘어났다.[6][7] 또한 당시 성행했던 국수주의나 가문 의식의 표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 한 예로, 주문 제작된 군도의 손잡이 쇠붙이에 은세공으로 소유자의 가문을 새겨넣는 일이 있었다.헤이안 시대 중기(900–1000년경)에 귀족들 사이에서 개인과 가문을 식별하는 방법으로 시작된 몬/Mon일본어은 계급 서열을 가지고 있었으며, 소달구가 길에서 서로 지나칠 때 낮은 지위의 사람이 길을 비켜야 했다. 헤이지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平治物語絵巻, 헤이지 모노가타리 에마키)는 헤이지의 난을 묘사한 로, 소달구에 그려진 몬/mon일본어을 보여준다. 점차 귀족들은 자신의 의상에 몬/mon일본어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가마쿠라 시대(1185–1333)에 권력을 잡은 무사 계급 또한 몬/mon일본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7] 12세기에는, 특히 전투에서 사용하기 위해 문장이 구별되는 특징으로 구현되었음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자료가 있다. 그것은 깃발, 천막, 장비에서 볼 수 있다. 전장에서, 몬/mon일본어은 군대 문장기로 사용되었지만, 이 사용법은 보편적이지 않았고, 고유하게 디자인된 군대 표준은 몬/mon일본어 기반 표준만큼 흔했다.(참고: sashimono일본어, uma-jirushi일본어)
무로마치 시대(1336–1573)에는 상인들이 가게 간판에 문장을 그렸는데, 이것이 몬/mon일본어이 되었다. 에도 시대(1603–1867)에는 가부키 배우들이 몬/mon일본어을 사용했고, 일반 대중은 자신이 좋아하는 몬/mon일본어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의 겐로쿠(元禄, 1680–1709) 시대에는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몬/mon일본어의 사용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그러나 황실에서 사용하던 국화 몬/mon일본어과 도쿠가와 씨족(徳川氏, 도쿠가와 막부)에서 사용하던 접시꽃 몬/mon일본어의 사용은 금지되었다.[6][7] 몬/Mon일본어은 또한 상인과 장인의 길드, 사찰, 극단, 심지어 범죄 조직과 같은 다양한 조직에 의해 채택되었다. 문맹 사회에서, 그들은 인식을 위한 유용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일본 전통 예복은 일반적으로 착용자의 몬/mon일본어을 표시한다. 몬/mon일본어이 없는 평민들은 종종 후원자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것을 사용했다. 그러한 것이 없을 경우, 그들은 때때로 "저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몇 안 되는 몬/mon일본어 중 하나를 사용하거나, 원하는 몬/mon일본어을 발명하거나 채택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가게와 가게 주인이 자신을 식별하기 위해 몬/mon일본어을 개발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때때로, 후원 씨족은 자신의 몬/mon일본어의 사용을 가신에게 보상으로 부여했다. 후원자의 성씨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매우 높은 영예로 여겨졌다. 또는, 후원 씨족은 자신의 몬/mon일본어의 요소를 가신의 것에 추가하거나, 그들을 위해 완전히 다른 몬/mon일본어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2. 5. 제2차 세계 대전 후 - 현재
헤이안 시대 중기(900–1000년경)에 귀족들 사이에서 개인과 가문을 식별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시작되었다.[6][7] 몬은 계급 서열을 나타냈으며, 소달구가 길을 지나갈 때 낮은 지위의 사람이 길을 비켜야 했다. 헤이지의 난을 묘사한 헤이지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平治物語絵巻)에는 소달구에 그려진 몬이 나타나 있다. 점차 귀족들은 의상에도 몬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가마쿠라 시대(1185–1333)에 권력을 잡은 무사 계급 또한 몬을 사용했다.[6][7] 12세기에는 몬이 깃발, 천막, 장비 등에 나타나며 전투에서 구별되는 특징으로 사용되었다. 전장에서 몬은 군대 문장기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고, 고유하게 디자인된 군대 표준이 몬 기반 표준만큼 흔했다(참고: sashimono일본어, uma-jirushi일본어).무로마치 시대(1336–1573)에는 상인들이 가게 간판에 문장을 그렸고, 에도 시대(1603–1867)에는 가부키 배우들이 몬을 사용했으며, 일반 대중도 자신이 좋아하는 몬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 겐로쿠(元禄, 1680–1709) 시대에는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몬 사용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그러나 황실에서 사용하던 국화 몬과 도쿠가와 씨족(도쿠가와 막부)에서 사용하던 접시꽃 몬의 사용은 금지되었다.[6][7] 몬은 상인과 장인의 길드, 사찰, 극단, 심지어 범죄 조직과 같은 다양한 조직에서도 사용되었다. 문맹 사회에서 몬은 인식을 위한 유용한 상징이었다.
일본 전통 예복은 일반적으로 착용자의 몬을 표시한다. 몬이 없는 평민들은 종종 후원자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몬을 사용했다. 그러한 것이 없을 경우, 그들은 때때로 "저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몇 안 되는 몬 중 하나를 사용하거나, 원하는 몬을 발명하거나 채택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가게와 가게 주인이 자신을 식별하기 위해 몬을 개발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때때로, 후원 씨족은 자신의 몬 사용을 가신에게 보상으로 부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몬(家紋)은 '''"군국적"'''·'''"봉건적"'''인 개념으로 부정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또한 구미 문화에 대한 관심 증가와 몬푸쿠(紋服) 착용 감소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서 가몬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나 2023년 (레이와 5년) 현재에도 대부분의 집에 하나씩은 전해지고 있으며, 관혼상제 등에서 착용하는 예복에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또한 전통 예능이나 노포에서는 2023년 (레이와 5년) 현재에도 정문(定紋)을 내세워 활동하는 사람이 많다. 최근에는 셔츠, 바지, 손수건 등에 가몬을 새겨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옷 가게도 있다.
3. 디자인
가몬의 모티프는 크게 동물, 식물, 자연, 건물 및 차량, 도구 및 패턴의 다섯 가지 범주로 분류되며, 각 범주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6][7] 동물 모티프 중 가장 흔한 것은 두루미와 거북이인데, 전통적으로 장수를 상징하여 가족의 장수와 번영을 기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식물 가몬은 부와 우아함의 상징으로, 가족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 향상을 기원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등나무와 오동나무와 같은 모티프가 자주 사용되었다.[6][7] 특히 등나무 가몬은 150종 이상이 있으며, 후지와라 씨족이 사용하면서 대중화되었다.[8] 건물, 차량 또는 도구를 묘사한 가몬은 직업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도리이 문이 있는 가몬은 신토와 관련된 가문을, 기샤 바퀴가 있는 가몬은 귀족을 나타냈다.[6][7] 자연의 가몬은 자연에 대한 존경과 풍년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달, 산, 천둥과 같은 모티프가 사용되었다.[6][7]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가몬 모티프는 등나무, 오동나무, 매 깃털, 모과, 괭이밥이며, 이를 고다이몬/五大紋일본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쇼가칸에서 발행한 가몬 사전에 따르면 참나무가 오동나무 대신에 등재되어 있다.[6]
유럽 문장에서의 문장과 유사하게, 가몬도 디자인의 내용에 따라 이름이 지정되지만, 정해진 규칙은 없다. 그러나 유럽 문장과는 달리 가몬의 묘사가 이름을 따르지 않으며, 이름은 단지 가몬을 설명하는 데 사용될 뿐이다. 가몬의 그림 묘사는 형식화되어 있지 않으며, 동일한 가몬으로 여겨지는 것에 약간의 변형이 있을 수 있지만, 디자인은 대부분 시간과 전통을 통해 표준화되어 있다. 허용되는 변형의 정도는 가몬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5-7-5 잎의 오동나무 문장은 총리에게 예약되어 있으며, 잎이 더 적은 오동나무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황실 국화 또한 16개의 꽃잎을 지정하지만, 꽃잎이 적은 국화는 다른 하위 황실 구성원이 사용한다.
일본 문장은 차등 또는 분할 시스템을 갖지 않지만, 한 가문의 방계가 본가와 약간 다른 가몬을 선택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각 황족(신노케일본어)은 수정된 국화 문장을 가몬으로 사용한다. 가몬 소유자는 후원자, 은인 또는 배우자의 가몬과 결합하여 점점 더 복잡한 디자인을 만들기도 한다.
가몬은 본질적으로 단색이며, 색상은 디자인의 일부를 구성하지 않으며, 어떤 색상으로든 그릴 수 있다. 하나의 문장에는 몸(身, 미) 또는 안(內, 우치)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과, 원(輪, 와)·테두리(枠, 와쿠) 또는 밖(外, 소토)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 구성에는 문장류에 따라 다르지만, 문장의 도안을 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세부적인 종류가 있다.
4. 종류
/물떼새일본어 새 문장
/Daki Myoga일본어 (일본 생강)
4. 1. 정문(定紋)・대표문(代表紋)・대문(替紋)
겐페이토키츠나 모노노베, 오토모로 불리는 씨족의 권력이 전성기였을 무렵, 수천 개의 성이 생겨나고, 그 후 점차 가몬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가몬이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마쿠라 시대나 헤이안 시대는 에도 시대의 겐로쿠 무렵과는 달리, 가몬의 종류나 형태는 많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고 인기 있는 가몬이나, 그리기 쉬운 단순한 도안의 가몬일수록 선호되는 경향이 있었으며, 같은 성씨라도 다른 가몬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다른 성씨라도 같은 가몬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같은 씨족 안에서 비교적 많이 사용되는 가몬은 '''대표 문'''(다이효몬) 또는 '''표문'''(오모테몬)이라고 하며, 그 씨족의 대표적인 가몬으로 취급되었다. 예를 들어, 후지와라 씨에서 갈라진 나가이에나 나스와 같은 지류에서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가몬인 「한 자 문양」을 대표 문으로 하고 있다.
또한, 당시 무사들 사이에서는 같은 성씨라도 여러 개의 다른 가몬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정식 가몬이 필요했다. 그런 각 개인이 정해 놓고 사용하는 가몬을 '''정문'''(조몬) 또는 "본문"이나 "정문"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여러 다이묘나 쇼군 가문에서는 정문을 적자에게만 계승했기 때문에, 또한 시대와 함께 한 가문이 가질 수 있는 대문(替紋)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정문의 권위와 가치와 필요성은 강해져 갔다. 「'''대문'''(카에몬・타이몬)」이란, 본래의 집을 나타내는 공식적인 가몬인 정문 이외의 가몬을 말한다.
대문은 "리몬", "별문", "부문", "통제문" 등이라고도 한다. 집끼리 가몬을 주고받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고, 가몬을 자유롭게 창작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의 가문의 의미를 벗어난 가몬을 많이 가진 집도 있었다. 예를 들어, 다테 마사무네 등의 센다이 다테 가문은 사용한 가몬의 수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에도 시대 중기에는, 정문인 「'''센다이 사사'''」를 시작으로, 「'''다테 원앙(다테 오시도리)'''」・「'''구요'''」・「'''원 안에 세로 삼지 인량 문양 (마루노 우치에 타테 미츠히키)'''」・「'''눈송이 안에 억새(유키와니 스스키)'''」・「''''여덟 갓꽃(야츠 나즈나)'''」・「'''오칠동(고시치노 키리)'''」・「'''십육 국화(주로쿠킷쿠)'''」, 7개의 대문을 사용하고 있다.
4. 2. 통문(通紋)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화려하고 장식적인 가몬은 무사에 국한되지 않고 서민들에게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소수의 가문이나 개인이 독점할 수 없게 된 가몬을 '''통문'''(通紋, 츠몬/토오리몬)이라고 한다. 통문은 예를 들어 당초문과 같이 일반적으로 우아한 가문에 많다. "오삼의 동"이나 "담쟁이덩굴" 등은 그 일반성 때문에 대여 의상의 문장으로 자주 사용된다.
4. 3. 신문(神紋)・사문(寺紋)
신사나 절에서는 각자 사용하는 고유한 문장이 있는데, 특히 가문(家紋)과 구별하여 이러한 문장을 '''신문'''(神紋, 신몬) 또는 '''사문'''(寺紋, 지몬)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학교의 교장(校章)이나 회사 등의 사장(社章)도 존재하지만, 가문의 수나 종류와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적기 때문에, 일본의 문장학자들 사이에서는 "문장 = 가문"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신문에는 각 신사와 관련된 공가(公家)·무가(武家)의 가문이 사용되는 외에도, 당나라 등의 도안이나 유래·연기에 관련된 도안 등 독자적인 의장이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신직(神職) 계통의 가계에서는 신문이 가문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예: 떡갈나무 문양, 당화문 등)

4. 4. 여문(女紋)
기내(킨키 지방)를 중심으로 한 서국에서 널리 퍼져 있는 풍습 중 하나이다. 여문이란 친가의 가문과는 달리 여계에서 여계로 전해지는 문장을 말하며, 친가의 가문과는 의장도 유래도 다르다. 킨키 지방의 상가에서는 외부에서 빈번하게 유능한 데릴사위를 맞아 집을 잇게 하는 여계 상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연 발생적으로 여계에 전해지는 문양이 생겨났다고 한다. 특히 킨키 지방의 상가에서는 "'''가문이 하나밖에 없는 집은, 구 가문이라고 하지 않는다'''"라고도 하며, 대대로 여문을 가진 집은 상당한 명문가로서 존경을 받는 경우가 많다. 관동을 비롯해 킨키 이외의 지역에서는 이 풍습이 드물며, 여문이라는 문화가 없는 곳에서는 혼인 시 관습의 차이로 인해 종종 난색을 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시집을 갔으니 당가의 가문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유'''). 2023년 현재에도 이 풍습은 굳건히 남아 있다.집안끼리의 혼인이 주였던 시대에는, 여성이 시집을 갈 때 혼가에 여문을 가지고 가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여문의 의장은 주로 가문을 바탕으로 하지만, 윤곽을 본뜬 "음(かげ)・중음(ちゅうかげ)", "세륜(細輪)", "엿보기" 등 다소 여성스러운 것이 많다. 여성이 겉옷에 친가의 가문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지만, 여문을 계승하고 있는 경우에는 여문으로 겉옷을 만든다.
4. 5. 비익문(比翼紋)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의 가문을 나란히 배치한 것을 '''비익문'''이라고 한다.5. 가몬의 양도
가몬은 종종 사람들 사이에서 양도 대상이 된다. 그러나 당시에도 2023년(레이와 5년) 현재에도 가몬 사용에 대한 제한은 특별한 문장을 제외하고 없었기 때문에 가몬을 양도한 쪽의 사람은 그 가몬의 사용을 제한받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황실의 가몬인 국화 문장 (국화 문)을 들 수 있다. 천황은 공적이 있는 자에게, 예를 들어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에게 수여했다. 또한 천황에게 받은 오동나무 문장 등을 장군 등의 유력자가 공적이 있는 우수한 가신이나 가신에게 수여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습관은 무로마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호소카와 요시유키에게 자신의 가몬을 증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가몬을 하사하는 것을 '''사여'''(しよ)라고 하며, 받은 가문은 일가의 대명예로 기뻐했다고 하며, 주어진 문장을 배령문이라고 한다.
무로마치 막부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에게 오동나무 문장을 수여했고, 그 후 노부나가에게 그 오동나무 문장이 아버지로부터 계승되었다. 그 오동나무 문장을 어깨에 두른 노부나가의 초상화가 초코지에 보존되어 있다. 비슷한 예로 분고오토모 씨의 "안은 행엽(다키 교요)"이 있으며, 그 문장을 받은 자를 "'''어동문중'''"이라고 부르며 중용했다고 한다. 그 반대로, 가신의 가몬을 주군이 사용하는 것을 "'''소환'''"이라고 하며, 가신인 혼다가 또는 사카이 가문의 가몬을 주군인 마쓰다이라 가문이 양도받았다고 하는 "'''세 잎 아욱'''"의 예가 있다.
그 외, 전승자가 전패자의 가몬을 빼앗는 "'''탈취'''"의 예에는, 류조지 씨가 분고 오토모 씨로부터의 대승을 얻은 전승 기념으로 사용한 "안은 행엽(다키 교요)"이 있다. 사용자의 허가 없이 사용자의 관계자를 위조하여 그 가몬을 잠용(참용)함으로써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
신분이 변하지 않는 동격자끼리의 가몬 양도도 있었지만, 가독의 상속이나, 혼인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예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의 우에스기 사다자네와 양자 연애 계획이 있었던 다테 사네모토에게 보내진 우에스기 가문의 정문인 "대나무에 참새"가 있다.
가몬은 아니지만, 주로 긴키 지방에서 가문 간의 혼인이 주를 이루었을 때, 여성이 시집갈 때 혼가에서 여문을 가져가는 예도 보인다.
6. 현대적 사용
사실상 모든 현대 일본 가족들은 가몬(紋일본어)을 가지고 있지만, 메이지 유신 이전과는 달리, 가몬은 일상생활에서 보다 특화된 역할을 한다.[9] 가몬의 사용이 필요한 경우, 조상의 고향 사찰 등록부에서 가족을 찾아보거나, 이용 가능한 많은 계보 출판물을 참고할 수 있다. 전문 결혼 컨설턴트, 장례 지도사 등도 적절한 가몬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가몬(Mon일본어)은 전통 공예와 특산물을 취급하는 상점과 가게에서 널리 볼 수 있다. 가몬은 스시 레스토랑에서 선호되며, 종종 로고에 사용된다. 가몬 디자인은 오래된 집의 도자기 지붕 타일에서도 볼 수 있으며, 센베이, 사케일본어, 두부 및 기타 식품 포장을 장식하여 우아함, 세련됨, 전통의 분위기를 더한다. 오동나무 가몬은 500엔 동전의 앞면에 나타난다.[9]
게이샤는 일할 때 자신의 오키야(게이샤 하우스)의 가몬을 옷에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하나마치로 알려진 개별 게이샤 지구는 교토의 폰토초의 물떼새 문장(chidori일본어)과 같이 고유한 가몬을 가지고 있다.[9] 여성은 원한다면 처녀 가몬을 여전히 착용하고 딸에게 물려줄 수 있으며, 남편이나 아버지의 가몬을 채택할 필요가 없다. 꽃, 나무, 식물 및 새는 또한 가몬 디자인의 일반적인 요소이다.[9]
가몬은 기모노에 격식을 더한다. 기모노는 하나, 셋 또는 다섯 개의 가몬을 가질 수 있다. 가몬 자체는 기모노의 격식에 따라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일 수 있으며, 격식은 가장 공식적인 '햇살'(hinata일본어) 문장에서 가장 비공식적인 '그림자'(kage일본어) 문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매우 공식적인 기모노는 더 많은 가몬을 표시하며, 종종 눈에 띄게 만든다. 가장 공식적인 기모노는 가슴 양쪽, 소매 뒤쪽 및 등 중앙에 가몬을 표시한다. 전사의 갑옷에서는 갑옷(헬멧), 도(가슴받이) 및 깃발과 다양한 다른 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 가몬은 또한 금고, 천막, 부채 및 기타 중요한 물건을 장식했다.[9]
현대의 가몬은 천황의 국화 문장을 제외하고 법으로 규제되지 않으며, 이는 국장으로도 사용되며, 오동나무는 내각총리대신 사무실의 문장이며 내각(정부) 및 정부의 상징으로도 사용된다.[9] 일부 지방 정부 및 협회는 가몬을 로고 또는 상표로 사용하여 전통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가몬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업 로고로 사용되는 가몬의 가장 잘 알려진 예 중 하나는 '세 개의 마름모'('세 개의 물밤'으로 번역되기도 함)를 의미하는 미쓰비시의 로고이며, 이는 마름모로 표현된다.[10]
또 다른 기업 사용 예는 간장 제조업체인 기꼬만의 로고로, 창업자의 가족 가몬을 사용한다.[11] 야마하(Yamaha)의 로고는 회사 이름과 회사의 기원을 모두 나타내는 대문자 'Y'의 형태로 얽힌 세 개의 튜닝 포크를 보여준다.[12]
기업이나 지방 자치 단체의 심볼 마크나 기장에도 전통적인 가문을 이용한 디자인이 보인다. 대부분 기업의 경우 창업자나 후원자의 가문, 지방 자치 단체의 경우 그 지역과 인연이 깊은 인물 (그 지역을 지배했던 다이묘 가문 등)의 가문이 이용된다. 디자인으로는 가문 그 자체를 "거의 그대로의 형태로 심볼 마크로 한다" (미쓰이 그룹, 메이지야, 시마즈 제작소, 가마쿠라시, 가고시마시, 오사카시 등), 가문을 "디자인의 일부"로 도입한다 (킷코만, 요코스카시, 구 나나오시[19] 등), 가문을 바탕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만든다 (미쓰비시 그룹의 쓰리 다이아몬드 등)등의 형태로 이용된다.
7. 서양 문장학
일본의 몬/mon일본어은 때때로 서양 문장학에서 문장이나 두석으로 사용된다.[13][14] 일본식 대신 전통적인 문장학 스타일로 문장이 표현된다. 예시로는 17세기 일본 대사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사용한 화살이 있는 만자, 아키히토의 가터 기사단 문장이 있다.[13][14]
영어권에서 사용되는 상징(Symbol)은 추상적인 도안을 가리키고, 문장(Coat of arms)은 시각적인 도안을 가리키지만, 일본의 가문은 "투구 장식"의 의미에서 Family crest, Crest와 같은 영어로 표현된다. 이는 서양에서는 개인 문장(Coat of arms)의 구성 요소인 크레스트(Crest)를 일족·가족이 공유하는 경우가 있으며, 일본의 가문과 유사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일본 이름을 음역하여 mon, kamon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8. 한국의 가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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