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로마의 명문가 출신으로, 제3차 놀라 전투에 참전했으나 지휘에 실패했다. 기원전 212년에는 프라이토르로 선출되어 카푸아 포위전에 참여했고, 기원전 211년에는 스페인으로 파견되어 로마군을 재편성했으나 하스드루발을 격파하지 못했다. 기원전 207년에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이후 감찰관을 역임하고 외교 사절로 활동했으며, 그의 결단력과 군사적 능력은 로마 공화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230년대 출생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세력을 확장한 고대 로마의 장군으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말년에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 기원전 230년대 출생 - 마시니사
    마시니사는 기원전 3세기 누미디아의 왕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 편에 서서 카르타고를 물리치는 데 기여하고 로마의 지원을 받아 누미디아를 통일했으며, 90세 넘게 통치하며 델로스에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업적을 남겼다.
  • 고대 로마의 감찰관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세력을 확장한 고대 로마의 장군으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말년에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 고대 로마의 감찰관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마케도니쿠스' 칭호를 얻었지만 에피루스 약탈로 비판받기도 하며 로마의 영웅적, 제국주의적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이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기원전 207년 메타우루스 전투 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하스드루발의 머리를 한니발의 진영으로 가져가는 모습.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메타우루스 전투 후 하스드루발의 머리를 한니발의 진영으로 가져가는 모습 (기원전 207년)
이름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로마자 표기Gaius Claudius Nero
씨족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네로 가문
정치 경력
레가투스기원전 214년
법무관기원전 212년
전법무관기원전 211년-210년
레가투스기원전 209년
집정관기원전 207년,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와 공동 집정관
감찰관기원전 204년
레가투스기원전 201년-199년
군사 경력
소속로마
군대로마군
참전 전투제2차 포에니 전쟁
제3차 노라 전투
카푸아 공성전
그루멘툼 전투
메타우루스 전투
개인 정보
출생기원전 237년 이전
가문클라우디아 겐스
집정관 재임 정보
임기 시작불명
임기 종료불명
동료 집정관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이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다음 집정관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와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2. 초기 생애와 가문

고대 자료에는 클라우디우스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기원전 212년에 프라에토르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어린 나이가 25세였다고 가정하면, 그는 기원전 237년 또는 그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다.[5] 그는 클라우디아 씨족(gens Claudia)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황제와 먼 친척 관계였다. 수에토니우스는 ''티베리우스의 생애''에서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로마 왕이 추방된 지 약 6년 후(기원전 504년)에 사비니족에서 이탈했다고 주장했다.[5] 이 가문은 28개의 집정관 직위, 5개의 독재관 직위, 7개의 감찰관 직위, 6개의 개선 및 2개의 개선식을 수여받았다. 수에토니우스는 또한 사비니 언어에서 코그노멘 네로(Nero)는 "강하고 용감한"을 의미한다고 기록했다.[5]

2. 1. 가문의 기원

기원전 212년에 프라에토르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어린 나이가 25세였다고 가정하면, 그는 기원전 237년 또는 그 이전에 태어났다. 그는 로마에서 가장 저명한 가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아 씨족(gens Claudia)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제인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먼 친척 관계였다.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저서 ''티베리우스의 생애''에서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로마 왕이 추방된 지 약 6년 후(기원전 504년)에 사비니족에서 이탈했다고 주장했다.[5]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가문은 28개의 집정관 직위, 5개의 독재관 직위, 7개의 감찰관 직위, 6개의 개선 및 2개의 개선식을 수여받았다. 수에토니우스는 또한 사비니 언어에서 코그노멘 네로(Nero)는 "강하고 용감한"을 의미한다고 기록했다.

2. 2. 초기 생애

고대 자료에는 클라우디우스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기원전 212년에 프라에토르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어린 나이가 25세였다고 가정하면, 기원전 237년 또는 그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다.[5] 그는 로마에서 가장 저명한 가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아 씨족(gens Claudia)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제인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먼 친척 관계였다.[5]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저서 ''티베리우스의 생애''에서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로마 왕이 추방된 지 약 6년 후(기원전 504년)에 사비니족에서 이탈했다고 주장했다.[5]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가문은 28개의 집정관 직위, 5개의 독재관 직위, 7개의 감찰관 직위, 6개의 개선 및 2개의 개선식을 수여받았다.[5] 수에토니우스는 또한 사비니 언어에서 코그노멘 네로(Nero)는 "강하고 용감한"을 의미한다고 기록했다.[5]

3. 군사 경력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기원전 214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집정관 휘하의 레가투스로 제3차 놀라 전투에 참여하면서 처음 역사에 등장한다.[6] 이후 프라이토르를 거쳐 카푸아 포위전, 스페인 파견 등 여러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군사 경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시기직책주요 활동 및 사건
기원전 214년레가투스제3차 놀라 전투 참전[6]
기원전 212년프라이토르수에수라 지역 담당[14]
기원전 212년 ~ 기원전 211년프라이토르 (연장)카푸아 포위전 참전[16]
기원전 211년프로프라에토르스페인 파견[20], 하스드루발 포위[20]



제3차 놀라 전투에서 그는 기병대 지휘를 맡았으나,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기도 했다.[6] 프라이토르 시절에는 수에수라 지역을 담당하며 로마 군단을 지휘했고,[14] 카푸아 포위전에서는 6개 군단의 기병대를 이끌며 한니발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18] 스페인에서는 로마군을 재편성하고 카르타고 세력에 맞섰으나, 하스드루발을 놓아주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23]

3. 1. 제3차 놀라 전투 (기원전 214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휘하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제3차 놀라 전투에 참전했다.[6] 칸네 전투에서 로마가 대패한 후, 한니발은 이탈리아 동맹국들을 로마에 대항하게 만드는 정책을 펼쳤다.[7][8] 놀라의 민중당이 카르타고에 도시를 항복시키려 하자, 마르켈루스는 성공적인 방어를 펼쳤다. 이후 한니발이 다시 놀라를 점령하려 했지만, 집정관이었던 마르켈루스에 의해 격퇴되었다.[9]

기원전 214년의 제3차 놀라 전투, 네로가 한니발을 후방에서 기습하려 했던 경로를 보여준다.


한니발이 3년째 다시 돌아오자 마르켈루스는 도시를 방어할 준비를 했다. 그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최고의 기병대를 이끌고 어둠을 틈타 적군 뒤를 우회하여 전투가 시작되면 후방에서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시간 조절에 실패했거나 길을 잃어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리비우스는 로마군이 승리하여 로마군 400명의 손실로 카르타고군 2,000명을 죽였지만, 기병의 지원 없이 마르켈루스는 도주하는 군대를 추격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해 질 무렵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진영으로 돌아오자, 마르켈루스는 "칸네에서 겪었던 재앙을 적에게 갚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라고 질책했다.[6]

도지는 리비우스의 기록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10] 리비우스는 마르켈루스가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지연 때문에 계획이 실패했다고 비난했지만, 도지는 "네로는 훌륭한 행군가"였으며, 그가 맡았던 경로가 실행하기에는 너무 길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지적한다. 이 전투는 로마인들에게 다소 행운이 따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한니발이 격퇴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음 날 그는 타렌툼을 향해 캄파니아를 떠났다.

3. 2. 프라이토르 시절 (기원전 212년)

기원전 212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함께 프라이토르로 선출되었다.[11] 그의 사촌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같은 해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것은 클라우디우스-풀비우스 파벌의 부활, 로마의 불안함, 전쟁의 새로운 방향에 대한 열망, 그리고 파비우스 씨족과의 불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12] 레이즌비는 기원전 212년과 기원전 211년에 "파비우스 씨족의 쇠퇴는 확실히 로마의 전쟁 노력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언급했다.[13]

프로빈키아(속주) 배정 추첨에서 클라우디우스는 수에수라를 받았는데, 이곳은 놀라와 카푸아 사이, 포필리아 가도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 중요한 캄파니아의 도시였다.[14] 그는 카이우스 테렌티우스 휘하에서 복무하던 약 두 군단 규모의 군대를 맡아 피케눔에서 활동하게 되었다.[14] 그는 이 병력을 정규 병력으로 보충한 다음 수에수라에 야영지를 건설하여, 남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에 대한 작전을 지원하도록 지시받았다.[14]

3. 3. 카푸아 포위전 (기원전 212년 - 211년)

기원전 212년, 프라에토르로 선출된 네로는 수에스라(현재 아체라의 일부)에 있었지만, 카푸아를 포위하려던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 의해 소집되어[72] 제2차 카푸아 포위전에 참여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카푸아에서 동료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를 만났고, 클라우디우스는 수에술라 근처 클라우디우스 야영지에서 군대를 증원군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다.[16] 연합군은 약 4만 명으로[15] 카푸아 주변에 본부를 세웠고, 클라우디우스의 병사들은 나무 말뚝 울타리와 도랑을 만들어 도시를 포위하고 간격을 두고 요새를 설치했다.[16] 이 과정에서 캄파니아 군대와 여러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16]

클라우디우스와 두 집정관의 지휘권은 포위 공격 첫 해에 임기가 만료되었지만 연장되었고, 기원전 211년에 그는 전직 법무관으로 계속 작전을 수행했다.[17] 한니발이 캄파니아로 다시 돌아와 포위 공격을 완화하려는 시도와 함께 벌어진 전투에서 클라우디우스는 6개 군단의 기병대를 맡았다.[18] 그의 역할은 수에술라로 가는 길을 지켜 카르타고 군대가 남쪽에서 야영지로 침투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카푸아인들을 상대하고, C.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에 맞섰다. 클라우디우스의 군대는 한니발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고, 카푸아는 한니발의 로마 진군 실패 후 기원전 211년에 로마에 함락되었다.[19]

3. 4. 스페인 파견 (기원전 211년)

기원전 212년, 프라에토르로 선출된 네로는 수에스라(현재 아체라의 일부)에 있었지만, 카푸아를 포위하려던 집정관 풀케르에 의해 소집되어[72] 제2차 카푸아 포위전에 참여했다.

카푸아가 함락되자 로마 원로원그나이우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죽음으로 지휘 공백이 생긴 스페인 상황에 집중했다.[20] 로마는 새로운 장군이 절실했고, 기원전 211년 말, 클라우디우스는 프로프라에토르 자격으로 스페인에 파견되어 로마 보병 6,000명과 기병 300명, 이탈리아 출신 보병 6,000명과 기병 6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지휘했다.[20] 아피아누스는 클라우디우스의 군대를 보병 10,000명과 기병 1,000명으로 기록하여 리비우스의 수치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21]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스페인에 도착하여 스키피오 가문의 패배로 궤멸된 로마군을 재편성하고, 빠르게 확장하는 카르타고 세력에 대항하여 로마의 교두보를 강화하는 임무를 맡았다.[20] 그는 에브로 강에서 티. 폰테이우스와 L. 마르키우스의 지휘 아래 있던 로마군과 병력을 합친 후, 라피데스 아트리("검은 돌") 근처에 주둔하던 하스드루발(한니발의 형제이자 하밀카르의 아들)을 공격하여 포위했다.[20] 그러나 당시 로마의 위태로운 스페인 내 입지를 고려할 때, 클라우디우스가 그러한 공격적인 행위를 시도했을지는 의문이다.[22]

하스드루발은 로마군과의 협상을 지속하며 자신의 부대를 탈출시켜 검은 돌 협곡의 함정에서 벗어났다.[23] 클라우디우스와 하스드루발 간의 충돌은 카르타고 후위 부대와 로마 선봉 부대 간의 소규모 교전으로 제한되었다.[23]

클라우디우스의 스페인 체류는 짧게 끝났다. 원로원이 집정관급 지휘관을 임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210년, 그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아프리카누스"가 될)에게 교체되었다.[24]

클라우디우스가 스페인에서 조기 소환된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이 제기되었다. 헤이우드는 이탈리아에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하여 클라우디우스의 귀환이 필요했다는 추측[25]을 했지만, 스컬라드는 "만약 네로가 그렇게 급하게 필요했다면 왜 기원전 207년까지 고위직에 선출되지 않았는가?"[26]라고 반박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클라우디우스가 카르타고에 대항하는 스페인 원정의 성공에 중요한 스페인인들을 다루는 데 필요한 외교적 능력이 부족했다고 제안한다.[28] 이러한 이유들과 다른 고려 사항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원로원이 스페인에서 클라우디우스의 지휘를 교체하기로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임무는 상황을 안정시킨 직후 소환하고, 적절한 대체자를 찾는 임시적인 지위였을 가능성이 있다.[29]

기원전 207년 메타우루스 전투

4. 집정관 시절 (기원전 207년)

기원전 208년,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가 매복 공격으로 사망하면서, 기원전 207년의 집정관 선거는 매우 중요한 상황에서 치러졌다.[30] 리비우스는 원로원이 클라우디우스를 가장 뛰어난 후보로 여겼다고 전한다.[31] 이는 클라우디우스가 북쪽에서 이탈리아로 접근하던 하스드루발과 싸운 경험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32]

클라우디우스의 인기는 군사적 경험뿐만 아니라, 마르켈루스와 크리스피누스의 실패로 인해 새로운 전쟁 지도자가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이들과 정치적으로 연관되지 않았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33] 사망한 집정관들의 친구였던 파비우스 막시무스도 훌륭한 후보였지만, 법적으로 두 명의 귀족을 집정관으로 선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출마할 수 없었다.[34]

리비우스는 클라우디우스가 "전쟁 상황이나 적, 한니발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대담하고 격렬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냉정하고 신중한 동료"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35] 이 임무를 위해 선택된 사람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였다. 그러나 리비우스와 클라우디우스 사이에는 적대감이 있었다. 리비우스는 첫 번째 집정관직 이후 기원전 218년에 재판을 받았고, 클라우디우스는 검찰 측 증인으로 나섰기 때문이다.[36] 리비우스는 기원전 218년 은퇴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이 선거가 얼마나 경쟁적이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기원전 207년, 네로는 집정관에 취임했다. 동료 집정관은 리비우스였다. 네로는 브루티움(현재의 칼라브리아주)에서 한니발과 대치하고, 리비우스는 세나에서 하스드루발에 대비하게 되었다.

4. 1. 메타우루스 전투

메타우루스 전투클라우디우스의 생애뿐만 아니라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 북부의 메타우루스 강 근처에서 벌어졌으며, 기원전 207년 로마의 결정적인 승리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환점을 만들었다.[41]

폴리비오스는 이 전투, 특히 하스드루발의 죽음과 클라우디우스가 승리하기 위해 사용한 전략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42]

이 전투는 로마의 승리로 하스드루발은 패배하여 죽었고, 한니발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클라우디우스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하스드루발이 죽자 그의 머리를 한니발의 진영에 던지도록 명령했다. 이는 한니발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리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한니발은 이처럼 크나큰 공적 및 개인적 고통의 이중 타격을 받고 "이제 나는 카르타고의 운명을 분명히 본다"라고 외쳤다.

호라티우스는 송가 4.4에서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찬양하는 시를 썼으며, 이는 메타우루스 전투의 승리가 로마에 오랫동안 기억되었음을 보여준다.

4. 1. 1. 전투 전 상황

기원전 208년, 스키피오는 바에쿨라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을 패퇴시켰으나, 한니발과의 전투에서 두 명의 집정관이 사망하는 등 로마에게도 큰 타격이 있었다.[40] 기원전 207년의 메타우루스 전투는 로마의 결정적인 승리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환점을 만들었다.[41]

하스드루발은 이탈리아에서 형 한니발과 합류하려 했으나,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이끄는 로마 군단에 의해 추격당했다.[41]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에게 회합 지점을 알리는 전령을 보냈지만, 이들은 로마군에 가로채져 계획이 발각되었다.[43]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전략적 요충지에서 한니발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동료 집정관인 리비우스보다 남쪽에 있었다. 그는 리비우스와 합류하여 하스드루발에게 대항하기 위해 북쪽으로 행군을 시작했다.[43] 이때 대부분의 군대는 한니발을 감시하도록 남겨두고, 밤에 리비우스와 합류했다.

4. 1. 2. 클라우디우스의 결단

클라우디우스는 한니발을 견제하면서 동료 집정관인 리비우스와 합류하기 위해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한니발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리비우스와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클라우디우스는 정예병 6,000명과 기병 1,000명을 선발하여 리비우스에게 급파했다.[43]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부재를 숨기기 위해 남은 병사들에게 양동 작전을 지시했다. 또한, 리비우스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리지 않고 밤에 합류할 것을 제안하여, 하스드루발이 로마군의 증원을 예상하지 못하도록 했다.[43]

그러나 이러한 클라우디우스의 행동은 원로원의 허가 없이 자신에게 할당된 전선을 이탈하는 것으로, 로마 법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었다.[43] 그는 패배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지만, 승리한다면 자신의 행동이 용서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클라우디우스의 결단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로마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험한 지형 때문에 정면 공격이 어렵자, 병력을 우회시켜 카르타고 군의 후방을 기습하는 과감한 전술을 펼쳤다.[42] 이 기습으로 카르타고 군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패배했다.[43] 폴리비우스는 "클라우디우스가 적의 후방을 공격하자마자 전투는 더 이상 동등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42]

4. 1. 3. 전투의 전개

기원전 207년, 네로는 리비우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네로는 브루티움(현재의 칼라브리아주)에서 한니발과 대치했고, 리비우스는 세나에서 하스드루발에 대비했다.[43]

알프스를 넘은 하스드루발은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밀사를 보냈으나, 네로의 군대에 붙잡혀 계획이 발각되었다. 네로는 자신도 합류해야 한다고 판단, 정예병 7,000명(보병 6,000명, 기병 1,000명)을 선발하여 강행군을 시작했다. 남은 병사들에게는 네로의 부재를 숨기기 위한 양동 작전이 지시되었다.[43] 네로는 "면밀한 준비를 거듭하여 군대를 소집한 리비우스의 군대에, 우리가 더해지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작전의 성공은 이 은밀한 행동에 달려있다."라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네로는 리비우스에게 급히 연락하여 자신의 도착을 알리지 않기 위해 밤에 도착할 것을 제안받았다.[43]

네로의 부대는 피로했지만, 즉시 공격을 제안하여 메타우루스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스드루발은 전투 코끼리 10마리를 앞세웠으나, 리비우스는 용감하게 맞섰다. 우익의 네로는 지형 때문에 전진하지 못하고, 후방에서 재편성하여 적의 공격을 받던 좌익으로 이동했다.[42] 양군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네로가 코끼리 부대를 기습하면서 카르타고 군은 무너졌고, 코끼리 부대도 전멸했다. 하스드루발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46]

폴리비우스는 "클라우디우스가 적의 후방을 공격하자마자 전투는 더 이상 동등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42]

4. 1. 4. 전투의 결과

메타우루스 전투클라우디우스의 생애뿐만 아니라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중요한 전투였다. 기원전 207년의 메타우루스 전투는 로마의 결정적인 승리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환점을 만들었다.[41] 이 전투는 로마의 주요 승리였으며, 하스드루발의 패배와 죽음을 초래했고 한니발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하스드루발이 죽자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머리를 한니발의 진영에 던지도록 명령했다.

이는 한니발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리비우스는 그 여파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한니발은 이처럼 크나큰 공적 및 개인적 고통의 이중 타격을 받고 "이제 나는 카르타고의 운명을 분명히 본다"라고 외쳤다.

호라티우스는 송가 4.4에서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찬양하는 시를 썼으며, 이는 메타우루스 전투의 승리가 로마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음을 증명한다.

폴리비오스는 하스드루발의 죽음을 묘사하며, 그가 성공적인 지도자이자 훌륭한 장군이었다고 말했다.

> "하스드루발은 이 기회에 그의 생애 전체와 마찬가지로 용감하게 행동했으며, 싸우다 죽었다."[46]

승리의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을 때, 백성들의 격앙된 감정은 형언할 수 없었다.[47]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와 리비우스에 의해 로마 군대의 보존과 적과 그 지휘관의 파멸을 기념하기 위해 사흘간의 공개적인 감사를 선포했다.[48] 두 사람은 군사적 개선(Triumph (Rome))을 함께 거행했지만, 클라우디우스의 전투 기여도가 리비우스와 동등하거나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49] 클라우디우스는 오바치오(ovation)라는 덜 명예로운 영예에 만족해야 했다. 그 결과, 클라우디우스는 리비우스가 누린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가 아닌, 한 마리의 말을 타고 도시에 입성했다.[50] 리비우스에 따르면:

> "[클라우디우스]는 비록 걸어갔을지라도, 그 전쟁에서 얻은 영광 때문이든, 개선에서의 경멸 때문이든 기억될 것이다."[51]

그러나 리비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글을 썼고, 황제의 아내 리비아가 클라우디우스 네로네스 가문에 속했으므로, 어느 정도의 편견은 예상할 수 있다.[52] 전리품에는 30만 세르테르티우스(Sestertius)와 8만 청동 아스(As (Roman coin))가 포함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는 리비우스가 부하들에게 지급한 것과 같은 1인당 56 아스의 보상을 약속했다.[53]

두 집정관은 함께 로마에 입성하기로 약속했고, 환호성으로 맞이했다. 개선식에서는, 리비우스의 담당 지역에서 리비우스의 지휘권이 있는 날의 승리였기 때문에, 그가 선두의 콰드리가에 탔고, 네로는 말에 타고 개선했지만, 네로의 공적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5. 감찰관 시절 (기원전 204년)

기원전 204년, 네로는 리비우스와 함께 감찰관으로 선출되었다.[54] 감찰관은 5년 임기였지만, 관례상 18개월 동안 감찰을 수행했다.[55] 감찰관의 주요 업무는 다음과 같았다.[56]


  • 로마 시민 인구 조사
  • 원로원 명부 작성
  • 공공 기반 시설 유지 보수 계약 체결
  • 정화 의식 ''루스트룸'' 수행


기원전 204년 감찰관 임기 동안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두 번째로 원로원 지도자로 선출되었고, 7명의 원로원 의원이 제명되었다.[6] 보아리움 포룸에서 비너스 신전까지의 도로 건설과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마그나 마테르 신전 건립 계약이 체결되었다. 새로운 소금세 부과는 인기가 없었다고 여겨진다.[57]

인구 조사는 군대에 있는 로마 시민의 수를 보고하기 위해 요원들이 전 지역으로 파견되어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리비우스는 기원전 204년 시민 수를 214,000명으로 보고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해외 복무 군인과 일시적 참정권 박탈 시민을 조정하면 240,000명에 더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58] 이 기간에는 여성, 어린이, 노예 및 외국인은 인구 조사에서 제외되었다.[59] 네로는 인구 조사 관련 추가 작업으로 평소보다 늦게 ''루스트룸''을 수행했다.

두 감찰관은 서로를 ''아에라리이''(더 높은 세금을 내야 하는 부류) 지위로 낮추려 했다.[63] 평민 재판관 그나이우스 베비우스는 이들의 품위 없는 행동에 대해 기소하려 했으나, 원로원은 민중의 변덕으로부터 직무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소를 막았다.

에퀴테스 명부 개정 때, 네로는 리비우스의 공마를 몰수하는 견책을 통고했다. 이에 리비우스도 네로의 공마를 몰수했다. 네로는 더 나아가 리비우스를 아에랄리우스(시민 의무 박탈)에 머물게 하는 견책을 가했다. 리비우스는 마에키아 구를 제외한 모든 트리부스를 아에랄리이(아에랄리우스의 복수형)로 만들었는데, 이는 이전에 그를 무죄임에도 유죄로 판결하고, 더 나아가 그 범죄자를 집정관이나 켄소르로 선출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본 야심 찬 호민관 중 한 명이 켄소르를 탄핵하려 했지만, 나쁜 선례를 우려한 원로원이 막았다.[80]

6. 외교 활동 (기원전 201년)

기원전 201년, 카르타고와의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1세와 로도스로부터 마케도니아필리포스 5세의 적대 행위에 대한 호소를 받았다. 필리포스 5세의 공격적인 정복 활동은 이미 잔혹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소아시아에서 잔혹한 군사 작전을 시작하기 전, 독립적인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약탈하면서, 아탈루스 1세는 자신의 영토에 대한 마케도니아의 위협을 우려했다. 당시 로마는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리리아에 집중되었고 기원전 205년에 포이니케 평화 조약으로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부 지중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아탈루스 1세의 우려에 응답했다.[65]

기원전 201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푸블리우스 아이리우스 파에투스가 아직 속주에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로 가는 대규모 사절단이 파견되었다.[65] 외교와 전쟁 경험이 풍부한 이 사절단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로 구성되었다.[66]

아테네에 도착한 사절단은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필리포스 5세가 아티카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고 있을 때 아탈루스 1세와 로도스 외교관들을 만났다. 마케도니아 장군과의 만남에서, 사절단은 장군에게 아테네, 로도스, 페르가몬, 아이올리아 동맹을 평화롭게 두고 로도스와 페르가몬과 합의하여 최근 전쟁의 피해를 조정하도록 촉구한 후 아테네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필리포스 5세는 실제로 봉쇄를 벗어나 귀국하여 로마의 최후통첩을 거부하고 아비도스를 포위하기 전 아테네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기원전 200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는 두 번째 최후통첩과 함께 필리포스 5세를 만났고, 이는 그에게 전쟁 상태에 대한 최종 통보였다.[67]

폴리비우스 16.34에 따르면, 원로는 필리포스 5세에게 어떤 그리스 국가와도 전쟁을 벌이지 말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간섭하지 않으며, 아탈루스 1세와 로도스에게 가해진 피해를 중재에 부치라고 명령했다. 만약 필리포스 5세가 이를 거부하면 로마와 즉시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었다. 필리포스 5세는 로도스인들이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했지만, 마르쿠스는 아테네인, 키아니안, 아비데니안을 언급하며 반박했다. 필리포스 5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로마인들에게 조약을 깨거나 전쟁을 벌이지 말 것을 요구하며,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용감하게 자신을 방어할 것이라고 말했다.[67]

이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예상하여 군사 동원과 해군력이 준비되면서, 로마를 위한 동맹국을 모집하는 캠페인이 진행되었고, 삼두 사절단은 연락 역할을 했다. 아이토리아 동맹, 로도스, 아탈루스 왕, 아테네뿐만 아니라 아카이아 동맹도 로마와 연합했다.[68] 방문해야 할 곳이 많았기 때문에, 사절단이 분리되었는지, 언제 분리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세 명의 사절 모두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에게 연락하라는 지시를 이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필리포스 5세와 비밀 협정을 맺은 상태였다. 이집트 방문은 로마의 카르타고 승리를 알리고 로마 동맹의 지속을 보장하는 기회였다. 또한, 그들은 안티오코스 3세의 권력과 군사력을 고려하여 두 왕이 에게 해에 간섭할 수 있는지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절단은 기원전 200년 말이나 기원전 199년 초에 임무를 완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9] 이후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그는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0]

7. 평가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이전 답변은 수정할 수 없습니다. 원문 소스를 제공해주시면 지침에 따라 평가 섹션을 작성하고, 이전 답변의 문제점을 수정해드리겠습니다.)

참조

[1] 서적 The Magistrates of the Roman Republic, Vol. I & II Scholars Press
[2] 서적 The Fifteen Decisive Battles of the World From Marathon To Waterloo http://www.gutenberg[...]
[3] 서적 Hannibal The Riverside Press
[4] 서적 The Magistrates of the Roman Republic, Vol. II Scholars Press
[5] 문서 Life Of Tiberius https://penelope.uch[...]
[6] 문서 https://www.perseus.[...]
[7] 서적 Rome and the Mediterranean 290 to 146 BC Edinburgh University Press
[8] 서적 Hannibal The Riverside Press
[9] 문서 M. Claudius M. f. M. n. Marcellus Little, 1867
[10] 서적 Hannibal The Riverside Press
[11] 문서 https://www.perseus.[...]
[12] 서적 Roman Politics 220-150 B.C. Clarendon Press
[13] 서적 Studies on Scipio Africanus Johns Hopkins Press
[14] 문서 https://www.perseus.[...]
[15] 서적 Hannibal's war : a military history of the Second Punic War Aris and Phillips
[16] 문서 https://www.perseus.[...]
[17] 서적 Roman politics, 220-150 B.C Clarendon Press
[18] 문서
[19] 서적 Roman politics, 220-150 B.C. Clarendon Press
[20] 문서 https://www.perseus.[...]
[21] 문서 Spanish Wars https://www.perseus.[...]
[22] 서적 Hannibal's war : a military history of the Second Punic War Aris and Phillips 1978
[23] 문서 https://www.perseus.[...]
[24] 문서
[25] 서적 Studies on Scipio Africanus Johns Hopkins Press
[26] 서적 Roman Politics 220-150 B.C. Clarendon Press
[27] 서적 Roman politics, 220-150 B.C. Clarendon Press 1951
[28] 서적 Studies on Scipio Africanus Johns Hopkins Press
[29] 서적 Studies on Scipio Africanus Johns Hopkins Press
[30] 문서 https://www.perseus.[...]
[31] 문서 https://www.perseus.[...]
[32] 서적 Roman Politics 220-150 B.C. Clarendon Press
[33] 문서 ibid
[34] 문서 https://www.perseus.[...]
[35] 문서 https://www.perseus.[...]
[36] 문서 op. cit., p. 68
[37] 문서 ibid, p. 66
[38] 웹사이트 26.17 f. https://www.perseus.[...]
[39] 웹사이트 27.34.4 https://www.perseus.[...]
[40] 서적 Ancient Rome: Using Evid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1] 서적 Conflict in Ancient Greece and Rome: The Definitive Political, Social and Military Encyclopaedia ABC-CLIO, LLC
[42] 웹사이트 11.1 https://www.perseus.[...]
[43] 간행물 The day the world trembled: The course of civilisation was determined on the banks of the Metaurus River in 207 BC, when brilliant Roman and Carthaginian generals fought the perfect battle (Rome vs. Carthage) http://go.galegroup.[...] 2002
[44] 웹사이트 27.49 https://www.perseus.[...]
[45] 웹사이트 27.51 https://www.perseus.[...]
[46] 웹사이트 11.2 https://www.perseus.[...]
[47] 웹사이트 27.50.2 https://www.perseus.[...]
[48] 웹사이트 27.51.8 https://www.perseus.[...]
[49] 문서 168
[50] 웹사이트 28.9.10 https://www.perseus.[...]
[51] 웹사이트 28.9.15 https://www.perseus.[...]
[52] 서적 The War with Hannibal Livy
[53] 문서 28.9.17
[54] 서적 Power and process under the republican ”constitution,”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Roman Republic. 2014
[55] 서적 The Oxford Classical Dictionary Oxford 2012
[56] 문서 728
[57] 문서 709
[58] 문서 266
[59] 서적 Census Figures and Population: Counting Romans People, Land and Politics: demographic develop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Roman Italy, 300 BC- AD 14. 2008
[60] 서적 & 웹사이트 State, Society and Popular Leaders in Mid-Republican Rome 241- 167 BC. https://www.perseus.[...] London and New York. 1996
[61] 문서 709
[62] 문서 82
[63] 서적 & 웹사이트 82 https://www.perseus.[...] 1996
[64] 문서 82
[65] 서적 The Magistrates of the Roman Republic, Vol. II Scholars Press 1951
[66] 서적 The Roman War of Antiochos the Great https://books.google[...] Brill 2002
[67] 웹사이트 16.35 http://perseus.uchic[...] 2018-12-26
[68] 서적 The Roman War of Antiochos the Great https://books.google[...] Brill 2002
[69] 서적 The Magistrates of the Roman Republic, Vol. II Scholars Press 1951
[70] 서적 Roman Politics 220-150 B.C. Clarendon Press 1951
[71] 서적 ローマ建国史
[72] 서적 ローマ建国史
[73] 서적 ローマ建国史
[74] 서적 ローマ建国史
[75] 서적 ローマ建国史
[76] 서적 ローマ建国史
[77] 서적 ローマ建国史
[78] 서적 歴史
[79] 서적 ローマ建国史
[80] 서적 ローマ建国史
[81] 서적 ローマ建国史
[82] 서적 歴史
[83] 서적 歴史
[84] 서적 ローマ建国史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