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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삼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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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평 삼충단은 조병세, 민영환, 최익현 세 충신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하다 순국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1910년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가 1989년 복원되었으며, 2005년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매년 11월 25일에 제향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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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삼충단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삼충단 정보
이름삼충단
가평 삼충단
삼충단
국가가평군
유형향토문화재
지정 번호12
지정일1986년 6월 19일
주소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488-1
시대일제강점기

2. 건립 배경

1905년 일제의 강압적인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침탈되자, 이에 항거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들이 있었다. 가평에 은거하던 전 의정대신 조병세, 의병을 일으켜 항전한 최익현, 시종무관이었던 민영환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다 순국하였으며,[1] 가평 삼충단은 이들 세 충신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2. 1. 을사늑약과 국권 침탈

서기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였다. 이에 항거하여 여러 충신들이 목숨을 바쳤다. 당시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있다가 가평에 은거하던 조병세는 이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을사오적 처단과 국권 회복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 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최익현의병을 일으켜 일본군 토벌에 앞장서 싸우다가 체포되었고, 대마도로 끌려가 단식 항거 중 순국하였다. 시종무관(侍從武官)이었던 민영환은 대한문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국권 회복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1]

2. 2. 순국과 항거

조병세는 당시 의정대신이었으나 가평에 은거하던 중,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상경하였다. 그는 을사늑약의 무효와 을사오적 처단, 국권 회복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며 항거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1]

최익현의병을 일으켜 일본군 토벌에 앞장서 싸우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대마도로 끌려가 단식으로 항거하다 순국하였다.[1]

민영환시종무관으로, 대한문 앞에 나아가 석고대죄하며 국권 회복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1]

3. 삼충단의 역사

가평 삼충단은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순국한 조병세, 민영환, 최익현 세 충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추모 시설이다.[1] 일제강점기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이후 1980년대 후반 지역 유지들의 노력으로 복원되었다.[1] 원래 현등사 인근에 있었으나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고,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1]

3. 1. 건립과 이전

1910년, 일제강점기 하에서 가평군의 유지였던 내시부지사 나세환, 첨지 김두환, 현등사 주지 정금명 등은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순국한 조병세, 민영환, 최익현 세 충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삼충단을 처음 건립하였다.[1]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민영환은 그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으며, 최익현은 의병을 조직하여 싸우다 체포되어 1906년 대마도에서 단식 항거 중 순국하였다.[1]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삼충단은 한때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다.[1] 이후 1988년, 뜻있는 지역 유지 39인이 삼충단 복원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듬해인 1989년에 추모비를 복원하고 기념비를 새로 세워 삼충단을 다시 일으켰다.[1]

원래 현등사 일주문 옆에 자리했던 삼충단은 2005년 8월 13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1] 2019년에는 추모비문의 내용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비문을 다시 제작하였다.[1] 삼충단은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1]

4. 관련 인물

가평 삼충단은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하여 순국하거나 자결한 세 명의 충신, 조병세, 민영환, 최익현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제단이다.[1] 이들은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각자의 방식으로 항거하며 충절을 지킨 인물들로, 가평의 유지들이 1910년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삼충단을 건립하였다.[1]

4. 1. 조병세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의정대신이었던 조병세는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당시 가평에 은거하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상경하였다.[1] 그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항거하였다.[1] 그러나 일본 헌병(왜헌)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충절을 보였다.[1] 가평 삼충단은 이러한 조병세 선생을 비롯한 세 충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10년 가평의 유지들이 세운 제단이다.[1]

4. 2. 민영환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시종무관(侍從武官)이었다.[1]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자, 대한문 앞에 나가 석고대죄하며 국권 회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1]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충신이다.[1]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병세, 최익현과 함께 가평군의 삼충단에 모셔졌다.[1]

4. 3. 최익현

최익현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이다.[1]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구 토벌에 앞장서 싸웠다.[1] 그러나 체포되어 대마도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1906년 순국하였다.[1] 가평군의 가평 삼충단은 이러한 최익현의 충절을 조병세, 민영환과 함께 기리기 위해 1910년 가평 유지들에 의해 세워진 제단이다.[1]

5. 문화재 지정

삼충단은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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