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공산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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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도 공산당 사건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까지 만주 간도 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통칭한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의 활동을 배경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의 탄압과 봉천군벌의 압박 속에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무장봉기를 시도했다. 1930년 5월 30일 발생한 5.30 폭동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의 사건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사건은 항일 무장 투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김일성은 5.30 폭동을 극좌모험주의로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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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공산당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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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간도 공산당 사건 |
다른 이름 | 간도 공산당 폭동 훈춘 사건 |
발생일 | 1930년 |
위치 | 간도 |
원인 | 만주사변 이전의 만주 지역에서의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 간의 주도권 다툼, 코민테른의 지령 |
결과 | 간도 지역 조선인 사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 강화 조선공산당 세력 약화 |
관련 세력 | |
관련 단체 | 중국공산당 조선공산당 |
관련 인물 | 불명 |
배경 | |
시대적 배경 | 1930년대 만주 지역 |
정치적 배경 | 만주사변 이전,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주도권 경쟁 |
사건 전개 | |
주요 사건 | 공산주의자들의 조선인 지주, 친일 인사 습격 및 재산 강탈 |
일본의 대응 | 대규모 토벌 작전 개시, 조선인 사회에 대한 감시 및 탄압 강화 |
영향 | |
사회적 영향 | 간도 지역 조선인 사회의 분열 심화, 항일 운동 약화 |
정치적 영향 | 조선공산당의 세력 약화, 일제의 만주 지역 지배 강화 |
논란 | |
역사적 논쟁 | 사건의 성격에 대한 논쟁 (폭동 vs 항일 운동), 희생자 규모에 대한 이견 |
관련 항목 | |
관련 문서 | 중국공산당 조선공산당 만주사변 간도 훈춘 |
2. 배경
간도 공산당 사건은 1926년부터 1930년까지 만주 간도 지역에서 세 차례에 걸쳐 발생한 일련의 사건이다.
1930년 5월 30일, 조선인들은 연길, 용정 등 간도 주요 도시와 철도 연선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일본 영사관 등 관공서와 철도시설, 전력회사 등을 습격하였다. 이어 7월 31일에도 돈화를 중심으로 폭동이 재발하여 1년 이상 간도 각지에서 단속적인 폭동이 벌어졌다. 일본 제국의 군부·경찰은 즉시 간도에 진입하여 진압을 시작했고, 봉천군벌도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일본 측에 의해 7,000명이 체포되어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소되었고, 그중 주현갑, 이동선 등 22명이 치안유지법과 형법 등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폭동으로 인해, 사회주의나 독립운동과 관계없는 일반 조선인들은 간도의 거주지를 잃고 일본 제국의 보호 하에 만주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를 권유받았다 (만보산사건 참조).
무장봉기의 생존자들은 항일유격대로서 만주에서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1931년 저서 「극좌모험주의노선을 배격하고 혁명적 조직노선을 관철하자」[1]에서 “5·30폭동 (간도공산당폭동)”을 “극좌모험주의(객관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급진주의 또는 과격주의)”라고 비판하였다[2].
2. 1. 만주 지역의 항일 운동 기반 조성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은 중앙 집행위원회를 만주, 상해, 일본 총국으로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조봉암, 최원택 등은 1926년 5월 16일 만주 총국을 조직했고, 동시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 총국도 설립되었다.[3]1926년 10월 28일, 조선공산당 만주 총국 동만국 집행위원회는 잡지 『화염』을 2000여 부 발행하였다.[3]
1927년, 만주 총국은 13개 지회와 3개 군회, 43명의 당원으로 성장했고, 고려공산청년회 만주 총국은 군간부 6개소에 59개 세포, 230명의 회원으로 발전하였다.[3]
제1차 간도 공산당 사건 이후, 독립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북풍파벌(북풍회)과 교류하며 1928년 조직을 회복한 후, 노동자 조직 활동을 강화하고 노동 조합·농민 동맹 등의 창설을 장려하였다.[3]
노동 조합·농민 동맹과 청년 총동맹은 김봉익·주채희의 지도 아래 5·1기념 시위 행진과 5·30 유혈사 3주년 강연회를 열어 일본의 만행을 알렸다.[3]
2. 2.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활동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은 중앙집행위원회를 만주, 상해, 일본 총국으로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조봉암, 최원택 등은 1926년 5월 16일 만주 총국을 조직했고, 동시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 총국도 설립되었다.[3]1926년 10월 28일, 조선공산당 만주 총국 동만국 집행위원회는 잡지 『화염』을 2000여 부 발행했다.[3]
1927년, 만주 총국은 13개 지회와 3개 군회, 43명의 당원으로 성장했고, 고려공산청년회 만주 총국은 군간부 6개소에 59개 세포, 230명의 회원으로 발전했다.[3]
2. 3. 2차 간도 공산당 사건의 배경: 북풍파와의 연대
간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반도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간도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해산하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합류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리리산(李立三) 노선과 국제주의 노선에 충실함을 보이기 위해, 일본 제국 세력과 간도를 지배하는 봉천군벌에 대한 무장봉기 계획을 세우고 만주성위원회의 승인을 얻었다. 또한 당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의 군부·경찰의 탄압과 더불어 북벌을 계기로 고조된 민족주의로 인해 현지 당국(봉천군벌)과 중국 민중으로부터 간도 거주 조선인 전체에 대한 배척 운동에 몰리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2. 4. 3차 간도 공산당 사건의 배경: 국내외 정세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이후, 용정의 학생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된 학생들의 소식에 분노하여 시위를 시작했고, 대성, 동흥 중학교 학생들도 반일 투쟁에 합류하면서 시위 규모가 커졌다.[6] 1930년 2월 28일부터 3월 5일까지 용정, 소오도구 등 여러 지역에서 수천 명의 학생과 농민들이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6] 3월 5일, 만주 총국 동만도 간부들은 회의를 통해 '전동만 폭동 위원회'를 결성하고 5월 1일에 전 동만에서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지만, 5월 중순 조선공산당 만주 총국 간부와 혁명 군중 130여 명이 체포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6]간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반도와 마주하고 있었다. 당시 간도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해산하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리리산 노선과 국제주의 노선에 충실함을 보이기 위해 일본 제국과 봉천군벌에 대한 무장봉기 계획을 세우고 만주성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당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의 군부와 경찰의 탄압뿐만 아니라, 북벌 이후 고조된 민족주의로 인해 현지 당국(봉천군벌)과 중국 민중으로부터 간도 거주 조선인 전체에 대한 배척 운동에 직면해 있었다.
3. 사건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반도 맞은편에 위치한 간도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해산하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리리산(李立三) 노선과 국제주의 노선에 충실함을 보이기 위해 일본 제국 세력과 간도를 지배하는 봉천군벌에 대한 무장봉기 계획을 세우고 만주성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당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의 군부·경찰의 탄압과 북벌을 계기로 고조된 민족주의로 인해 현지 당국(봉천군벌)과 중국 민중으로부터 간도 거주 조선인 전체에 대한 배척 운동에 몰리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1930년 5월 30일, 연길, 용정 등 간도 주요 도시와 철도 연선에서 일제히 봉기가 일어나 일본 영사관 등 관공서와 철도시설, 전력회사 등을 습격하였다. 7월 31일에도 돈화를 중심으로 폭동이 재발하여 1년 이상 간도 각지에서 단속적인 폭동이 벌어졌다. 일본 제국 군부·경찰과 봉천군벌은 즉시 간도에 진입하여 진압을 시작했다. 그 결과, 일본 측에 의해 7,000명이 체포되어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소되었고, 그중 주현갑(周現甲), 이동선(李東鮮) 등 22명이 치안유지법과 형법 등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회주의나 독립운동을 명목으로 한 이 폭동과 관계없는 일반 조선인들은 간도의 거주지를 잃고 일본 제국의 보호 하에 만주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를 권유받았다 (만보산사건 참조).
무장봉기의 생존자들은 항일유격대로서 만주에서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인 사회주의자 김일성은 1931년 저서 「극좌모험주의노선을 배격하고 혁명적 조직노선을 관철하자」에서 “5·30폭동 (간도공산당폭동)”을 “극좌모험주의(객관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급진주의 또는 과격주의)”라고 비판하였다.[1][2]
3. 1. 제1차 간도 공산당 사건 (1927)
1927년 10월 2일, 용정의 일본 총영사관은 대성 중학교와 동흥 중학교 교원인 박재하, 임계학 등을 체포하였다. 이에 조선공산당 만주 총국 동만국은 일제의 강압적인 방식에 항의하고 체포된 교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수백 명의 학생들과 시위행진을 벌였다. 학생들은 붉은기를 들고 삐라를 뿌리며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은 지방 군경과 협력하여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책임 비서 대리 겸 조직부장 최원택과 동만국 책임 비서 안기성 등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4]3. 2. 제2차 간도 공산당 사건 (1928)
1928년 9월 2일, 동만도 청년 간부 이정만 등이 국제 청년절 기념 활동을 이용하여 삐라를 뿌리고 표어를 붙이며 각종 강연회와 군중 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시위행진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비판하고 일본 경찰의 강압적인 체포 방식에 항의하였다. 이에 일본 총영사관은 일본 군경을 동원하여 고려 공산당 청년회 만주 총국 동만도 간부이자 책임 비서인 이정만 등 72명의 간부와 군중을 체포하였다.[5]3. 3. 제3차 간도 공산당 사건 (5.30 폭동, 1930)
제3차 간도 공산당 사건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이후 일본 경찰에 학생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한 용정 지역 학교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대성, 동흥 중학교 학생들도 반일 투쟁에 가담하면서 시위 규모가 커졌다. 1930년 2월 28일부터 3월 5일까지 용정, 소오도구, 내퐁동, 대동구, 4도구, 2도구, 3도구, 약수동 등지에서 수천 명의 학생과 농민들이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5일, 만주 총국 동만도 간부들은 회의를 열어 '3.1 폭동 11주년 기념 준비위원회'를 '전동만 폭동 위원회'로 바꾸고, 5월 1일 전 동만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5월 중순 조선공산당 만주 총국 간부와 혁명 군중 130여 명이 체포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6]3. 3. 1. 5.30 폭동의 전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반도의 맞은편에 위치한 간도에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해산하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리리산(李立三) 노선과 국제주의 노선에 충실함을 보이기 위해, 일본 제국 세력과 간도를 지배하는 봉천군벌에 대한 무장봉기 계획을 세우고 만주성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당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의 군부·경찰의 탄압과 북벌을 계기로 고조된 민족주의로 인해 현지 당국(봉천군벌)과 중국 민중으로부터 간도 거주 조선인 전체에 대한 배척 운동에 몰리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1930년 5월 30일, 연길, 용정 등 간도 주요 도시와 철도 연선에서 일제히 봉기가 일어나 일본 영사관 등 관공서와 철도시설, 전력회사 등을 습격하였다. 7월 31일에도 돈화를 중심으로 폭동이 재발하여 1년 이상 간도 각지에서 단속적인 폭동이 벌어졌다. 일본 제국 군부·경찰과 봉천군벌은 즉시 간도에 진입하여 진압을 시작했다. 그 결과, 일본 측에 의해 7,000명이 체포되어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소되었고, 그중 주현갑(周現甲), 이동선(李東鮮) 등 22명이 치안유지법과 형법 등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회주의나 독립운동을 명목으로 한 이 폭동과 관계없는 일반 조선인들은 간도의 거주지를 잃고 일본 제국의 보호 하에 만주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를 권유받았다 (만보산사건 참조).
무장봉기 생존자들은 항일유격대로서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이후 조선인 사회주의자 김일성은 1931년 저서 「극좌모험주의노선을 배격하고 혁명적 조직노선을 관철하자」[1]에서 “5·30폭동 (간도공산당폭동)”을 “극좌모험주의(객관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급진주의 또는 과격주의)”라고 비판하였다[2].
3. 3. 2. 봉천군벌의 탄압
1930년 5월 30일, 간도 주요 도시인 연길, 용정(竜井) 등지와 철도 연선에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일본 영사관 등 관공서와 철도시설, 전력회사 등을 습격하였다. 이어 7월 31일에도 돈화(敦化)를 중심으로 폭동이 재발하여 1년 이상 간도 각지에서 단속적인 폭동이 벌어졌다. 일본 제국의 군부·경찰은 즉시 간도에 진입하여 진압을 시작했고, 봉천군벌도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일본 측에 의해 7,000명이 체포되어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소되었고, 그중 주현갑(周現甲), 이동선(李東鮮) 등 22명이 일본의 치안유지법과 형법 등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1]4. 조선공산당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17일 창건된 공산주의 정당이다.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이 조선인 유학생들에 의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공산주의가 조선인들 사이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고,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몰락한 양반과 민족주의 계열 등이 중심이 되어 창당되었다.
4. 1. 조선공산당 창당 목적과 활동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17일 창건된 공산주의 정당이다.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이 조선인 유학생들에 의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공산주의가 조선인들 사이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고,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몰락한 양반과 민족주의 계열 등이 중심이 되어 창당되었다.[1]
조선공산당은 국제공산당의 한 지부로서 폭력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조선 문제에 있어서는 공산당 지도 아래 노동자, 농민의 결합으로 공동전선을 전개하고, 일본제국의 통치를 변혁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려 하였다.[1]
세계 프롤레타리아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의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도모해야 했다. 민족문제 해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일부로 보았다. 조선에서의 혁명적 의의는 이와 같이 이해되어야 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민족운동을 원조하고, 전술로서 민족주의적 단체와 제휴하여 이를 이용하였다. 노동운동, 소작쟁의, 학교의 맹휴도 그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그 조직에서는 각 방면의 야체이카를 부식하고, 모든 표현단체에 프락치를 만들었다.[1]
4. 2. 조선공산당의 민족 운동 전략
조선공산당은 국제공산당의 한 지부로서 폭력혁명을 통해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조선 문제에 있어서는 공산당의 지도 아래 노동자와 농민을 결합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일본제국의 통치를 변혁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려 했다.세계 프롤레타리아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의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이루어야 했다. 민족 문제 해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일부로 여겨졌다. 조선에서의 혁명적 의의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는 민족운동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전술로서 민족주의 단체와 제휴하여 이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노동운동과 소작쟁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학교의 맹휴(동맹휴학)도 그 대상이었다. 이를 위해 각 방면에 야체이카(세포조직)를 만들고, 모든 표현단체에 프락치(세작)를 심었다.
5. 고려공산청년회
고려공산청년회는 1925년 조선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총 지도기관 역할을 한 비밀지하단체이다.[7] 조선 공산당 창건 다음 날인 1925년 4월 18일, 서울 훈정동 4번지 박헌영의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표회가 개최되었다.
5. 1. 고려공산청년회의 활동 목표와 조직
고려공산청년회는 1925년 조선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총 지도기관 역할을 한 비밀지하단체이다. 1925년 4월 18일, 조선 공산당 창건 다음 날, 서울 훈정동 4번지 박헌영의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청년단체의 '30세 연령제한'과 군연맹, 도연맹, 총동맹의 청년단체 조직 방침, 그리고 '노력군중'을 중심으로 한 혁명적 민족주의자 및 혁명적 종교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조선혁명 등의 목표를 가지고 사회운동을 실시하였다.[7]6. 결과 및 영향
간도 공산당 사건은 간도 지역의 공산주의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되었지만, 동시에 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측의 기록에 따르면 7,000명이 체포되고 700명 이상이 기소되었으며, 주현갑(周現甲), 이동선(李東鮮) 등 22명이 치안유지법과 형법 등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폭동과 관계없는 일반 조선인들은 거주지를 잃고 일본 제국의 보호 하에 만주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권유받기도 했다 (만보산사건 참조).
무장봉기 생존자들은 항일유격대로 활동하며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계속 이어갔다. 훗날 김일성은 이 사건을 "극좌모험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1][2]
6. 1. 간도 지역 독립운동의 타격
간도 공산당 사건은 1차, 2차, 3차에 걸쳐 발생했으며, 이 사건으로 간도 지역의 공산주의 독립 운동가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폭로하려는 시위는 번번이 무산되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시위 행진과 독립 투쟁이 증가하였다.1930년 5월 30일, 연길, 용정(竜井) 등 간도 주요 도시와 철도 연선에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일제히 봉기하여 일본 영사관 등 관공서와 철도시설, 전력회사 등을 습격하였다. 7월 31일에도 돈화(敦化)를 중심으로 폭동이 재발하여 1년 이상 간도 각지에서 단속적인 폭동이 벌어졌다. 일본 제국의 군부·경찰은 즉시 간도에 진입하여 진압을 시작했고, 봉천군벌도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일본 측에 의해 7,000명이 체포되어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소되었고, 그중 주현갑(周現甲), 이동선(李東鮮) 등 22명이 치안유지법과 형법 등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회주의나 독립운동의 명목을 빌린 이러한 폭동과 관계없는 일반 조선인들은 이 폭동으로 인해 간도의 거주지를 잃고 일본 제국의 보호 하에 만주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를 권유받았다 (만보산사건 참조).
무장봉기의 생존자들은 항일유격대로서 만주에서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인 사회주의자 김일성은 1931년 저서 「극좌모험주의노선을 배격하고 혁명적 조직노선을 관철하자」[1]에서 “5·30폭동 (간도공산당폭동)”을 “극좌모험주의(객관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급진주의 또는 과격주의)”라고 비판하였다[2].
6. 2. 만주 지역 항일 무장 투쟁의 시발점
간도 지역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Коминтерн)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해산하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리리산(李立三) 노선과 국제주의 노선에 충실함을 보이기 위해, 일본 제국 세력과 간도를 지배하는 봉천군벌에 대한 무장봉기 계획을 세우고 만주성위원회의 승인을 얻었다. 당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의 군부·경찰의 탄압과 북벌을 계기로 고조된 민족주의로 인해 현지 당국(봉천군벌)과 중국 민중으로부터 간도 거주 조선인 전체에 대한 배척 운동에 직면해 있었다.[1]1930년 5월 30일, 연길, 용정(竜井) 등 간도 주요 도시와 철도 연선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일본 영사관 등 관공서와 철도시설, 전력회사 등을 습격하였다. 이어 7월 31일에도 돈화(敦化)를 중심으로 폭동이 재발하여 1년 이상 간도 각지에서 단속적인 폭동이 벌어졌다. 일본 제국의 군부·경찰은 즉시 간도에 진입하여 진압을 시작했고, 봉천군벌도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일본 측에 의해 7,000명이 체포되어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소되었고, 그중 주현갑(周現甲), 이동선(李東鮮) 등 22명이 치안유지법과 형법 등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회주의나 독립운동의 명목을 빌린 이러한 폭동과 관계없는 일반 조선인들은 이 폭동으로 인해 간도의 거주지를 잃고 일본 제국의 보호 하에 만주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를 권유받았다 (만보산사건 참조).[1]
무장봉기의 생존자들은 항일유격대로서 만주에서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1]
이후 조선인 사회주의자 김일성은 1931년 저서 「극좌모험주의노선을 배격하고 혁명적 조직노선을 관철하자」에서 “5·30폭동 (간도공산당폭동)”을 “극좌모험주의(객관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급진주의 또는 과격주의)”라고 비판하였다.[2]
6. 3. 노선 갈등과 비판
리리산(李立三) 노선과 국제주의 노선에 충실함을 보이기 위해, 일본 제국 세력과 간도를 지배하는 봉천군벌에 대한 무장봉기 계획을 세우고 만주성위원회의 승인을 얻었다. 당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의 군부·경찰의 탄압과 더불어 북벌을 계기로 고조된 민족주의로 인해 현지 당국(봉천군벌)과 중국 민중으로부터 간도 거주 조선인 전체에 대한 배척 운동에 몰리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1]무장봉기 생존자들은 항일유격대로서 만주에서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1]
이후 조선인 사회주의자 김일성은 1931년 저서 「극좌모험주의노선을 배격하고 혁명적 조직노선을 관철하자」에서 “5·30폭동 (간도공산당폭동)”을 “극좌모험주의(객관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급진주의 또는 과격주의)”라고 비판하였다.[2]
6. 4. 일반 조선인들의 피해
1930년 5월 30일,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연길, 용정(竜井) 등 간도 주요 도시와 철도 연선에서 봉기하여 일본 영사관 등 관공서와 철도시설, 전력회사 등을 습격하였다. 이어 7월 31일에도 돈화(敦化)를 중심으로 폭동이 재발하여 1년 이상 간도 각지에서 단속적인 폭동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나 독립운동과 관계없는 일반 조선인들은 간도의 거주지를 잃고 일본 제국의 보호 하에 만주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를 권유받았다 (만보산사건 참조).[2]참조
[1]
웹사이트
極左冒険主義路線を排撃し、革命的組織路線を貫徹しよう - CiNii
https://ci.nii.ac.jp[...]
[2]
웹사이트
金日成 - 延吉県明月溝で開かれた党および共青幹部会議でおこなった演説
http://kcyosaku.web.[...]
[3]
웹인용
세계한민족문화대전
http://www.okpedia.k[...]
2019-12-0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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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민족문화대전
http://www.okpedi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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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민족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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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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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민족문화대전
http://www.okpedi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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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웹인용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9-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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