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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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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도 참변은 1920년 일제가 독립군 토벌을 명분으로 만주 간도 지역의 한국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3.1 운동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일본군을 만주로 출병시켰다. 이후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보복으로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했고, 3~4개월 동안 수많은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학살당했으며, 일본군은 교회를 불태우고 기독교인을 학살하는 등 종교 탄압도 자행했다. 간도 참변으로 인해 일본의 만행이 국제 사회에 알려지면서 비판 여론이 일었고, 일제는 군대를 철수했지만, 간도 파견대를 남겨 독립운동 탄압을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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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참변
사건 개요
사건명간도 학살
다른 명칭간도 참변
경신 참변
경신 간도 학살 사건
간도 사건 (일본어: 間島事件, Kantō jiken)
위치만주 동부
목표중국 내 한국인
국민군 병력
좌표좌표 정보 누락
날짜1920년 10월 ~ 1921년 4월
시간대시간대 정보 누락
유형집단 학살
사망자최소 5,000명의 민간인 사망
부상자미상
가해자일본 제국 육군
사용 무기총, 일본도, 죽창
동기동기 정보 누락
관련 정보
관련 사건간토 대학살
캠페인
관련 캠페인한국 독립 운동
일본어 명칭
간토 사건kanji: 間島事件
hiragana: かんとうじけん
로마자 표기: Kantō jiken
한국어 명칭
경신 간도 학살 사건hangul: 경신간도학살사건
hanja: 庚申間島虐殺事件
로마자 표기: Gyeongsin gando haksalsageon
매큔-라이샤워 표기: Kyŏngsin kando haksalsagŏn
간도 참변hangul: 간도참변
hanja: 間島慘變
로마자 표기: Gando chambyeon
매큔-라이샤워 표기: Kando ch'ambyŏn
경신 참변hangul: 경신참변
hanja: 庚申慘變
로마자 표기: Gyeongsin chambyeon
매큔-라이샤워 표기: Kyŏngsin ch'ambyŏn

2. 배경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에서는 한국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수많은 독립군 양성기관이 세워지고 무장 부대가 조직되었으며, 이들은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하여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 기관에 타격을 주었다. 일본은 중국 군벌을 회유하여 독립군 합동 토벌을 시도했으나,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저항과 중국 군대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패배한 일본 제국은 만주의 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 투입을 계획했다.[4] 일본은 정규군 파병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훈춘 사건을 조작하였다.

일본은 조작된 훈춘 사건을 빌미로 대규모 병력을 간도로 출병시켜 한국 독립군 소탕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독립군은 이미 병력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일본군의 추격을 피했고, 작전은 초기부터 차질을 빚었다. 더욱이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에게 크게 패배하자,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 대신 간도 지역의 무고한 한인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5][4]

2. 1. 훈춘 사건 조작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에서는 한국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하여 일본 제국의 통치 기관을 공격하는 등 큰 위협이 되었다. 일본은 중국 군벌을 회유하여 합동 토벌을 시도했으나, 만주 거주 조선인들의 저항과 중국 군대의 소극적인 태도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은 일본은, 독립군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대규모 정규군 투입을 결정하고 이른바 '간도 지방 불령 선인 초토 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웠다. 이 계획에 따라 약 18,000명 규모로 추산되는 병력을 간도로 보내려 했으나, 정식 파병을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4]

이에 일본은 만주 출병 구실을 만들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음모를 꾸몄다. 1920년 10월, 일본은 중국인 마적 두목 長江好|창장하오zho를 매수하여 훈춘을 공격하도록 사주했다. 10월 2일, 약 400명의 마적단은 계획대로 훈춘 시내를 습격하여 4시간 동안 살인과 약탈, 방화를 저질렀다. 이 공격으로 중국인 70여 명, 조선인 7명, 일본인 수 명이 목숨을 잃었고, 미리 사람을 비워둔 훈춘 일본 영사관 건물이 불탔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작한 이 훈춘 사건을 빌미로 즉각 행동에 나섰다. 사건 발생을 기다렸다는 듯이 3개 사단 규모의 대규모 병력을 간도로 출병시켰다.[4] 이 침공은 한국 독립군을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이루어졌으며, 이후 무고한 한국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 즉 간도 참변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시작이었다.[5][4]

3. 일본군의 만행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만주 출병을 계획했다. 그러나 정식 출병 명분이 없었던 일제는 1920년 10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하는 훈춘 사건을 조작했다.[4]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약 1만 8천여 명으로 추산되는 대규모 병력을 간도 지역에 투입했다.[4]

하지만 한국 독립군은 일본군의 침공 이전에 이미 병력을 산악 지대나 중국-소련 국경 지대로 이동시켜 일본군의 초기 '토벌'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특히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 등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4][5]

청산리 전투에서의 패배는 일본군의 잔혹한 보복으로 이어졌다. 독립군 소탕에 실패한 일본군은 그 분풀이를 간도 지역에 거주하던 무고한 한인들에게 돌렸다. 1920년 10월부터 약 3~4개월간 일본군은 소위 '간도 지방 불령 선인 초토 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이라는 명목 아래 무차별적인 학살,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5][4]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한인 마을이 불타고 폐허로 변했으며, 재산과 식량이 약탈당했다. 일본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인들을 학살했으며, 특히 남성들을 집단으로 살해하고 여성들을 강간 후 살해하는 등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5][4]

이 '경신참변' 또는 '간도참변'이라 불리는 학살로 인해,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약 한 달간 확인된 희생자만 3,469명에 달하며, 전체 기간 동안의 피해자는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군의 만행은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에게도 유사하게 자행되었다.

이러한 참상은 당시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목격담과 기록을 통해 외부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영국 선교사 스탠리 마틴 등은 이 참상을 국내외 언론에 알리려 노력했다.[4] 또한,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은 현장을 취재하던 중 실종되었는데,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그를 살해한 것으로 여겨진다.[5]

3. 1. 학살과 방화

독립군이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산악 지대나 중·소 국경 지대로 이동하면서 일본군의 독립군 섬멸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특히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패배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지역의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작전은 3~4개월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수많은 조선인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의 재산과 식량이 약탈당했다. 일본군은 눈에 띄는 조선인들을 발견하는 즉시 학살했다. 예를 들어, 옌지현[延吉縣] 이란거우[依蘭溝]에서는 마을 주민 30여 호가 모두 살해되고 마을 전체가 폐허로 변했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약 27일 동안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조선인의 수는 확인된 것만 3,469명에 달한다.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와 전체 학살 기간 동안의 피해를 고려하면, 적어도 수만 명의 조선인이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이러한 만행을 노령 연해주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자행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인 마을을 포위하여 남성들을 한곳에 모아 총이나 창으로 학살했으며, 여성들을 그 자리에서 강간하고 살해했다. 또한 모든 집을 불태우고 가축을 약탈하여 마을을 철저히 파괴했다.[5][4]

일본 육군 제19사단은 북간도 지역을 침략하여 북간도국민회의 병영과 간부 훈련소를 불태웠다. 1920년 10월 말에는 연해주에서 온 일본 육군 제14사단 제15연대 제3대대 소속 병력 77명이 용정촌 북쪽 25리 지점의 장감동에 침입하여 '장감동 참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던 주민들을 교회에 강제로 모았다. 일본군은 기독교인 28명을 총살 연습 대상으로 삼아 살해했으며, 연길현 우이란구에서는 약 30가구 주민 전체를 학살하고 한 집안의 형제 4명을 살해했다. 장감동에서는 학살한 33명의 시신을 교회 안에 모아놓고 짚단을 쌓은 뒤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교회가 화염에 휩싸이자 불길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찔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5][4]

일본군이 철수한 후, 충격에 빠진 유족들은 불에 탄 시신을 수습하여 간신히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5~6일 뒤 일본군이 다시 마을을 공격하여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들을 한 곳에 모으도록 강요했다. 유족들은 얼어붙은 땅을 파서 시신들을 다시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이번에는 시신 위에 짚단을 쌓고 기름을 부어 숯과 재가 될 때까지 불태웠다. 두 차례의 학살과 시신 소각으로 인해 유족들은 시신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희생자들을 함께 묻는 합장묘를 만들었다.[4]

또한 1920년 10월 19일, 일본군은 화룡현 북장패 마을의 촌장 이용점과 농부 장두환, 신국현, 김종민을 체포하여 풍돌령에서 살해했다. 같은 날 화룡현 송언둔(宋堰屯)에 침입하여 집을 수색하고 지계순 등 14명을 학살한 후, 시신에 기름을 뿌려 불태우는 '송언동 학살'을 자행했다.[4]

백운평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백운평 마을 23가구에 살던 유아를 포함한 모든 남성을 학살했으며, 10월 20일에는 명동학교를 불태웠다. 연길현 와룡동에서는 교사를 체포하여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는 등 신원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고문하여 살해했다. 이 외에도 어린아이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시체를 불태우거나, 어린 소녀를 폭행하여 살해하는 등 잔혹한 행위가 끊이지 않았다.[5]

이러한 일본군의 잔혹 행위는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생생하게 폭로되었다. 학살을 목격한 한 미국 선교사는 "피로 물든 만주의 땅은 인류 역사의 저주받은 페이지"라고 기록했으며, 마틴(S.H. Martin)과 푸트(Foote) 선교사의 회고록에도 이러한 참상이 증언되어 있다.

한편,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에 갔던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의 실종 및 암살 역시 일본군이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저지른 사건으로 여겨진다.[5] 또한, 영국 선교사 스탠리 마틴 박사 등에 의해 이러한 참상이 국내외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4]

3. 2. 종교 탄압

일본군은 한국인 마을을 포위하여 남성들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강간, 살해했으며, 가옥을 불태우고 가축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5][4] 특히 종교 시설과 신자들에 대한 탄압도 자행되었다.

일본 육군 제19사단은 북간도 지역에서 북간도국민회의 병영과 간부 훈련소를 불태웠다.[5][4] 1920년 10월 말, 연해주에서 온 일본 육군 제14사단 제15연대 제3대대 병력 77명은 용정촌 북쪽 25리 지점의 장감동에서 참혹한 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은 기독교인이 다수였던 주민들을 교회에 강제로 모았다. 이후 기독교인 28명을 총살 연습 대상으로 삼아 살해했으며, 교회 안에 짚단을 쌓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불길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은 일본군에게 찔려 살해당하는 등 끔찍한 만행이 벌어졌다.[5][4]

학살 후 일본군이 철수하자 유족들은 불탄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으나, 5~6일 뒤 일본군이 다시 마을을 공격하여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한데 모아 불태우도록 강요했다. 이로 인해 유족들은 시신의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되어 합장묘를 만들어야 했다.[4]

이러한 일본군의 잔혹 행위는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기록되고 폭로되었다. 학살을 목격한 한 미국 선교사는 "피로 물든 만주의 땅은 인류 역사의 저주받은 페이지"라고 개탄했으며, 마틴(Martin, S.H.)과 푸트(Foote) 선교사의 회고록에도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국 선교사 마틴(Minsanhae) 박사는 이러한 만행을 국내외 언론에 알렸다.[4]

한편,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하던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의 암살 역시 일본군이 사건을 은폐하려 한 정황 중 하나로 여겨진다.[5]

3. 3. 기타 만행

일본군은 한국인 마을을 포위하여 남성들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강간, 살해했으며 가옥을 불태우고 가축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5][4]

일본 육군 제19사단은 북간도 지역을 침략하여 북간도국민회의 시설을 파괴했으며, 1920년 10월 말에는 장감동 참변을 일으켰다. 연해주에서 온 일본 육군 제14사단 병력은 용정촌 인근 장감동에 들어가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마을 사람들을 교회에 강제로 모았다. 일본군은 기독교인 28명을 총살 연습 대상으로 삼아 학살했으며, 연길현 우이란구에서는 약 30가구 주민 전체와 형제 4명을 살해했다. 이후 33명을 교회 앞에 무릎 꿇린 뒤, 교회에 불을 질러 학살하고 불길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찔러 죽이는 잔혹함을 보였다.[5][4]

참변 이후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으나, 며칠 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공격하여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도록 강요했다. 일본군은 모아진 시신에 기름을 뿌려 불태워 훼손했으며, 유족들은 남은 유해를 모아 합장묘를 만들어야 했다.[4]

또한 1920년 10월 19일, 일본군은 화룡현 북장패 마을 촌장 이용점 등 4명을 체포하여 살해하고, 송언둔에서는 지계순 등 14명을 학살한 후 시신을 소각하는 '송언동 학살'을 자행했다.[4]

백운평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백운평 마을 23가구의 유아를 포함한 모든 남성을 학살했으며, 10월 20일에는 명동학교를 불태웠다.[5] 연길현 와룡동에서는 교사를 체포하여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는 고문을 가했으며, 어린아이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거나 어린 소녀를 폭행하여 살해하는 등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5]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은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학살을 목격한 한 미국 선교사는 "피로 물든 만주의 땅은 인류 역사의 저주받은 페이지"라고 기록했으며, 마틴(S.H. Martin)과 푸트(Foote) 선교사의 기록에도 생생히 남아있다. 영국 선교사 마틴 박사는 이를 국내외 언론에 알리기도 했다.[4]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하던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이 암살된 사건 역시 일본군이 참상을 은폐하려 한 정황으로 여겨진다.[5]

4. 피해 규모

독립군이 사전에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산중이나 중국·소련 국경 지대로 이동하면서 일본군의 독립군 섬멸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특히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오히려 독립군에게 패배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은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하였으며, 조선인들을 발견하는 대로 학살했다. 옌지현[延吉縣] 이란거우[依蘭溝]에서는 마을 주민 30여 호 전체가 살해당하고 마을이 완전히 폐허로 변하는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약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조선인의 수는 확인된 것만 3,469명에 이른다. 확인되지 않은 피해자와 3~4개월간 지속된 학살 전체를 고려하면, 피해를 입은 조선인은 적어도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이러한 만행을 연해주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저질렀다.

5. 국제 사회의 반응

일본군의 이러한 잔혹한 만행은 만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생생하게 폭로되었다. 일본군의 학살을 목격한 한 미국 선교사는 "피로 물든 만주의 땅은 인류 역사의 저주받은 페이지"라고 한탄했으며, 이는 마틴(Martin, S.H.)과 푸트(Foote) 선교사의 회고록에서 생생하게 증명된다.

또한,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에 갔던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의 암살 역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은폐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로 여겨진다.[5] 한편, 회사를 운영했던 영국 선교사 마틴(Minsanhae) 박사에 의해 참변의 실상이 국내외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4]

6. 사건의 여파

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무차별적인 학살로 인해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되었다.[5] 이러한 참혹한 만행은 일본 국내외적으로 큰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일본 정부는 1920년 12월 20일, 간도 지역에서 주력 부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철수가 아니었으며, 일본은 일부 부대와 정보 조직을 남겨 독립운동 세력을 감시하고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시도했다.[4] 간도참변은 만주 지역 독립운동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한인 사회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6. 1. 일본군의 철수와 영향력 유지 시도

경신참변으로 인해 일본 국내외에서 일본군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 정부는 1920년 12월 20일 간도에서 주력 부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간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병행했다. 철수 결정 직전인 12월 16일, 제19사단의 일부 부대를 '간도파견대'로 명명하였고, 같은 해 12월 31일 이를 정식으로 조직하여 현지에 남겨두었다. 간도파견대는 독립운동 세력을 수색하고 용정, 국자가, 백초구, 두도구, 의란구 등지에서 발생하는 탈주병 문제를 처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4]

또한, 1921년 2월에는 용정, 두도구, 백초구, 천보산 지역을 연결하는 간도 연락반을 추가로 조직하여 정보 활동을 강화했다. 이 연락반은 1921년 5월, 잔류 부대가 완전히 철수한 이후에도 '연락사무소'로 명칭을 바꾸어 활동을 지속하며, 간도 지역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4]

6. 2.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패배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지역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근거지를 파괴하고 한인 사회를 위축시키려는 의도였다. 일본군은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했으며, 조선인들을 발견하는 대로 학살했다. 예를 들어, 옌지현 이란거우에서는 마을 주민 전체가 살해당하고 폐허로 변하기도 했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약 한 달간 확인된 학살 피해자만 3,469명에 달하며[5], 전체 기간 동안의 피해 규모는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참혹한 학살은 만주 지역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경신참변으로 인해 국내외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1920년 12월 20일 간도에서 주력 부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완전히 물러나지 않고, 12월 16일 제19사단 일부를 '간도파견대'로 명명하고 12월 31일 조직하여 현지에 남겨두었다. 이 간도파견대는 독립운동 세력을 수색하고 용정, 국자가, 백초구, 두도구, 의란구 등지에서 탈주병 문제를 처리하는 데 집중했다. 또한 1921년 2월, 일본은 용정, 두도구, 백초구, 천보산을 연결하는 간도 연락반을 조직하여 정보 활동을 수행했으며, 1921년 5월 잔류 부대가 완전히 철수한 후에도 연락반을 '연락사무소'로 개칭하고 활동을 지속하며 간도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4] 이는 간도참변 이후에도 일본이 만주 지역 독립운동을 억압하려는 의도를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7. 대중문화

참조

[1] 백과사전 경신참변 http://encykorea.aks[...]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8-03-03
[2] 서적 A New Modern History of East Asia https://books.google[...] V&R unipress GmbH 2017-12-04
[3] 서적 Origins of North Korea's Juche: Colonialism, War, and Development https://books.google[...] Lexington Books 2012-12-07
[4] 웹사이트 간도 참변 http://www.okpedi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09-25
[5] 웹사이트 한국 독립군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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