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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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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홍립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진주 강씨 가문 출신이다. 1597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거쳤으며, 1618년 후금 정벌을 위해 파병된 조선군의 도원수가 되었다. 광해군의 밀명을 받아 후금에 투항하여 중립 외교를 시도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억류되었다가 정묘호란 때 귀국했다. 이후 후금에 협력했다는 의심을 받았으나, 1627년 사망 후 관작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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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립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강홍립
한자 표기姜弘立
로마자 표기Gang Hongrip
군신(君信)
내촌(耐村)
생애
출생1560년
사망1627년 9월 6일 (음력)
가족 관계
가문진주 강씨
아버지강신
어머니동래 정씨
배우자우주 황씨
자녀2남 3녀
관직
작위조선의 도원수

2. 생애

2. 1. 생애 초기

강홍립은 경기도 시흥 출신으로 본관은 경상남도 진주 (진주 강씨)이다.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이다. 고려 시대부터 명문가였던 진주 강씨 가문에서 태어나, 조부 강사상(姜士尚)은 선조 때 우의정을, 아버지 강신(姜紳)은 우찬성을 지냈다.

1589년,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597년 문과 알성시에 병과 1등위로 급제하여 설서, 검열 등을 역임하고, 1599년 함경도 도사, 1601년 성균관 전적, 공조정랑, 1602년 사헌부장령, 홍문관 수찬을 거쳤다. 1604년 교리, 부수찬, 성균관사예를 거쳐 1605년 청난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같은 해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이 되었고,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6년 예조정랑, 부교리, 1607년 성균관 직강, 내자시정, 수찬을 지냈다. 1608년 보덕(輔德)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 우윤(右尹)이 되었다.

2. 2. 관료 생활

1589년(선조 22년),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597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설서, 검열 등의 관직을 거쳤다. 1605년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원년인 1608년임해군을 처리한 공으로 보덕(輔德)의 벼슬을 얻었다. 1609년 7월 한성부 우윤,[2] 11월에는 함경남도 병마절도를 제수받았다.[3] 1610년 남병사, 황주부사, 1611년 수원부사를 지내고,[4] 1614년(광해군 7년)에 순검사(巡檢使)를 역임했다. 1618년 아버지의 공신호를 계승하여 진녕군(晉寧君)에 봉해졌다.[5] 이어 형조참판, 좌참찬, 한성판윤을 지냈다. 본관은 진주( 진주 강씨)이며,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이다.

2. 3. 부차 전투와 투항

1618년(광해군 11년) 윤4월 23일 명나라요동반도를 침범한 후금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강홍립은 5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출정했다.[6] 1619년 명나라가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하고, 이어 상간하다, 아부달리에서 잇달아 각개 격파를 당하고, 이어 유정과 강홍립이 이끄는 조명연합군도 부차 전투에서 기상 악화로 패배하였다.[6]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좌영, 우영, 중영 삼영으로 나눴는데, 조선군의 강홍립은 조총과 장창으로 전면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를 맞아 싸웠으나, 강한 역풍으로 인해 불이 꺼지고, 화기의 연기에 시야를 빼앗겼다.[6] 그 틈을 이용해 후금군 기병이 돌격하여 선봉부대를 돌파하였다. 이때 좌영을 방어하던 조선군 장수 김응하가 전사하였다.[6] 명군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밤이 되자 조선군 중영 본영은 5,000명만이 고립되어 포위되었다. 후금은 조선군에 항복을 권했고, 결국 이틀을 굶은 강홍립과 조선군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투항했다.[6] 조선군의 투항 사실을 알게 된 명군의 장교는 자살하고 동남로군은 소멸했다.[6]

광해군임진왜란(文禄・慶長の役)과 정유재란(丁酉再乱)에서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받은 은혜가 있어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여러 차례 망설였으나, 결국 조정에서는 명분론이 우세해지면서 파병을 결정했다.[6] 강홍립은 세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려 사양했지만, 광해군은 만일의 경우에는 항복하라는 밀지를 내리고 강홍립에게 5도 도원수의 직책과 1만 3천 명의 병력을 주어 출정시켰다.[6] 그는 일찍이 광해군의 밀지를 받고 명-후금과의 싸움에 출전, 후금에 거짓 투항함으로써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성사시켰다.[7]

1619년, 조선군은 유정(劉綎)의 남로군에 속해 후금의 수도 헤투알라를 향했지만, 강홍립은 극비리에 통사를 헤투알라에 보내 조선의 이번 출병은 본의가 아니었다고 전했다.[6] 또한 정응정을 풀어서 조선에 소식을 알렸다.[9] 그리고 애초부터 강홍립은 청군과의 교전에서 궁사들로 하여금 화살촉을 뺀 빈 막대기를 활에 넣어 쏘도록 하여 명을 도와줄 수 밖에 없는 처지를 청에게 알리도록 조치했다. 5월 15일 조선 조정에서는 그의 관직(부윤)을 삭제했고, 가족을 구금하라고 광해군에게 청했으나 그것은 들어주지 않았다.[8]

2. 4. 후금 억류와 정묘호란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정권을 잡았다.[10] 1624년 이괄의 난 때 반란을 주도했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 형제가 후금에 투항하여 강홍립 휘하로 들어갔다.[10] 이들은 머리를 깎고 성을 바꾸는 등 완전히 청나라에 귀화하여 그곳에서 청나라인과 결혼했다.[10]

1627년 1월 4일 후금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공격했고, 조선은 강화를 제의했다.[7] 후금은 전쟁 장기화를 원치 않아 교섭에 응했는데,[7] 이때 강홍립이 막후에서 외교 수완을 발휘했다.[7] 1627년 3월 3일 정묘호란 때 후금군과 함께 의주를 공략하고 내려온 강홍립은 조선이 항복하자 8년 만에 귀국하였다.[11] 한윤과 한택도 이때 후금군으로 같이 내려왔다.[11]

조정에서는 강홍립이 후금의 앞잡이로 정묘호란을 선도했다는 의심도 있었지만,[12] 비국은 그가 10년간 절개를 지켰다고 인조에게 보고했다.[13] 그러나 서인 중심의 조정에서는 강홍립이 항복한 것을 들어 참수를 주장했다.[14] 인조는 강홍립과 박난영이 변발을 하지 않고 뜻을 꺾지 않았음을 들어 관직 회복을 지시했다.[15]

1627년 9월 6일 (음력 7월 27일) 강홍립은 병으로 사망했다.[16] 인조는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장례 물품을 지원했다.[16] 강홍립 사후 청나라에서 첩으로 주었던 여인은 명나라 차관을 따라 돌아갔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명과 청 사이에서 유리한 쪽에 붙으려 했으나 인조반정으로 인해 방치되었다. 이후 부차 전투에서 전사한 김응하는 충무공 시호를 받고 명나라 신종에게서 요동백을 추증받았지만,[17] 항복의 책임자였던 강홍립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묘는 서울시 관악구 난향동에 있다.[18]

1620년, 후금에 억류되어 있던 조선군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 등 10여 명은 귀국하지 못하고 금주에 남았다. 이들은 누르하치의 후대를 받았으며, 특히 강홍립은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의 양녀와 결혼하고 명나라 포로 500명을 하인으로 받았다. 강홍립은 광해군과 밀서를 주고받으며 후금의 정황을 알렸고,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에 양면 정책을 취하며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1626년 누르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즉위하면서 정세가 변했다. 조선에서는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여 친명 반후금 정책을 펼치고,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철산 주둔을 허락했다.

2. 5. 귀국과 죽음

1623년 4월 11일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정권을 잡았다.[10] 1624년 이괄의 난 때 반란을 주도했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 형제가 후금에 투항하여 강홍립 휘하로 들어갔다.[10]

1627년 1월 4일 후금이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공격했다.(정묘호란)[7] 후금은 모문룡을 격파하고, 침공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했지만, 강홍립은 후금의 사신과 함께 강화도로 가서 양국의 평화 실현을 위해 외교 능력을 발휘했다.[7] 1627년 3월 3일(음력), 강화도에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관계라는 비교적 온건한 평화안을 맺었고, 아민의 만주군은 철군했다. 강홍립은 조선에 남았으나, 배신자라는 비판이 일어나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고, 같은 해 7월 27일(음력)에 죽었다. 사후에 명예는 회복되었다.

3. 요동 파견 상세

1618년 윤4월 23일 광해군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했지만, 강홍립은 병과 자격이 없음을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강권했다.[19] 9월 24일(음력 8월 6일)에는 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올렸지만, 광해군은 요양한 이후에 갈 것을 권했다.[20]

1618년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30권 7월 4일에는 파견된 인물 구성과 방어 지역, 군사들의 장비와 병종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21] 조선-명나라 연합군을 구성하여 요동에 파견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 강홍립 (姜弘立) - 도원수 (당시 의정부 좌참찬)
  • 이계선 (李繼先) - 중군관 (원임 절도사)
  • 김경서 (金景瑞) - 총령대장 부원수 (당시 평안절도사)
  • 안여눌 (安汝訥) - 중군관
  • 문희성 (文希聖) - 방어사
  • 김응하 (金應河) - 좌조방장 (이후 부차 전투에서 사망)
  • 차재중 (車載重) - 중군장 (이후 부차 전투에서 사망)
  • 이원일 - 우조방장


이들이 방어해야 할 지역은 강계, 상토(上土), 만포(滿浦), 고산리(高山里), 위원(渭源), 이산(理山), 아이(阿耳), 벽동(碧潼), 창주(昌洲), 창성(昌城), 삭주(朔州), 의주였다.

총 1만명의 병사들의 병종은 다음과 같았다.

  • 포수(砲手) - 3,500명 (평안도 1,000명, 전라도 1,000명, 충청도 1,000명, 황해도 500명)
  • 사수(射手) - 3,500명 (평안도 1,500명, 전라도 500명, 충청도 500명, 황해도 1,000명)
  • 살수(殺手) - 3,000명 (평안도 1,000명, 전라도 1,000명, 충청도 500명, 황해도 500명)


1619년 3월 명나라 도독 유정(劉綎)은 포수의 숫자가 적다고 하여 5,000명을 요구했다. 강홍립은 우영 2,000명, 좌영 1,500명, 중영 1,500명을 맞춰 포수를 보강하여 총 11,500명을 맞췄다.[22]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조선은 명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조정에서는 명분론이 우세해지면서 광해군은 강홍립을 5도 도원수로 임명하고 1만 3천 명의 병력을 주어 출정시켰다. 강홍립은 세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 광해군은 만일의 경우에는 항복하라는 밀지를 내렸다.[19][20]

1619년, 조선군은 유정(劉綎)의 남로군에 속해 후금의 수도 헤투알라로 향했다. 강홍립은 극비리에 통사를 헤투알라에 보내 조선의 출병이 본의가 아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명나라 대군은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의 만주군에게 각개격파되었고, 조선군 또한 부차 전투에서 후금군의 기습을 받아 선봉대가 전멸했다. 강홍립은 후금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였다.

3. 1. 파병 과정

1618년 윤4월 23일 광해군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했지만, 강홍립은 병과 자격이 없음을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강권했다.[19] 9월 24일(음력 8월 6일)에는 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올렸지만, 광해군은 요양한 이후에 갈 것을 권했다.[20]

1618년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30권 7월 4일에는 파견된 인물 구성과 방어 지역, 군사들의 장비와 병종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21] 조선-명나라 연합군을 구성하여 요동에 파견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 강홍립 (姜弘立) - 도원수 (당시 의정부 좌참찬)
  • 이계선 (李繼先) - 중군관 (원임 절도사)
  • 김경서 (金景瑞) - 총령대장 부원수 (당시 평안절도사)
  • 안여눌 (安汝訥) - 중군관
  • 문희성 (文希聖) - 방어사
  • 김응하 (金應河) - 좌조방장 (이후 부차 전투에서 사망)
  • 차재중 (車載重) - 중군장 (이후 부차 전투에서 사망)
  • 이원일 - 우조방장


이들이 방어해야 할 지역은 강계, 상토(上土), 만포(滿浦), 고산리(高山里), 위원(渭源), 이산(理山), 아이(阿耳), 벽동(碧潼), 창주(昌洲), 창성(昌城), 삭주(朔州), 의주였다.

총 1만명의 병사들의 병종은 다음과 같았다.

  • 포수(砲手) - 3,500명 (평안도 1,000명, 전라도 1,000명, 충청도 1,000명, 황해도 500명)
  • 사수(射手) - 3,500명 (평안도 1,500명, 전라도 500명, 충청도 500명, 황해도 1,000명)
  • 살수(殺手) - 3,000명 (평안도 1,000명, 전라도 1,000명, 충청도 500명, 황해도 500명)


1619년 3월 명나라 도독 유정(劉綎)은 포수의 숫자가 적다고 하여 5,000명을 요구했다. 강홍립은 우영 2,000명, 좌영 1,500명, 중영 1,500명을 맞춰 포수를 보강하여 총 11,500명을 맞췄다.[22]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조선은 명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조정에서는 명분론이 우세해지면서 광해군은 강홍립을 5도 도원수로 임명하고 1만 3천 명의 병력을 주어 출정시켰다. 강홍립은 세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 광해군은 만일의 경우에는 항복하라는 밀지를 내렸다.[19][20]

1619년, 조선군은 유정(劉綎)의 남로군에 속해 후금의 수도 헤투알라로 향했다. 강홍립은 극비리에 통사를 헤투알라에 보내 조선의 출병이 본의가 아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명나라 대군은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의 만주군에게 각개격파되었고, 조선군 또한 부차 전투에서 후금군의 기습을 받아 선봉대가 전멸했다. 강홍립은 후금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였다.

3. 2. 조선군 구성 및 전략

1618년 윤4월 23일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하였으나, 강홍립은 병과 자격이 없음을 이유로 거절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9] 1618년 9월 24일(음력 8월 6일)에는 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올렸지만, 광해군은 요양 후 복귀를 권고했다.[20]

1618년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 130권 7월 4일에는 파견된 인물 구성, 방어 지역, 군사들의 장비와 병종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21] 조선-명나라 연합군으로 요동에 파견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강홍립 (姜弘立) - 도원수 (당시 의정부 좌참찬)
  • 이계선 (李繼先) - 중군관 (원임 절도사)
  • 김경서 (金景瑞) - 총령대장 부원수 (당시 평안절도사)
  • 안여눌 (安汝訥) - 중군관
  • 문희성 (文希聖) - 방어사
  • 김응하 (金應河) - 좌조방장 (이후 부차 전투에서 사망)
  • 차재중 (車載重) - 중군장 (이후 부차 전투에서 사망)
  • 이원일 - 우조방장


이들은 강계, 상토, 만포, 고산리, 위원, 이산, 아이, 벽동, 창주, 창성, 삭주, 의주 지역을 방어해야 했다.

당시 조선군의 병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포수(砲手) - 3,500명 (평안도 1,000명, 전라도 1,000명, 충청도 1,000명, 황해도 500명)
  • 사수(射手) - 3,500명 (평안도 1,500명, 전라도 500명, 충청도 500명, 황해도 1,000명)
  • 살수(殺手) - 3,000명 (평안도 1,000명, 전라도 1,000명, 충청도 500명, 황해도 500명)


1619년 3월, 명나라 도독 유정(劉綎)은 포수 부족을 이유로 5,000명을 요구했다. 강홍립은 우영 2,000명, 좌영 1,500명, 중영 1,500명을 보강하여 총 11,500명의 포수를 맞췄다.[22]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조선은 명분론에 따라 파병을 결정,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5도 도원수 직책과 1만 3천 명의 병력을 주어 출정시켰다. 만일의 경우 항복하라는 밀지도 함께 내렸다. 1619년, 조선군은 유정(劉綎)의 남로군에 속해 후금의 수도 헤투알라로 향했으나, 강홍립은 극비리에 통사를 보내 조선의 출병이 본의가 아니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명나라 대군은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의 만주군에게 각개격파되었고, 조선군 또한 부차 전투에서 후금군의 기습을 받아 선봉대가 전멸했다. 이후 강홍립은 후금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였다.

4. 가족 관계

증조부는 강온(姜溫)이며, 친조부는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이다. 종조부는 강사안(姜士安)이다.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강신(姜紳)인데, 숙부인 강사안(姜士安)의 계자(繼子)가 되었다. 어머니는 동래 정씨로,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증손녀이며 정유의(鄭惟義)의 딸이다.

부인은 우주 황씨로, 좌의정 황헌(黃憲)의 손녀이며 황이형(黃履亨)의 딸이다. 장남은 강숙(姜璹)이고, 차남은 강원(姜瑗), 삼남은 강찬(姜瓚)이다. 장녀는 윤감(尹堪)에게, 차녀는 진사 심자(沈鎡)에게, 삼녀는 통제사 이현달(李顯達)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5. 평가 및 현대적 의의

5. 1. 당대 평가

5. 2. 현대적 재평가

6. 관련 작품

참조

[1] 문서
[2] 실록 강홍립·조정립·김지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광해군 일기 1627-06-24
[3] 실록 이운룡·윤안성·심열·이정험·한찬남·오익·임장·윤중삼·조익·강홍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광해군일기 1609-10-24
[4] 실록 광해군일기 1616-11-16
[5] 실록 한명욱·최호·이강·이모·이홍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광해군일기 1618-04-13
[6] 실록 평안 감사가 중국군과 조선군이 삼하에서 패배했다고 치계하다 http://sillok.histor[...] 광해군일기 1619-03-12
[7]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8] 실록 http://sillok.histor[...]
[9] 실록 왕이 노추를 잘 미봉하고 명에 대한 의리로 국방의 계책을 삼다 http://sillok.histor[...] 광해군일기 1619-04-08
[10] 실록 인조실록 1626-06-25
[11] 실록 평안 감사 윤훤이 의주가 금나라에게 함락되었다고 아뢰다 http://sillok.histor[...] 인조실록 1627-01-17
[12] 실록 평안 감사 윤훤이 의주가 금나라에게 함락되었다고 아뢰다 http://sillok.histor[...] 인조실록 1627-01-22
[13] 실록 평안 감사 윤훤이 의주가 금나라에게 함락되었다고 아뢰다 http://sillok.histor[...] 인조실록 1627-02-01
[14] 실록 인조실록 1627-02-10
[15] 실록 인조실록 1627-03-25
[16] 실록 강홍립의 졸기 http://sillok.histor[...] 인조실록 1627-03-25
[17] 실록 충무공 김응하 등 충신의 자손들을 포상하다 http://sillok.histor[...] 정조실록 1798-03-19
[18] 문서
[19] 실록 도원수 진령군 강홍립이 상소하여 원수로 천거된 것을 사피하다 http://sillok.histor[...] 광해군일기 1618-06-12
[20] 실록 도원수 강홍립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다 http://sillok.histor[...] 광해군일기 1618-08-06
[21] 실록 조선 국왕이 군사를 일으켜 토역하는 일로 보내는 자문의 내용 http://sillok.histor[...] 광해군 일기 1618-07-04
[22] 실록 도원수 강홍립이 경략이 포수 5천 명의 징발을 독촉한다는 치계를 올리다 http://sillok.histor[...] 광해군일기 16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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