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 모토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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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토 모토쓰구는 1560년에 태어나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사망한 센고쿠 시대 무장이다. 구로다 가문의 가신으로 규슈 정벌,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오오하시 가무베를 베는 무공을 세웠다. 이후 구로다 가문을 떠나 이케다 가문을 섬기다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오사카 5인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불화로 인해 구로다 가문을 떠났다는 설과, 오사카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 외에도 생존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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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요시타카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 하시바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 모리 씨 공략과 규슈 평정에 공헌했으며, 천하 통일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서군을 제압하는 데 기여했고, 만년에는 조스이라는 호를 사용하며 은거하여 '이 시대의 장량'이라는 평을 받았다.
고토 모토쓰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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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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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명 | 고토 씨 |
이름 | 고토 모토쓰구 |
별명 | 고토 마타베에 |
이명 | 미야하치로, 마타베에 |
계명 | 서조원전하안도련대거사, 심암종전거사 (후쿠오카 금룡사 과거장), 외 다수 |
생몰 | 1565년 5월 5일 ~ 1615년 6월 2일 |
출생 | 에이로쿠 3년 4월 10일 (1560년 5월 5일) |
사망 | 게이초 20년 5월 6일 (1615년 6월 2일) |
묘소 | 나라현 우다시의 야쿠시지 오사카부 가시와라시의 다마데야마 공원 에히메현 이요시의 조센지 오이타현 나카쓰시 돗토리현 돗토리시의 교후쿠지 효고현 히메지시의 후쿠다지 외 |
관위 | 종6위하・오키노카미 |
가족 | 부: 고토 모토쿠니 모: 간키 요리우지의 딸 형제: 모토히데, 모토쓰구, 모토카게 처: 선처: 불상, 후처: 미우라 시헤에의 딸 자녀: 가즈타다, 모토노리, 마사카타, 마타이치, 모토요시, 미우라 다메카쓰 딸: 노무라 스케나오의 부인, 야마나카 도타유의 부인, 외 자녀 수 명 |
소속 | |
주군 | 구로다 요시타카 센고쿠 히데히사 구로다 요시타카 나가마사 도요토미 히데요리 |
기타 정보 |
2. 생애
에이로쿠 3년(1560년), 하리마국 히메지 근교 신토군 야마다무라에서 베소씨 가신 후토 신자에몬[5]의 아들 모토쿠니[6]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가신 시절 기록은 1586년 규슈 정벌 우루즈 성 공격 무렵부터 나타난다.[5]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서 도쓰기가와 전투 이후 구리야마 도시야스의 지원을 받아 구로다가에 100석으로 봉직하였다. 영지 교체를 둘러싸고 완강하게 저항한 시로이 씨와의 싸움에서는 요시다 나가토시와 함께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후퇴를 권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패배하였으며, 1587년 12월 나가이와 성 공격 때에는 중상을 입었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에 종군하여 제2차 진주성 공방전에서는 거북선과 같은 장갑차를 만들어 성벽을 무너뜨렸고[7],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인 모리모토 가즈히사 등과 선봉을 다투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 가신 오하시 가무베를 일기토로 베는 무공을 세웠고, 전후 구로다가 중신으로 지쿠젠 육단성[8] 중 하나인 오쿠마 성(마스토미 성) 성주가 되어 16,000석의 영지를 받았다고 하나, 10,000석에서 14,000석이 타당하다는 지적도 있다.[9]
게이초 11년, 모토쓰구는 일족과 함께 구로다 가문을 떠났다. 이는 모토쓰구가 호소카와 씨, 이케다 씨 등 다른 영주들과 자주 서신을 교환했기 때문이었다.[9] 고쿠라 번의 호소카와 다다오키를 의지했으나, 구로다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이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중재로 호소카와 가문을 떠났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마에다 도시나가, 유키 슈코 등이 그의 지략과 용맹을 아껴 초빙하려 했으나, 나가마사에 의해 "봉공구"가 이루어져 실현되지 못했다.[10]
모토쓰구는 하리마 국으로 돌아가 이케다 데루마사를 거쳐 오카야마 번의 이케다 다다쓰구를 섬겼다. 그러나 "봉공구"의 영향으로 게이초 16년부터 교토에서 낭인 생활을 하였다. 같은 해, 모토쓰구가 구로다 가문으로 돌아오는 문제가 발생하여 나가마사가 막부를 통해 협상을 진행했지만, 모토쓰구와 연락이 닿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9]
게이초 19년 오사카 전투가 발발하자 오오노 하리나가의 권유를 받아 오사카성에 입성했다. 기수(旗頭)로서 덴마의 우라에서 열병식 지휘를 맡았을 때, 그 지휘 솜씨가 뛰어나 “마리시텐의 재림”이라고 칭송받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는 모토쓰구와 미야스쿠 마사토모만이 경계해야 할 명망가였다.[16] 오사카성 5인중 중 한 명으로, 야마카와 케이신, 키타가와 노리카쓰 등을 요리쿠로 삼아 오오노 하리나가, 하리후사 등을 보좌했다. 겨울의 진에서는 6,000명[11]의 유군을 맡아 시기노, 이마후쿠 방면을 키무라 시게나리와 협력하여 방비하고, 우에스기 및 사타케 세력과 대치했다.
이듬해 5월, 오사카 여름의 진 도묘지 전투에서 야마토로 평야 지대의 출구인 고쿠분무라에서의 저격 작전 선봉으로 2,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히라노고에서 출진했다. 그러나 미즈노 가쓰나리가 이끄는 도쿠가와 측 선봉 부대가 이미 고쿠분무라까지 진출해 있었다. 차선책으로 고마쓰야마(현재: 타마테야마 공원 부근)에 진을 치고, 오쿠다 타다쓰구를 토벌하는 등 고군분투하여 칭찬을 받았다.[12][13] 그러나 우스다 케나리, 아카시 마사토, 사나다 유키무라(幸村) 등의 후속 부대가 안개 발생으로 도착이 늦어져[30], 다테 마사무네 가신 가타쿠라 시게나가가 이끄는 철포대 등, 10배 이상이 된 적과 대치하게 되자, 산을 내려와 전개·돌격을 감행하고 혼전 중에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향년 56세.
2. 1. 출생
에이로쿠 3년(1560년), 하리마국 히메지 근교의 신토군 야마다무라에서 베소씨 가신 후토 신자에몬[5] 모토쿠니[6]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 2. 구로다 가신 시절
구로다 가타카의 가신 시절의 기록은 1586년 규슈 정벌 우루즈 성 공격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5]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서 세키스이 히데히사가 시마즈 이에히사에게 대패하고 영국인 사누키 국으로 도망친 후, 구로다 가타카의 중신인 구리야마 도시야스의 지원을 받아 구로다가에 100석으로 봉직하였다. 영지 교체를 둘러싸고 완강하게 저항한 시로이 씨와의 싸움에서는 요시다 나가토시와 함께 도중에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후퇴를 권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패배하였으며, 1587년 12월 나가이와 성 공격 때에는 죽을 뻔한 중상을 입었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에도 종군하여, 제2차 진주성 공방전에서는 거북선과 같은 장갑차를 만들어 성벽을 무너뜨렸다.[7]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인 모리모토 카즈히사 등과 선발을 다투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 가신의 강력한 창술의 명수인 오오하시 카무베를 일기토로써 베는 무공을 세웠고, 전후 구로다가 중신의 한 사람으로 지쿠젠 육단성[8] 중 하나인 오쿠마 성(마스토미 성)의 성주가 되어 16,000석의 영지를 받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10,000석에서 14,000석이 타당하지 않냐는 지적도 있다.[9]2. 3. 구로다 가문 출분 이후
게이초 11년(1606년), 모토쓰구는 일족과 함께 구로다 가문을 떠났다. 이는 모토쓰구가 호소카와 씨, 이케다 씨 등 다른 영주들과 자주 서신을 교환했기 때문이었다.[9] 처음에는 고쿠라 번의 호소카와 다다오키를 의지했으나,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구로다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이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중재로 호소카와 가문을 떠나게 되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마에다 도시나가, 유키 슈코 등은 모토쓰구의 지략과 용맹을 아껴 그를 초빙하려 했으나, 나가마사에 의해 "봉공구"가 이루어져 실현되지 못했다.[10]모토쓰구는 일단 고향인 하리마 국으로 돌아가 이케다 데루마사를 거쳐 오카야마 번의 이케다 다다쓰구를 섬겼다. 그러나 "봉공구"의 영향으로 게이초 16년(1611년)부터 교토에서 낭인 생활을 하게 된다. 같은 해, 모토쓰구가 구로다 가문으로 돌아오는 문제가 발생하여 나가마사가 막부를 통해 협상을 진행했지만, 모토쓰구와 연락이 잘 닿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9]
2. 4. 오사카 전투
게이초(慶長) 19년 오사카 전투(大坂の陣)가 발발하자 오오노 하리나가(大野治長)의 권유를 받아 선발대로 오사카성(大坂城)에 입성했다. 기수(旗頭)로서 덴마(天満)의 우라(浦)에서 열병식(閲兵式) 지휘를 맡았을 때, 그 지휘 솜씨가 뛰어나 “마리시텐(摩利支天)의 재림”이라고 칭송받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로부터는 모토쓰구와 미야스쿠 마사토모(御宿政友)만이 경계해야 할 명망가였다.[16] 오사카성 5인중(大坂城五人衆) 중 한 명으로, 야마카와 케이신(山川賢信), 키타가와 노리카쓰(北川宣勝) 등을 요리쿠(与力)으로 삼아 오오노 하리나가(大野治長), 하리후사(治房) 등을 보좌했다. 겨울의 진(陣)에서는 6,000명[11]의 유군(遊軍)을 맡아 시기노(鴫野), 이마후쿠(今福) 방면을 키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와 협력하여 방비하고, 우에스기(上杉) 및 사타케(佐竹) 세력과 대치했다.
이듬해 5월, 오사카 여름의 진(大坂夏の陣)의 도묘지 전투(道明寺の戦い)에서 야마토로(大和路) 평야 지대의 출구인 고쿠분무라(国分村)에서의 저격 작전의 선봉으로 2,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6일 새벽 히라노고(平野郷)에서 출진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측 선봉장인 미즈노 가쓰나리(水野勝成)가 이끄는 부대가 이미 고쿠분무라(国分村)까지 진출해 있었다. 차선책으로 중간에 있던 고마쓰야마(小松山)(현재: 타마테야마 공원(玉手山公園) 부근)에 진을 치고,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먼저 쳐들어온 오쿠다 타다쓰구(奥田忠次)를 토벌하는 등, 고군분투하여 칭찬을 받았다.[12][13] 그러나 후속 부대인 우스다 케나리(薄田兼相), 아카시 마사토(明石全登), 사나다 유키무라(真田信繁)(幸村) 등의 군대가 안개 발생으로 도착이 늦어져[30], 반대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가신인 가타쿠라 시게나가(片倉重長)가 이끄는 철포대 등, 10배 이상이 된 적과 대치하게 되자, 모토쓰구는 산을 내려와 전개·돌격을 감행하고 혼전 중에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향년 56세.
3. 일화
고토 모토쓰구와 관련된 일화는 다음과 같다.
구로다 나가마사와의 불화 및 출분 관련 일화
- 시로이 씨와의 첫 전투에서 패배 후, 다른 무장들은 머리를 깎았지만 모토쓰구는 따르지 않고 "전쟁에는 승패가 따르는 법이다."라고 말해 요시타카는 묵과했으나, 먼저 머리를 깎은 나가마사는 체면을 구겼다.[14]
- 임진왜란 중 조선군 적장과 일기토치를 벌이다 강에 빠진 나가마사를 돕지 않고 "적에게 죽을 만큼 내 주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14]
- 정유재란 때 호랑이가 나타났을 때, 가신 스가 마사토시가 먼저 칼을 휘둘렀으나 모토쓰구가 끼어들어 호랑이를 베었다. 나가마사는 이를 어리석다고 질책했다.[15][7]
- 모토쓰구는 포상에 불만이 있었다.[16]
- 나가마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았다.[5][17]
- 모토쓰구의 적장자 고토 다로스케가 여성 문제 등으로 구로다가에서 추방되었다.
- 모토쓰구의 넷째 아들이 소고 연주에 뛰어났지만, 나가마사의 명령에 "무사의 직무가 아니다"라며 거절하여 관계가 서먹해졌다.[17][14]
생존설 관련 일화
- 나라현(奈良県) 우다시(宇陀市)에는 은둔 생활 후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는 전설이 있으며, '''다이헤이자쿠라(又兵衛桜)'''라고 불리는 시다레자쿠라(シダレザクラ) 거목이 남아 있다.
- 오이타현(大分県) 나카쓰시(中津市) 야마케이(耶馬渓)에는 '고토 마타베에의 무덤[18]'이 남아 있다. 오사카성 함락 전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를 분고국(豊後国) 히데에 상륙시켜 사쓰마국(薩摩国)으로 도망치게 한 후, 옛 첩 오토요와 함께 지내다 히데요리의 병사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는 전설이 있다.[19]
- 강담 『난바 전기(難波戦記)』에서는 오카야마 전투에서 사나다 노부시게에 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며, 사카이 난소지(南宗寺)에는 「이에야스의 무덤」도 남아 있다.
- 이요국(伊予) 쵸센지 주지가 기쓰기의 삼촌이었기에 이요로 도망쳐 농부가 되어 현지 발전에 기여했다는 일화와 기쓰기의 무덤이 이요군(伊予郡) 마쓰마에마치(松前町) 다이치인에 존재한다.[20] 쵸센지 옆에는 기쓰기의 목을 매장했다는 보리소가 있다.[21]
- 『창업록(創業録)』에 따르면,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는 고토 마타베에가 배신했다고 믿었다.
인물 및 기타 일화
- 어린 시절 아버지가 병사하자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거두어졌으나, 삼촌이 반역을 도모하다 추방되자 연좌되어 구로다가를 떠나 있었다.[23]
- 시로이야 붕괴 당시, 장(殿)을 맡았다고 주장했지만, 버린 진하오리를 동료가 주워 인정받지 못했다.[24]
- 시로이씨 등 국인 일기와의 싸움에서 라이카호(雷火砲)라는 무기를 사용했다.[27]
- 노나카 시네카네의 나가이와 성 공격 때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단단한 구족과 원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24]
- 분로쿠의 역 평양성 공략전 가산성 공격에서 일등창을 기록했고, 격퇴전에서는 시라카와 성에서 구로다 가즈나리와 함께 공훈자가 되었다.
- 전황 판단에 뛰어났다. 일본 말의 편자, 적과 조우한 선봉 부대의 도키 소리, 적진의 말 연기 등을 보고 전황을 정확히 판단했다.[7]
- 제2차 진주성 공방전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과 일등을 다투었다.[28]
- 모리 유노부, 구로다 가즈나리와 하루 교대로 선봉을 맡았다.[29]
- 아이와타가와 전투에서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으니 논할 필요가 없다"라고 답하여 방침을 결정지었다.[7]
- 외출 중 두 명의 암살자 존재를 눈치챘지만, 암살자들은 모토쓰구를 두려워하여 도망쳤다.[14]
- 사나다마루 건축 이전에 「고토마루」를 쌓으려고 했지만, 사나다 노부시게가 자재를 철거했다. 우스다 카네마사와 아키시 게이토의 중재로 노부시게를 용서하고 군의에 참가시키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 키는 6척(180cm)을 넘었고, 오사카의 진 무렵에는 비만이었다.[30]
- 이마후쿠 전투에서 나오에 가네쓰구의 철포대에 저격당해 부상당했지만, "히데요리 공의 무운은 강하다"라고 말했다.[32]
- 노다·후쿠시마 전투 이후 도요토미 측은 선바에 불을 지르고 후퇴했는데, 모토쓰기는 적의 야습을 예상했지만 하나부사 시키히데가 만류하여 중지되었다.[7]
- 하나와 나오유키 등에 의한 혼마치바시 야습전 때 전술을 강의했다.[33]
- 도묘지 전투 며칠 전, 혼다 마사노부의 친족 요우세이도가 이에야스의 사자로 방문하여 귀순을 권유받았지만, 감격하면서도 거절했다.[7]
- 『미카와키』에는 "고토 모토쓰구는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봉공구에 처해진 후, 만년에 야마토에 은거했다. 오오노 하루나가의 은혜를 입고 오사카 성으로 달려가 조아의 장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 1. 나가마사와의 불화 및 출분
구로다 가문에서 떠난 것은 주군인 구로다 나가마사와의 불화 때문이라는 설이 후세의 추측으로 여겨지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그 이유로 제시되고 있다.- 시로이 씨와의 첫 전투에서 패배(시로이타니 붕괴)한 후, 일치 진압군을 이끌던 나가마사는 머리를 깎고 아버지 요스이에게 사과했다. 다른 무장들도 이에 따라 머리를 깎았지만, 모토쓰구는 따르지 않았다. 주위에서 우려했으나, 모토쓰구는 태연하게 "전쟁에는 승패가 따르는 법이다. 패전할 때마다 머리(남자)를 깎는다면 평생 머리가 제대로 자랄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요스이는 이를 묵과했다.[14] 먼저 머리를 깎은 나가마사는 크게 체면을 구겼다.
- 문록의 역에서 나가마사가 조선군 적장과 일기토치를 벌이다 강에 빠졌을 때, 모토쓰구는 곁에 있었지만 전혀 돕지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신이 이상하게 여겨 묻자, 모토쓰구는 "적에게 죽을 만큼 내 주군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태연하게 구경했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결국 적장을 죽였지만, 이 일로 모토쓰구를 매우 원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 게이초의 역에서 나가마사의 진영에 호랑이가 나타나 말을 물어 죽이고 날뛰었다. 가신 스가 마사토시가 칼을 휘둘렀으나, 호랑이가 마사토시에게 달려들자 모토쓰구가 끼어들어 베었다. 마사토시가 호랑이의 미간에 일격을 가해 즉사시켰다. 이때 야습을 의심하여 우물탑에서 전말을 지켜본 나가마사는 "일류 장수가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 짐승과 용맹을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며 두 사람을 질책했다.[15][7]
- 모토쓰구는 포상에 불만이 있었다.[16]
- 모토쓰구는 무가 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교우 관계가 넓었는데, 나가마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아 질책을 받았다.[5][17]
- 모토쓰구의 적장자이며 이시가키하라 전투에서도 공을 세운 고토 다로스케가 여성 문제 등으로 구로다가에서 영토 밖으로 추방되었다.
- 모토쓰구의 넷째 아들 마타이치로는 소고 연주에 뛰어났지만, 나가마사로부터 기온 신사의 노의 반주를 명령받자 "무사의 직무가 아니다"라며 관계가 서먹해졌다.[17][14]
3. 2. 생존설
각지에 강담(講談)이나 군기(軍記)가 퍼져 읽히면서, 정설(定説)과는 달리 고토 모토쓰구가 오사카 여름의 진(大坂夏の陣)에서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나라현(奈良県) 우다시(宇陀市)에는 은둔 생활 후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는 전설이 있다. 기쓰기(모토쓰구)의 저택 터로 전해지는 곳에는 '''다이헤이자쿠라(又兵衛桜)'''라고 불리는 시다레자쿠라(シダレザクラ)의 거목이 남아 있다.
- 오이타현(大分県) 나카쓰시(中津市)의 야마케이(耶馬渓)에는 시의 사적(市の史跡)으로서 '고토 마타베에(後藤又兵衛)의 무덤[18]'이 남아 있다.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전사한 기쓰기는 그림자 무사였고, 오사카성 함락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를 호위하여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와 함께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에서 분고국(豊後国) 히데에 상륙하여 사쓰마국(薩摩国)의 시마즈씨(島津氏)를 의지하여 도망쳤다는 계획을 실행했다. 상륙 후, 히데요리 일행과의 재회를 맹세하고 히타 땅에서 헤어진 기쓰기는, 옛날 구로다씨(黒田氏)가 나카쓰를 영지로 가지고 있던 시절의 첩(妾)·오토요(お豊)가 있는 이후쿠(伊福)의 마을로 향한다. 오토요와 마을 사람들과 평온한 나날을 보냈지만, 곧 히데요리의 병사(病死) 소식을 들은 기쓰기는, 도요토미 가문 재흥의 꿈이 끊긴 슬픔으로 인해 쇼오(承応) 3년(1654년(1654年)) 1월 29일, 오토요의 집에서 자결했다. 기쓰기의 사후 얼마 후에, 마을 사람들이 무덤을 세웠지만 세월이 흘러 붕괴되어, 현재 남아 있는 무덤은 호레이키(宝暦) 13년(1763년(1763年))에 이후쿠 시게스케(伊福茂助)가 재건한 것이다.[19]
- 강담(講談) 『난바 전기(難波戦記)』에서는 오카야마 전투에서 사나다 노부시게에 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본진이 무너지고, 도망치는 이에야스가 기쓰기에 죽임을 당했다고 되어 있으며, 사카이의 난소지(南宗寺)에는 「이에야스의 무덤」도 남아 있다. 유례로, 기쓰기 전사의 다음 날, 사촌이자 사위였던 부하 야마나카 토우타(山中藤太夫)가 이에야스를 추격했다. 전후, 병사들의 사면이 이루어졌고, 토우타도 도쿠가와 요리노부(徳川頼宣)에게 채용되었지만, 이에야스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34]
- 이요국(伊予)의 쵸센지(長泉寺)(현재의 에히메현(愛媛県) 이요시(伊予市)) 주지가 기쓰기의 삼촌이었기 때문에, 이를 의지하여 이요로 도망쳐 농가(農家)가 되어 아내를 맞이하고, 치수(治水)와 개간(開墾)으로 현지 발전에 기여했다는 일화와 기쓰기의 무덤이 다이치인(大智院)(이요군(伊予郡) 마쓰마에마치(松前町))에 존재한다.[20] 쵸센지 옆에는 기쓰기의 목을 매장했다는 보디소(菩提所)가 있다.[21]
- 『창업록(創業録)』에 따르면,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는 고토 마타베에가 배신했다고 믿고 있었다. 생포되어 니조성(二条城)에 왔을 때, "고토는 반역자였음이 틀림없다"라고 말했다. 곁에 있던 사람이, "고토는 전사했다"라고 말했지만, 쵸소카베는 이를 믿지 않았다. 모리치카는 죽을 때까지 마타베에의 '배신'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마타베에가 함부로 선행한 결과 패전했다. 의심을 계속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22]
3. 3. 인물 및 기타
- 어린 시절 아버지가 병사하자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거두어져 그곳에서 성인이 되었다. 이후 삼촌인 후지오카 구헤이가 나가마사에게 반역을 도모하다 추방되자, 모토쓰구 또한 연좌되어 한때 구로다가를 떠나 있었다.[23]
- 시로이야 붕괴 당시, 장(殿)을 맡았다고 주장했지만, 눈에 띄지 않도록 버린 승홍색(猩猩緋) 진하오리를 동료인 하라타네 요시가 주워 인정받지 못했다.[24]
- 시로이씨 등 국인 일기와의 싸움에서 라이카호(雷火砲)라는 무기를 사용했다고 한다.[27]
- 노나카 시네카네의 나가이와 성 공격 때, 미나미 야스케에게 죽을 뻔했지만, 단단한 구족과 원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24]
- 분로쿠의 역 평양성 공략전의 가산성 공격에서 일등창(一番槍)을 기록했고, 격퇴전에서는 시라카와 성에서 구로다 가즈나리와 함께 공훈자(殊勳者)가 되었다.
- 전황 판단에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정찰 중 상류에서 일본 말의 편자(沓)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이미 아군이 도하를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산그늘에서 적과 조우한 선봉 부대의 도키(鬨) 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듣고 압박당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멀리 떨어진 적진의 말 연기(馬煙)를 보고, 다가온다면 검게 보일 텐데 희게 옅어지고 있으므로 적의 패배라고 판단했다. 이 판단들은 모두 정확했다.[7]
- 제2차 진주성 공방전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과 일등을 다투어, 이다 나오카게에게 속옷을 잡히면서도 기기(寄騎)인 호리 사다노리와 함께 무너진 성벽을 기어올랐지만, 나오카게에게 깃발을 던져져 먼저 일등의 명칭과 일등급(一番首)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8]
- 모리 유노부, 구로다 가즈나리와 하루 교대로 선봉을 맡았다.[29]
- 아이와타가와 전투에서 서안에 이시다 측이 매복하고 있는 나가라가와를 강행 도하할 것인지, 아니면 후속 부대를 기다릴 것인지에 대한 군의가 오쓰지(카가미시마 고보)에서 열렸다. 후지도 다카토라가 건의를 요구하자, 모토쓰구는 "이미 후쿠시마 군이 타케가하나 성을 함락시켰고, 이케다 군이 오다 군을 격파했으며, 우리는 기후 성 공격에 늦어 아직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으니 논할 필요가 없다"라고 답하여 방침을 결정지었다.[7]
- 외출 중 두 명의 암살자 존재를 눈치챘지만, 암살자들은 모토쓰구를 두려워하여 손을 대지 못하고 츠쿠시로 도망쳤다. 나가마사는 이를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겨 오히려 그 암살자들에게 100석을 늘려주었다.[14]
- 사나다마루 건축 이전에 모토쓰구가 말출(馬出)이 될 「고토마루」를 쌓으려고 했지만, 사나다 노부시게가 모토쓰구가 준비했던 자재를 함부로 철거했다. 분노한 모토쓰구는 찬동하는 낭인들과 함께 노부시게를 토벌하려 했지만, 우스다 카네마사가 달래고 아키시 게이토가 중재하여 「군의에 참가시키는」 조건으로 노부시게를 용서했다. 그 결과, 낭인 중의 중심 인물이 나가소베 모리치카, 모리 가츠나가, 사나다 노부시게 3명이었던 것이 모토쓰구, 겐토를 더한 5명이 되었다.
- 키는 6척(180cm)을 넘었다. 오사카의 진 무렵에는 비만으로 거구였다고 한다.[30]
- 이마후쿠 전투에서 우에스기 가게카쓰 가신인 나오에 가네쓰구의 철포대에 저격당해 옆구리를 부상당했지만, 상처를 손가락으로 확인한 후 "히데요리 공의 무운(武運)은 강하다"라고 말했다.[32]
- 노다·후쿠시마 전투 이후 도요토미 측은 선바(船場)에 불을 지르고 후퇴했다. 이때 모토쓰기는 연기에 섞여 적이 야습해 올 것을 예상하고 "젊은이들은 공을 세워라"라며 매복을 재촉했지만, 도쿠가와 측은 나타나지 않아 판단 착오로 조롱당했다. 그러나 야습은 이케다 타다오 등이 계획했지만, 모토쓰기를 잘 아는 하나부사 시키히데가 만류하여 중지되었다고 한다.[7]
- 하나와 나오유키·요네다 요리쓰네·오슈쿠 마사토모 등에 의한 혼마치바시 야습전 때에는 나오유키의 상관인 오오노 하루후사의 요청으로 전술을 강의했다.[33]
- 도묘지 전투 며칠 전, 히라노 고우에서 장진 중에 이에야스의 참모인 혼다 마사노부의 친족이자 모토쓰기와 나가소노베 모리치카의 옛 지인이었던 교토 쇼코쿠지의 승려 요우세이도가 이에야스의 사자로 방문하여 하리마 50만 석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귀순을 권유받았지만, 감격하면서도 거절했다.[7]
- 『미카와키』에는 "고토 모토쓰구는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봉공구(奉公構)에 처해진 후, 만년에 야마토에 은거했다. 그때 오오노 하루나가의 은혜를 입고 자세한 사정도 묻지 않은 채 시중을 받으며 오사카 성으로 달려가 조아(爪牙)의 장이 되어 비밀 모의나 밀서에 진심을 다했으며, 하루나가의 조카사위가 되어 일가처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4. 대중문화 속의 고토 모토쓰구
- 오사라기 지로(尾崎士郎)의 소설 고토 마타베이(小藤太兵衛)가 있다.
- 비디오 게임 전국 바사라 4(PS3)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 만화 "전국 천쇼키(戦国天正記)"에 등장한다.
- 노부나가의 야망: 천하창세에서 도묘지 전투(道明寺合戦)와 오사카 성 공방전의 다른 전투에 등장한다. 그를 구출하여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소설'''
- 다이부쓰지로(大佛次郎)의 『구걸장군(乞食大将)』(1947년)
- 시마 료타로(司馬遼太郎)의 『팔자 이야기』(売ろう物語) (단편, 『오, 대포』(おお、大砲)〈1961년〉 수록)
- 시마 료타로의 『군사 두 사람』(軍師二人) (단편, 『하나후사 스케베에』(花房助兵衛)〈1963년〉 수록)
- 시마 료타로의 『성채』(城塞) (1971년-1972년)
- 다카하시 나오키의 『사나다 유키무라와 고토 마타베에』(真田幸村と後藤又兵衛) (2014년)
- 이마무라 쇼고(今村翔吾)의 『유키무라를 치라』(幸村を討て) (2022년)
'''만화'''
-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의 『고토 마타베에』(後藤又兵衛) (1954년)
- 가와노 이치로(かわのいちろう)의 『고토 마타베에~쿠로다 간베에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사내~』(後藤又兵衛~쿠로다 간베에に最も愛された男~)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제목 | 연도 | 방송사 | 배역 |
---|---|---|---|
구걸장군 | 1959년 | 일본텔레비전(日本テレビ) | 토미타 코타로(冨田浩太郎) |
도쿠가와 이에야스 | 1983년 | NHK 대하드라마(NHK大河ドラマ) | 카라사와 타미카쓰(唐沢民賢) |
사나다 타이헤이키 | 1985년 | NHK 대형시대극 | 콘도 요우스케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 2000년 | NHK 대하드라마 | 시게마쓰 오사무(重松収) |
군사 간베에 | 2014년 | NHK 대하드라마 | 쓰카모토 타카시(塚本高史) (유년기: 카와구치 카즈유(川口和宥) /소년기: 마쓰시마 카이토(松島海斗)) |
사나다마루 | 2016년 | NHK 대하드라마 | 아이카와 쇼(哀川翔) |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어떻게 할까 | 2023년 | NHK 대하드라마 | 쿠라하라 켄(蔵原健) |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후고토 모토쿠니 |
아들 | 후고토 모토노리 |
아들 | 후고토 모토요시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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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後藤又兵衛」の解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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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藤又兵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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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西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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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No.81 黒田長政を支えたのち『大坂の陣』で活躍した智勇の豪将「後藤又兵衛」
https://www.ncbank.c[...]
nc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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実録 後藤又兵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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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前六端城 | テーマに沿って城めぐり | 攻城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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呪詛の時空 宇都宮怨霊伝説と筑前黒田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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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書太閤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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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本儀太夫筆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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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士清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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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川覚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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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村と並ぶ英雄、後藤又兵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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