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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주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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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건주 여진은 명나라 시대에 쑹화강과 무단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만주족의 기원이 된 민족이다. 그들은 명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며, 명나라는 이들을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 구분했다. 건주 여진은 명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농업 기술을 습득하고 사회적,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16세기 후반 누르하치의 등장으로 세력이 확장되었다. 누르하치는 건주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여 청나라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건주 여진은 만주어 사용, 명나라와의 갈등, 조선과의 관계 등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보이며, 만주 지역의 정치, 사회, 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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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주여진
개요
이름건주 여진
원어 명칭建州女真
유형여진
위치만주
조상오도리 여진
언어만주어
역사적 시기명나라 시대
역사
기원오도리 여진에서 유래
주요 활동 지역만주 지역
관련 사건누르하치의 통일
문화
언어만주어 사용
영향만주족 형성에 기여
기타
관련 인물누르하치

2. 명칭 및 기원

16세기 후반, 여진족은 현재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초기 국가 형태를 이루거나 부족 단위로 흩어져 살았다. 명나라는 이 지역에 200여 개의 위소(衛所)를 설치하고 여진 부족장들을 수장으로 임명하여 간접 통치했다.

당시 명나라는 여진족을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 세 집단으로 구분했다. 각 집단 아래에는 아이만(部, ᠠᡳᠮᠠᠨ|Aimanmnc)이나 구룬(國, ᡤᡠᡵᡠᠨ|Gurunmnc)이라 불리는 여러 독립적인 집단이 있었고, 이들 내부에서도 씨족과 부족 간 권력 다툼이 있었다.

건주여진은 압록강 북쪽 훈허 상류부터 동가강에 걸쳐 거주했으며, 숙수후, 후너허, 왕기얀, 동고, 저천의 5개 아이만으로 나뉘었다. 백두산 일대의 너연, 주셔리, 얄루 기양 3개 아이만도 때때로 건주여진으로 분류되었다. 이들은 정치적 독립체였고, 수장 가문 간 혈연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건주여진은 씨족 단위 사회에서 벗어나 지연적 거주 형태로 발전했으며, 수렵, 목축, 채집 외에도 농업과 교역이 확산되고 있었다. 농업과 교역 증가는 사회 계층 분화를 촉진했고, 각 부는 명나라와의 교역권을 두고 갈등했다.[36]

건주 여진은 명나라 시대에 농업을 받아들이면서 비료, 가축, 철제 쟁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15] 1599년부터 중국에서 철제 쟁기를 구매하고, 조선으로부터 철을 무기로 만드는 법을 배워 제련 및 광업 지식도 습득했다.[16]

2. 1. 기원

건주여진의 기원은 논쟁의 대상이다. 만주사 전문 역사학자인 패멀라 크로슬리(Pamela Crossley)에 따르면, 쉬종샤(Xu Zhongsha)는 발해 지역, 쑹화강과 훈강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했다. 일본 학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건주라는 이름이 현재 한국과의 국경 근처에서 이주한 여진족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2]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후, 원나라에 충성하는 세력들이 북동쪽으로 후퇴했다. 1375년, 전 원나라 관료였던 나하출은 랴오양성에 거주하며 원나라 부활을 위해 랴오둥을 침략했다. 1387년 그가 패배한 후, 명나라는 랴오둥의 여진족을 재편하여 명나라 변경 지역을 추가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여진 부족들이 남쪽으로 이주했고, 세 개의 부족이 현대 중국, 러시아, 북한 국경 근처의 두만강 주변에 정착했다.[3]

건주 여진은 요나라금나라를 세운 여진족과는 별개의 민족으로 분류되었고, 원나라 때도 여진족과 별도로 분류되었던 홀리개에서 부분적으로 유래되었다. 그들의 고향은 쑹화강무단강 하류에 있었다. 홀리개는 나중에 서쪽으로 이동하여 명나라 시대에 멍게무(Mentemu)가 이끄는 건주 여진의 주요 구성 요소가 되었으며, 건주 여진은 후에 만주족이 되었다. 명나라 시대의 여진족은 지린성에 살았다. 명나라 관료들의 기록에 따르면, 건주 여진은 모허족의 후손으로, 모허족은 발해를 건국했다.[4]

타오원, 홀리개, 워둘리안 여진 부족은 랴오양성의 일부로 회로로 통치되었던 원나라 시대에 이란에서 헤이룽장 지역에 살았다. 이 부족들은 명나라 시대에 건주 여진이 되었다. 금나라 시대에 금나라 여진족은 홀리개가 된 후르카족과 같은 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앙가는 일란투멘에서 온 한국의 여진 이주민들이 1300년대에 사용했는데, 이는 우리앙가가 일란투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5][6][7] 보쿠장, 투오울리안, 워두리안, 홀리개, 타오완은 각각 3만 가구로 구성되었으며, 원나라가 우수리강과 쑹화강 지역의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사용한 구획이었다.[8][9] 금나라 시대에는 상경로가 홀리개를 통치했다.[10] 홀리개로도 금나라에 의해 만들어졌다.[11][12][13][14]

1388년, 홍무제무단강쑹화강의 합류 지점 근처의 현대 이란현에 있는 세 개의 일란투멘 부족과 접촉했다. 오도리, 홀리개(후르하 또는 후르카) 및 투오원 여진족은 몽골족에 대항하는 동맹으로 모집되었다. 여진족은 명나라 칭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홀리개 추장 아하쿠는 1403년, 해당 지역의 원나라 정치 단위의 이름을 딴 건주위의 지휘관이 되었다. 오돌리의 멍커 테무르(Möngke Temür)는 건주좌위의 지도자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퉁(Tong)이라는 중국 성씨를 받아들였다. 두 건주위는 카이위안과 푸순의 지정 시장에서 명나라와 교역했다. 그들은 북쪽의 야인 여진족과 남쪽의 조선에 맞서 여러 차례 단기적인 서쪽 이동을 수행했다. 여진족의 한국 영토 침략은 1467년1478년에 한국-명나라의 합동 반격을 초래하여 건주 여진족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3. 역사

16세기 후반, 여진족은 현재 중국 동북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초기 국가 형태나 부족, 씨족 단위로 흩어져 살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 지역에 200여 개의 위소(衛所)라는 행정 구획을 설치하고, 여진 부족장들을 수장으로 임명하여 간접 통치했다.[36]

당시 명나라는 여진족을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의 세 집단으로 구분했다. 각 집단 아래에는 아이만(部, ᠠᡳᠮᠠᠨ|Aimanmnc)이나 구룬(國, ᡤᡠᡵᡠᠨ|Gurunmnc)이라 불리는 여러 독립적인 정치 집단이 있었고, 이들 하부 집단 내부에서도 여러 씨족과 부족이 권력을 다투는 경우가 많았다.[36]

건주여진은 압록강 북쪽 훈허 상류부터 동가강에 걸쳐 거주했으며, 숙수후(蘇克素滸, ᠰᡠᡴᠰᡠᡥᡠ|Suksuhumnc), 후너허(渾河, ᡥᡠᠨᡝᡥᡝ|Hunehemnc), 왕기얀(完顔, ᠸᠠᠩᡤᡳᠶᠨ|Wanggiyanmnc), 동고(董鄂, ᡩᠣᠩᡤᠣ|Donggomnc), 저천(哲陳, ᠵᡝᠴᡝᠨ|Jecenmnc)의 5개 아이만으로 나뉘어 있었다. 백두산 일대의 너연(訥殷, ᠩᡝᠶᡝᠨ|Neyenmnc), 주셔리(朱舍里, ᡷᡠᡧᡝᡵᡳ|Jušerimnc), 얄루 기양(鴨綠江, ᠶᠠᠯᡠ
ᡤᡳᠶᠠᠩ|Yalu Giyangmnc) 3개 아이만도 때때로 건주여진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정치적 독립체였고, 수장 가문 간 혈연관계도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건주여진은 씨족 단위 사회에서 벗어나 지연적 거주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다. 수렵, 목축, 채집 경제가 여전히 중요했지만, 농업과 교역도 확산되면서 사회 계층 분화가 촉진되었고, 명나라와의 교역권을 둘러싼 갈등도 커져갔다.[36]

건주 여진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패멀라 크로슬리에 따르면, 쉬종샤는 발해 지역, 쑹화강과 훈강에서 유래했다고 보았으나, 일본 학자들은 건주라는 이름이 현재 한국과의 국경 근처에서 이주한 여진족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2]

원나라 멸망 후, 원나라에 충성하던 세력들이 북동쪽으로 후퇴했다. 1375년, 전 원나라 관료 나하출이 랴오양성에서 원나라 부활을 위해 랴오둥을 침략했다. 1387년 그가 패배한 후, 명나라는 랴오둥의 여진족을 재편하여 변경 지역을 보호하려 했다. 여러 여진 부족들이 남쪽으로 이주했고, 세 부족이 두만강 주변에 정착했다.[3]

건주 여진은 요나라금나라를 세운 여진족과는 별개로, 원나라 때도 여진족과 별도로 분류되었던 홀리개에서 부분적으로 유래되었다. 그들의 고향은 쑹화강무단강 하류였다. 홀리개는 나중에 서쪽으로 이동하여 명나라 시대에 멍게무가 이끄는 건주 여진의 주요 구성 요소가 되었고, 이는 후에 만주족이 되었다. 명나라 기록에 따르면, 건주 여진은 발해를 건국한 모허족의 후손이다.[4]

랴오양성의 일부였던 타오원, 홀리개, 워둘리안 여진 부족은 원나라 시대에 이란에서 헤이룽장 지역에 살았다. 이 부족들은 명나라 시대에 건주 여진이 되었다. 금나라 시대에 금나라 여진족은 홀리개가 된 후르카족과 같은 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앙가는 일란투멘에서 온 한국의 여진 이주민들이 1300년대에 사용했는데, 이는 우리앙가가 일란투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5][6][7]

1388년, 홍무제무단강쑹화강 합류 지점 근처 이란현에 있는 세 개의 일란투멘 부족과 접촉했다. 오도리, 홀리개(후르하 또는 후르카) 및 투오원 여진족은 몽골족에 대항하는 동맹으로 모집되었다. 여진족은 명나라 칭호를 받기 시작했다. 홀리개 추장 아하쿠는 1403년 건주위의 지휘관이 되었다. 오돌리의 멍커 테무르는 건주좌위의 지도자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퉁(Tong)이라는 중국 성씨를 받았다. 두 건주위는 카이위안과 푸순의 지정 시장에서 명나라와 교역했다. 그들은 북쪽의 야인 여진족과 남쪽의 조선에 맞서 여러 차례 서쪽으로 이동했다. 1467년과 1478년, 여진족의 한국 영토 침략은 한국-명나라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건주 여진족을 약화시켰다.[17]

건주 여진족은 명나라 시대에 농업을 채택하면서 비료, 가축, 철제 쟁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15] 1599년부터 중국에서 철제 쟁기를 구매하고 한국인에게서 철을 무기로 만드는 방법을 배운 후 제련 및 광업 지식을 습득했다.[16]

3. 1. 명나라의 지배와 위소 설치

명나라는 여진족 지역에 200여 개의 위소(衛所)라는 행정구획을 설치하고, 여진의 여러 부족장을 그 수장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제했다.[36] 당시 명나라는 여진족을 해서여진, 야인여진, 건주여진의 세 집단으로 구분했다.[36]

영락제는 중국 동북부로 출병하여 흑룡강 부근까지 진출하여 여진족을 지배하에 두었다. 이때 명나라는 이 지역을 회유하고 지배하기 위해 건주위, 건주좌위, 건주우위를 설치하고, 여진족을 위소제에 편입시켰다. 여진족은 위소를 통해 명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사회적,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다.[34]

건주 여진은 각 위소 외에 지면(地面), 참(站), 채(寨)를 가지고 있었으며, 명나라로부터 관직을 받을 때에는 칙서가 하사되었다.[34] 조공은 1년에 한 번, 10월 초부터 12월까지로 정해졌다. 건주 여진은 건주위, 좌위, 우위, 모련위 각각에서 100명 정도가 입경했지만, 나중에는 정원을 500명으로 정했다. 공물은 주로 말, 담비 모피, 스라소니 모피, 해청(), 토골, 황응, 아교, 수각 (해상아) 등이었다.[34]

3. 2. 건주여진의 성장과 독립

16세기 중반, 명나라의 방위 체계가 무너지면서 여진족은 해서여진과 건주여진 두 연맹으로 분열되었다. 건주 연맹은 압록강 북쪽에서 숙수후강 부족, 후네허, 왕가, 동고, 절전의 다섯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왕고의 지도 아래 연맹은 명나라 변경을 침략했고, 1473년에는 무순의 명나라 지휘관을 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반격으로 왕고가 사망하고 연맹은 해체되었다.[17]

1582년, 명나라 군대는 붕괴되어 가던 건주 연맹을 안정시키기 위해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추장 니칸 와이란은 왕고의 아들 아타이를 상대로 명나라 장군 이성량과 동맹을 맺었다. 기오창가는 넷째 아들 탁시를 데리고 아타이를 지원했으나, 고이성 전투에서 아타이, 기오창가, 탁시가 모두 사망했다.[17]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의 수쿠수 강 부족을 장악한 후 명나라에 맞서 일곱 가지 원한을 발표하고 복수전을 시작했다. 명나라는 니칸 와이란이 조창가와 탁시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보고 1586년에 그를 살해했다. 명나라는 그들의 죽음이 사고였다고 주장했지만, 이성량은 누르하치를 지원했다. 누르하치는 젊은 시절 이성량의 푸순 가문에서 살면서 중국 문자를 깨우쳤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훗날 여진 부족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7]

건주 연합의 지도 계보는 오도리 여진에서 시작되었으며,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기오창가는 몽케 테무르의 4대손이라고 주장했다.[18] 1588년 누르하치는 왕기야 부족과 동고 부족을 통합했다. 건주 여진의 통일은 누르하치가 남부 및 중앙 만주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통일 만주 국가를 건설하는 발판이 되었다. '만주'라는 이름 자체도 건주 여진을 지칭하는 오래된 용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7]

누르가치는 농업 노동력을 축적하여 건주 여진을 강화했다. 이전 통치자들과 달리, 누르가치는 이들에게 거처와 혜택을 제공하여 동화를 용이하게 하고 충성을 확립했다.[17]

푸순은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건주 사절단이 조공 임무를 수행하던 곳이었다.[31] 1618년, 누르가치의 군대는 푸순을 점령했고, 1621년에는 요동에서 명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누르가치는 "금"이라는 통일된 여진 정권을 선포하고, 1622년에는 광녕에서 명나라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건주를 강화하고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2]

요동을 통괄한 명나라 무장 이성량은 해서 여진과 건주 여진을 다투게 하는 정책을 폈다. 이 과정에서 소쿠수후허스크스후·빌라부의 니칸 와이란과 누르하치를 지원하여, 1587년 누르하치가 건주 여진을 통일하게 했다. 이후 누르하치는 조선 출병에 대응하느라 바쁜 명나라의 틈을 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했다.

3. 3. 누르하치의 등장과 건주여진 통일

누르하치는 할아버지 기오창가가 속했던 수쿠수후 강 부족을 장악한 뒤, 명나라에 맞서 일곱 가지 원한을 발표하고 복수전을 시작했다.[17] 명나라는 니칸 와이란이 기오창가와 아버지 탁시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보고 1586년에 그를 살해했다. 명나라는 이들의 죽음이 사고였다고 주장했지만, 누르하치는 젊은 시절 이성량의 푸순 가문에서 살면서 중국 문자를 깨우쳤을 가능성이 있으며, 훗날 여진 부족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7]

건주 연합의 지도 계보는 오도리 여진에서 시작되었으며,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기오창가는 몽케 테무르의 4대손이라고 주장했다.[18] 1588년 누르하치는 왕기야 부족과 동고 부족을 통합했다.

요동을 통괄한 명나라 무장 이성량은 건주 여진과 해서 여진을 다투게 하는 정책을 폈다. 이 과정에서 이성량은 소쿠수후허스크스후·빌라부의 니칸 와이 란과 누르하치를 지원했고, 1587년 누르하치는 건주 여진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후 누르하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에 명나라가 대응하는 틈을 타 해서 여진을 격파하고 여진족을 통일하여 후금을 건국했다.

3. 4. 후금 건국과 청나라로의 발전

누르가치는 농업 노동력을 축적하여 건주 여진을 강화했다. 국경 지역 농민들을 납치하기도 했지만, 이전 통치자들과 달리 이들에게 거처와 혜택을 제공하여 동화와 충성을 유도했다.[31]

푸순은 "퉁 조상의 도시"로, 17세기 초 명나라가 요동 국경으로 요새화한 곳이었다. 이곳은 하이시 여진, 건주 여진, 야인여진이 점령한 누르간과 접경한 무역 중심지였으며, 특히 말린 인삼, 말 거래, 염색 의류로 유명했다. 또한 건주 사절단이 조공 임무를 수행하며 오락과 다과를 즐기는 주요 장소였다.[31]

1618년, 누르가치 군대는 푸순을 점령했다. 1621년, 건주 여진은 요동에서 명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누르가치는 명나라 군 사령관 슝팅비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누르가치는 이전 여진 제국을 연상시키는 "금"이라는 통일된 여진 정권을 선포했다. 1622년, 누르가치는 명나라를 지원하던 몽골인들을 설득하여 지위를 버리게 했고, 그 결과 광녕에서 명나라는 치명적인 패배를 겪었다. 누르가치 군대는 곧 명나라의 옛 성도인 선양을 점령했다. 이 전투는 건주를 강화하고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2]

4. 사회와 문화

건주 여진 사회는 씨족 중심에서 지연 중심으로 변화하였으며, 수렵, 목축, 채집과 더불어 농업과 교역이 중요해졌다. 사회 계층 분화가 촉진되었고, 명과의 교역권을 둘러싼 갈등도 있었다.[36] 건주 여진족은 여진어, 몽골어, 중국어를 사용했으며, 누르하치는 만주어를 창제했으나 초기에는 몽골어가 널리 쓰였다.[19]

4. 1. 사회 구조

16세기 후반 여진족은 현재 중국의 동북지역과 러시아의 연해주를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에서 초기적 형태의 국가들을 이루거나 부족 혹은 씨족 단위로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의 지역에 일종의 행정구획인 위소(衛所)를 200여개 설치하고, 여진의 여러 부족장을 그 수장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제했다.[36]

당시 명은 이들을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의 세 집단으로 구분하였다. 세 집단의 하부에는 아이만(部, ᠠᡳᠮᠠᠨ|Aimanmnc)이나 구룬(國, ᡤᡠᡵᡠᠨ|Gurunmnc)으로 불린 여러 정치적 독립집단이 존재했고, 때로는 이 하부 집단도 통일되지 못한 채 내부적으로 여러 씨족과 부족이 권력을 다투고 있었다.[36]

건주여진은 압록강의 북쪽으로 훈허(渾河, 만주어 Hunehe bira) 상류부터 동가강(佟佳江)에 걸쳐 거주했으며, 숙수후(蘇克素滸, ᠰᡠᡴᠰᡠᡥᡠ|Suksuhumnc), 후너허(渾河, ᡥᡠᠨᡝᡥᡝ|Hunehemnc), 왕기얀(完顔, ᠸᠠᠩᡤᡳᠶᠨ|Wanggiyanmnc), 동고(董鄂, ᡩᠣᠩᡤᠣ|Donggomnc), 저천(哲陳, ᠵᡝᠴᡝᠨ|Jecenmnc)의 5개 아이만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외에 백두산 일대의 너연(訥殷, ᠩᡝᠶᡝᠨ|Neyenmnc), 주셔리(朱舍里, ᡷᡠᡧᡝᡵᡳ|Jušerimnc), 얄루 기양(鴨綠江, ᠶᠠᠯᡠ
ᡤᡳᠶᠠᠩ|Yalu Giyangmnc)의 3개 아이만도 때로 건주여진의 일부로 분류되었다. 건주여진에 속한 여러 부는 정치적 독립체였고, 수장 가문 사이의 혈연적 친연관계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 시기에 건주여진은 씨족을 단위로 하는 사회에서 벗어나, 여러 씨족이 하나의 마을에 거주하거나 하나의 씨족이 분화하여 여러 마을에서 분산 거주하는 지연적 형태의 거주로 발전해 있었다. 또한 생산의 면에서 수렵이나 목축, 그리고 채집경제가 여전히 중요했지만 농업과 교역이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농업과 교역이 증가할수록 사회적 계층의 분화가 촉진되어 갔고, 각 부 사이에 명나라와의 교역권을 둘러싸고 갈등과 마찰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36]

4. 2. 경제

16세기 후반 건주여진은 농업과 교역이 확산되면서 사회 계층이 분화되었고, 각 부족은 명나라와의 교역권을 두고 갈등했다.[36] 누르가치는 농업 노동력을 늘려 건주 여진을 강화했는데, 국경 지역 농민들을 데려와 이들에게 혜택을 주어 동화시켰다.

푸순은 명나라 요동의 국경 요새이자 무역 중심지였으며, 말린 인삼, 말 거래, 염색 의류 등으로 유명했다. 또한 건주 사절단이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방문하는 주요 장소였다.[31]

1618년 누르가치 군대가 푸순을 점령하면서 긴장이 높아졌고, 1621년 건주 여진은 요동에서 명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누르가치는 '금'이라는 통일된 여진 정권을 선포하고, 1622년 광녕에서 명나라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후 선양을 점령하여 건주를 강화하고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튼튼히 했다.[32]

4. 3. 언어

건주 여진족은 금나라에서 사용된 여진어를 사용했던 여진족과는 달리, 여진어, 몽골어, 중국어 세 가지 언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했다. 청나라 황실 역사에 따르면, 건주 수령 누르하치는 몽골어와 여진어를 통합한 체계를 고안하려 했다. 그 결과 만주어가 창제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만주 통일을 이끈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로 여겨졌다.[19] 그러나 한동안 이 문자는 널리 사용되지 않았고, 건주 여진족은 몽골어를 공용어로 계속 사용했다.[19]

5. 대외 관계

조선1300년대에 건국되어 일부 여진족 수령들을 동맹으로 여기기도 했지만, 12세기부터 함흥까지 남하한 여진족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내기 위해 군사 작전을 펼쳤다.[20] 1594년에는 건주 여진족이 조선인 17명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하자, 조선 조정은 신충립을 누르하치의 수도 *페알라*(Fe Ala)로 파견했다. 신충립은 만포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누르하치의 근거지인 수수 계곡까지 이동하며 여정을 상세히 기록했다.[21] 그의 기록에 따르면, 건주 지역은 강과 숲이 풍부하고 산업화가 진행 중이었으며, 건주 여진족은 20가구 이하의 마을 단위로 흩어져 살면서 강과 주변 지형에 의존해 생활했다.[21] 한편, 1467년1478년에는 여진족이 조선을 침략하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반격하여 건주 여진족을 크게 약화시키기도 했다.[4]

5. 1. 명나라와의 관계

명나라는 16세기 후반, 여진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200여 개의 위소(衛所)를 설치하고 여진 부족장들을 수장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제했다. 당시 명나라는 여진족을 해서여진, 야인여진과 함께 건주여진으로 구분했다.[36] 건주여진은 압록강 북쪽의 훈허 상류부터 동가강에 걸쳐 거주했으며, 숙수후, 후너허, 왕기얀, 동고, 저천의 5개 아이만(部)으로 나뉘어 있었다.[36] 백두산 일대의 너연, 주셔리, 얄루 기양의 3개 아이만도 때때로 건주여진의 일부로 분류되었다.[36]

건주 여진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패멀라 크로슬리에 따르면, 쉬종샤는 건주여진이 발해 지역, 쑹화강과 훈강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 학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현재 한국과의 국경 근처에서 이주한 여진족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2]

1375년, 전 원나라 관료였던 나하출이 랴오양성에서 원나라 부활을 위해 랴오둥을 침략했다. 1387년 그가 패배한 후, 명나라는 랴오둥의 여진족을 재편하여 명나라 변경 지역을 추가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여진 부족들이 남쪽으로 이주했고, 세 개의 부족이 현대 중국, 러시아, 북한 국경 근처의 두만강 주변에 정착했다.[3]

홍무제는 1388년 무단강쑹화강 합류 지점 근처(현재 이란현)의 세 부족과 접촉했다. 오도리, 홀리개(후르하 또는 후르카) 및 투오원 여진족은 몽골족에 대항하는 동맹으로 모집되었다. 여진족은 명나라 칭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403년 홀리개 추장 아하쿠는 건주위 지휘관이 되었고, 오돌리의 멍커 테무르는 건주좌위 지도자가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퉁(Tong)이라는 중국 성씨를 받았다.[3] 두 건주위는 카이위안과 푸순의 지정 시장에서 명나라와 교역했다.

건주 여진은 명나라 시대에 농업을 채택하여 비료, 가축, 철제 쟁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15] 1599년부터 중국에서 철제 쟁기를 구매하고 한국인에게서 철을 무기로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16]

16세기 중반, 건주 연맹은 압록강 북쪽에서 숙수후강 부족, 후네허, 왕가, 동고, 그리고 절전의 다섯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왕고의 지도 아래, 연맹은 명나라 변경을 침략하여 1473년에는 무순의 명나라 지휘관을 살해했다. 중국의 대규모 반격으로 왕고가 사망하고 연맹은 해체되었다.

1582년, 명나라 군대는 니칸 와이란과 동맹을 맺고 왕고의 아들 아타이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기오창가와 그의 아들 탁시가 사망했다. 누르가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성장하여, 명나라에 일곱 가지 원한을 발표하고 복수전을 시작했다. 명나라는 1586년 니칸 와이란을 살해했지만, 누르하치는 여진 부족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7]

건주 여진은 무역 권리를 놓고 명나라와 자주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여진 지도자들은 명나라 황제에게 "의례적인 숭배"를 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하여 조공 체제를 충족시켰다. 누르가치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그리고 자신이 이끈 조공을 두 번 행했다. 1580년, 그는 명나라 관리들의 부패와 무역 방해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22][23]

청나라는 만주족의 조상인 건주 여진이 명나라에 복종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청태조 무황제 실록''과 ''만주 실록도''의 원본 판을 일반에 공개하지 않았고, 명사에서 관련 내용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27][28][30] 명나라 시대에 조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의 여진족 거주지를 명나라의 일부로 간주했다.[29]

1618년, 누르가치의 군대는 푸순을 점령했다. 1621년, 건주 여진은 요동에서 명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누르가치는 "금"이라는 통일된 여진 정권을 선포했다. 1622년, 광녕에서 명나라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고, 곧 명나라의 옛 성도인 선양을 점령했다.[32]

건주 여진은 명나라로부터 관직을 받을 때 칙서를 받았다.[34] 조공은 1년에 한 번, 10월 초부터 12월까지로 정해졌으며, 건주위, 좌위, 우위, 모련위에서 각각 100명 정도가 입경했지만, 나중에는 정원을 500명으로 정했다. 공물은 주로 말, 담비 모피, 스라소니 모피, 해청, 토골, 황응, 아교, 수각 (해상아) 등이었다.[34]

5. 2. 조선과의 관계

1388년, 홍무제무단강쑹화강의 합류 지점 근처(현재의 이란현)에 있던 세 개의 일란투멘 부족과 접촉했다. 오도리, 홀리개(후르하 또는 후르카) 및 투오원 여진족은 몽골족에 대항하는 동맹으로 모집되었다. 여진족은 명나라 칭호를 받기 시작했고, 1403년 홀리개 추장 아하쿠는 해당 지역의 원나라 정치 단위의 이름을 딴 건주위의 지휘관이 되었다. 오돌리의 멍커 테무르(Möngke Temür)는 건주좌위의 지도자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퉁(Tong)이라는 중국 성씨를 받았다.[4] 두 건주위는 카이위안과 푸순의 지정 시장에서 명나라와 교역했다. 이들은 북쪽의 야인 여진족과 남쪽의 조선에 맞서 여러 차례 단기적인 서쪽 이동을 수행했다. 1467년1478년에 여진족이 조선 영토를 침략하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반격하여 건주 여진족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4]

조선1300년대에 건국되었으며, 일부 여진족 수령들을 유용한 동맹으로 여기고 12세기부터 한반도 중북부의 함흥까지 남하하여 거주한 여진족들을 압록강 너머 현재의 만주 지역으로 몰아내기 위한 강력한 군사 작전을 펼쳤다.[20]

신충립은 건주 여진에 대한 가장 생생한 서술과 묘사를 제공하였다. 1594년 건주 여진족이 최소 17명의 조선인을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 조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충립을 누르하치의 수도인 *페알라*(Fe Ala)로 파견하였다. 신충립은 소수의 조선 관리들과 함께 만포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북서쪽 지류를 따라 수수 계곡으로 이동했는데, 이곳은 누르하치의 근거지였다.[21]

신충립은 건주 여진 연맹을 여행하면서 여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록에 따르면 건주 지역은 강과 숲이 풍부했고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충립은 건주 여진 사회를 분석하여, 그들이 약 20가구 이하의 마을로 나누어져 숲이 우거진 강둑을 따라 흩어져 살았다고 언급했다. 그들은 강과 주변 지형에 의존하여 생활했다.[21]

참조

[1] 서적 The Manchus https://archive.org/[...] Blackwell 1997
[2] 서적 A translucent mirror :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3] 서적 A translucent mirror :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4] 웹사이트 东夷考略 https://ctext.org/li[...]
[5] 서적 Ch'ing-shih Wen-t'i https://books.google[...] Ch'ing-shih wen-t'i
[6] 서적 Ch'ing-shih Wen-t'i https://books.google[...] Ch'ing-shih wen-t'i
[7] 서적 A Transluce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8] 서적 China's minority nationalities https://books.google[...] Foreign Languages Press
[9] 서적 Rosyjsko-chińskie stosunki polityczne: XVII-XIX w https://books.google[...] Wydawn. Univ.
[10] 서적 ı̃Ư̄Ư̆ʺ̄ø̄ʻ̄̌: The Liao dynasty and Northern Song dynasty period, the Jin dynasty and Southern Song dynasty period https://books.google[...] ̄ʻ̄̄ð ̇ Þ̇
[11] 서적 中国交通五十年成就: 黑龙江卷 https://books.google[...] 人民交通出版社
[12] 서적 China Archaeology & Art Digest https://books.google[...] Art Text (HK) Pty Limited
[13] 서적 A Social History of Medieval China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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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16] 서적 The Great Enterprise: The Manchu Reconstruction of Imperial Ord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7] 서적 China's Last Empir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16-02-04
[18] 서적 The Manchus https://archive.org/[...] Blackwell 1997
[19] 서적 A transluce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20] 서적 A translucent mirror :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21] 서적 A translucent mirror :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22] 서적 A translucent mirror :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23] 서적 A translucent mirror :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24] 간행물 Abahai
[25] 서적 Early Manchu Recruitment of Chinese Scholar-official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1972
[26] 서적 The Manchu era (1644-1912): arts of China's last imperial dynasty https://books.google[...] Art Gallery of Greater Victoria 2004
[27] 간행물 Nurhaci
[28] 서적 The Augustan, Volumes 17-20 https://books.google[...] Augustan Society 1975
[29] 서적 The Northern Region of Korea: History, Identity, and Cultur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11
[30] 서적 The Qing Dynasty and Traditional Chinese Culture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5
[31] 서적 A translucent mirror :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32] 서적 A translucent mirror :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33] 서적 神宗顯皇帝實錄
[34] 서적 大明會典 Harvard-Yenching Library 所蔵
[35] 서적 柳邊紀略
[36] 서적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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