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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복건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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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걸복건귀는 선비족 걸복부 출신으로, 서진을 건국한 걸복국인의 동생이다. 걸복국인 사후 서진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금성을 수도로 삼고 주변 민족들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확장했다. 후진과의 대립, 후량과의 전쟁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으며 여러 차례 후진에 항복과 독립을 반복했다. 409년 서진을 재건했으나, 412년 쿠데타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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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복건귀
기본 정보
칭호대도독, 대장군, 대선우, 하남왕 (大都督 大將軍 大單于 河南王, 388–389)
시호무원왕 (武元王, "무예가 뛰어나고 사리 분별력이 있는")
묘호고조 (高祖)
걸복 (乞伏)
걸복 (乞伏)
건귀 (乾歸, 또한 강귀로 읽음)
재위 기간388년–400년
연호태초 (太初): 388년–400년
생몰
사망 년도412년
매장지원평릉 (元平陵)
가계
아버지걸복사번
배우자알려진 바 없음
자녀알려진 바 없음
서진 통치
통치 시작388년
통치 종료400년
이전 통치자걸복국인
다음 통치자부재
서진 재건 통치
통치 시작409년
통치 종료412년
이전 통치자재건
다음 통치자걸복치반

2. 생애

385년 걸복국인이 서진을 건국하자 그의 동생인 걸복건귀는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다. 388년 걸복국인이 죽자 그의 아들 걸복공부가 어렸기 때문에 걸복건귀가 뒤를 이었다. 그는 대도독·대장군·대선우·하남왕(大都督, 大將軍, 大單于, 河南王)을 자칭하고 간쑤성 금성(金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389년 전진의 부등에게 금성왕(金城王)으로 책봉되었다.

394년 부등이 지원군을 청하며 양왕(梁王)으로 책봉하자 걸복건귀는 1만 기병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부등은 전사하였고 걸복건귀는 회군하였다. 곧이어 황중(湟中)에서 부숭이 황제에 즉위하자 걸복건귀는 부숭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황중을 점거하였다. 부숭은 구지의 양정에게 망명하여 공동으로 걸복건귀를 공격하였으나, 걸복건귀는 이들을 격파하여 전진을 멸망시키고 농서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후 걸복건귀는 진왕(秦王)을 자칭하였다.

걸복건귀는 간쑤성 서성(西城)으로 천도하고 세력 확대를 꾀하여 토욕혼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397년 후량의 공격을 받아 금성을 빼앗기고 세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400년 원천(院川)으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후진이 서진을 공격하여 걸복건귀는 대패하였으며, 서진은 멸망하였다.

걸복건귀는 남량으로 망명하였으나 재기를 노리다가 실패하여 다시 후진으로 망명하였다. 후진의 요흥은 걸복건귀를 귀의후(歸義侯)에 책봉하였으며, 401년 옛 본거지였던 원천에 진수하여 구 서진의 세력을 이끌었다. 후진의 장군으로서 걸복건귀는 후량 공략, 토욕혼 공략 등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걸복건귀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요흥은 걸복건귀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주객상서(主客尙書)로 삼았다. 걸복부는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이 대신 통솔하였다.

409년 걸복건귀는 요흥의 진중에서 탈출하여 걸복부로 귀환하였으며 본거지를 원천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다시 도견산(度堅山)에 근거를 두고 진왕(秦王)에 즉위하여 서진을 다시 부활시켰다. 410년 수도를 다시 원천으로 옮겼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일시적으로 후진에 복속하기도 하였으나 남량, 후진 등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412년 세자 걸복치반이 남량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사이 걸복공부에게 살해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서진 건국 (385년 ~ 388년)

선비족 걸복부 출신인 걸복건귀는 걸복국인의 동생이다. 385년 걸복국인이 서진을 건국하자 걸복건귀는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다. 388년 걸복국인이 죽자, 그의 아들 걸복공부는 어렸기 때문에 관리와 장군들은 걸복건귀를 후계자로 지지하였다. 걸복건귀는 대도독·대장군·대선우·하남왕(大都督, 大將軍, 大單于, 河南王)을 자칭하였다. 여기서 하남왕은 현대의 허난성이 아닌, 황하 이남의 간쑤성칭하이성 지역을 의미한다.

2. 2. 제1차 통치 시기 (388년 ~ 400년)

388년 걸복국인이 죽자, 그의 아들 걸복공부가 어렸기 때문에 걸복건귀가 선비족 걸복부의 뒤를 이었다. 걸복건귀는 대도독·대장군·대선우·하남왕(大都督, 大將軍, 大單于, 河南王)을 자칭하고 간쑤성 금성(金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389년에는 전진의 부등에게 금성왕(金城王)에 책봉되었다.

390년, 토욕혼의 칸 모용시련이 서진에 신하로 복종했고, 걸복건귀는 그를 백란공으로 봉했다. 그러나 그 해 말 모용시련이 죽고 아들 모용시비(慕容視羆)가 뒤를 이으면서 그 칭호를 거부했다.

391년, 걸복건귀의 장군 월질힐귀(越質詰歸)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걸복건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자 항복했다. 걸복건귀는 씨족의 딸을 월질힐귀와 결혼시켜 그를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391년 말에 역효과를 냈다. 부족장 모이간(沒奕干)은 처음에는 복종하여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 다른 부족장 대두(大兜)를 공격하는 데 도움을 요청했다. 걸복건귀는 그를 도와 대두를 물리친 후, 모이간에게 감사의 표시로 그의 아들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모이간은 걸복건귀를 배신하고 철불의 수장 유위진과 연합했다. 걸복건귀는 모이간을 공격했고, 전투 중 화살을 쏘아 모이간의 눈을 맞혔다. 모이간을 공격하는 동안 후량의 왕자 여광은 서진을 공격했고, 걸복건귀는 그를 막기 위해 후퇴해야 했다. 이 사건은 서진과 후량 사이에 몇 년간의 간헐적인 전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393년, 걸복건귀는 아들 걸복치반태자로 세웠다.

395년 가을, 여광은 서진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걸복건귀는 여광에게 신하로 복종하고 그의 아들 걸복칙발(乞伏敕勃)을 인질로 여광에게 보냈고, 여광은 철수했다. 그러나 걸복건귀는 곧 이 조약을 후회하고 신하들을 처형했다.

398년 후반, 걸복익주는 모용시비와 싸워 그를 격파했다. 모용시비는 두려워 그의 아들 모용당기(慕容宕豈)를 인질로 보내고 평화를 구했다. 걸복건귀는 씨족의 딸을 모용당기와 결혼시켰다.

400년 여름, 후진의 장군 요석덕(姚碩德)이 서진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처음에는 걸복건귀가 요석덕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지만, 요흥이 직접 요석덕을 지원하기 위해 나타났다. 걸복건귀는 군대를 나누어 후진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지만, 안개 속에서 군대 간의 연락이 끊어졌고, 후진은 그들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거의 모든 서진 군대를 포로로 잡았다. 요흥은 부한(현대 린샤 후이족 자치주, 간쑤)으로 진격했고, 걸복건귀는 금성으로 도망쳐야 했다. 군대를 잃은 걸복건귀는 더 이상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남량의 왕자 토발리록고에게 항복했고, 토발리록고는 그를 귀빈으로 환영했다. 걸복건귀가 국가를 재건하려 할까 봐 걱정한 토발리록고는 그를 감시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걸복건귀는 처형될까 두려워 걸복치반,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를 남량의 수도 서평으로 인질로 보내 토발리록고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남량의 경비가 느슨해지자마자 부한으로 도망쳐 후진에 항복했다.

2. 2. 1. 주변 세력과의 각축

388년 걸복국인이 죽자 그 아들 걸복공부가 어렸기 때문에 걸복건귀가 뒤를 이었다. 걸복건귀는 대도독·대장군·대선우·하남왕(大都督, 大將軍, 大單于, 河南王)을 자칭하고 간쑤성 금성(金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389년 전진의 부등에게 금성왕(金城王)으로 책봉되었다.

394년 부등이 지원군을 청하며 양왕(梁王)으로 책봉하자 걸복건귀는 1만 기병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부등은 전사하였고 걸복건귀는 회군하였다.

곧이어 황중(湟中)에서 부숭이 황제에 즉위하자 걸복건귀는 부숭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황중을 점거하였다. 이에 부숭은 구지의 양정에게 망명하여 공동으로 걸복건귀를 공격하였다. 걸복건귀는 이들을 격파하여 전진을 멸망시켰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걸복건귀는 진왕(秦王)을 자칭하였다.

걸복건귀는 간쑤성 서성(西城)으로 천도하고 세력 확대를 꾀하여 토욕혼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후량의 공격을 받아 397년 금성을 빼앗기고 세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400년 원천(院川)으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후진이 서진을 공격하여 걸복건귀는 크게 패하였으며, 서진은 멸망하였다.

걸복건귀는 남량으로 망명하였으나 재기를 노리다가 실패하여 다시 후진으로 망명하였다. 후진의 요흥은 걸복건귀를 귀의후(歸義侯)에 책봉하였으며, 401년 옛 본거지였던 원천에 진수하여 구 서진의 세력을 이끌었다.

후진의 장군으로서 걸복건귀는 후량 공략, 토욕혼 공략 등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걸복건귀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요흥은 걸복건귀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주객상서(主客尙書)로 삼았다. 걸복부는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이 대신 통솔하였다.

409년 걸복건귀는 요흥의 진중에서 탈출하여 걸복부로 귀환하였으며 본거지를 원천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다시 도견산(度堅山)에 근거를 두고 진왕(秦王)에 즉위하여 서진을 다시 부활시켰다.

410년 수도를 다시 원천으로 옮겼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일시적으로 후진에 복속하기도 하였으나 남량, 후진 등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2. 2. 2. 진왕(秦王) 즉위와 쇠퇴

388년, 걸복국인이 죽자 그의 아들 걸복공부(乞伏公府)가 어렸기 때문에 걸복건귀가 뒤를 이었다. 걸복건귀는 대도독·대장군·대선우·하남왕(大都督, 大將軍, 大單于, 河南王)을 자칭하고 간쑤성 란저우 시에 있는 금성(金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389년, 전진의 부등은 걸복건귀를 금성왕(金城王)에 책봉했다. 이는 원래의 하남공보다 낮은 지위였지만, 걸복건귀는 이 칭호를 받아들였다.

394년, 부등이 지원군을 청하면서 걸복건귀를 양왕(梁王)에 책봉하자, 걸복건귀는 1만 기병을 원군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부등은 전사했고, 걸복건귀는 회군했다.

곧이어 황중(湟中)에서 부숭이 황제에 즉위하자, 걸복건귀는 부숭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황중을 점거했다. 부숭은 구지의 양정에게 망명하여 공동으로 걸복건귀를 공격했다. 걸복건귀는 이들을 격파하여 전진을 멸망시키고 농서 일대를 장악했다. 이를 토대로 걸복건귀는 진왕(秦王)을 자칭했다.

395년 경, 걸복건귀는 진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암묵적으로 스스로를 후진의 라이벌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국가는 역사상 서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걸복건귀는 서성(西城, 간쑤성 징위안 현)으로 천도하고 세력 확대를 꾀하여 토욕혼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397년 후량의 공격을 받아 금성을 빼앗기고 세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400년에는 원천(院川)으로 천도했다. 같은 해, 후진이 서진을 공격하여 걸복건귀는 대패했으며, 서진은 멸망하였다.

2. 2. 3. 후진으로의 망명과 귀환

394년 부등이 지원군을 청하며 걸복건귀를 양왕(梁王)에 책봉하자, 걸복건귀는 1만 기병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부등은 전사하였고, 걸복건귀는 회군하였다.

황중(湟中)에서 부숭이 황제에 즉위하자 걸복건귀는 부숭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황중을 점거하였다. 이에 부숭은 구지의 양정에게 망명하여 공동으로 걸복건귀를 공격하였다. 걸복건귀는 이를 격파하여 전진을 멸망시켰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걸복건귀는 진왕(秦王)을 자칭하였다.

400년 후진이 서진을 공격하여 걸복건귀는 크게 패하였으며, 서진은 멸망하였다. 걸복건귀는 남량으로 망명하였으나 재기를 노리다가 실패하여 다시 후진으로 망명하였다. 후진의 요흥은 걸복건귀를 귀의후(歸義侯)에 책봉하였으며, 401년에는 옛 본거지였던 원천(院川)에 주둔하여 구 서진의 세력을 이끌었다.

409년 걸복건귀는 요흥의 진중에서 탈출하여 걸복부로 귀환하였으며 본거지를 원천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다시 도견산(度堅山)에 근거를 두고 진왕(秦王)에 즉위하여 서진을 다시 부활시켰다.

2. 3. 제2차 통치 시기 (409년 ~ 412년)

409년 걸복건귀는 후진에서 탈출하여 걸복부로 돌아와 도견산(度堅山)에서 진왕(秦王)을 칭하며 서진을 부활시켰다. 복위 후, 걸복건귀는 그의 아내 변씨를 공주로, 걸복치반을 태자로 책봉하고, 일시적으로 수도를 도견산(현재의 백은시, 간쑤성)에 두었다.

410년 수도를 다시 원천(苑川)으로 옮기고 농서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그 후 후진의 금성군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이후 후진의 여러 군을 추가로 점령했다. 411년 봄, 점령한 관료들을 후진에 돌려보내고 다시 속국으로 복종할 것을 제안하며 평화를 모색했다. 요흥은 그를 하남왕으로 책봉했다. 그러나 411년 겨울, 다시 후진의 여러 군을 점령했다. 412년 봄, 수도를 담교(譚郊, 현재의 린샤 후이족 자치주, 간쑤성)로 옮기고 걸복치반에게 원천을 맡겼다.

2. 3. 1. 서진의 부활

388년 걸복국인이 죽자 아들 걸복공부가 어렸기 때문에 걸복건귀가 뒤를 이었다. 400년 후진(後秦)에게 멸망당했던 서진을 409년에 부활시켰다.

409년 걸복건귀는 후진의 진중에서 탈출하여 걸복부로 귀환하여 도견산(度堅山)에 근거를 두고 진왕(秦王)에 즉위하여 서진을 다시 부활시켰다.

410년에는 수도를 원천(苑川)으로 옮겼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일시적으로 후진에 복속하기도 하였으나 남량, 후진 등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412년 세자 걸복치반이 남량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사이 걸복공부에게 살해되었다.

2. 3. 2. 최후

412년, 세자 걸복치반이 남량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사이 걸복공부가 걸복건귀를 살해했다. 걸복공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걸복건귀와 그의 아들 10명 이상을 죽였다. 이후 걸복공부와 걸복치반 사이에 짧은 전투가 벌어졌고, 걸복치반이 승리하여 걸복공부를 죽였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척복사번선비족 추장
부인변황후388년, 409년 책봉
부인부황후394년 책봉
아들척복칩반태자 겸 평창공, 이후 문제
아들척복칙발
아들척복목혁간
아들척복심건
아들척복지달
아들척복담달
아들척복루기
아들척복천년
아들척복옥릉
아들척복십인척복모모에게 429년 처형
아들척복백양척복모모에게 430년 처형
아들척복거렬척복모모에게 430년 처형
평창공주북량 저거몽손의 태자 저거흥국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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