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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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헬름 1세는 1797년 프로이센의 왕자로 태어나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으며, 1861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사망으로 프로이센 국왕이 되었다. 그는 군대 개혁을 추진하고 의회와 갈등을 겪었으며,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등용하여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했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초대 독일 황제가 되었으며, 1888년 사망할 때까지 비스마르크를 중용하여 독일 통치를 이끌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으며, 미야코지마에서 독일 상선 난파 사건으로 인해 주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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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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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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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빌헬름 1세 |
로마자 표기 | Wilhelm Friedrich Ludwig |
전체 이름 | 빌헬름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
별칭 | 빌헬름 대왕 |
출생일 | 1797년 3월 22일 |
출생지 | Kronprinzenpalais, 베를린, 프로이센 왕국,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888년 3월 9일 |
사망지 |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베를린, 독일 제국 |
매장일 | 1888년 3월 16일 |
매장지 |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
종교 | 루터교 (프로이센 연합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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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 | 호엔촐레른 가문 |
아버지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어머니 | 루이제 폰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
배우자 | 아우구스타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1829년 6월 11일 결혼) |
자녀 | 프리드리히 3세 루이제 |
군사 경력 | |
소속 | 프로이센 왕국 육군 (현역 복무) |
복무 기간 | 1809년–1858년 (현역 복무) |
최종 계급 | 원수 (현역 복무) |
부대 | 제1근위연대 |
지휘 | 슈테틴 근위향토방위대 마인츠 요새 |
참전 전투 |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바르쉬르오브 전투 파리 전투 나폴레옹 백일천하 리니 전투 워털루 전투 1848년 독일 혁명 보불전쟁 스당 전투 파리 포위전 |
훈장 | 철십자 훈장 |
프로이센 국왕 | |
재위 기간 | 1861년 1월 2일 – 1888년 3월 9일 |
대관일 | 1861년 10월 18일 |
이전 국왕 |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
다음 국왕 | 프리드리히 3세 |
총리 | 카를 안톤 폰 호엔촐레른 공작 아돌프 추 호엔로헤잉겔핑겐 공작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브레히트 폰 론 |
북독일 연방 의장 | |
재임 기간 | 1867년 7월 1일 – 1870년 12월 31일 |
수상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독일 황제 | |
재위 기간 | 1871년 1월 18일 – 1888년 3월 9일 |
즉위 방식 | 선포 |
선포일 | 1871년 1월 18일 |
이전 황제 | (군주제 수립) |
다음 황제 | 프리드리히 3세 |
수상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2. 어린 시절과 군사 경력
빌헬름 1세는 1797년 3월 22일 베를린 왕세자궁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 빌헬름의 조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그가 태어난 해인 1797년에 사망했다.[2] 빌헬름은 1801년부터 1809년까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던 요한 프리드리히 고틀리에프 델브뤽에게 교육을 받았다.[2] 12세 때인 1807년, 프로이센 군에 장교로 임명되었다.[2]
1814년부터 육군에 복무한 빌헬름은 나폴레옹 전쟁의 일부인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나폴레옹 1세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바르쉬르오브 전투에서 용감한 군인으로 활약하여 철십자 상을 수상하였다.[2] 1815년 소령으로 진급, 제 1 근위 사단의 대대를 지휘하였고, 리니와 워털루 전투에서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아래에서 싸웠다.[2] 181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와 결혼한 누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를 동행하였다.[3]
1816년 슈테틴 근위향토방위대를 지휘하였고, 2년 후 소장으로 진급했다.[2] 1820년 제1근위 사단의 사령관, 1825년 제 3 육군단의 사령관으로 승진했다.[2] 빌헬름은 강하고 잘 훈련된 군대를 주장하여 호엔촐레른 가 안에서 프로이센 육군의 대변인이 되었다.[2]
1826년 빌헬름은 폴란드 귀족 여성 엘리자 라츠비우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귀천상혼을 이유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4] 1829년, 아우구스타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녀와 결혼하였으나, 외적으로는 안정적이었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다.[5]
1840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프로이센 국왕이 되었으나 자녀가 없어 빌헬름은 사실상의 왕세제가 되었다.[2] 1847년, 자신의 신념에 반하여 형에게 충성, 프로이센 국회를 세우는 법안을 서명하고 귀족원에 의석을 차지하였다.[2]
1848년 독일 혁명 동안 빌헬름은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으나, 대포를 사용하여 '포도탄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2] 1849년 코블렌츠에 있는 선거궁에서 의석과 함께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의 총독이 되었다.[2][5] 코블렌츠에서 빌헬름 부부는 자유주의 학자들을 즐겁게 했으며, 이를 계기로 자유주의에 대한 반대가 점차 부드러워졌다.[2]
1854년 야전 사령관으로 올라 마인츠 연방 요새의 총독이 되었다.[6] 1857년 뇌졸중을 앓은 형을 대신하여 1858년 1월부터 섭정을 맡았다.[2]
2. 1. 탄생과 교육
'''빌헬름 1세'''는 1797년 3월 22일 베를린 왕세자궁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74] 빌헬름의 조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그가 태어난 해인 1797년에 사망했다.[74] 빌헬름은 1801년부터 1809년까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던 요한 프리드리히 고틀리에프 델브뤽에게 교육을 받았다.[2] 1807년, 12세의 나이에 프로이센 군에 장교로 임명되었다.[2]
1814년부터 육군에 복무한 빌헬름은 나폴레옹 전쟁의 일부인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나폴레옹 1세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바르쉬르오브 전투에서 용감한 군인으로 활약하여 철십자 상을 수상하였다.[2] 1815년 소령으로 진급, 제 1 근위 사단의 대대를 지휘하였고, 리니와 워털루 전투에서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아래에서 싸웠다.[2] 181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와 결혼한 누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를 동행하였다.[3]
1816년 슈테틴 근위향토방위대를 지휘하였고, 2년 후 소장으로 진급했다.[2] 1820년 제1근위 사단의 사령관, 1825년 제 3 육군단의 사령관으로 승진했다.[2] 빌헬름은 강하고 잘 훈련된 군대를 주장하여 호엔촐레른 가 안에서 프로이센 육군의 대변인이 되었다.[2]
1826년 빌헬름은 폴란드 귀족 여성 엘리자 라츠비우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귀천상혼을 이유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4] 1829년, 아우구스타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녀와 결혼하였으나, 외적으로는 안정적이었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다.[5]
1840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프로이센 국왕이 되었으나 자녀가 없어 빌헬름은 사실상의 왕세제가 되었다.[2] 1847년, 자신의 신념에 반하여 형에게 충성, 프로이센 국회를 세우는 법안을 서명하고 귀족원에 의석을 차지하였다.[2]
1848년 독일 혁명 동안 빌헬름은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으나, 대포를 사용하여 '포도탄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2] 1849년 코블렌츠에 있는 선거궁에서 의석과 함께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의 총독이 되었다.[2][5] 코블렌츠에서 빌헬름 부부는 자유주의 학자들을 즐겁게 했으며, 이를 계기로 자유주의에 대한 반대가 점차 부드러워졌다.[2]
1854년 야전 사령관으로 올라 마인츠 연방 요새의 총독이 되었다.[6] 1857년 뇌졸중을 앓은 형을 대신하여 1858년 1월부터 섭정을 맡았다.[2]
2. 2. 나폴레옹 전쟁 참전
빌헬름 1세는 1814년부터 프로이센 육군에 복무하며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2] 그는 독일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해방 전쟁)으로 알려진 전쟁에서 나폴레옹 1세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매우 용감한 군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74][76][75] 바르쉬르오브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철십자훈장을 수훈받았다.[2][74][76][75] 1815년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제1근위연대 대대를 지휘하였고, 리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휘하에서 싸웠다.[2]이러한 프랑스와의 전쟁은 빌헬름 1세에게 평생 동안 영향을 주었으며, 나폴레옹과 프랑스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2] 그는 이 전투를 통해 나폴레옹을 낳은 혁명을 격렬하게 증오하게 되었고, 혁명으로부터 왕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군대뿐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77]
2. 3. 군 경력과 왕족으로서의 활동
빌헬름 1세는 1814년부터 프로이센 육군에 복무하며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바르쉬르오브 전투에서 용맹함을 보여 철십자훈장을 받았으며, 이 경험은 그에게 프랑스에 대한 강한 반감을 심어주었다.[2] 1815년 소령으로 진급하여 제1근위연대 대대를 지휘했고, 워털루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2] 1817년에는 누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결혼식 참석차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3]1816년 슈테틴 근위향토방위대 지휘를 맡았고, 1818년 소장으로 진급했다.[2] 1819년에는 제7, 8군단 조사관으로 임명되어 프로이센 군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며, 강하고 잘 훈련된 군대를 옹호했다.[2] 1820년 제1근위사단 사령관, 1825년 제3군단 사령관으로 진급했다.[2]
1840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즉위하면서 왕위 계승 서열 1순위가 되어 "프로이센 왕자" 칭호를 받았다.[2] 1848년 혁명 당시 베를린 봉기 진압에 참여했으나, 대포 사용으로 인해 "포도탄의 왕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2] 이후 바덴 봉기 진압을 돕고,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총독을 역임했다.[2][5]
1854년 원수로 진급하여 마인츠 연방 요새 총독이 되었다.[6] 1857년 형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1858년 1월부터 섭정을 맡아 프로이센을 통치하기 시작했다.[2]
2. 4. 엘리자 라츠비우와의 관계와 아우구스타와의 결혼
1826년 빌헬름 1세는 폴란드 귀족 여성 엘리자 라츠비우와 결혼하려 했으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귀천상혼을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되었다.[4] 엘리자는 빌헬름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딸 아그네스 크롤을 낳았고, 베를린의 크롤 오페라 하우스 소유주인 요제프와 캐롤라인 크롤이 키웠다고 전해진다.[4] 아그네스는 훗날 카를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데트만과 결혼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고 1904년 사망했다.[4][20]1829년 빌헬름은 아우구스타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녀와 결혼하였다.[5] 그녀는 카를 프리드리히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과 니콜라이 1세의 딸 마리야 파블로브나의 딸이었다. 이 결혼은 표면적으로는 안정적이었으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다.[5]
2. 5. 1848년 혁명과 망명
1840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프로이센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빌헬름은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어 'Prinz von Preußende'(프로이센 왕자) 칭호를 받았다.[2] 그는 형에 대한 충성심으로 자신의 신념에 반하여 1847년 프로이센 의회를 설립하는 법안에 서명하고 귀족원 의석을 차지하였다.[2]1848년 혁명 기간 동안 빌헬름은 베를린에서 일어난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2] 그러나 대포를 사용한 진압 방식은 그를 인기 없게 만들었고, 'Kartätschenprinzde'(포도탄 왕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2][88] 실제로 그는 상인으로 변장하여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2] 당시 베를린 경찰청장은 빌헬름 왕자가 시민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고 보고했고,[79]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인 동생에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영국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는 임무를 명령, 3월 19일 빌헬름은 망명에 가까운 형태로 국외로 떠났다.[80][81]
이후 귀국한 빌헬름은 프로이센 군대를 지휘하여 바덴 봉기를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 1849년 10월, 그는 코블렌츠에 있는 선거후궁에 거주하며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의 총독이 되었다.[2][5] 코블렌츠에 있는 동안 빌헬름과 그의 아내는 역사가 막시밀리안 볼프강 둥커, 아우구스트 폰 베트만홀베크, 와 같은 자유주의 학자들을 접대했고,[2] 이를 계기로 빌헬름의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반대는 점차 완화되었다.[2]
2. 6. 자유주의 사상과의 관계
빌헬름 1세는 코블렌츠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역사가 막시밀리안 볼프강 둥커, 아우구스트 폰 베트만홀베히와 클레멘스 테오도어 페르테스 같은 자유주의 학자들을 접대했다.[2] 1849년 베스트팔렌(Westfalen)주와 라인(Rhein)주의 주지사에 취임하여, 아우구스타 왕비와 함께 코블렌츠 선제후궁전(Kurfürstliches Schloss (Koblenz))에서 생활했다.[74]이후, 자유주의적인 아우구스타 왕비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학자들과 교류를 깊게 하면서, 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대립을 심화시키는 가운데, “주보당(Wochenblattpartei)” 등 자유주의적 보수파가 빌헬름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다. 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주변에는 레오폴트 폰 게를라흐(Leopold von Gerlach)(시종무관장) 등 보수파 측근 그룹인 “카마릴라(Kamarilla)”가 있었기 때문에, 빌헬름도 형과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주장을 하게 되었다.[91]
크림 전쟁 중이던 1854년에는, 친영불을 주장했던 주보당 인사들이 친러를 주장하는 카마릴라에 의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와 거리를 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주보당에 가까웠던 빌헬름 왕자는 이에 반발하여 일시적으로 바덴바덴(Baden-Baden)(바덴 대공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빌헬름 왕자는 자유주의파처럼 “반동의 본거지” 러시아와 전쟁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동방의 우방” 러시아가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도록 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92]
이러한 교류를 통해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빌헬름의 반감은 점차 완화되었다.[2]
2. 7. 섭정 취임
1854년 빌헬름 왕자는 야전 사령관으로 진급하여 마인츠 연방 요새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6] 1857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뇌졸중을 앓아 정신적으로 장애를 갖게 되자,[2] 1858년 1월 빌헬름은 섭정이 되었다. 처음에는 일시적이었으나, 10월 이후에는 영구적으로 섭정직을 수행하게 되었다.[2]1857년 가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정신 질환이 악화되어 정신 착란 상태에 빠졌다. 프로이센 헌법에 따라 빌헬름이 섭정에 취임해야 했지만, 총리 오토 테오도르 폰 비스마르크 등은 자유주의 정책 시행을 우려하여 섭정 설치에 미온적이었다. 10월 23일, 빌헬름은 3개월 기한의 “국왕 대리인”이라는 헌법상 규정이 없는 지위에 임명되었다. 1858년 1월, 4월, 7월에 걸쳐 이 직위는 갱신되었으나, 결국 10월 7일 빌헬름은 정식 섭정으로 임명되었다.[96]
섭정 취임 후, 빌헬름은 형의 정치적 유언을 무시하고 10월 26일 의회에서 헌법 선서를 하며 입헌 통치를 선언했다.[97] 그는 프로이센 헌법을 "단단하고 불가침"하게 보존할 것을 약속했다.[2]
빌헬름은 11월 6일, 자유주의 성향의 카를 안톤 폰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을 총리로 임명하여, 이른바 '신시대'를 열었다.[98] 그러나 군대 개혁 문제에 있어서는 빌헬름과 프로이센 의회의 자유주의 다수파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2]

3. 프로이센 국왕 즉위
1861년 1월 2일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사망하자 빌헬름은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로서 왕좌에 올랐다.[2] 1861년 7월 라이프치히에서 온 학생이 빌헬름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그는 가볍게 부상 만을 당했다.[2] 10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 성에서 프리드리히 1세처럼 빌헬름은 쾨니히스베르크로 가서 슐로스키르헤(Schlosskirche)에서 스스로 대관식을 거행했다.[5] 빌헬름은 라이프치히 전투 기념일인 10월 18일을 이 행사의 날짜로 선택했는데, 이는 1701년 이후 최초의 프로이센 대관식이자 1806년 이후 독일 국왕의 유일한 대관식이었다.[2] 빌헬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유언에 나타난 그의 형의 헌법 폐지 요구를 거부했다.[2]
빌헬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프로이센 의회 사이에 갈등을 상속받았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형보다 정치에서 덜 개입하면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숙고되었다. 1862년 프로이센 의회는 이미 군대의 시행된 개혁을 위하여 지불하는 데 필요했던 군사 예산에서 증가를 거부하였다. 이 일은 150,000명에서 200,000명의 남성들로 평시 군대를 키우고 40,000명에서 63,000명으로 연간 신입 병사 수를 늘리이는 것을 연루하였다. 하지만 정말 논란이 되는 부분은 3년의 세월에 군사 복무의 기간을 지키는 계획이었다.[7] 그의 요청(알브레히트 폰 로온 전쟁 장관의 지지)이 거부되자 빌헬름은 처음에 퇴위를 고려했지만, 그의 아들인 황태자는 강력히 반대했다.[7] 그러자 로온의 조언에 따라 빌헬름은 제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임명했다.[2] 프로이센 헌법에 따라 총리는 란트타크가 아니라 국왕에게만 책임이 있었다. 보수적인 프로이센 융커이자 국왕의 충실한 친구였던 비스마르크는 빌헬름과의 관계를 봉건적 상급자에 대한 봉신의 관계로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정과 외교 모두에서 비스마르크가 사실상 국정을 지휘했고, 여러 차례 사임을 위협하여 빌헬름의 동의를 얻었다.[8]
빌헬름은 1864년 덴마크를 상대로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과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다. 후자의 전쟁이 프로이센에 의하여 승리한 후, 빌헬름은 프로이센 군대가 빈으로 행렬하여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것을 원했으나 비스마르크와 자신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가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나중에 필요한 경우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을 수 있도록 전쟁을 빠르게 끝내는 것을 원하였으며, 프리드리히 왕세자도 또한 사상자들에 경악하여 적대 행위의 신속한 종료를 원했다. 열띤 토론이 있던 동안 비스마르크는 만약 빌헬름이 빈으로 지속한다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하였으며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방향을 얻었다. 빌헬름은 독일 북부 3분의 2의 사실상 통치자가 되면서 스스로 만족해야 했다.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물론 마인강 북부의 몇몇의 오스트리아의 동맹국들을 병합하였다. 그 일은 또한 작센라우엔부르크를 프로이센과 동군연합으로 들어오는 것을 강요하였다.
1867년 북독일 연방은 프로이센의 영구적 통솔 아래 북부와 중부 독일의 주들의 연방으로서 창조되었다. 빌헬름은 연방의 상임 간부회인 '''분데스프레지디움'''(Bundespräsidiumde)을 추정하였고, 직위는 프로이센 왕가의 세습 직위였다. 명시적이 아닌 기능적으로 그는 국가의 원수였다. 비스마르크는 국제적으로 총통은 너무 공화주의적이면서 그런 칭로들을 피하였다.[9] 빌헬름은 또한 전연방무장군대의 헌법적 사령관이기도 했다. 남부 독일의 주들과 조약들을 통하여 그는 또한 전쟁 시기에 그들의 군대의 사령관이 되기도 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난 동안 빌헬름은 중대한 스당 전투에서 전체 독일 군대의 지휘관이었다.[2]
3. 1. 즉위와 암살 시도
1861년 1월 2일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사망하자 빌헬름은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로서 왕좌에 올랐다.[112] 즉위 직후, 빌헬름 1세는 「통수권 행사에 관한 칙령」을 발포하여 군사 예산 및 군사 행정 관련 문제에 대해서만 국왕은 육군대신의 부서를 필요로 하고, 군 복무 사항과 군 인사에 대해서는 육군대신의 부서를 필요로 하지 않음으로써 군을 의회의 영향으로부터 멀리했다.[113] 빌헬름은 1월 14일, 국왕으로서 처음 소집한 하원 개원식 칙어에서 국민 대표가 군제 개혁에 협찬할 것을 요구했다.[114]1861년 7월 라이프치히에서 온 학생이 빌헬름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그는 가볍게 부상 만을 당했다.[2] 10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 성에서 프리드리히 1세처럼 빌헬름은 쾨니히스베르크로 가서 슐로스키르헤(Schlosskirche)에서 스스로 대관식을 거행했다.[5] 빌헬름은 라이프치히 전투 기념일인 10월 18일을 이 행사의 날짜로 선택했는데, 이는 1701년 이후 최초의 프로이센 대관식이자 1806년 이후 독일 국왕의 유일한 대관식이었다.[2] 빌헬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유언에 나타난 그의 형의 헌법 폐지 요구를 거부했다.[2]
빌헬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프로이센 의회 사이에 갈등을 상속받았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형보다 정치에서 덜 개입하면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숙고되었다. 1862년 프로이센 의회는 이미 군대의 시행된 개혁을 위하여 지불하는 데 필요했던 군사 예산에서 증가를 거부하였다.[7] 정부는 군제 개혁 문제에 대해 국왕의 통수권에 따라 당연히 시행되는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특별 경비로 하지 않고 일반회계예산에 계상하려고 했지만, 하원 군사위원회는 앞선 임시법의 조치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조치임을 강조하고, 또한 「란트베어는 1814년 병역법에 의해 정해진 제도이며, 이것을 국왕이 명령으로 함부로 개변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114]
3. 2. 군제 개혁과 의회와의 갈등
빌헬름 1세는 즉위하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프로이센 의회 사이의 갈등을 상속받았다.[2] 그는 형보다 정치에 덜 개입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여겨졌다.[7]1859년 11월, 빌헬름은 알브레히트 폰 로온(Albrecht von Roon)을 육군 장관에 임명하고 군제 개혁안을 추진했다.[104] 이 개혁안은 징병 수를 늘리고, 3년 복무제를 유지하며, 란트베어의 야전군 기능을 축소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했다.[105] 빌헬름은 3년 복무제가 군인의 신분 의식을 확립하고 왕위를 보호하는 데 중요하다고 믿었으며,[105] 란트베어를 불신했다.[108]
프로이센 의회의 자유주의파 의원들은 군비 증강에는 찬성했지만, 3년 복무제와 란트베어 축소에는 반대했다.[109] 1862년 프로이센 의회는 군사 예산 증액을 거부했고, 이는 갈등을 심화시켰다.[7] 빌헬름은 의회가 국왕의 통수권을 침해한다고 보았다.[110]
의회와의 갈등이 지속되자, 빌헬름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임명하여 제안을 강제하려 했다.[2] 프로이센 헌법에 따르면 총리는 의회가 아닌 국왕에게만 책임을 지기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융커 출신이자 국왕의 충신이었던 비스마르크는 빌헬름과의 관계를 봉건적 상급자와 봉신의 관계로 인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는 내정과 외교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8]
1862년 9월 23일, 빌헬름은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임명하고, 이후 4년간 무예산 통치를 강행하며 군제 개혁을 추진했다.[126]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정부 사이에 이른바 '헌법 투쟁'이 벌어졌다.[130] 비스마르크는 철혈 연설을 통해 군비 증강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의회의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128]
4. 독일 통일 전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남독일 국가들이 북독일 연방에 합류하였고, 이는 독일 제국(Deutsches Reich)으로 재편되었다. 연방 대통령(Bundespräsidium)의 직함은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로 바뀌었다. 이는 제국의회(Reichstag)와 연방평의회(Bundesrat)의 입법 기관들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빌헬름 1세는 12월 8일 제국의회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이에 동의했다. 새로운 헌법(1871년 독일 연방 헌법)과 황제의 칭호는 1871년 1월 1일에 발효되었다.[10]
그러나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 국왕이라는 자신의 칭호를 가릴까 봐 헌법상의 칭호를 받는 것을 주저했다. 그는 또한 "독일 황제(Kaiser von Deutschland)"가 되기를 원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남독일 제후들과 오스트리아 황제가 항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11][12] 결국 빌헬름 1세는 마지못해 승낙했고,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의 거울의 방(Hall of Mirrors)에서 공식적으로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 날짜는 1701년 최초의 프로이센 국왕의 대관식 날짜로 선택되었다. 국가적 기억 속에서 1월 18일은 제국 건국일(Reichsgründungstag)이 되었지만, 헌법적 의미는 없었다.[12]
[[File:Wernerprokla.jpg|thumb|프랑스 베르사유](Versailles)의
4. 1. 덴마크 전쟁 (1864)
1864년,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라우엔부르크 세 공국은 덴마크 국왕이 동군연합으로 통치했지만, 주민 대다수가 독일계여서 덴마크로부터의 독립 운동이 발생했다.[136] 덴마크는 제1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때 체결된 런던 의정서를 위반하고 슐레스비히 공국 병합을 시도했다.[136] 크리스티안 9세가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하자, 아우구스텐부르크 공 프리드리히가 세 공국의 계승권을 요구하며 봉기했고, 독일 제후국의 민족주의적 지지를 얻었다.[136]빌헬름 1세는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137][138] 비스마르크는 런던 의정서를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139][140] 결국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덴마크에 런던 의정서를 준수하도록 1864년 2월부터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을 일으켰다.[141]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 군이 뒤펠 방어선 공략과 알센섬 상륙 작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뻐했다.[141]

전쟁은 1864년 8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런던 의정서는 폐기되었다.[142] 세 공국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공동 통치하게 되었고, 1865년 8월 가스타인 조약으로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관리하고, 라우엔부르크의 오스트리아 권리는 프로이센에 매각되었다.[142] 빌헬름 1세는 라우엔부르크 획득 공로로 1865년 9월 15일 비스마르크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142]
4. 2.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66)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프로이센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했다.[146] 전쟁은 쾨니히그라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승리하면서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147] 빌헬름 1세는 쾨니히그라츠 전투의 승리에 고무되어 오스트리아 빈으로 진군하여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려 했으나,[147] 비스마르크와 황태자 프리드리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56][157][158][159]
당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강화 교섭을 중재하며 개입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은 강화에 응해야 했다.[148] 오스트리아는 작센 왕국의 영토 보전을 강화 조건으로 제시했지만, 빌헬름 1세는 작센을 전쟁의 "주범"으로 여겨 영토 축소를 원했다.[149][150][151] 반면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미래의 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2]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는 7월 22일부터 니콜스부르크 대본영에서 격렬하게 대립했다.[148] 빌헬름 1세는 정통주의의 입장에서 군주가 폐절되는 것을 꺼렸고,[153][154][155] "주범" 작센이 "무죄 방면"되고 하노버와 헤센 선제후국만 병합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155]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수긍하지 않으면 제3국의 개입 없이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없다고 반박했다.[155] 결국 황태자 프리드리히가 비스마르크를 지지하여 빌헬름 1세를 설득했고, 7월 24일 빌헬름 1세가 양보했다.[157][158][159] 7월 26일 니콜스부르크 예비 조약이 체결되었고, 8월 23일 프라하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160]
전쟁 결과, 오스트리아를 맹주로 한 독일 연방이 해체되고, 1867년 7월 프로이센 국왕을 연방 주석(Bundespräsidium)으로 하는 북독일 연방이 수립되었다.[162] 빌헬름 1세는 북독일 연방의 연방 주석 겸 군 총사령관이 되었다.[163]

4. 3.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1868년 9월,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가 후안 프리모 장군 등의 쿠데타로 퇴위당한 후, 지그마링겐가의 레오폴트가 스페인 국왕 후보로 거론되었다.[166][167][168] 빌헬름 1세는 처음에는 신중했으나, 비스마르크의 설득으로 결국 호엔촐레른가 인물이 다른 나라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고 선언했다.[171][172] 그러나 프랑스 외무장관 백작은 강하게 반발했고, 프랑스는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이를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다.[174]빌헬름 1세는 프랑스의 강경한 태도에 우려했지만, 레오폴트가 스스로 입후보를 포기하기를 바랐다. 비스마르크는 독단으로 지그마링겐에 사절을 보내 카를 안톤 후작에게 이 뜻을 전달했고, 카를 안톤 후작은 레오폴트의 입후보 포기를 발표했다.[175][176]
하지만 프랑스는 빌헬름 1세에게 레오폴트의 후보 자격 철회 확답과 미래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며, 주프로이센 프랑스 대사 뱅상 베네데티(Vincent Benedetti) 백작을 바트 에엠스로 보냈다.[177] 베네데티는 빌헬름 1세와 만나 회담했지만, 빌헬름 1세는 프랑스에 변명적인 선언을 거부하고 추가 접견을 거부했다.[178][179][180][181]
빌헬름 1세는 이 경위를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리고 공표 여부를 일임했다.[182][183] 비스마르크는 전보 내용을 수정하여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로 바꾸어 발표했고, 빌헬름 1세는 이를 보고 전쟁을 예상했다.[184][185]
멕시코 원정 실패로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나폴레옹 3세와 프랑스 정부는 전보를 받고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다.[186] 남독일 여러 연방 국가는 독일 민족주의 여론에 따라 프로이센을 지지하며 프로이센 국왕의 지휘하에 군대를 보냈다.[187]
1870년 7월 31일, 빌헬름 1세는 마인츠에서 전 독일군을 지휘했다.[188] 독일군은 세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는 등 승리했다.[191] 빌헬름 1세는 나폴레옹 3세에게 온정적인 조치를 취했다.[193]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된 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독일군은 파리를 포위했다.[194] 베르사유에서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 협상을 벌였고, 새로운 국호를 "독일 제국(Deutsches Reich)", 수장을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로 결정했다.[196][197]

5. 독일 제국 황제 즉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동안 남부 독일의 주들은 독일 제국으로 재편되었던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였다. 분데스프레지디움의 칭호는 독일 황제의 칭호와 함께 수정되었다. 이 일은 입법 기관들 - 국가의회와 연방 의회에 의하여 결정되었고, 빌헬름은 국가의회의 사절단의 출석에 12월 8일 이것으로 동의하였다. 새로운 헌법과 황제의 칭호는 1871년 1월 1일 발효되었다.[10]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 국왕으로서 자신의 칭호가 가려지는 것을 우려해 헌법적 칭호를 받아들이는 데 망설였다. 그는 또한 "독일의 황제"가 되길 원했으나,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의 왕들과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항의할 것을 경고하였다.[11][12] 마지못해 빌헬름 1세는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에서 정식으로 독일 황제로서 선포되었다.[199] 이 날짜는 1701년 프로이센의 초대 국왕의 대관식 날짜와 같은 날 이었다.[12] 국가의 기억 속에 1월 18일은 헌법적 의미가 없었어도 "제국 건국의 날"이 되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빌헬름 1세의 대관식을 신성 로마 제국의 복원으로 보았다. 펠릭스 단은 중세의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붉은 수염)의 이름을 딴 〈Macte senex Imperator〉(만세, 늙은 황제)라는 시를 써서 빌헬름 1세를 바르바블랑카 (흰 수염)로 묘사했다. 산중휴거 전설에 따르면 바르바로사는 독일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까지 키프호이저 산 아래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빌헬름 1세는 바르바로사의 재림으로 묘사되었으며, 키프호이저 기념비는 두 황제를 모두 묘사한다.[13]
1872년 빌헬름 1세는 영국과 미국 사이의 경계 분쟁에 중재하여 미국의 호의에 결정하고 미국의 국가 영토 안에서 워싱턴주의 샌환 제도를 놓아 12년의 무혈 돼지 전쟁을 끝냈다.[14]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빌헬름을 좋은 상식이 경우적으로 "여성의 영향"으로 훼손되었던 구식의 예의 바르고, 틀림없이 겸손한 신사이자 진실한 프로이센 장교로 묘사한다. 여기서 "여성의 영향"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 의하여 교육을 받은 빌헬름의 부인으로 그녀는 남편에게 지적으로 우월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자유주의자이면서 공식적인 정책들에 대해 때때로 반대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빌헬름은 자유적 아이디어들에 오랫동안 강하게 반대하였다.[2] '''카이저'''(Kaiserde)로서 상당한 힘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빌헬름은 자신의 재상에게 통치하는 일의 대부분을 맡겨 국가를 대표하는 데 자신을 제한시키고 비스마르크의 모든 정책을 찬성하였다.[15][16]
5. 1. 독일 제국 성립과 황제 즉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동안 남부 독일의 주들은 독일 제국으로 재편되었던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였다. 분데스프레지디움의 칭호는 독일 황제의 칭호와 함께 수정되었다. 이 일은 입법 기관들 - 국가의회와 연방 의회에 의하여 결정되었고, 빌헬름은 국가의회의 사절단의 출석에 12월 8일 이것으로 동의하였다. 새로운 헌법과 황제의 칭호는 1871년 1월 1일 발효되었다.[10]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 국왕으로서 자신의 칭호가 가려지는 것을 우려해 헌법적 칭호를 받아들이는 데 망설였다. 그는 또한 "독일의 황제"가 되길 원했으나,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의 왕들과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항의할 것을 경고하였다.[11][12] 마지못해 빌헬름 1세는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에서 정식으로 독일 황제로서 선포되었다.[199] 이 날짜는 1701년 프로이센의 초대 국왕의 대관식 날짜와 같은 날 이었다.[12] 국가의 기억 속에 1월 18일은 헌법적 의미가 없었어도 "제국 건국의 날"이 되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빌헬름 1세의 대관식을 신성 로마 제국의 복원으로 보았다. 펠릭스 단은 중세의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붉은 수염)의 이름을 딴 〈Macte senex Imperator〉(만세, 늙은 황제)라는 시를 써서 빌헬름 1세를 바르바블랑카 (흰 수염)로 묘사했다. 산중휴거 전설에 따르면 바르바로사는 독일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까지 키프호이저 산 아래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빌헬름 1세는 바르바로사의 재림으로 묘사되었으며, 키프호이저 기념비는 두 황제를 모두 묘사한다.[13]
1872년 빌헬름 1세는 영국과 미국 사이의 경계 분쟁에 중재하여 미국의 호의에 결정하고 미국의 국가 영토 안에서 워싱턴주의 샌환 제도를 놓아 12년의 무혈 돼지 전쟁을 끝냈다.[14]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빌헬름을 좋은 상식이 경우적으로 "여성의 영향"으로 훼손되었던 구식의 예의 바르고, 틀림없이 겸손한 신사이자 진실한 프로이센 장교로 묘사한다. 여기서 "여성의 영향"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 의하여 교육을 받은 빌헬름의 부인으로 그녀는 남편에게 지적으로 우월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자유주의자이면서 공식적인 정책들에 대해 때때로 반대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빌헬름은 자유적 아이디어들에 오랫동안 강하게 반대하였다.[2] '''카이저'''(Kaiserde)로서 상당한 힘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빌헬름은 자신의 재상에게 통치하는 일의 대부분을 맡겨 국가를 대표하는 데 자신을 제한시키고 비스마르크의 모든 정책을 찬성하였다.[15][16]
5. 2. 황제로서의 통치
빌헬름 1세는 1871년 1월 1일 독일 제국이 성립된 후, 독일 황제 칭호를 받았다.[10] 하지만, 그는 프로이센 국왕으로서의 자신의 칭호가 가려질 것을 우려하여 이 칭호를 망설였다.[11][12]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설득으로, 빌헬름 1세는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로 공식 선포되었다.[12]많은 지식인들은 빌헬름 1세의 대관식을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과 연결시켰다. 펠릭스 단은 그를 프레드리히 바르바로사에 빗대어 "바르바블랑카"(흰 수염)라고 불렀다.[13] 1872년에는 영국과 미국 사이의 국경 분쟁을 중재하여 워싱턴주의 샌 후안 제도를 미국 영토로 결정, 돼지 전쟁을 종식시켰다.[14]
빌헬름 1세는 '''카이저'''(Kaiserde)로서 상당한 권력을 가졌지만, 내정과 외교의 대부분을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맡기고 자신은 국가 대표 역할에 집중했다.[2] 그는 비스마르크와의 관계에 대해 "그런 재상 아래 황제가 되는 게 어려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15][16] 빌헬름 1세는 1862년 9월 23일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한 이후, 1888년 3월 9일 서거할 때까지 25년 이상 그를 총리로 중용했다.
빌헬름 1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자유주의 사상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223] 문화투쟁에 대해서는 가톨릭 교회 탄압에 한해서는 이해했지만, 프로테스탄트에도 영향을 미칠 경우에는 제동을 걸었다.[223]
빌헬름 1세는 1878년 사회주의자 탄압법 제정을 적극 지지했다.[224] 그는 사회주의자들의 위협을 심각하게 여겼으며, 알렉산드르 2세와 제임스 A. 가필드 암살 사건을 예로 들며 사회주의자 탄압법 유지를 명령했다.[224]
빌헬름 1세는 자유주의적인 황태자 프리드리히 3세 대신 보수적인 황손 빌헬름 2세에게 기대를 걸었다.[226][227]
군사 문제에 있어서 빌헬름 1세는 항상 스스로 주도권을 쥐려고 했고,[265] 비스마르크가 군사 문제에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266] 군사 개혁은 빌헬름 1세의 지휘 아래 단행되었다. 참모 밑에 군대 지휘권을 두는 프로이센 군대의 방식도 빌헬름 1세에 의해 확립되었다. 참모총장 몰트케의 임용도 빌헬름 1세의 공적이다.[267]
5. 3. 암살 시도들과 반사회주의법
1878년 5월 11일, 에밀 막스 회델이라는 배관공이 베를린에서 빌헬름 1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다. 빌헬름 1세와 그의 딸 루이제가 운터덴린덴을 따라 마차 행렬을 하던 중, 회델은 리볼버를 이용해 당시 81세였던 황제를 쏘았으나 빗나갔다. 회델은 곧바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그해 8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2][17]
같은 해 6월 2일, 카를 노빌링 박사가 빌헬름 1세를 암살하려는 두 번째 시도를 했다. 황제가 열린 마차를 타고 지나갈 때, 노빌링은 운터덴린덴에서 떨어진 집 창문에서 산탄총으로 두 발을 쏘았다.[2] 빌헬름 1세는 중상을 입고 급히 궁전으로 돌아갔다. 노빌링은 자살을 시도하며 자신을 쏘았고, 3개월 후 자해 상처로 사망했다.
이러한 암살 시도들을 계기로 비스마르크는 사회민주당을 탄압하기 위한 사회주의자 탄압법 제정을 추진했다.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 소속의 루트비히 밤베르거와 협력하였고, 빌헬름 1세의 생명을 노린 이 시도들은 1878년 10월 18일 제국의회에서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된 반사회주의법 제정의 구실이 되었다.[18]
반사회주의법은 사회주의 및 노동자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것으로, 독일 사회민주당의 법적 지위를 박탈하고, 모든 조직과 언론을 금지했으며, 사회주의 문헌을 압수하고 사회민주당원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이 법은 2~3년마다 연장되었으나, 대중 노동자 운동의 압력으로 1890년 10월 1일 폐지되었다.[18]

5. 4. 이후의 세월과 사망
1878년 8월, 빌헬름 1세는 조카인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가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의 이익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편지를 받았다.[2] 이에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아내 아우구스타와 아들 황태자와 함께 러시아를 방문하여 알렉산드르 2세와 직접 만나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사임을 내세우며, 빌헬름 1세가 러시아에 대항하는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동의하도록 하였다.[2]1883년 9월 18일, 빌헬름 1세가 뤼데스하임에서 니더발트 기념비를 공개했을 때 또 다른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무정부주의자 단체가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한 공격을 준비했지만, 비가 오는 날씨 때문에 실패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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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에 의하여 결성된 1884년 ~ 85년의 베를린 회담은 아프리카 분할의 형식화로 볼 수 있다. 아직 청구되지 않은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에서 남은 영토의 대부분을 청구한 독일은 독일 식민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19]
암살 시도들과 1848년 혁명에서 빌헬름의 인기 없던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의 부인은 특히 자신들의 이후의 세월에 매우 인기가 있었다. 많은 국민들은 그들을 "옛 프로이센"의 인격화로 숙고하였고 그들의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 방식을 좋아했다.[2][5]
1885년 5월, 빌헬름 1세가 병석에 누워 위독하다는 소문이 돌았으나,[242] 당시에는 회복되었다. 1886년 10월, 빌헬름 1세를 알현한 프랑스 대사 엘베는 빌헬름 1세가 서 있을 수는 있었지만, 약간의 움직임에도 신중한 모습이었고, 사고하거나 대화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고 기록했다.[243]


빌헬름 1세는 1888년 3월 9일 베를린에서 91세 생일을 2주 앞두고 짧은 투병 끝에 사망하였다. 그는 샤를로텐부르크성에 있는 영묘에 안장되었다.[74][249] 붕어 전날,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와 군비확장 법안에 대해 논의했고, 붕어 직전까지 외교와 관련된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245] 비스마르크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이제 끝이다. 아들도 앞날이 짧을 것이다. 손자의 즉위를 확실히 보좌해다오. 부탁한다."였다고 한다.[246]
빌헬름 1세 붕어 후, 베를린 대성당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약 20만 명의 신하들이 조문을 왔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하였으나, 그 역시 즉위 99일 만에 사망하여 황위는 손자 빌헬름 2세에게 계승되었다.[250]
그를 영예하는 데 큰 수의 기념비/동상들이 이어진 세월들에 전국에 세워졌다. 그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은 튀링겐주에 있는 키프호이저 기념비 (1890년 ~ 96년), 포르타 베스트팔리카에 있는 기념비 (1896년)와 코블렌츠에서 도이체스 에크에 있는 빌헬름 1세의 동상 (1897년)이다. 베를린성 옆에 있던 동상은 1950년 동베를린 정부에 의하여 녹아내렸다.[2]
6. 한국과의 관계
=== 이토 히로부미와의 만남 ===
1882년, 헌법 연구를 위해 독일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빌헬름 1세는 의회 개설에 신중해야 하며, 예산 심의권을 의회에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269]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 하원과 예산 문제로 대립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의회에 예산 심의권을 주면 내란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269]
이러한 조언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뜻밖의 말"이었지만,[269] 이토는 의회 제도 도입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토는 국민 정신의 기둥이 있다면 의회 정치가 기능할 수 있으며, 일본에는 일본 천황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270] 또한, 의회가 불안정하더라도 입헌 군주가 외부에서 구제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270]
=== 미야코지마 독일 상선 조난 사건 ===
1873년 7월 9일, 미야코지마의 우에노무라(현 오키나와현 미야코지마시) 앞바다에서 독일 상선 R・J・로버트슨호가 태풍으로 인해 좌초되었다. 섬의 관리와 주민들이 에두아르트 하임스하임(Eduard Heimsheim) 선장을 비롯한 생존자 8명을 구조하고 보살폈다.[271] 하임스하임 선장 일행은 귀국길에 들른 영국령 홍콩에서 독일 영사에게 이 사건을 보고했고, 이는 함부르크시, 제국 총리부를 거쳐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전해졌다.[271]
미야코지마 주민들의 행동에 감동한 빌헬름 1세는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사건의 경위를 기록한 "독일 황제 박애 기념비"와 금은 회중시계 4개, 망원경 4개를 섬에 보냈다.[271] 1876년 3월, 동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 군함 치크로프호가 이를 미야코지마로 운반했고, 히라라항 근처 언덕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3월 22일에 제막식이 거행되었다.[271]
이 비석은 이후 잊혀졌으나, 1929년 일본은행 나하 지점장이 이 비석을 발견하여 기념 사업을 벌였다.[272] 1936년 11월, 일독방공협정을 앞두고 양국 우호 관계가 깊어지는 가운데, 독일 대사관 관계자들도 참석한 가운데 "독일 황제 박애 기념비 6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때 우에노무라에도 "독일 상선 난파 지" 비석이 세워졌다.[272]
1972년 11월 오키나와 반환을 맞아 로버트슨호 구조 사건 100주년을 기념하여 "박애 기념제"가 개최되었다. 2000년에는 규슈·오키나와 서밋에 참석한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우에노 독일 문화촌을 방문했다.[272]
6. 1. 이토 히로부미와의 만남
1882년, 헌법 연구를 위해 독일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빌헬름 1세는 의회 개설에 신중해야 하며, 예산 심의권을 의회에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269]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 하원과 예산 문제로 대립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의회에 예산 심의권을 주면 내란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269]이러한 조언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뜻밖의 말"이었지만,[269] 이토는 의회 제도 도입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토는 국민 정신의 기둥이 있다면 의회 정치가 기능할 수 있으며, 일본에는 일본 천황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270] 또한, 의회가 불안정하더라도 입헌 군주가 외부에서 구제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270]
6. 2. 미야코지마 독일 상선 조난 사건
1873년 7월 9일, 미야코지마의 우에노무라(현 오키나와현 미야코지마시) 앞바다에서 독일 상선 R・J・로버트슨호가 태풍으로 인해 좌초되었다. 섬의 관리와 주민들이 에두아르트 하임스하임(Eduard Heimsheim) 선장을 비롯한 생존자 8명을 구조하고 보살폈다.[271] 하임스하임 선장 일행은 귀국길에 들른 영국령 홍콩에서 독일 영사에게 이 사건을 보고했고, 이는 함부르크시, 제국 총리부를 거쳐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전해졌다.[271]미야코지마 주민들의 행동에 감동한 빌헬름 1세는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사건의 경위를 기록한 "독일 황제 박애 기념비"와 금은 회중시계 4개, 망원경 4개를 섬에 보냈다.[271] 1876년 3월, 동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 군함 치크로프호가 이를 미야코지마로 운반했고, 히라라항 근처 언덕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3월 22일에 제막식이 거행되었다.[271]
이 비석은 이후 잊혀졌으나, 1929년 일본은행 나하 지점장이 이 비석을 발견하여 기념 사업을 벌였다.[272] 1936년 11월, 일독방공협정을 앞두고 양국 우호 관계가 깊어지는 가운데, 독일 대사관 관계자들도 참석한 가운데 "독일 황제 박애 기념비 6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때 우에노무라에도 "독일 상선 난파 지" 비석이 세워졌다.[272]
1972년 11월 오키나와 반환을 맞아 로버트슨호 구조 사건 100주년을 기념하여 "박애 기념제"가 개최되었다. 2000년에는 규슈·오키나와 서밋에 참석한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우에노 독일 문화촌을 방문했다.[272]
7. 가족 관계
빌헬름 1세는 아우구스타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녀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 아들: 프리드리히 3세 (1831년 10월 18일 - 1888년 6월 15일) - 독일 황제.
- 딸: 프로이센의 루이제 (1838년 12월 3일 - 1923년 4월 23일) - 바덴의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
엘리사 라치빌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딸(추정)이 하나 더 있다.
- 딸(사생아, 추정): 아그네스 데트만 (1824년 1월 30일 포즈난 출생, 1904년 1월 3일 시드니(오스트레일리아) 사망) - 요제프 크롤과 아그네스 크롤 부부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녀는 나중에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갔다.[20]
빌헬름 1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빌헬름 1세 | 부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조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 증조부: 프로이센 왕자 아우구스트 빌헬름 |
증조모: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녀 루이제 | |||
조모: 프리데리케 | 증조부: 루트비히 9세 | ||
증조모: 프팔츠-츠바이브뤼켄 공녀 헨리에테 카롤리네 | |||
모친: 루이제 | 조부: 카를 2세 | 증조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자 카를 | |
증조모: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녀 엘리자베트 | |||
조모: 프리데리케 | 증조부: 헤센-다름슈타트 후작자 게오르크 빌헬름 | ||
증조모: 하나우-리히텐베르크 백작부인 샤를로테 |
8. 유산
빌헬름 1세는 독일 통일의 주역이자 독일 제국 초대 황제였다. 그는 프로이센의 군국주의를 강화하여 훗날 독일 군국주의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161]
빌헬름 1세 붕어 후, 독일 제국 시기 독일 전역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수많은 기념비와 동상이 건립되었다.[74] 주요 기념물로는 키프호이저 기념비(Kyffhäuserdenkmal), 포르타 베스트팔리카의 빌헬름 황제 기념비(Kaiser-Wilhelm-Denkmal an der Porta Westfalica), 코블렌츠의 도이체스 에크(Deutsches Eck) 등이 있다. 과거 베를린에 있었던 빌헬름 황제 국민 기념비(Kaiser-Wilhelm-Nationaldenkmal)는 동독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파괴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74]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 수상에게 거의 모든 행정을 맡겼지만, 수상의 조언이라도 철저하게 검토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결정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251][252] 그는 군인 기질과 기사적인 정신을 지닌 인물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는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다.[253][254]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면서도 겸손한 자세로 타인을 배려했으며,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고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의 공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255][256][257][258]
그는 군대를 혁명으로부터 왕권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겨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군과 국가"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며 군대를 국가보다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61] 검소한 생활을 하며 신궁전을 건설하지 않았고, 전용 열차조차 소유하지 않는 등 소박한 면모를 보였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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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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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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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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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田(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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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田(1979)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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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田(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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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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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イク(1997) 5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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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イク(1997) 5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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ガル(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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ガル(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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ガル(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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