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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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겐닌의 난은 1201년 겐닌 연간에 일어난 일본의 반란으로, 조 씨 가문이 가마쿠라 막부를 전복하려 시도한 사건이다. 겐페이 전쟁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수립되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하면서 권력 다툼이 심화된 가운데, 조 나가모치는 교토를 습격하여 막부를 전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그의 조카 조 스케모리와 누이 한가쿠 고젠이 이끄는 저항군 역시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가쿠 고젠의 용맹함이 널리 알려졌으며, 겐닌의 난은 이후 몇 세기 동안 잊혀졌다가 한가쿠 고젠의 이야기와 함께 기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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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닌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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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겐닌의 난 |
로마자 표기 | Kennin no Ran |
한자 표기 | 建仁の乱 |
분쟁 개요 | |
날짜 | 1201년 1월 ~ 5월 |
장소 | 헤이안쿄, 에치고국 |
결과 | 가마쿠라 막부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가마쿠라 막부 |
교전국 2 | 조씨 |
지휘관 및 지도자 | |
가마쿠라 막부 |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사사키 모리쓰나 |
조씨 | 조 나가요시 조 스게모리 한가쿠 고젠 |
병력 규모 | |
가마쿠라 막부 | 불명 |
조씨 | 불명 (헤이안쿄) 약 1,000명 (에치고) |
사상자 규모 | |
가마쿠라 막부 | 불명 |
조씨 | 괴멸 |
2. 배경
12세기 일본은 다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 간의 권력 다툼으로 정치적 변화와 갈등을 겪었다.[1] 에치고 국을 기반으로 한 다이라 씨의 분가 조 씨도 이러한 갈등에 포함되었다.[1] 이 권력 다툼은 1180년부터 1185년까지 겐페이 전쟁으로 이어졌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끄는 미나모토 씨가 승리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설립했다.
2. 1. 12세기 일본의 정치 상황
12세기 일본은 다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가 국가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면서 정치적 변화와 갈등의 시기를 겪었다.[1] 그들의 갈등에는 에치고 국을 기반으로 한 다이라 씨의 분가인 조 씨도 포함되었다.[1] 이 경쟁은 결국 1180년부터 1185년까지의 겐페이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 전쟁에서 다이라 씨는 미나모토 씨에게 패배했다.[1] 조 씨는 전쟁 동안 다이라 씨와 함께 싸웠다.[1]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다이라 씨를 상대로 승리한 후, 가마쿠라 막부를 설립했다. 이 막부는 교토의 황실(당시에는 "헤이안쿄"라고 알려짐)과 함께 일본을 통치하는 군사 독재였다.[1] 그는 조 씨를 사면했고, 가문의 지도자 조 나가모치(조정무)는 미나모토 씨가 오슈 후지와라 씨와 같은 여전히 자치적인 다른 가문을 물리치는 것을 지원함으로써 새로운 권력자들의 신뢰를 점차 얻게 되었다.[1] 조 씨의 생존은 조 나가모치의 동맹이었던 정부의 영향력 있는 인물인 가지와라 카게토키에게 부분적으로 기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씨의 권력은 급격히 쇠퇴했고, 이에 따라 조 나가모치는 가마쿠라 막부를 계속 원망하며 이를 전복할 계획을 세웠다.[1]1199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사고로 사망하여 미나모토 씨를 약화시켰다. 그의 어린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는 가문의 공식적인 지도자가 되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요리토모의 아내 호조 마사코에게 넘어갔고, 그녀는 결과적으로 실질적인 지배력을 유지하고 자신의 가문인 호조 씨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른바 "여승 쇼군"의 부상과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더 많은 권력을 얻으려는 시도는 상당한 긴장을 야기했다.[1] 1200년, 이 불안은 가지와라 카게토키의 변으로 보호자였던 카게토키가 멸망하는 결과로 이어진다.[1][2]
조 나가모치(조정무)는 지쇼·쥬에이의 난에서는 총령가·헤이케 측으로 싸웠고, 헤이케 멸망 후에는 가지와라 가게토키의 중재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신종하여, 분지 5년(1189년)의 오슈 전투의 공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에 올랐다. 요리토모 사후 1년 뒤인 쇼지 2년(1200년) 정월, 막부 내분으로 보호자였던 가게토키가 멸망하자, 1년 후에 조정무는 군세를 이끌고 상경한다.
2. 2. 조 씨 가문의 몰락
지쇼·쥬에이의 난에서 조 나가모치는 총령가·헤이케 측으로 참전했고, 헤이케 멸망 후에는 가지와라 가게토키의 중재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귀순하여, 1189년 오슈 전투에서 공을 세워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이 되었다.[1] 조 씨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조 나가모치의 동맹이자 막부의 실력자였던 가지와라 가게토키의 도움이 컸다.[1] 그러나 조 씨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했고, 이에 조 나가모치는 가마쿠라 막부에 불만을 품고 전복할 계획을 세웠다.[1]1199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고로 사망하면서 미나모토 씨는 약화되었다. 요리토모의 어린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가문의 공식적인 지도자가 되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요리토모의 아내 호조 마사코에게 넘어갔다. 호조 마사코는 자신의 친정인 호조 씨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1200년 정월, 막부 내 권력 다툼인 가지와라 가게토키의 변으로 조 나가모치의 후원자였던 가게토키가 제거되자,[1][2] 1년 후 조 나가모치는 군사를 이끌고 수도로 상경한다.
2. 3. 호조 씨의 권력 장악
1199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고로 사망하면서 미나모토 씨는 약화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가문의 공식적인 지도자가 되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요리토모의 아내 호조 마사코에게 넘어갔다. 호조 마사코는 실질적인 지배력을 유지하고 자신의 가문인 호조 씨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1][2] 이른바 "여승 쇼군"의 부상과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더 많은 권력을 얻으려는 시도는 상당한 긴장을 야기했다.3. 겐닌의 난 전개
1201년 (겐닌 원년), 조 나가모치는 헤이안쿄를 습격하여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요시노 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는 에치고에 있는 조씨 가문의 영지에 보복 공격을 명령했다. 조 나가모치의 조카인 조 스케모리와 그의 누이 한가쿠 고젠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돗사카 성을 거점으로 저항했다.[1][4]
1201년 4월, 돗사카 성 수비대는 첫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사사키 모리쓰나가 이끄는 정부군의 증원으로 병력 면에서 크게 밀리게 되었다.[6] 사사키는 조 스케모리에게 서신을 보냈고, 스케모리는 돗사카 성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5월에 벌어진 주요 전투에서 조 스케모리의 군대는 성 밖에서 싸웠고, 한가쿠 고젠은 성의 수비를 지휘하며 뛰어난 궁술로 많은 적군을 사살하며 분전했다.[2] 그러나 결국 사무라이 후지사와 기요치카가 쏜 화살에 맞아 한가쿠 고젠이 부상을 입으면서 성의 수비대는 항복했고, 한가쿠 고젠은 포로로 잡혔다. 조 스케모리는 전장에서 도주하여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2]
3. 1. 조 나가모치의 거병 (1201년 1월)
1201년 (겐닌 원년) 1월, 조 나가모치는 정초를 기해 거병했다.[2][1] 그는 쇼군 직 내부의 갈등을 이용하여 군대를 일으켜 헤이안쿄를 습격,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1]나가모치는 우선 가지와라 가게토키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관리 오야마 도모마사의 저택을 공격했으나, 도모마사는 간신히 탈출했다.[2][1] 이후 나가모치는 고토바 천황에게 미나모토 씨를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며 천황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1] 그러나 천황은 이를 따르지 않았고,[2] 오히려 쇼군 직에 충성하는 군대가 반격을 가해 조 나가모치의 군대를 격파했다.[3] 나가모치는 요시노 산으로 피신하려 했으나, 결국 체포되어 참수되었다.[1]
정지 3년(1201년) 정월 23일 밤, 조 나가시게는 오야마 도모마사의 저택을 습격했다. 당시 오반야쿠로 교토 수호를 위해 상경해 있던 도모마사는 부재 중이었고, 나가시게는 도모마사 저택의 가신들과 싸운 뒤 고토바 상황과 쓰치미카도 천황이 있는 센토 고쇼로 가서 가마쿠라 막부 추토의 선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거부당하자, 나가시게 등은 히가시야마의 기요미즈자카 부근에 잠복했다.
2월 3일, 이 사건은 가마쿠라에도 전해져 큰 소동이 일어났다. 교토 수호의 요청에 따라 고토바 상황은 나가시게 추토 명령을 내렸고, 기나이의 무사들에 의해 수색이 이루어져 요시노 산 방면에 잠복해 있는 것이 밝혀졌다. 겐닌 원년(2월 13일에 연호가 바뀜) 2월 22일, 나가시게 등은 가마쿠라 군대와 싸워 패배하고, 나가시게와 그의 가신 닛츠 시로 등은 요시노에서 토벌되었으며, 5명이 포로로 잡혔다. 나가시게는 토벌되기 전에 출가했다고 한다.
2월 25일, 나가시게와 그 가신 4명의 머리는 헤이안쿄를 끌려다녔고, 포로들도 참수되었다. 2월 29일, 나가시게의 조카이자 유력한 잔당이었던 조 스케이에·조 스케마사 형제와 오슈 후지와라 씨의 생존자로 막부의 식객이 된 후지와라 다카히라도 제거되었다.
3. 2. 에치고 봉기 (1201년 4월)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는 에치고국에 있는 조씨의 영지에 보복 공격을 명령했다. 조 나가모치의 조카 조 스케모리와 누이 한가쿠 고젠이 조씨의 남은 병력을 이끌었으며, 그들은 다가오는 정부군의 작전에 대비하여 가능한 최선을 다해 최후의 저항을 결심했다.[3] 그들은 약 1,000명의 전사들을 모았으며,[2][1] 주요 기지는 현대의 다이나이 근처에 있는 나무 요새인 돗사카 성이었다.[1][4]봄이 되어 해빙으로 산길이 열리자 쇼군 직의 군대는 에치고에 주둔한 반군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1201년 4월, 돗사카 성의 수비대는 첫 번째 공격을 격퇴했다. 그 결과 정부 충성파가 보강되었고,[2] 사사키 모리쓰나가 쇼군 직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정부군은 반군보다 훨씬 더 많았다.[6]
사사키는 반군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조 스케모리는 돗사카 성에서 최종 전투를 벌이겠다고 동의했다.
3. 3. 돗사카 성 전투 (1201년 5월)
1201년 1월, 조 나가모치가 거병하였으나 요시노 산에서 체포되어 참수되었다.[1]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는 에치고에 있는 조씨의 영지에 보복 공격을 명령했다. 조 나가모치의 조카 조 스케모리와 누이 한가쿠 고젠은 돗사카 성을 거점으로 저항하였다.[1][4]1201년 4월, 돗사카 성 수비대는 첫 공격을 격퇴했으나, 사사키 모리쓰나가 지휘하는 정부군에 의해 병력에서 압도당했다.[6]
thumb가 1842년경 묘사한 반란 중의 갑옷을 입은 한가쿠 고젠.]]
사사키는 조 스케모리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스케모리는 돗사카 성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5월에 주요 전투가 벌어졌으며, 스케모리의 군대는 성 밖에서, 한가쿠 고젠은 성 안에서 방어전을 이끌었다.[2] 한가쿠 고젠은 뛰어난 궁술 실력으로 많은 공격자를 사살했다.[6]
사무라이 후지사와 기요치카가 성의 후면 사각지대에서 한가쿠 고젠에게 화살을 쏘아 부상을 입혔다.[6] 이로 인해 성의 수비대는 5월 9일에 항복했고,[6] 한가쿠 고젠은 포로로 잡혔다. 조 스케모리는 전장에서 도망쳤으며, 그의 행방은 묘연하다.[2]
겐닌의 난은 단발성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같은 해 정월 하순 조 스케모리와 반가쿠 고젠 등 조 일족이 에치고국 가마하라의 도리사카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4월 2일, 막부에 보고가 전해지자, 호조 도키마사, 오에노 히로모토, 미요시 야스노부는 사사키 모리쓰나에게 에치고국의 고케닌을 소집하여 조 씨 토벌에 나서도록 전령을 보냈다.
4월 5일, 모리쓰나는 즉시 출발했고[7], 8일에는 조 씨의 세력권인 도리사카구치에 도착했다. 모리쓰나는 에치고국, 사도, 시나노국에서 참전한 고케닌들을 편성하여 아가노강을 건넜다.
모리쓰나는 스케모리에게 군사를 보냈고, 스케모리는 도리사카성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겠다고 답했다. 스케모리의 군세는 1,000명 정도였으며, 막부군에 비해 수세적인 자세를 취했다.
5월 초, 전투가 시작되었고, 조 씨가 농성하는 도리사카성은 띠구루와에 목책이 둘러져 있었으며, 해자에는 거꾸로 세운 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성에서 화살과 돌이 날아와 막부군은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그중에서 모리쓰나의 아들 사사키 모리스에와 우노 유키우지는 선봉을 다투다 부상당했다. 막부군은 희생을 감수하며 구루와에 육박했다. 그 때, 반가쿠 고젠은 머리를 묶고 하라마키를 착용하고 화살대 위에 서서, 적을 차례차례 사살했고 그 솜씨는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시나노국의 무사 후지사와 기요치카에 의해 이타가쿠가 양 다리를 맞고 쓰러지자 포박당했고, 스케모리 측은 패배했다. 본성인 시라토리성은 5월 8, 9일에 함락되었다.
4. 겐닌의 난 이후
1201년에 일어난 이 반란은 겐닌 연호 시대에 발생했기 때문에 "겐닌의 난"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 이 난은 수 세기 동안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사건으로 남아 있었으며, 주로 한가쿠 고젠의 연루로 기억되었다.[2]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가쿠 고젠의 용맹함과 강인함에 대한 많은 전설들이 생겨났다.[4] 타이나이시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나카조역에 동상을 세웠다.[1]
4. 1. 한가쿠 고젠의 최후
사사키는 반군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조 스케모리는 돗사카 성에서 최종 전투에 동의했다. 스케모리의 군대가 성 밖에서 싸우고 한가쿠 고젠이 수비대를 이끌면서 주요 전투는 5월에 벌어졌다.[2] 한가쿠 고젠은 뛰어난 궁술 실력으로 추종자들 사이에서 이미 높은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영감을 주는 유능한 지도자임을 증명했다. 갑옷을 완전히 갖춘 남성 사무라이처럼 옷을 입고[4] 망루에서 성을 방어하며 활로 많은 공격자를 죽였다. 후기 기록에 따르면 화살을 100발 쏘아 매번 상대를 맞혔다고 한다.[6]
결국, 사무라이 후지사와 기요치카가 성 가까이에 있는 산을 올라가 성 후면의 사각지대에 자리를 잡고[2][6] 한가쿠 고젠에게 화살을 쏘았다. 그녀는 허벅지를 맞았고,[4] 화살은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곳에서 다리를 관통했다.[6][4] 서 있을 수 없게 된 그녀는 쓰러졌다.[3][4] 한가쿠 고젠이 부상을 입자, 성 수비대는 5월 9일에 항복했고[6], 포로로 잡혔다.[4] 조 스케모리는 전장에서 도망쳤다. 그의 운명은 불분명하며, 데와국에 숨을 수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다.[2]
1201년 6월, 한가쿠 고젠은 가마쿠라로 보내져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에게 보내졌으며, 그녀의 두려움 없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산 채로 포로가 되어 요리이에에게 구경거리로 바쳐지는 것은 매우 굴욕적인 일이었기에 그녀의 당당한 태도는 특히 주목할 만했다.[6] 반란에 가담한 한가쿠 고젠은 통상적으로 의례적인 자결(세푸쿠)을 명령받거나 외딴 지역으로 평생 유배되었을 것이다.[6] 하지만 요리이에의 측근인 아사리 요이치 요시토는 한가쿠 고젠의 태도와 용맹함에 매료되어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는 아사리에게 이유를 설명하도록 요청했고, 사무라이는 그녀가 분명히 "쇼군을 지킬 강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요리이에는 처음에는 그녀가 너무 여자답지 않아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며 비웃었지만, 그의 측근은 굴하지 않았고 요리이에는 마침내 동의했다. 아사리와 한가쿠 고젠은 결혼하여 적어도 한 명의 자녀를 두었다. 사건의 일부 기록에서는 아들이었다고 주장하는 반면,[2] 쓰노다 분에이와 같은 다른 역사가들은 딸이라고 주장한다.[6]
붙잡힌 판가쿠 고젠은 가마쿠라로 호송되었다. 6월 28일, 쇼군 요리이에의 요청에 따라 후지사와 기요치카와 함께 오구라 고쇼로 불려 나가자, 무쌍의 용녀를 보려고 어고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걱정하며 나섰지만, 판가쿠 고젠의 태도는 당당하여 비굴한 모습이 없었고, 『아즈마카가미』는 용감한 남자와 마주해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라고 칭찬했다.[8] 얼굴 생김새에 대해서는 후궁에 있어도 될 정도라고 언급했다. 다음 날, 어고닌 중 가이 겐지의 아사리 요시토오가 요리이에에게 판가쿠 고젠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청했다. 요리이에는 "판가쿠 고젠은 조정의 적이며, 그것을 원하는 것은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요시토오는 "전혀 특별한 속셈은 없습니다. 단지 동심의 맹세를 맺어 씩씩한 남자를 낳아 조정을 지키고 무가를 돕기 위함입니다"라고 답했다. 요리이에는 "이 자의 얼굴은 좋지만, 마음의 사나움을 생각하면 누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할까. 요시토오의 바람은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라며 자꾸 놀렸고, 요시토오의 소원을 허락했다고 한다. 요시토오는 판가쿠 고젠과 함께 가이 국으로 내려갔다.
4. 2. 조 씨 가문의 멸망
1201년 정월 하순, 조 스케모리와 그의 이모이자 조 나가시게의 여동생인 반가쿠 고젠 등 조 씨 일족이 본거지인 에치고국 가마하라 도리사카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에치고국 슈고는 사사키 모리쓰나였으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막부 내분으로 지토직에서 파면당하고 고즈케국 우스이군에 은거하고 있었기에 조 씨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스케모리는 주변 지토들을 공격했고, 3월에 눈이 녹으면서 북국의 무사들을 모아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했다.[6]4월 2일, 막부는 호조 도키마사, 오에노 히로모토, 미요시 야스노부의 참회를 받고, 고즈케국에 있던 사사키 모리쓰나에게 에치고국 고케닌을 소집하여 조 씨 토벌을 명했다.
4월 5일, 모리쓰나는 즉시 출발하여[7] 8일에 조 씨 세력권인 도리사카구치에 도착, 에치고, 사도, 시나노국의 고케닌들을 편성하여 아가노강을 건넜다.
모리쓰나는 스케모리에게 군사를 보내 도리사카성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했다. 스케모리 군세는 1,000명 정도로, 막부군에 비해 수세적인 입장이었다.
5월 초, 전투가 시작되자 조 씨는 도리사카성에 목책을 두르고 해자에 거꾸로 세운 나무를 설치하여 막부군에 맞섰다. 막부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고, 모리쓰나의 아들 사사키 모리스에와 우노 유키우지도 부상당했다. 그러나 막부군은 구루와에 육박했고, 이때 반가쿠 고젠은 뛰어난 활솜씨로 적을 사살했으나, 후지사와 기요치카에게 양다리를 맞아 쓰러졌다. 결국 스케모리 측은 패배했고, 본성인 시라토리성은 5월 8일과 9일에 함락되었다.
이후 스케모리는 소식이 끊겼고, 타이라노 코레모치 이래 에치고국에서 번성했던 명문 조 씨 가문은 멸망했다.
4. 3. 역사적 의의
겐닌 연호 시대에 발생했기 때문에 "겐닌의 난"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 겐닌의 난은 수 세기 동안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사건으로 남아 있었으며, 주로 반가쿠 고젠의 연루로 기억되었다.[2]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반가쿠 고젠의 용맹함과 강인함에 대한 많은 전설들이 생겨났다.[4] 타이나이시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나카조역에 동상을 세웠다.[1]참조
[1]
웹사이트
坂額御前(上)鎌倉幕府に弓を…「美女」が戦った時代があった
https://www.sankei.c[...]
2021-09-22
[2]
웹사이트
板額御前とは~鎌倉武士として戦った越後の女性武将で弓の名手
2018-01-13
[3]
웹사이트
Story of the Skillful Archer named Hangaku Gozen
https://lightinthecl[...]
2021-09-22
[4]
웹사이트
胎内市の誇る勇婦~板額御前~
http://www.city.tain[...]
2021-09-22
[5]
웹사이트
Myoko Torisaka castle -Irreconciable conflict after god of war (5) intervention from outside
https://www.japancas[...]
2021-09-22
[6]
웹사이트
坂額御前(下)「勇士を産め」と甲斐国へ 弓は百発百中、朝敵の美女
https://www.sankei.c[...]
2021-09-22
[7]
서적
吾妻鏡(三)
岩波文庫
[8]
서적
吾妻鏡(三)
岩波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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