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고등연예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경성고등연예관은 1910년 2월 18일,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2가에 개관한 조선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이다. 약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프랑스 파테사의 영사장비를 구비하여 영화 상영을 시작했다. 개관 당시 고종이 영화를 관람하고 하사금을 내릴 정도로 사회적 관심을 받았으나, 1914년 제2대정관으로 개칭된 후 1915년에 폐관되었다. 폐관 이후에는 메이지 생명 경성 출장소가 들어섰으며, 현재는 상업 시설이 위치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경성고등연예관 | |
---|---|
기본 정보 | |
회사명 | 경성고등연예관 |
한국어 명칭 | 경성고등연예관 |
종류 | 사업장 |
시장 정보 | 소멸 |
본사 위치 | 조선경성부 황금정 제63번지 7호 (현재의 대한민국서울특별시중구을지로 63-7) |
설립 | 1910년2월 18일 |
업종 | 서비스업 |
사업 내용 | 영화의 흥행 |
대표자 | 관주 신전경시 |
역사 | |
연혁 | 1910년 2월 18일: 개관 1914년: 제2대정관으로 개칭 1915년: 폐관 |
2. 위치 및 시설
1910년 2월 18일, 조선에서 활동사진 상설관으로는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위치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2가 외환은행 본점 옆 자리인 황금정 63통 7호였다.[8] 1911년 8월경 황금정 도로 확장으로 건물이 헐리게 되자 황금정 3번지로 장소를 옮겨 다시 신축되었다. 내부는 ‘기석’(奇席)이라는 일본식이었고, 2층은 '''다다미''', 아래층 객석은 긴 의자로 배치하였다. 수용인원은 4~5백 명 정도였고, 건물의 외관이나 내부 설비를 현대적으로 갖추었다. 또한 ‘요시자와 상점’에서 활동하던 일본 영사기사를 영화 상영을 위해 고정 배치하였고, 프랑스 ‘파테 회사’의 영사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9]
4. 운영 및 활동
경성고등연예관은 현대적 시설을 갖춘 덕분에 이전의 다른 극장들에 비해 입장료가 비쌌는데, 특등석은 1원이었다. 이는 당시 극장 입장료 중 가장 비싼 가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고등연예관의 영화 상영은 큰 인기를 끌었다.[10]
1912년 7월에는 매일신보 평양지국 개설을 기념하여 평양에서 영화 상영회를 열었는데, 이 행사 역시 큰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경성고등연예관은 지방 순회 상영을 통해 영업 범위를 넓히려 했지만, 1912년 8월 메이지 천황의 사망으로 인해 중단되었다.[11]
1910년 2월 18일, 한성부 황금정 63번지 7호(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2가)에 '경성고등연예관'으로 개관했다.[1][2][3] 개관 당시 프로그램은 말레이와 태국에서 영화 순회 상영을 하던 와타나베 지요리(와타나베 지스이)가 배급하는 작품을 상영했다.[1] 경성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매일 밤 900명 이상의 관객이 있었고, 한국인 6할, 일본인 4할의 비율로 흥행에 성공했다. 이는 당시 조선에는 실내 극장이 드물었기 때문에, 경성고등연예관이 현지 조선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음을 보여준다.[3] 단성사에 비해 경성고등연예관은 본격적인 영화 전문 극장이었다. 일본인이 지은 극장으로, 대중에게 영화를 보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시설도 제대로 갖춰져 있었고, 신문 기자나 유력 인사를 시사회에 초대하는 등 영화 흥행의 전문화·근대화를 시도했다.[2] 요시자와 상점에서 영사 기사로 활동한 나카무라라는 인물이 영사 기사를 맡았다고 한다.[2]
1914년에는 사쿠라이정 1정목(현재의 중구 인현동1가)에 대정관을 경영하던 니타 상회가 경성고등연예관을 매수하여 '제2대정관'으로 개칭했다.[4][6] 니타 상회는 닛카쓰와 계약을 맺어 조선에서의 대리점이 되었고, 닛카쓰의 배급 작품을 동관에서 공개하거나 조선의 다른 영화관에 배급했다.[1] 그러나 1915년 초에 경성고등연예관은 폐관되었다.[1]
4. 1. 고종 황제의 관람
경성고등연예관의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관심거리가 되자 고종 황제가 이들을 궁내로 초대해 정부 관리와 황실 인사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주 와다나베에게 하사금을 주어 격려하기도 했다. 황제가 일반 극장의 영사 시설을 궁내로 불러들여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 주인에게 하사금까지 주었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경성고등연예관은 당시 서울에서 사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10]5. 몰락과 이후
1911년 8월경, 서울에서 영화 장비 판매, 영화 제작, 극장 운영 등의 사업을 시작한 금원상회가 경성고등연예관을 매입하면서, 금원상회의 ‘연예관’에 흡수되었다. 영업 상태가 좋았던 극장이 왜 매입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금원상회로 소유권이 넘어간 후에도 계속 영화 상영 극장으로 운영되었다. 1912년 7월 말경, 구리개(현 을지로) 일대의 도로 확장 공사로 건물 일부가 헐리게 되자, 이를 계기로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지었다.[12]
1913년 1월 1일부터 새롭게 개관하여 영업을 계속했으나, 이듬해인 1914년에는 운영권이 다시 ‘대정관’(大正館)으로 넘어갔다. 경성고등연예관을 인수한 ‘대정관’은 극장 이름을 ‘제2대정관’으로 변경하여, ‘경성고등연예관’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2대정관’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운영되었으나, ‘대정관’과 ‘우미관’(優美館) 극장주들 사이에 사업적 협상이 이루어지면서 ‘제2대정관’은 다시 ‘세계관(世界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일본인을 주로 상대하는 극장으로 전환되었다.[12]
연도별 주요 변경 사항은 다음과 같다.
경성고등연예관이 있던 자리에는 메이지 생명(현재의 메이지야스다생명보험) 경성 출장소가 세워졌다.[1][5] 이 출장소는 1928년 이후 경성부청(현재의 서울도서관, 태평로1가 31번지) 앞 모퉁이 땅으로 이전했다.[7] 현재는 그 자리에 상점이 들어서 있다.
6. 우미관과의 관계
우미관은 1912년 12월에 설립된 것이 확인되므로, 1915년 경성고등연예관을 이어받아 우미관을 개장했다는 김종원의 주장이나 1916년에 우미관으로 개명했다는 이영일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13] 일부 자료에는 우미관이 경성고등연예관의 후계관이라는 기술이 있지만, 이는 오해이다.[1]
7. 의의 및 평가
경성고등연예관은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지만, 조선 최초의 본격적인 영화 전문 극장으로서 영화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상업적인 흥행 중심지로서 조선에 영화가 보급되는 과정에 기여했다.[12] 특히,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 호현찬은 경성고등연예관이 단성사에 비해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고, 시사회를 개최하는 등 영화 흥행의 전문화·근대화를 시도하여 영화를 대중에게 보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2]
하지만, 극장 소유주가 일본인이었고 일본 자본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 영화 시장을 본격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이기도 하다.[12]
참조
[1]
간행물
京城における帝国キネマ演芸の興亡 : 朝鮮映画産業と帝国日本の映画興行
https://hdl.handle.n[...]
関西大学大阪都市遺産研究センター
[2]
웹사이트
開化期韓国における活動写真の伝来と近代日本
http://swjc.saga-wjc[...]
2013-11-20
[3]
웹사이트
朝鮮における「新派」
http://scs.kyushu-u.[...]
2013-11-20
[4]
문서
第六回五月一日番組
Kダイヤモンド商會
1910-05-01
[5]
문서
明治生命
[6]
문서
年鑑
[7]
뉴스
半島財界に三菱王国乗出す : 三井の積極化につれ三菱系の活躍が顕著となる
0100064715
京城日報
1927-09-21
[8]
논문
활동사진시기 조선영화산업 연구
한양대 대학원
[9]
서적
한국영화사연구 內 이용남,해방 전 조선극장사 연구
새미 출판
[10]
서적
한국영화사연구 內 이용남,해방 전 조선극장사 연구
새미 출판
[11]
논문
草創期 韓國映畵史 硏究
중앙대
[12]
논문
草創期 韓國映畵史 硏究
[13]
논문
활동사진시기 조선영화산업 연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