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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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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연은 군주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학문을 토론하는 제도이다. 중국에서는 전한 선제 때 유래하여 당, 송, 원, 명, 청나라 시대에 걸쳐 존재했으나, 형식적인 제도로 변질되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는 청연각을 설치하여 경연을 실시했으나, 무신집권기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조선 시대에는 태조 때 경연관을 증설하고 정종이 경연에 관심을 보이며 사관의 입시가 이루어지면서 자리를 잡았다. 세종은 경연을 정례화하고 집현전을 설치하는 등 경연에 적극적이었으며, 학술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을 수행했다. 경연청에는 영사, 지사, 참찬관, 시강관, 시독관, 검토관 등의 관직이 있었다.

2. 중국의 경연

중국에서는 전한 선제가 유학자들에게 석거각(石渠閣)에서 오경을 강의하도록 한 데에서 유래하며, 당나라 현종집현원(集賢院)에 시독학사(侍讀學士), 시강학사(侍講學士), 직학(直學) 등을 설치하였다. 송나라 태종 때 ‘경연’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원나라·명나라·청나라에서도 경연이 있었지만, 이는 형식적인 제도로 전락하였다.

3. 한국의 경연

유교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였기 때문에, 경서와 역사책은 정치와 교리를 모두 담고 있었다. 이러한 교리를 밝히고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 경연이다. 경연은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발전했다.

3. 1. 고려의 경연

1116년 예종은 궁궐 안에 청연각(淸燕閣)을 짓고 학사, 직학사, 직각 한 명씩을 임명하여 아침저녁으로 경서를 강론하게 하였다. 이후 무신집권기에 일시적으로 폐지되기도 했다.

이때는 경연을 ‘보문각’이라고 하였는데, 충렬왕 이후에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충목왕 때는 의 압력으로 서연(書筵)으로 격하되었다. 충목왕은 번을 넷으로 나누어 날을 번갈아 시독(侍讀)하게 하였다. 공민왕은 5품 이하의 관리 네 사람을 시학(侍學)으로 삼았는데, 이후 공양왕 때 경연의 명칭을 회복하고 영사(領事), 지사(知事), 강독관(講讀官)을 두었다. 이때의 제도는 조선시대로 이어져 경연 제도의 기본을 이루었다.

3. 2. 조선의 경연

태조는 즉위 후 관제를 제정하면서 경연관을 늘렸지만, 경연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비공식적으로 《대학연의》를 진강토록 한 것이 경연의 역할을 대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종은 경연에 관심을 보이며 즉위 직후 경사에서 국사 관련 내용을 모으게 하고, 《사서》에 구절 점을 쳐서 바치도록 지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1] 세제였던 정안군에게 양위하기 한 달여 전 경연에서 노자와 신선의 도를 말해 달라고 청했는데[2], 이는 양위 의사를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정종은 초기에는 사관(史官)의 경연 입시를 거부했지만[3], 이후 허락하여 사관이 경연에 참여하게 되면서[4] 조선의 경연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태종은 세제 시절 《주역[5], 《대학연의》[6] 등을 공부했다. 즉위 후에도 경연에서 《대학연의》 진강을 잘 한 권근에게 음식을 내리는 등[7] 잠시 활동을 보였으나, 이후 경연을 게을리하였다.[8] 태종 6년 이후 경연에 대한 기록이 없어[9] 경연을 실질적으로 폐지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세자 책봉 후 서연을 열었고[10], 즉위 후에는 경연을 공식적으로 정례화했다. 최초의 참찬관으로 하연 등을 임명하고, 집현전을 설치하는 등 경연에 관심을 보였으나, 말년에는 여러 이유로 경연을 열지 않았다. 대신 서연을 중시하였다.[11]

3. 2. 1. 경연의 기능

유교는 정교일치(政敎一致)였던 바, 그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또한 정치를 다루면서도 교리(敎理)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교리를 현현(現顯)하고 정치를 구현(具現)하고자 하였던 것이 경연이다.

경연에서의 임금 교육은 서연에서부터 시작하여 경연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는데, 세종 이전의 3대( 태조, 정종, 태종)에 비해 세종은 강한 학문에 대한 의지와 의욕으로 실록에 등장하는 경연에 대한 기록이 2천여 회에 달할 정도였다. 경(經)과 사(史)를 중심으로 한 세종 대의 경연은 중강(重講)뿐만 아니라 삼강(三講)까지 할 정도였다.

세종의 학문적인 중추 역할을 담당한 집현전과 함께 경연은 학술적 기능도 수행했다. 또한 경연에서는 여러 가지 학술 서적의 찬술(纂述)도 논해졌고, 지시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의 경연은 정치적인 기능보다 학술적인 기능이 주목적이었으며 그를 중심으로 제도가 정비되었다. 하지만 세종 이후의 경연에서는 간간이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이후 정치적 기능이 훨씬 더 강화되어 경연 정치로 발전하게 되었다.

3. 2. 2. 경연청 관직

조선시대 경연청 관직
품계관직비고
정1품영사겸직
종1품
정2품지사겸직
종2품동지사겸직
정3품참찬관당상관
종3품
정4품시강관
종4품
정5품시독관
종5품
정6품검토관
종6품
정7품사경
종7품
정8품설경
종8품
정9품전경
종9품


참조

[1] 실록 태조실록 권15 태조 7년 9월 17일 기축(己丑)일 조 null
[2] 실록 정종실록 권6 정종 2년 10월 3일 갑오(甲午)일 조 null
[3] 실록 태조실록 권15 태조 7년 12월 9일 신해(辛亥)일 조 null
[4] 실록 정종실록 권1 정종 원년 1월 7일 무인(戊寅)일 조 null
[5] 실록 정종실록 권4 정종 2년 5월 17일 신사(辛巳)일 조 null
[6] 실록 정종실록 권4 정종 2년 6월 20일 계축(癸丑)일 조 null
[7] 실록 정종실록 권6 정종 2년(태종 즉위년) 11월 13일 계유(癸酉)일 조 null
[8] 실록 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8월 17일 정사(丁巳)일 조, 권1 태종 원년 3월 23일 임오(壬午)일 조, 권3 태종 2년 6월 18일 경오(庚午)일 조, 권5 3년 3월 3일 경진(庚辰)일 조, 권20 10년 10월 29일 임술(壬戌)일 조, 권28 14년 8월 17일 정사(丁巳)일 조 null
[9] 실록 태종실록 권11 태종 6년 5월 2일 신묘(辛卯)일 조 null
[10] 실록 태종실록 권35 태종 18년 6월 20일 기해(己亥)일 조 null
[11] 실록 세종실록 권100 세종 25년 6월 23일 병오(丙午)일 조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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