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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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엄은 북제의 황족으로, 무성제의 아들이자 후주의 동생이다. 그는 총명함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총애를 받았으나, 형인 후주의 질투를 받아 권력 투쟁에 휘말렸다. 동평왕, 낭야왕 등을 역임하며 요직을 거쳤지만, 571년 유도지에게 살해당하고 초공애제로 추존되었다. 그는 화사개 등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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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고엄 |
원래 이름 | 초공애제(楚恭哀帝) |
시호 | 초공애제(楚恭哀帝) |
묘호 | 없음 |
출생일 | 557년 |
사망일 | 571년 9월 |
사망지 | 미상 |
재위 | (추존) |
배우자 | 초제후(楚帝后) |
부친 | 북제 무성제 |
모친 | 호태후 |
작위 | 북제의 낭사왕 |
재위 기간 | 568년 12월 ~ 571년 9월 |
종교 | 미상 |
가문 | 발해 고씨 |
왕조 | 북제 |
목록 | 북제의 추존 황제 |
2. 생애
고엄은 557년 고담과 호태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담의 후계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형인 고위의 질투를 받았다. 고담 치세에 동평왕(東平王)으로 봉해졌으며 시중, 중서감(中書監), 경기대도독(京畿大都督), 대장군, 대사마를 역임하였다.[5] 568년 12월, 부황이 죽자 낭야왕(瑯邪王)에 봉해졌다.[6]
고위는 고엄을 매우 경계하였으며, 화사개와 목제파[6]의 참언을 듣고 기회를 엿보아 고엄을 제거하려 했다. 571년 4월, 고위는 고엄을 한직으로 보내고 경기의 병권을 회수하려 했다. 이에 고엄은 호태후의 매부인 풍자종과 연합하여 화사개를 죽이고, 육령훤과 목제파 모자를 제거하려 했으나, 곡률광에게 진압당하여 실패하였다.
이후 고엄은 모친 호태후의 궁에서 보호받았으나, 같은 해 9월 유도지에게 살해되었고, 초공애제(楚恭哀帝)[7]로 추존되었다. 고엄에게는 아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태어나자마자 유폐되어 죽었다.
2. 1. 출생과 성장
고엄은 557년 고담과 호태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담의 후계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형인 고위의 질투를 받았다. 고담 치세에 동평왕(東平王)으로 봉해졌으며 시중, 중서감(中書監), 경기대도독(京畿大都督), 대장군, 대사마를 역임하였다.[5] 568년 12월, 부황이 죽자 낭야왕(瑯邪王)에 봉해졌다.[6]고엄은 고담의 셋째 아들이었다. 형인 문선제 치하에서 당시 창광왕이었던 고담과 고담의 부인이자 호태후의 둘째 아들이었다.
567년 (천통 3년) 5월, 상서령으로 전임되었다. 윤 6월, 녹상서사(録尚書事)가 되었다. 8월, 사도로 승진했다. 568년 (천통 4년) 3월, 대장군으로 전임되었다. 569년 (천통 5년) 2월, 낭야왕(琅邪王)으로 개봉되었다. 11월, 대사마가 되었다.
2. 2. 권력 투쟁과 죽음
고엄은 557년 고담과 호태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고담의 후계자로 여겨져 형인 고위의 질투를 받았다. 고담 치세에 동평왕으로 봉해졌고, 시중, 중서감, 경기대도독, 대장군, 대사마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5] 568년 12월, 부황 고담이 사망하자 낭야왕에 봉해졌다.고위는 고엄을 매우 경계하였으며, 화사개와 목제파[6]의 참언을 듣고 기회를 엿보아 고엄을 제거하려 했다. 567년 고엄은 어사중승(御史中丞)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북제 시대에는 어사중승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그가 길거리에 나설 때 태자와 동등한 영예를 누릴 수 있었고, 심지어 왕공(王公)과 공(公)과 같이 존경받는 관리들도 어사중승의 행렬에 굴복해야 했다. 이 의례는 오랫동안 폐지되었지만, 무성제는 고엄에게 더 큰 영예를 주기 위해 이 의례를 부활시켰다. 고엄은 너무나 존경받아 그의 삼촌들조차 그에게 절을 했고, 고위가 사용하던 모든 종류의 황실 기물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571년 4월, 고위는 고엄을 한직으로 보내고 경기의 병권을 회수하려 했다. 이에 고엄은 호태후의 매부인 풍자종과 연합하여 화사개를 죽이고, 육령훤과 목제파 모자를 제거하려 했으나, 곡률광에게 진압당하여 실패하였다.
이후 고엄은 모친 호태후의 궁에서 보호받았으나, 같은 해 9월 유도지에게 살해되었고, 초공애제(楚恭哀帝)[7]로 추존되었다. 고엄에게는 아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태어나자마자 유폐되어 죽었다. 572년 봄, 고위는 호태후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고엄에게 "초공애황제"라는 시호를 내리고, 고엄의 아내 이씨 부인에게 "초황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는 또한 자신의 아들 고각(高恪)을 고엄의 양자로 입적시켰고, 고각이 곧 사망한 후 그의 삼촌 고엄(高淹, 다른 한자) 평양왕의 손자 고세준(高世俊)을 고엄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2. 3. 사후
북제의 황족 고엄은 571년 9월 유도지에게 살해되었고, '''초공애제'''(楚恭哀帝)[7]로 추존되었다. 고엄에게는 아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태어나자마자 유폐되어 죽었다.[6] 572년 후주는 호태후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고엄에게 "초공애황제"라는 시호를 내리고, 고엄의 아내 이씨 부인에게 "초황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자신의 아들 고각을 고엄의 양자로 입적시켰고, 고각이 곧 사망한 후 그의 삼촌 고엄(평양왕)의 손자 고세준을 고엄의 양자로 입적시켰다.3. 평가
고엄은 업의 유수를 맡았지만, 부황을 전송하러 나와 길 중간이나 진양까지 전송하고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1] 무성제는 후주에게 무언가를 주면, 고엄에게도 똑같은 것을 주었다.[2] 형인 후주가 먼저 신기한 것을 손에 넣으면, 고엄은 속관이나 공장을 반드시 벌했다.[3] 고엄은 목에 지병을 앓아 의사에게 침을 맞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4] 고엄이 "기운 없는 형이 신하들을 거느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무성제에게 말하자, 무성제는 "이 아이는 총명하구나. 분명 무언가를 해낼 것이다"라고 말하며, 후주의 폐위를 고려할 정도였다.[5]
4. 가족 관계
고엄은 고담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호태후이다.
5. 기타
고엄의 시호는 초공애제(楚恭哀帝)로 '황제(皇帝)'가 아닌 '제(帝)'로만 끝나는데, 이는 완전한 '皇帝'에서 일부러 황을 빠뜨려 그 위상에 차이를 둔 것이다. 보통 황보다 제가 더 높은 위상을 가지기에 초공애제는 황제보다 낮고 황보다는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영어로는 황제, 황과 똑같이 'Emperor'로 번역된다.Emperor|엠페러영어
- 무성제가 병주로 갈 때, 고엄은 업의 유수를 맡았지만, 부황을 전송하러 나와 길 중간이나 진양까지 전송하고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 무성제는 후주에게 무언가를 주면, 고엄에게도 똑같은 것을 주었다. 형인 후주가 먼저 신기한 것을 손에 넣으면, 고엄은 속관이나 공장을 반드시 벌했다.
- 고엄은 목에 지병을 앓아 의사에게 침을 맞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 고엄이 "기운 없는 형이 신하들을 거느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무성제에게 말하자, 무성제는 "이 아이는 총명하구나. 분명 무언가를 해낼 것이다"라고 말하며, 후주의 폐위를 고려할 정도였다.[1]
참조
[1]
서적
Bei Qi Shu
[2]
서적
Family Instructions for the Yan Clan and Other Works by Yan Zhitui (531–590s)
De Gruyter Mouton
2021
[3]
웹사이트
Prince's death: window into late Three Kingdoms
http://www.csstoday.[...]
2024-04-18
[4]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Medieval China
https://books.google[...]
Rowman.& Littlefield Publishers
2017
[5]
문서
高儼の東平王への初封は『北斉書』武成紀の[[河清]]三年九月乙丑の条と同書後主紀の天統二年五月己亥の条に重複してみられる。
[6]
문서
아버지는 목초(穆超)이며, 어머니는 고위의 유모이자 태희(太姬)에 임명된 육령훤(陸令萱)의 아들이다.
[7]
문서
《北齊書 卷十二 列傳第四 武成十二王》:帝使啟太后,臨哭十餘聲,便擁入殿。明年三月,葬於鄴西,'''贈謚曰楚恭哀帝''',以慰太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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