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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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러성은 사르후에서 무순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에 위치한 성으로, 명나라 시기 건주여진의 왕고가 거주하며 근거지로 삼았다. 1574년 명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왕고가 처형된 후, 그의 아들 아타이가 성을 이어받았으나 1583년 다시 공격받아 살해되고 성은 불탔다. 이 사건은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공격하는 계기가 되었고, 1593년 누르하치는 구러산에서 9부 연합군을 격파하여 만주의 위엄을 떨쳤다. 구러성은 이후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다카하시 고시로, 나이토 코난 등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성터의 위치를 특정하기 위한 논쟁이 진행되었으며, 용두산성지, 천교령성지, 영풍각성지 등이 구러성 후보지로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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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러성 | |
---|---|
기본 정보 | |
위치 | 러시아 |
위치 설명 | 아무르 강 하류 |
언어 | 만주어 |
민족 | 나나이족 |
관련 민족 | 여진족 |
2. 역사
구러는 사르후(Sarhu, 薩爾滸)에서 무순으로 이어지는 가도(街道) 상에 위치하며, 훈허(Hunehe, 渾河) 유역을 통해 하다와 여허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명나라 시기 왕고와 그의 아들 아타이가 이곳에 거하였으나, 이성량에게 2차례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오창가와 탁시 부자가 명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는 누르하치가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다.[1] 이후 누르하치는 구러산에서 여허의 나림불루가 이끄는 9부 연합군을 대파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2. 1. 명나라 시기
가정(嘉靖) 연간(1522-1566)부터 만력(萬曆) 연간(1573-1620) 초기까지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유력자였던 왕고(王杲)가 구러성을 근거지로 삼았다.[1] 1574년(만력 2년), 명나라 장수 이성량(李成梁)의 공격으로 구러성이 함락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1] 1575년(만력 3년), 왕고는 명나라에 의해 처형되었다.[2][1]왕고의 아들 아타이(Atai, 阿台)가 구러성을 이어받았으나, 1583년(만력 11년) 이성량(李成梁)의 재차 공격으로 살해되고 성은 불태워졌다.
2. 2. 누르하치의 봉기와 후금 건국
기오창가와 그의 아들 탁시(Taksi, 塔克世)의 죽음은 훗날 누르하치가 '칠대한(七大恨)' 중 첫 번째 이유로 명나라를 비난하며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다.[1] 1593년(만력 21년), 건주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구러산(gure i alin, 古勒山)에서 여허의 나림불루(Narimbulu, 納林布祿)가 이끄는 9부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구러산 전투). 이 승리로 누르하치는 여진 사회 전체에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3. 조사
구러성은 왕고와 아타이 두 부자가 거처한 성이었고, 기오창가와 탁시 두 부자가 횡사한 땅이기도 하다. 또한 누르하치가 거병하여 만주국(滿洲國, Manju Gurun|만주 구룬mnc)이 수립되는 계기가 된 곳으로,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3]
1941년 일본의 다카하시 고시로(高橋匡四郎)가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驪と後女眞の遺跡일본어 논문에서 '오륵성지(吳勒城址)' 즉 구러성지에 대한 실지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인 1906년, 나이토 코난(内藤湖南)이 구러를 방문하여 자신의 사진첩 滿洲寫眞帖일본어에 '고루부근(古樓附近)'이라는 제목의 흑백사진을 한 장 수록했으나, 실지조사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4][5]
이후 1987년 간다 노부오(神田信夫)는 後金国の山城・都城の研究일본어 논문을 통해 현지 실지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당시 구러성지는 소나무 숲이었으며, 한쪽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동쪽에는 다카하시가 보았다고 하는 성문터로 보이는 유구와 약간의 돌담이 남아있었다고 한다.[4]
2005년 현지조사를 실시한 중국인 연구자 청즈(承志, 현 오오테몬가쿠인대학 교수)와 스기야마 기요히코(杉山清彦, 현 도쿄대학 교수)의 보고서에 의하면, 고루촌에는 현재 성터 세 곳(샤지[6], 허지거[7], 구러)이 확인된다고 하였다.
3. 1. 초기 조사
1941년, 일본의 다카하시 고시로(高橋匡四郎)는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驪と後女眞の遺跡일본어 논문에서 '오륵성지(吳勒城址)' 즉 구러성에 대한 실지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서쪽의 사르후에서 고루촌(鼓樓村)으로 가서 노인들에게 구러성 위치를 물었지만 아무도 몰랐고, 마침내 고루촌 동쪽 입구 소자하(蘇子河) 북안에서 산채(山塞)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4]나이토 코난(内藤湖南)은 1906년 滿洲寫眞帖일본어에 '고루부근(古樓附近)'이라는 제목의 사진을 수록했으나,[5] 실지조사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4]
3. 2. 후기 조사
1941년 다카하시 고시로(高橋匡四郎)는 논문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驪と後女眞の遺跡」에서 '오륵성지(吳勒城址)' 즉 구러성지를 소개하였다. 그는 서쪽의 사르후에서 고루촌(鼓樓村)으로 가서 노인들에게 구러성 위치를 물었지만 아무도 몰랐고, 마침내 고루촌 동쪽 입구 소자하(蘇子河) 북안에서 산채(山塞)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4]1906년 나이토 코난(内藤湖南)도 구러를 방문, 자신의 사진첩 『만주사진첩(滿洲寫眞帖)』에 '고루부근(古樓附近)'이라는 제목의 흑백사진을 한 장 수록했으나,[5] 실지조사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4]
1987년 간다 노부오(神田信夫)는 논문 「後金国の山城・都城の研究」를 통해 현지 실지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당시 구러성지는 소나무 숲이었으며, 한쪽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동쪽에는 다카하시가 보았다고 하는 성문터로 보이는 유구와 약간의 돌담이 남아있었다고 한다.[4]
2005년 중국인 연구자 청즈(承志)와 스기야마 기요히코(杉山清彦)는 현지조사를 통해 고루촌(古樓村)에 세 곳의 성터(샤지성(šaji hoton, 沙濟城)[6], 허지거성(hejige hoton, 黑濟格城)[7], 구러성)를 확인했다.
3. 3. 성터 비정 논쟁
구러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용두산성지(龍頭山城址)''': 소자하(蘇子河)와 협하(夾河)가 합류하는 지점 근처에 있는 용두산(龍頭山) 위에 있다. 스기야마 등 조사단은 이 성지를 구러성으로 보았지만, 『고찰기실(考察紀實)』은 허지거성(黑濟格城)으로 비정했다.
- '''천교령성지(天橋嶺城址)''': 소자하가 협하와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지점 근처 구릉(천교령) 위에 있다. 『고찰기실』은 천교령의 험준함을 들어 이곳을 구러성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다른 연구에서는 용두산성지를 구러성, 천교령성지를 허지거성(許知巨城)으로 보기도 한다.[8][9]
- '''영풍각성지(迎風閣城址)''': 고루촌 북쪽에 있는 급경사 구릉(영풍각산) 위에 있다. 『고찰기실』은 방어 시설이 빈약하다는 점을 들어 이 성지를 샤지성으로 비정하였다.[1]
3. 3. 1. 용두산성지(龍頭山城址)
협하(夾河) 좌안, 협하와 소자하(蘇子河) 합류 지점 부근에 용두산(龍頭山)이라는 평평한 산지가 있으며, 이 산 위에 용두산성지(龍頭山城址)가 있다. 유래는 말 그대로 서쪽을 향한 용머리로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성지는 북쪽과 서쪽에 각각 협하와 소자하가 접하고 있으며, 동남쪽에만 산기슭이 이어지는 천연 요새이다. 스기야마 등 조사단은 이 성지를 구러성으로 비정하였지만 『고찰기실(考察紀實)』은 이 성지를 허지거성(黑濟格城)으로 비정하고 있다.3. 3. 2. 천교령성지(天橋嶺城址)
蘇子河중국어가 夾河중국어와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는 지점 인근에 솟은 구릉은 天橋嶺중국어(천교령)이라 하며, 고루촌 입구에 있다. 현재는 남쪽 기슭을 깎아 차도를 뚫었지만, 원래 북쪽에 玄菟古道중국어(현도고도)가 있었다. 이 구릉 위에 토루와 마른 해자로 방어 시설을 갖춘 성채가 있는데, 이것이 천교령성지이다. 구러성은 '삼면이 우뚝 솟음'으로 묘사되며, 그런 점에서 세 성지 모두 해당하지만, 『考察紀實중국어』은 천교령의 험준함을 들어 천교령성지를 구러성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이 책의 부주편(副主編) 장덕옥(張德玉)이 단독으로 발표한 「新宾清前遗迹考察紀实중국어」[8]과 왕결(王潔)의 「古勒城新考중국어」[9]에서는 용두산성지를 구러성, 천교령성지를 허지거성중국어(許知巨城)으로 비정하고 있다.3. 3. 3. 영풍각성지(迎風閣城址)
고루촌 집락의 정북쪽에 솟아있는 급경사 구릉은 산 위에 있는 옛 사당(古廟) 때문에 영풍각산이라 부른다. 산에 있는 영풍각성지는 사이에 마을이 있기 때문에 소자하로부터 거리가 좀 있지만 바로 아래로 강을 바라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샤지성은 비교적 간단하게 함락되었으며 유구로 인정되는 방어 시설이 빈약하다는 점에서 『고찰기실(考察紀實)』은 이 성지를 샤지성으로 비정하였다.[1] 이 성지보다 서북쪽에는 서적산성지라는 제4성지가 발견되어 있지만 왕결은 이를 구러성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이다.[1]참조
[1]
서적
東夷考略
https://zh.wikisourc[...]
[2]
서적
神宗顯皇帝實錄
[3]
저널
明末清初期マンジュ・フルン史蹟調査報告 - 2005年遼寧・吉林踏査行
[4]
저널
後金国の山城・都城の研究
[5]
서적
滿洲寫眞帖
[6]
문서
ᡧᠠᠵᡳ (šaji)
[7]
문서
ᡥᡝᠵᡳᡤᡝᡳ (Hejige)
[8]
저널
新宾清前遗迹考察紀实
[9]
저널
古勒城新考
辽宁民族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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