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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가네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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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조 가네자네는 섭정 후지와라 타다미치의 아들로, 유직(有職)에 정통한 공경으로 성장하여 내람 선하를 받고 섭정, 씨장자가 되었다. 그는 헤이시 정권과 요리토모의 등장 속에서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 했으나, 보수적인 성향과 고토바 천황과의 갈등으로 실각했다. 이후 정토종에 귀의하여 엔쇼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40년간 일기를 기록한 『교쿠요』를 남기는 등 와카에도 조예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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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가네자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족후지와라 북가(미도류 구조가)
시대헤이안 시대 말기 - 가마쿠라 시대 전기
구조 가네자네
구조 가네자네 상 (『덴시셋칸 미카게(天子摂関御影)』 에서)
가몬Kujō Fuji inverted.png
가몬 설명아홉 줄기 등나무
별명게쓰린덴(月輪殿), 고홋쇼지도노(後法性寺殿)
묘소교토시 도호쿠지
개명가네자네 → 엔쇼 (법명)
생년1149년
사망1207년 5월 3일
관직
관위종1위, 섭정, 관백, 태정대신
주군고시라카와 천황→니조 천황→로쿠조 천황→다카쿠라 천황→안토쿠 천황→고토바 천황→쓰치미카도 천황
가족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가가교쿠(加賀局, 후지와라 나카미쓰의 딸)
형제기요코(聖子), 고노에 모토자네(近衛基実), 마쓰도노 모토후사(松殿基房), 무네코(藤原育子), 신엔(信円), 후지와라노 가네후사(藤原兼房), 지엔(慈円) 등
배우자정실: 가네코(兼子, 후지와라노 스에유키(藤原季行)의 딸), 후지와라 겐스케(藤原顕輔) 또는 후지와라 요리스케(藤原頼輔)의 딸)
자녀요시미치, 요시쓰네(良経), 닌시(任子), 요엔(良円), 요헤이(良平), 요카이(良快), 요스케(良輔), 요히로(良尋), 요시미(良海), 요시에(良恵), 다마비(玉日) 등
관련 인물
아들구조 요시미치 (1167–1188)
구조 요시쓰네
구조 요시스케 (1185–1218)
구조 요시히라 (1185–1240)

2. 생애

후지와라 다다미치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신분은 낮았지만, 이복 누나인 황가문원(皇嘉門院)의 유자가 되었고,[2] 호겐 3년(1158년)에는 형 모토자네의 유자 자격으로 원복하여 정5위하에 서임되었고, 좌근위권중장(左近衛権中将)에 임명되었다. 에이랴쿠 원년(1160년)에는 종3위가 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

호겐의 난으로 세력을 잃은 섭관가는 의례 정치를 통해 생존을 모색했고, 가네자네도 학문 연찬을 쌓아 유직고실(有職故実)에 통달한 공경으로서 이복 형 모토자네・모토후사에 이어 승진했다. 조칸 2년(1164년) 16세에 내대신(内大臣), 닌안 원년(1166년) 18세에 우대신(右大臣)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이후 20년간 관직 변동 없이 우대신에 머물렀는데, 이는 결원이 없어 승진이 정체된 것도 있지만, 병을 핑계로 조정 출사를 자주 거부한 것도 요인 중 하나로 추정된다.[5]

1179년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쿠데타(지쇼 3년의 정변)는 가네자네에게 뜻밖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새롭게 간파쿠가 된 고노에 모토미치는 공사(公事)에 미숙했고, 헤이시는 가네자네에게 보좌역을 기대하며 그의 적자 요시미치를 곤츄나곤・우다이쇼로 임명하는 등 우대책을 제시했다. 가네자네는 헤이시로부터의 은혜를 "생애의 치욕"이라 분개하면서도, 구조 가의 위상 상승을 위해 이를 수락했다.[6]

1180년 모치히토 왕의 거병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동란이 발생하고, 이듬해 1181년 키요모리가 사망하는 등 정세가 급변했지만, 가네자네는 특정 세력에 가담하지 않고 방관자적 태도를 유지했다.

같은 해, 가네자네는 구마노로 향하는 자신의 호지승(護持僧) 지센(知仙)에게 자신이 서사(書写)한 『반야심경』과 『법화경』을 맡기고, 혼란한 정치를 우려하며 자신이 권력 중추에 섰을 때 "정치를 순수함으로 되돌리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키요하라 요리나리에게 『정관정요』의 가점(加点)을 요구하는 등 중국 정치 서적 학습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해 말 타이라노 시게히라에 의한 난토 소토로 도다이지고후쿠지가 불타는 것에 비탄했다.

분지 원년(1185년) 10월, 고시라카와 법황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요청에 따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추토의 원선(院宣)을 내렸지만, 요시쓰네가 몰락하면서 상황이 어려워졌다. 요리토모는 원(院)의 독재를 견제하고자 원근신 해관, 기소 공경에 의한 조정 운영, 가네자네에 대한 내람 선하를 요구했다. 분지 2년(1186년) 3월 12일, 가네자네는 마침내 섭정・씨장자로 선하되었다.[7]

집정 자리에 오른 가네자네는 이전과 달리 정무에 매진했다. 분지 3년(1187년)에는 보겐 이래 폐지되었던 기록소를 간인 내리(閑院内裏) 안에 설치했다.

1190년 11월 7일, 오슈 후지와라 씨 토벌을 마친 요리토모가 상경했다. 11월 9일, 가네자네는 칸인 내리의 귀문에서 요리토모와 처음으로 대면한다.[10][11]

1192년 3월 13일, 고시라카와 원이 붕어하면서 가네자네는 오랜 압박에서 해방되었지만, 엄격한 자세와 원근신 억압은 센요몬인을 중심으로 한 반(反) 가네자네 파의 결집을 초래했다.

고시라카와인 붕어 후, 가네자네는 조정에서 누구도 꺼리는 일 없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요리토모에게 정벌 대장군 지위를 선하하고, 남도 부흥 사업을 실시하는 등 가네자네의 정치 생활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가 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196년 11월, 관백 지위를 잃고 실각했다.[1]

겐닌 2년(1202년) 정월 27일, 구조 가네자네는 정토종의 호넨을 계사(戒師)로 하여 출가하고 엔쇼(円証)라 칭했다. 가네자네는 장남 요시미치가 일찍 죽은 슬픔을 전수염불의 가르침에서 구원받고자 했으며, 호넨에게 깊이 귀의했다. 호넨의 저작인 『선택본원염불집』(『선택집』)은 가네자네의 요청으로 저술된 것이다.[1]

그러나 『신란 성인 어인연』 등에 따르면, 가네자네는 호넨의 악인정기 사상에 의문을 품고, 자신과 같은 속인이나 계율을 어긴 승려도 염불을 외우면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차남 요시쓰네는 도미노미카도 미치치카가 사망한 후 겐닌 2년 12월에 섭정이 되었으나, 겐큐 3년 3월에 38세로 급사했다. 가네자네는 손자 미치이에를 키우는 데 모든 것을 쏟았다. 겐에이 2년 2월에 일어난 전수 염불 탄압 (조겐의 난)에서는 호넨의 유배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유배지를 자신의 영지인 사누키로 변경하여 보호했다.[4]

가네자네는 4월 5일 59세로 사망했다. 교토 호쇼지에 묻혔고, 묘는 도후쿠지에 있다.[4]

2. 1. 유직(有職)의 공경

후지와라 다다미치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신분은 낮았지만, 이복 누나인 황가문원(皇嘉門院)의 유자가 되었고,[2] 호겐 3년(1158년)에는 형 모토자네의 유자 자격으로 원복하여 정5위하에 서임되었고, 좌근위권중장(左近衛権中将)에 임명되었다. 에이랴쿠 원년(1160년)에는 종3위가 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

호겐의 난으로 세력을 잃은 섭관가는 의례 정치를 통해 생존을 모색했고, 가네자네도 학문 연찬을 쌓아 유직고실(有職故実)에 통달한 공경으로서 이복 형 모토자네・모토후사에 이어 승진을 거듭한다. 조칸 2년(1164년) 16세에 내대신(内大臣), 닌안 원년(1166년) 18세에 우대신(右大臣)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20년간 관직 변동 없이 우대신에 머물렀다. 이는 결원이 없어 승진이 정체된 것도 있지만, 병을 핑계로 조정 출사를 자주 거부한 것도 요인 중 하나로 추정된다.[5]

2. 2. 지쇼・주에이의 난(治承・寿永の乱)

1179년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쿠데타(지쇼 3년의 정변)는 가네자네에게 뜻밖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새롭게 간파쿠가 된 고노에 모토미치는 공사(公事)에 미숙했고, 헤이시는 가네자네에게 보좌역을 기대하며 그의 적자 요시미치를 곤츄나곤・우다이쇼로 임명하는 등 우대책을 제시했다. 가네자네는 헤이시로부터의 은혜를 "생애의 치욕"이라 분개하면서도, 구조 가의 위상 상승을 위해 이를 수락했다.[6]

1180년 모치히토 왕의 거병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동란이 발생하고, 이듬해 1181년 키요모리가 사망하는 등 정세가 급변했지만, 가네자네는 특정 세력에 가담하지 않고 방관자적 태도를 유지했다. 이 시기 가네자네는 우다이진의 요직에 있으면서 조정에 거의 출사하지 않았고, 고시라카와 원의 자문에는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6]

같은 해, 가네자네는 구마노로 향하는 자신의 호지승(護持僧) 지센(知仙)에게 자신이 서사(書写)한 『반야심경』과 『법화경』을 맡기고, 혼란한 정치를 우려하며 자신이 권력 중추에 섰을 때 "정치를 순수함으로 되돌리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그는 키요하라 요리나리에게 『정관정요』의 가점(加点)을 요구하는 등 중국 정치 서적 학습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해 말 타이라노 시게히라에 의한 난토 소토로 도다이지고후쿠지가 불타는 것에 비탄했다. 이후 고후쿠지 재건에 대한 고시라카와 법황의 자문에 대해, 재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백성을 괴롭히는 조영은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불에 대한 기도와 덕정(徳政)의 조화를 강조했다.[7]

2. 3. 내람 선하(内覧宣下)

분지 원년(1185년) 10월, 고시라카와 법황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요청에 따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추토의 원선(院宣)을 내렸지만, 요시쓰네가 몰락하면서 상황이 어려워졌다. 요리토모는 원(院)의 독재를 견제하고자 원근신 해관, 기소 공경에 의한 조정 운영, 가네자네에 대한 내람 선하를 요구했다. 요리토모가 가네자네를 추천한 배경에는 가네자네가 고실에 정통한 교양인이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헤이시와 친밀했던 고노에 가、기소 요시나카와 결탁한 쇼덴 가에 의한 정권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정도 있었다. 하지만 내람 추천은 가네자네에게는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던 듯,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옥엽』 12월 27일 조)라고 경악하며, 간토(關東)와 밀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게 될까 두려워했다. 요리토모의 요구에 대해 고시라카와 원이 고노에 모로미치 옹호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한때 섭정・내람이 병립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분지 2년(1186년) 3월 12일, 가네자네는 마침내 섭정・씨장자로 선하되었다.[7]

집정 자리에 오른 가네자네는 이전의 병약함과 달리 정무에 매진했다. 분지 3년(1187년)에는 보겐 이래 폐지되었던 기록소를 간인 내리(閑院内裏) 안에 설치했다(『옥엽』 2월 28일 조). 이어서 고시라카와 원의 이름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의견 봉사를 요구하는 어교서가 나왔는데, 이는 가네자네의 제언에 따른 것이며, 최종적으로 문면을 추고한 것도 가네자네였다(『옥엽』 분지 3년 3월 4일 조). 가네자네는 보수적이며 고실 선례에 의거하여 공사를 과실 없이 수행하는 것을 중시했지만, "정치를 순수하게 반한다"라는 이념 실현을 위해 필요한 개혁과 덕정 추진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2. 4. 요리토모 상락(頼朝上洛)

1190년 11월 7일, 오슈 후지와라 씨 토벌을 마친 요리토모가 상경했다. 11월 9일, 카네자네는 칸인 내리의 귀문에서 요리토모와 처음으로 대면한다.[10][11] 요리토모는 카네자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후, 카네자네와 요리토모의 만남은 『교쿠요』 기록상으로는 한 번뿐이었다. 이듬해부터 반(反) 카네자네 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카네자네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1192년 3월 13일, 고시라카와 원이 붕어하면서 카네자네는 오랜 압박에서 해방되었지만, 엄격한 자세와 원근신 억압은 센요몬인을 중심으로 한 반 카네자네 파의 결집을 초래했다.

2. 5. 실각

고시라카와인 붕어 후, 가네자네는 조정에서 누구도 꺼리는 일 없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요리토모에게 정벌 대장군 지위를 선하하고, 남도 부흥 사업을 실시하는 등 가네자네의 정치 생활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가 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고시라카와인 붕어 후 새로운 치천의 군이 된 고토바 천황과 상급 귀족들은 엄격한 가네자네의 태도에 불만을 가졌고, 원근신(院近臣)에 대한 억압은 센요몬인을 중심으로 반(反) 가네자네 파의 결집을 가져왔다. 문벌 중시와 옛 관례에 얽매이는 가네자네의 태도는 중·하급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요리토모 역시 오오히메 입내(入內)를 위해 단고노쓰보네에게 접근하며 가네자네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이처럼 조정 내에서 고립된 가네자네는 자신의 정치 노선을 굽히지 않았고, 옛 관례보다는 치천의 군으로서의 입지 강화를 꾀하는 고토바 천황과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주고 닌시(任子)가 황자를 낳지 못하면서 조정 신하 대부분에게 버림받아, 1196년 11월, 관백 지위를 잃고 실각했다.[1]

2. 6. 정토종 귀의

겐닌 2년(1202년) 정월 27일, 구조 가네자네는 정토종의 호넨을 계사(戒師)로 하여 출가하고 엔쇼(円証)라 칭했다. 가네자네는 장남 요시미치가 일찍 죽은 슬픔을 전수염불의 가르침에서 구원받고자 했으며, 호넨에게 깊이 귀의했다. 호넨의 저작인 『선택본원염불집』(『선택집』)은 가네자네의 요청으로 저술된 것이다.[1]

그러나 『신란 성인 어인연』 등에 따르면, 가네자네는 호넨의 악인정기 사상에 의문을 품고, 자신과 같은 속인이나 계율을 어긴 승려도 염불을 외우면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는 호넨의 제자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파계승으로 만들고, 그 승려가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이는 파계승도 왕생할 수 있다면 자신과 같은 속인도 왕생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호넨은 가네자네의 동생 덴다이종 지엔의 제자였던 샤쿠(훗날의 신란)를 지명, 타마히와 결혼시켜 가네자네를 안도하게 했다.[1]

2. 7. 만년

차남 요시쓰네는 도미노미카도 미치치카가 사망한 후 겐닌 2년 12월에 섭정이 되었으나, 겐큐 3년 3월에 38세로 급사했다. 가네자네는 손자 미치이에를 키우는 데 모든 것을 쏟았다. 겐에이 2년 2월에 일어난 전수 염불 탄압 (조겐의 난)에서는 호넨의 유배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유배지를 자신의 영지인 사누키로 변경하여 보호했다.[4]

가네자네는 4월 5일 59세로 사망했다. 교토 호쇼지에 묻혔고, 묘는 도후쿠지에 있다.[4]

3. 가계

구조 가네자네|구조 가네자네일본어는 여러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자녀로는 구조 요시미치(1167–1188), 구조 요시쓰네, 후지와라노 타카코(1173–1239) 등이 있다. 구조 닌시는 고토바 천황의 중궁이 되었다.[1] 신란과의 혼인으로 알려진 타마히는 생모가 불분명한 자녀로, 여러 설이 존재한다.[1]

{| class="wikitable"

|-

! 아버지

| 후지와라노 타다미치

|-

! 어머니

| 카가노 츠보네[1] (가가, 후지와라 나카미츠의 딸)[1]

|-

! 배우자 및 자녀

|

부인자녀
후지와라노 토모코 (후지와라 스에요키의 딸)[1]
후지와라노 아키스케의 딸 (혹은 후지와라 요리스케의 딸)[1]
하치조인노 츠보네[1] (하치조인 산위국, 타카시나 모리아키의 딸)[1]
생모 불명



|}

4. 작품

구조 가네자네일본어는 여러 역사 드라마와 영화에서 다뤄졌다.

구분작품명방영/출시 연도주연/연기/성우
NHK 대하 드라마풀이 불탄다1979년(쇼와 54년)타카하시 마사야
불길이 일다1993년(헤이세이 5년) ~ 1994년(헤이세이 6년)사이토 요스케
다이라노 기요모리2012년(헤이세이 24년)아이지마 카즈유키
영화친란 / 속 친란1960년센다 코레야
텔레비전 드라마겐 요시츠네1966년2대 나카무라 마타고로
풀이 타오르다1979년다카하시 마사야
불타오르다1993년사이토 요스케
타이라노 키요모리2012년아이시마 카즈유키
가마쿠라 시대의 13인2022년다나카 나오키
OVA세계의 빛 신란 성인1992년오가와 신지
게임겐로 GENROH2012년카타오카 이치로


4. 1. 진적(真跡)


  • 나카야마 세쓰(中山切)
  • 쇼분 조안(処分状案)
  • 쓰네키리(교세쓰(経切))

4. 2. 출연 작품

구조 가네자네일본어는 여러 역사 드라마와 영화에서 다뤄졌다.

구분작품명방영/출시 연도주연/연기/성우
NHK 대하 드라마풀이 불탄다1979년(쇼와 54년)타카하시 마사야
불길이 일다(炎立つ)1993년(헤이세이 5년) ~ 1994년(헤이세이 6년)사이토 요스케
다이라노 기요모리2012년(헤이세이 24년)아이지마 카즈유키
영화친란 / 속 친란1960년센다 코레야
텔레비전 드라마겐 요시츠네1966년2대 나카무라 마타고로
풀이 타오르다1979년다카하시 마사야
불타오르다1993년사이토 요스케
타이라노 키요모리2012년아이시마 카즈유키
가마쿠라 시대의 13인2022년다나카 나오키
OVA세계의 빛 신란 성인1992년오가와 신지
게임겐로 GENROH2012년카타오카 이치로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2] 간행물 家領の相続に見る九条家
[3] 서적 中世前期女性院宮の研究 思文閣出版
[4] 서적 中世王権の形成と摂関家 吉川弘文館
[5] 간행물 治承の兼実
[6] 문서 玉葉 1189-06-05 #治承5年6月5日, 1189년으로 가정
[7] 간행물 九条兼実の反淳素思想
[8] 간행물 八条院領の伝領と八条良輔
[9] 문서 玉葉 1187-07-01 #文治3年6月13日, 1187년으로 가정
[10] 간행물 建久の兼実
[11] 서적 源通親 吉川弘文館
[12] 문서 玉葉 Unknown
[13] 문서 吾妻鏡 1192-03-02 #建久3年3月2日, 1192년으로 가정
[14] 간행물 一条能保と鎌倉初期公武関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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