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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후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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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후쿠지는 일본 교토에 위치한 사찰로, 924년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 의해 호쇼지로 창건되었다. 1236년 구조 미치이에에 의해 구조 가문의 보리사로 도후쿠지로 개칭되었으며, 1243년 선승 엔니가 초대 주지로 부임했다. 1249년에 불전이 건설되었으나, 1319년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신안 해저 유물에서 도후쿠지 관련 목간이 발견되어 재건 비용을 위한 무역선임을 추정하게 되었다. 1334년 교토 오산에 포함되었고, 무로마치 막부의 지원을 받아 재건되었으며, 1351년 남조 고무라카미 천황의 기원소가 되었다. 1881년 화재로 인해 주요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현재 국보인 산문과 중세 건물이 남아있다. 도후쿠지는 많은 명승을 배출했으며, 단풍 명소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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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후쿠지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위치일본 교토
착공1236년
용도사찰

2. 역사

일본의 국보인 도후쿠지 산몬(三門)


도후쿠지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의 동남쪽 끝, 후시미구와의 경계에 있으며, 동쪽에는 센뉴지(泉涌寺)가 있다.

도후쿠지는 여러 차례 화재와 재건을 반복하며 역사를 이어왔다. 국보인 산문(三門) 등 일부 건물은 중세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잦은 화재로 인해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2. 1. 창건과 초기 역사 (924년 ~ 1319년)

엔초 2년(924년), 후지와라 다다히라가 호쇼지(法性寺)를 창건하였다.[2] 가테이 2년(1236년), 구조 미치이에(九条道家)는 구조 가문의 보리사(菩提寺)로 이곳에 높이 5장(약 15미터)의 석가여래상을 안치하는 대사찰을 세울 것을 발원하였으며, 사찰 이름은 나라도다이지고후쿠지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도후쿠지(東福寺)’라 명명하였다.

구조 미치이에에서 수행을 마치고 귀국한 선승 엔니(円爾, 시호: 성일국사)를 초대 주지로 초빙하였다. 엔니는 간겐 원년(1243년)에 도후쿠지의 초대 주지로 부임하였다.

겐초 원년(1249년)에 높이 5장의 석가여래상을 안치하는 불전 건설이 엔오 원년(1239년)에 시작되어, 겐초 7년(1255년)에 완공되었다. 분에이 10년(1273년)에는 법당(현재 사원의 강당에 해당)이 완성되었다.

겐오 원년(1319년) 2월, 대화재로 인해 가람이 전소되었으며, 높이 5장의 본존인 석가여래상도 소실되었다.[2]

2. 2. 재건과 무로마치 시대 (1319년 ~ 1526년)

겐오 원년(1319년) 2월 대화재로 가람이 전소되었으며, 본존인 석가여래상도 소실되었다.[2] 1976년 대한민국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도덕도 앞바다의 신안 해저유물 매장해역에서 발견된 배의 화물에 포함된 목간에 ‘도후쿠지’와 ‘10관 공용’ 등의 글자가 있어, 이 배는 소실된 도후쿠지의 재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가마쿠라 막부가 승인한 중국과의 무역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겐무 원년(1334년) 방장이 소실되었으나, 교토 오산(京都五山)에 포함되었다. 엔겐 원년(1336년) 병화로 임시 불전이 소실되었으나, 재건이 시작되었다. 높이 5장(약 15미터)의 본존 석가여래상이 다시 세워졌으며, 무로마치 막부의 지원으로 조와 3년(1346년) 이치조 쓰네미치에 의해 불전 상량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도후쿠지는 선사로 부흥되었다.

간노 2년(1351년) 남조 고무라카미 천황의 기원소가 되었다. 이후 도후쿠지는 ‘신대불사(新大仏寺)’라고도 불렸다. 시토쿠 3년(1386년) 법당이 재건되었고, 교토쿠 3년(1454년) 삼층탑이 세워졌다.

분메이 2년(1470년) 오닌의 난으로 일부 탑두가 소실되었다. 다이에이 6년(1526년)에도 소실되었다.

2. 3.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와 에도 시대 (1526년 ~ 1868년)

덴쇼 연간(1573년 ~ 1593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후쿠지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사찰 영지 1854석의 소유권을 이전받았다.[2] 이후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이에미츠에 의해 수리가 이루어졌다.

2. 4. 메이지 시대 이후 (1868년 ~ 현재)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신불분리령으로 약 70개에 달하던 탑두가 25개로 줄어들었다. 1881년(메이지 14년) 12월 16일 오후 8시에 누군가의 방화로[3] 불전, 높이 5장의 본존 석가여래상, 법당, 방장, 고리(庫裏) 등이 소실되었다. 현재 도후쿠지에는 거대한 불상의 손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는 구 본존상의 왼손 부분만이 메이지 시대 대화재 당시 구출된 것으로 추정된다.[4]

러일 전쟁 당시에는 절 영역이 접수되어 러시아군 포로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1917년(다이쇼 6년)부터 불전과 법당을 겸하는 본당이 건설되었고, 탑두(塔頭)인 만주지(万寿寺)에서 석가여래상을 옮겨 본존으로 모셔 1934년(쇼와 9년)에 완공되었다. 현재의 본당, 방장, 고리 등은 메이지 이후 재건된 것이지만, 국보인 산문(三門)을 비롯해 동사(東司), 욕실, 선당 등은 소실되지 않아 중세의 건물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도후쿠지에서는 역대에 걸쳐 많은 명승을 배출하였는데, 『원형석서(元亨釈書)』의 저자인 호칸 시렌(虎関師錬)과 무로마치 시대에 화승으로 활약하며 이후 불화와 수묵화에 큰 영향을 미친 요시야마 묘초(吉山明兆) 등이 유명하다.

경내에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통천모미지(通天モミジ)’라 불리는 삼엽 단풍나무 등 다양한 단풍나무가 많다. 원래는 벚나무가 심어져 있었으나 ‘후대에 유흥의 장소가 된다’는 이유로 벌목되고, 대신 단풍나무가 심어진 것이다. 주변 지역은 역사적 풍토 특별보존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3. 소실된 불상

1881년(메이지 14년) 화재로 소실된 불전. 현재 교토부립 교토학・역채관(京の記憶アーカイブ)에 보존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붕 끝 처짐을 방지하기 위한 '태합주(太閤柱)'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81년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법당 건축물. "교토의 기억 아카이브"에 기록되어 있다.


호류지(法隆寺) 서원당(西円堂) 건칠약사여래좌상(乾漆薬師如来坐像)은 천불광배(千仏光背)의 예시이다. 불상은 8세기 후반 제작, 광배는 고안 6년(1283년) 제작.


도후쿠지에는 1881년 화재로 소실된 구 본존상 관련 유물이 남아있다. 그중 구 본존상의 왼손인 '불수(佛手)'는 길이 약 2m로, 당시 본존상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소실된 불전 초석은 현재 재건된 본당(불전 겸 법당) 정면 향나무 뿌리 주변에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3. 1. 구 본존상

도후쿠지에는 현재 길이 약 2m에 달하는 거대한 '불수(佛手, 부처의 손)'가 보관되어 있다. 이는 구 본존상의 왼손 부분으로, 1881년 12월 16일[5] 화재 당시 구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수는 14세기에 재건된 본존상의 유물로 여겨진다. 이 불수로 미루어보아 화재로 소실된 구 본존 좌상은 매우 거대한 상이었으며, 『도후쿠지연기(東福寺縁起)』에 따르면 그 높이는 약 5장(약 15m), 협시 보살상은 2장 5척(약 7.5m)이었다고 한다.

센고쿠 시대 일본을 방문한 루이스 프로이스는 도후쿠지를 방문하여 소실된 불전, 구 본존상 및 협시상에 대해 『프로이스 일본사』에 기록을 남겼다.[6]

나가이 노리오와 히키마 토시아키의 논문 「도후쿠지 무로마치 재건 불전의 복원」에서는 구 본존상의 높이가 5장(약 15m)이라는 것에 대해 실제 높이는 2장 5척(약 7.5m)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7] 이 논문은 에도 시대 그림, 소실 전 촬영된 불전의 고사진, 발굴 조사 성과 등을 바탕으로 구 본존상이 건물 내부에 수납될 수 있는 높이와 디자인을 검토하였으며, 그 결과 구 본존상의 높이 5장은 좌상이 일어선 경우를 가정한 크기이며 실제 높이(좌고)는 그 절반인 2장 5척(약 7.5m) 정도였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현재 남아 있는 불수의 크기와 2장 5척의 좌고를 기준으로 상정되는 구 본존상의 신체 크기가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갖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광배의 높이에 대해서는 불전 내부 공간의 높이 관계와 『우자견기(愚子見記)』(공장 헤이 마사타카가 저술한 건축서)에 기술된 호코지 대불의 앉은키와 광배 높이의 비율을 참고하여, 도후쿠지 구 본존상의 광배 높이는 약 44척(약 13m)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좌상의 대불 높이를 실제 앉은키가 아닌, 일어섰다고 가정한 신장으로 표기하는 관례는 다른 대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도다이지(東大寺) 대불은 16장(약 14.7m), 호코지(方広寺) 대불은 16장(실제 높이는 6장 3척), 운고지(雲居寺) 대불은 8장(실제 높이는 4장)이라고 공표되었다.[8]

반리 슈큐(万里集九)의 시집 『매화무진장(梅花無尽蔵)』(에이쇼 3년, 1506년)에는 "난토(南都, 도다이지)의 절반이 운고지, 운고지의 절반이 도후쿠(東福, 도후쿠지 대불)"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도후쿠지 구 본존상의 신장이 도다이지 대불 신장의 1/4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도다이지 대불의 공표된 높이가 16장이고, 도후쿠지 구 본존상의 신장이 5장이므로 약 1/4이 된다. 도후쿠지 구 본존상의 신장 5장이 실제 높이가 아닌 일어섰다고 가정한 가상 높이임은 역사학자 모리 카츠미(森克己)도 지적한 바 있다.[9] 일본 역대 불사의 업적을 기록한 『본조 대불사 정류 계보(本朝大仏師正流系図)』에는 겐무(建武) 3년(1336년)에 지어진 도후쿠지 본존상의 높이가 2장 5척, 그 양옆의 보살상은 각각 1장 2척 5촌으로 기록되어 있다.[10]

미술사학자 콘다테 켄스케(根立研介)는 구 본존상이 확실히 광배를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구 본존상이 조성된 시대의 불상 양식 및 쇼토쿠 원년(1711년)에 출판된 『야마시로 명승지(山城名勝志)』의 "광배 안에 500구의 화불"이라는 기록을 토대로, 구 본존상의 광배가 무수히 많은 화불로 장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이른바 천불광배(千仏光背)로, 구 본존상의 광배 디자인이 옛 도다이지 대불의 광배를 본떠 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도다이지 대불의 광배는 창건 당시 500여 구의 화불로 장식되었으나,[11] 이후 두 번의 재건을 거치며 화불의 수가 점차 줄어 현재는 16구가 남아 있다.

도후쿠지에는 높이 약 85cm의 좌상 3구가 보관되어 있으며, 뒷면이 평평하고 양쪽 끝에 철환이 부착되어 있다. 이들 좌상이 구 본존상의 광배를 장식했던 중형 화불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12] 도후쿠지 탑두인 난묘인(南明院)의 본존상은 도후쿠지 구 본존상 광배의 화불로 전해져 온다. 콘다테는 난묘인의 본존상이 수리가 이루어지며 일부 형상이 변했으나, 앞서 언급한 3구와 유사한 점이 많아 난묘인의 본존상도 구 본존상 광배의 화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소슈쿠인(即宗院)이나 레이겐인(霊源院) 등 도후쿠지의 많은 탑두는 구 본존상이 앉았던 연대(蓮台)의 일부로 전해지는 연판(蓮弁)을 소장하고 있다. 이는 메이지 시대 화재로 구 본존상이 소실되었을 때, 남은 연판을 기념품으로 도후쿠지 탑두들에 한 장씩 배분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구 본존상의 인상은 현존하는 왼손이 '여원인(與願印)'이므로 오른손은 통상적으로 '시무외인(施無畏印)'일 것으로 추정된다.

『야마시로 명승지(山城名勝志)』의 도후쿠지 구 본존상 소개에는 "석가 미간에 5촌 길이의 비로자나상이 숨겨져 있다"는 기록이 있어, 구 본존상의 미간에 소형 미간농(眉間籠)이 내장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불 미간에 불상을 안치하는 방식은 다른 대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호코지 대불은 낙뢰로 소실되었지만 미간농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야마시로 명승지(山城名勝志)』에는 구 본존상의 협시로 관음과 미륵의 두 보살상 및 사천왕상이 불전에 함께 안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구 본존상의 불수(佛手)와 마찬가지로 협시상 역시 소실을 피한 일부 유물이 도후쿠지에 보관되어 있으며, "어느 조각상의 계(全長 110cm)",[13] "사천왕상 발아래에 있는 사악한 귀신의 일부", "분세이(文政) 12년(1829년) 보수 당시 다문천상(多聞天像) 손끝 일부", "보살상의 지물로 추정되는 연줄기 및 수병", "사천왕상의 지물로 추정되는 창의 끝 부분" 등이 바로 그것이다.

3. 2. 구 본존상 관련 기록

센고쿠 시대 일본을 방문한 루이스 프로이스는 도후쿠지를 방문하여, 소실된 불전, 구 본존상 및 협시상에 대해 『프로이스 일본사』에 기록을 남겼다.[6] 반리 슈큐의 시집 『매화무진장(梅花無尽蔵)』(에이쇼 3년, 1506년)에는 "난토(南都, 도다이지)의 절반이 운고지, 운고지의 절반이 도후쿠(東福, 도후쿠지 대불)"라는 표현이 있는데,[8] 이는 도후쿠지 구 본존상의 신장이 도다이지 대불 신장의 1/4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 역대 불사의 업적을 기록한 『본조 대불사 정류 계보(本朝大仏師正流系図)』에는 건무 3년(1336년)에 지어진 도후쿠지 본존상의 높이가 2장 5척, 그 양옆의 보살상은 각각 1장 2척 5촌으로 기록되어 있다.[10]

쇼토쿠 원년(1711년)에 출판된 『야마시로 명승지(山城名勝志)』에는 "광배 안에 500구의 화불"이라는 기록이 있어, 구 본존상의 광배가 무수히 많은 화불로 장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야마시로 명승지(山城名勝志)』의 도후쿠지 구 본존상에 대한 소개에는 "석가 미간에 5촌 길이의 비로자나상이 숨겨져 있다"는 기록이 있다.

히라도번 번주 마쓰우라 세이(松浦清)가 저술한 『갑자야화(甲子夜話)』에는, 1798년(간세이 10년)에 발생한 호코지 대불(교토 대불)의 낙뢰로 인한 소실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는 호코지 대불이 소실됨으로써 도후쿠지 구 본존상이 의도치 않게 교토에서 가장 높은 불상이 되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14]

3. 3. 구 본존상 관련 유물



도후쿠지에는 현재 길이 약 2m에 달하는 거대한 '불수(佛手, 부처의 왼손)'가 보관되어 있다. 이는 1881년 12월 16일[5] 화재 당시 구출된 구 본존상의 왼손 부분으로 추정된다. 이 불수는 14세기에 재건된 본존상의 유물로 여겨지며, 소실된 구 본존 좌상은 매우 거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후쿠지연기(東福寺縁起)』에 따르면 그 높이는 약 5장(약 15m)이었다고 한다.

미술사학자 콘다테 켄스케(根立研介)는 구 본존상이 광배를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쇼토쿠 원년(1711년)에 출판된 『야마시로 명승지(山城名勝志)』의 "광배 안에 500구의 화불"이라는 기록을 토대로, 구 본존상의 광배가 무수히 많은 화불로 장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는 옛 도다이지 대불의 광배를 본떠 제작된 천불광배(千仏光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후쿠지에는 높이 약 85cm의 좌상 3구가 보관되어 있으며, 이들은 구 본존상 광배의 중형 화불일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12] 도후쿠지 탑두인 난묘인(南明院)의 본존상 역시 구 본존상 광배의 화불로 전해진다. 콘다테는 난묘인의 본존상이 수리 과정에서 일부 변형되었으나, 3구와 유사점이 많아 이 역시 광배의 화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소슈쿠인(即宗院), 레이겐인(霊源院) 등 도후쿠지의 많은 탑두는 구 본존상이 앉았던 연대(蓮台)의 일부로 전해지는 연판(蓮弁)을 소장하고 있다.

구 본존상의 인상은 현존하는 왼손이 '여원인(與願印)'이므로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야마시로 명승지(山城名勝志)』에는 구 본존상의 협시로 관음과 미륵 두 보살상 및 사천왕상이 함께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협시상 역시 소실되지 않은 일부 유물이 도후쿠지에 보관되어 있는데, "어느 조각상의 계(全長 110cm)",[13] "사천왕상 발아래 사악한 귀신의 일부", "분세이 12년(1829년) 보수 당시 다문천상(多聞天像) 손끝 일부", "보살상의 지물로 추정되는 연줄기 및 수병", "사천왕상의 지물로 추정되는 창의 끝 부분" 등이다.

3. 4. 구 본존상 인상(印相)

현존하는 왼손은 여원인(與願印)이므로, 오른손은 통상적으로 시무외인(施無畏印)일 것으로 추정된다.

4. 갤러리

분다인의 도난정

참조

[1] 서적 総合佛教大辞典 第1巻 1987
[2] 문서 호쇼지는 현재 [[서일본 여객철도|JR]] [[게이한 전기 철도|게이한]] [[도후쿠지역]] 근처에 작은 절로 남아 있다
[3] 간행물 東福寺古僧堂の遺構から見た禅宗伽藍 1966
[4] 간행물 東福寺の彫刻 -南北朝・室町時代の遺品を中心に- 2004
[5] 간행물 東福寺古僧堂の遺構から見た禅宗伽藍 1966
[6] 서적 十六・七世紀イエズス会日本報告集 第3期第4巻 1998
[7] 간행물 東福寺室町再建仏殿の復原 1996
[8] 서적 昭和京都名所圖會 1980
[9] 서적 日宋文化交流の諸問題 1975
[10] 서적 続群書類従 第35輯 拾遺部 1972
[11] 서적 重源 1994
[12] 문서 앞서 언급한 프로이스의 기록에 따르면, 광배의 화불은 소형 약 1,000체, 중형 약 40체가 있었다
[13] 문서 아마도 보살상의 일부로 추정되며, 구 본존상이 보관석가여래(寶冠釋迦如來, 계를 묶고 보관을 쓴 석가여래)였다면 구 본존상의 일부일 가능성도 있음
[14] 서적 史料京都見聞記 第5巻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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