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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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은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에 발생한 화재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후 나치당의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화재 발생 후, 히틀러는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몰아 바이마르 헌법 제48조를 발동하여 시민의 자유를 대폭 제한하는 국회의사당 방화령을 공포했다. 이로 인해 나치당은 3월 총선에서 득표율을 높여 전권위임법을 통과시키고, 독일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는 마리누스 판 데르 뤼베의 단독 범행설과 나치당 개입설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며, 1933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는 판 데르 뤼베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나치당은 반역죄 재판을 인민 법원으로 이관하고, 사건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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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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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이름 |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
원어 이름 | Reichstagsbrand (라이히스타크스브란트) |
발생 위치 | 국회의사당, 베를린, 독일 |
좌표 | 52° 31′ 7″ N, 13° 22′ 34″ E |
발생 날짜 | 1933년 2월 27일 |
유형 | 방화 |
관련 사건 | 독일의 정치적 폭력 (1918–1933)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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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 |
결과 | |
주요 결과 | 국회 의사당 화재 긴급 조치령 제정 판 데르 뤼베 사형 집행 시민 자유 정지 나치당의 정부 장악 강화 |
추가 정보 | |
관련 사건 | 룀 숙청 7월 쿠데타 크리스탈나흐트 |
2. 사건 발생 이전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연립 내각의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히틀러는 나치당의 의석수를 늘리기 위해 국회 해산 및 재선거를 요구했고, 1933년 3월 5일에 총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었다.[6] 히틀러와 나치당은 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켜 합법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했다. 전권위임법은 바이마르 헌법에 의해 비상사태 시 수상에게 의회 동의 없이 법률을 의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특별법이었다. 이 법은 1923년 ~ 1924년에 초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사용된 적이 있었으며, 의회 의석 수의 2/3 이상 찬성이 있어야 통과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33년 1월 당시 나치는 의석의 32%만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독으로 전권위임법을 통과시킬 수 없었다.[6]
2. 1. 나치당의 선전 전략
1933년 선거 기간 동안, 나치당은 독일에 공산주의혁명이 임박했으며,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치당에게 권력을 주는 것뿐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신경질적인 반공주의 정강을 내세우며, 공산주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민들의 불안감을 조성했다.[6] 이러한 선전을 통해 히틀러는 수권법 통과에 필요한 의석 수를 늘리고, 반대파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나치는 독일 공산당(KPDde)을 추방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을 공산주의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위험 신호로 규정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했다. 괴링과 히틀러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위험한 해충들을 철권으로 짓밟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47]3.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1933년 2월 27일 오후 9시 직후,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소방관들이 출동했다. 소방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물 대부분이 전소되었다.[7] 화재는 오후 11시 30분까지 진압되었다. 소방관과 경찰은 잔해를 조사하던 중 불타지 않은 인화성 물질(점화제) 20묶음을 발견했다.
현장 수색 결과, 불에 탄 건물의 그늘에서 웅크리고 있는 반나체의 마리누스 판 데르 르베가 발견되었다. 르베는 네덜란드 출신의 정신 장애를 앓고 있는 무정부주의자이자, 네덜란드 공산당원이었다. 르베는 방화 동기에 대해 "자본주의에 대한 항의"라고 주장했으며, 프로이센 내무성 정치경찰부장 루돌프 디엘스도 "한 광인의 단독 범행"으로 추정했다.
그날 프로이센 주 경찰은 공산당 의원 및 공무원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 계열 신문은 모두 발행 금지되었다. 이후 공산당 의원단장 와 훗날 코민테른 서기장을 역임하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그리고 디미트로프와 같은 불가리아인 공산주의자 와 4명이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화재 발생 후 경찰 보고에 따르면, 화재 발생 시간인 9시 14분에서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한 경찰과 소방대는 발화점이 60~65개소이고, 건물 전체에 흩어져 있는 점에 놀랐다. 연기를 내지 않고 치솟는 불기둥도 있었다. 경찰과 소방대는 이 불길이 인화재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판데르뤼버 혼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나치의 주장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발터 겜프는 1933년 2월 27일 국회의사당 화재 당시 베를린 소방서장이었고, 사건 현장에서 직접 지휘했다.[9] 1933년 3월 25일, 그는 나치의 화재 연루를 시사하는 증거를 제시한 혐의로 해고되었다.[10] 겜프는 소방서에 통보가 늦어졌으며, 자신이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주장했다. 1937년, 겜프는 직권 남용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의 항소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옥되었다. 겜프는 1939년 5월 2일 감옥에서 목 졸려 살해되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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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나치당의 초기 반응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는 화재 소식을 긴급 전화로 처음 접했을 때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여겼으나, 두 번째 전화를 받고 나서야 히틀러에게 보고했다.[8] 그들은 국회의사당에 도착하여 현장에서 헤르만 괴링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을 만났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이다! 공산주의자 범인 중 한 명이 체포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8] 히틀러는 이 화재를 "신의 징표"라고 부르며 공산주의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고 주장했다.[8] 다음 날 히틀러는 "이 방화 행위는 독일에서 볼셰비즘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테러 행위"라고 말했다.[8]괴링은 프로이센 주 경찰의 공식 발표에 개입하여, 범인이 준비한 방화 재료 "100파운드" (약 47킬로그램)를 "1,000파운드" (약 470킬로그램)로 수정하게 했다.[49] 담당관이 너무 많아서 혼자서는 운반이 불가능하다고 항의하자, 괴링은 "무슨 일이든 불가능은 없다! 게다가 왜 단독 범행이라고 쓰는 건가? 10명이나 20명이나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당신은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모르는 건가? 이 사건은 공산주의자 봉기의 신호다!"라고 외치며, "두 명의 공산당 의원"이 공범이라고 덧붙였다.[49]
히틀러는 국회의장 공저에서 열린 대책 회의에서 "공산주의 간부는 한 명도 남김없이 총살이다. 공산당 의원은 전원 오늘 밤 안에 목을 매달아 죽여라. 공산주의자 동료는 한 명도 남김없이 감옥에 쳐넣어라. 사회민주당원도 마찬가지다!"라고 외치며, 단독 범행이라는 루돌프 디엘스의 의견을 일축했다.[48]
4. 정치적 결과
1933년 화재 다음 날, 아돌프 히틀러의 요청에 따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바이마르 헌법 제48조를 사용하여 국회의사당 방화령에 서명했다. 이 법령은 인신 보호 영장,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 및 시위의 자유, 통신의 자유 등 대부분의 시민 자유를 정지시켰다.[12] 이러한 권리는 나치 정권 동안 회복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이 비상 권력을 이용하여 독일을 장악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광범위한 노력의 시작이라고 발표했다. 나치당 신문은 이 조작된 이야기를 게재하여 독일 국민을 공포에 빠뜨리고 공산주의자들을 더욱 고립시켰다.[12] 화재 이후 며칠 동안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독일 공산당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다. 히틀러는 "이 하등 인간들은 국민들이 우리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다.[12]
1933년 2월 28일, 히틀러는 각료 회의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법적 고려에 구애받지 않고 처리"하기 위해[45] 「독일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령(국가 방위 긴급령)」과 「독일 국민에 대한 배신과 반역적 책동에 대한 대통령령」의 두 가지 긴급 대통령령 발부를 제의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고, 국가 방위 긴급령은 즉일, 반역 방지 긴급령은 다음 날 공포되었다. 이로 인해 언론의 자유와 소유권은 현저하게 제한되었고, 정부는 연방 각 주의 전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1933년 3월 1일, 헤르만 괴링은 라디오 방송에서 "공산주의를 우리 민족에서 말살하는 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책무이다"라고 말하며, "(국가 사회주의) 혁명의 적에 대해서는 테러의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정부에 의한 백색 테러를 선언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잇따라 경찰에 의해 예방 구금되었고, 이틀 후에는 무정부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도 대상에 포함되었다.[46]
또한, 공산주의자의 습격이 일어난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공산당과 민주주의 정당의 집회는 나치당의 돌격대에 의해 습격당했고, 공산당 지도자를 포함한 체포자와 사망자도 잇따랐다. 선거 기간 중 사망한 나치스당원은 18명, 기타 정당의 사망자는 51명, 부상자는 수백 명에 달했다.
4. 1. 1933년 3월 총선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 및 재선거를 요청하여 나치당 의석 확대를 꾀했다. 히틀러의 요구는 수용되었고 1933년 3월 5일 총선이 실시되었다.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자 했다. 바이마르 헌법에 따라 수상에게는 의회 동의 없이 법률을 의결할 수 있는 전권위임법이 허용되었으나, 이는 비상사태에만 사용되었고 의회 2/3 이상 찬성이 필요했다. 당시 나치는 의석의 32%만 차지하여 전권위임법 통과가 어려웠다.나치는 선거 기간 동안 공산주의 혁명 임박 및 전권위임법 통과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반공주의 정강을 내세웠다. 독일 공산당(KPDde) 추방을 계획한 히틀러는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을 이용해 공산당 추방을 가속화하고 공산주의 혁명 위협을 강조했다. 나치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 혁명의 신호탄으로 규정, 국민들에게 나치에게 권력을 주지 않으면 소비에트 연방식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선동했다.[12]
언론 접근 차단, 지도자 투옥 등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체포되거나 지하로 숨었다. SPD 일부 당원들과 함께 SA에 의해 국회 등원을 저지당했다.
나치는 득표율을 44%로 올렸고, 독일 국가인민당 (8%)과 합쳐 52%로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나치의 기대치(50~55%)에 미달했다.[13] 결국 나치는 전권위임법 통과를 위해 다른 정당들을 협박, 회유해야 했다. 사회민주당만이 반대했으나, 독일 중앙당의 찬성으로 전권위임법이 통과되어 히틀러는 전권을 장악했다.
4. 2. 전권위임법 통과
1933년 3월 23일, 전소된 국가의회 의사당을 대신해 임시 국회의사당이 된 크롤 오퍼(크롤 오페라 극장)에서 총선거 후 첫 본회의가 개최되었다. 참석한 의원의 수는 535명이었고, 공산당 의원 81명, 사회민주당 의원 26명, 기타 5명의 의원은 질병·체포·도주 등의 이유로 "결석"했다.[50][51]계속되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전원이 전권 위임법에 반대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독일 국가 인민당과 중앙당의 협력을 얻어 3분의 2의 찬성을 확보하여, 전권 위임법을 성립시켰다. 이 법률은 국회 심의·의결 없이 광범위한 범위의 법령을 제정할 권리를 히틀러 정권에 인정한다는, 일종의 헌법 개정적 법령이었다. 의사당 주변에는 친위대가 피켓 라인을 쳤고, 의장 내 복도에는 돌격대원이 늘어섰다고 한다.[52]
5. 라이프치히 재판
1933년 7월, 마리누스 판 데르 뤼베와 에른스트 토르글러,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블라고이 포포프, 바실 타네프 등 4명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방화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1933년 9월 21일부터 12월 23일까지 라이프치히에서 독일 대법원 판사들이 주재하여 열렸다.
라이프치히 재판은 널리 홍보되었고 라디오로 방송되었다.[16] 히틀러 정권은 이 재판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유죄를 입증하고, 모든 반국가 세력에 대한 나치의 탄압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주요 용의자였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법정에서 검사들과 논쟁을 벌이며 자신을 성공적으로 변호했다. 그는 공산주의와 나치즘 간의 투쟁을 벌였고, 결국 자신과 동료 공산주의자들의 무죄를 증명하고 석방되었다. 또한 디미트로프는 방화 사건의 배후에 나치당의 주요 인물이 있다고 주장했다.
재판 과정에서 헤르만 괴링은 증인으로 출석하여 디미트로프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디미트로프는 괴링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그의 주장을 반박했고, 괴링은 이에 대해 분노하며 디미트로프를 위협하기도 했다.
나치당은 이 재판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려 했으나, 게슈타포와 형사경찰(KRIPO)이 공산당 본부에서 압수했다는 폭력 봉기 계획 관련 문건들은 법정에 제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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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판결 및 그 이후
판 데르 뤼베는 재판에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1934년 1월 10일 그의 25번째 생일 3일 전에 참수되었다.[18] 나치는 판 데르 뤼베가 공산주의 음모의 일원으로서 국회의사당을 불태우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고 주장한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판 데르 뤼베가 범행의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리려는 나치의 음모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판 데르 뤼베는 독일 노동자 계급의 상황에 항의하기 위해 혼자 행동했다고 주장했다.[21]1933년 9월 2일부터 12월 23일까지 열린 라이프치히 재판은 ''Reichsgericht''라고 불린 구 독일 제국 법원 출신의 재판관들이 재판을 주재했다. 이 재판은 폭넓게 선전되었고, 라디오로 방송되었다.
주요 범죄 용의자였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법정에서 검사들을 상대로 논쟁을 통해 싸웠으며, 자기 자신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법정은 곧 공산주의와 나치즘 간에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과 공산주의자 동지들이 무죄임을 증명했고, 석방되었다. 거기에 더해, 디미트로프는 방화자가 나치당의 주요 멤버인 것도 증명해보였다.
괴링과 괴벨스 등은 라디오를 통해 공산주의자가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했고, 게슈타포와 형사경찰(KRIPO)이 공산당 본부인 카를 리프네히트관을 습격하여 100파운드에 달하는 폭력봉기 계획과 관련한 문건을 압수했다고 발표하기도 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이 증거물들이 법정에 증거물로 제출되지 않았다.
12월 23일 발표된 판결에서 뷔enger 판사는 방화를 위한 공산주의 음모가 있었다는 자신의 믿음을 강조했지만, 판 데르 뤼베를 제외하고 피고인들을 화재나 alleged conspiracy와 연관시킬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선언했다. 불가리아인들은 무죄를 선고받고 소련으로 추방되었고,[15] 판 데르 뤼베만이 유죄로 판결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18] 토르글러 역시 무죄로 판결받았고 전쟁에서 살아남았다.[15]
이 재판의 결과로 아돌프 히틀러는 반역 재판을 정규 법원에서 제외시켰다. 그는 앞으로 반역죄는 새로 설립된 인민 법원(Volksgerichtshof)에서만 재판을 받도록 명령했다.[15] 인민 법원은 이후 1944년 히틀러 암살 시도 이후 당시 법원장이었던 롤란트 프라이슬러가 주재한 재판을 포함하여 많은 사형 선고와 관련되었다.[19]
6. 사건의 진상 논쟁
역사가들은 판데르뤼버가 의사당 화재에 관여했다는 사실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피해 정도가 그가 혼자서 했다는 것에는 의문을 품고 있다. 화재가 건물에 퍼진 속도를 고려할 때, 명성에 굶주린 정신 불안 방화범이라는 판데르뤼버의 평판과 지도급 나치당 관계자의 애매한 논평은 나치 지도자들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관여했을 것이라고 믿게 하고 있다. 즉, 나치가 계획하고 실행한 다음, 판데르뤼버에게 뒤집어 씌워 공산당을 탄압하려 했다는 것이다.[7]
몇몇 사람들은 나치나 공산주의자 모두 관계가 없고, 오직 판데르뤼버 혼자서 저지른 범죄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제국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은 나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판데르뤼버가 "얼간이" 또는 "정신불안자"였다는 생각은 폭력적인 반파시스트와 거리를 두려 했던 네덜란드 공산당의 선전이었다는 것이다. 역사가 한스 몸젠은 사건 당일 나치 지도자들이 공황 상태였고, 그들이 공산혁명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는 그들의 선전 활동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여겼다고 결론지었다.
화재 발생 후 경찰 보고에 따르면, 화재 발생 시간인 9시 14분에서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한 경찰과 소방대는 발화점이 60~65개소이고, 건물 전체에 흩어져 있는 점에 놀랐다. 연기를 내지 않고 치솟는 불기둥도 있었다. 경찰과 소방대는 이 불길이 인화재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판데르뤼버 혼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나치의 주장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주변 정황 또한 나치의 주장을 의심하게 했다.[9]
1933년 3월, SA 대원 "라르"는 강도 혐의로 체포되어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폭로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카를 에른스트가 지휘하는 10명의 SA 대원이 괴링의 국회의장 공관을 통해 의사당에 들어가 방화 연료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이 음모에는 요제프 괴벨스가 아이디어를 냈고, 괴링이 협조했으며, 실무 지휘는 에른스트 룀의 수하인 에른스트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르"는 곧 시체로 발견되었고, 관련자들은 룀 숙청 사건 당시 대부분 사망했다.[9]
발터 겜프는 화재 당시 베를린 소방서장이었고, 사건 현장에서 직접 지휘했다. 그는 나중에 나치의 화재 연루를 시사하는 증거를 제시한 혐의로 해고되었고, 투옥 중 사망했다.[10]
이러한 정황 증거들과 증언들은 나치당의 개입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망명한 공산당원인 빌리 뮌첸베르크 등은 익명으로 파리에서 『갈색 서』(de)라는 책을 출판하여, 방화의 진범이 나치당이며, 구체적인 범인까지 제시했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 널리 신뢰받았지만, 이 책에 참여한 아서 쾨슬러는 나중에 "우리는 구체적인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라고 말했다.[55]
1960년, 프리츠 토비아스는 판 데르 뤼베가 방화광이며 단독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발표했다.[30][23] 그는 판 데르 뤼베가 사건 발생 며칠 전 여러 건의 방화 공격을 저질렀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2014년, 벤자민 카터 헤트는 토비아스의 분석에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며, 최신 증거는 화재가 개인의 소행일 수 없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그는 공산주의 음모론보다 나치 협력에 대한 증거가 훨씬 더 많다고 주장한다.[31][32]
6. 1. 판 데르 뤼베 단독 범행설
판 데르 뤼베는 네덜란드 출신의 정신 장애를 가진 무정부주의자이자 네덜란드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방화 동기에 대해 "자본주의에 대한 항의"라고 주장했으며, 루돌프 디엘스 프로이센 내무성 정치경찰부장도 "한 광인의 단독 범행"으로 추정했다.[48]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반란 계획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공산주의 간부는 한 명도 남김없이 총살"하고 "공산당 의원은 전원 오늘 밤 안에 목을 매달아 죽여라."라고 외치며 디엘스의 의견을 일축했다.[48]
헤르만 괴링은 프로이센 주 경찰의 공식 발표에 개입하여 범인이 준비한 방화 재료의 양을 늘리고, 공범이 있다고 덧붙였다. 나치당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지도 이 '음모' 기사로 교체되었다.[49]
재판에서 판 데르 뤼베는 유죄로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34년 1월 10일, 25번째 생일 3일 전에 단두대에서 참수되었다.[21] 나치는 판 데르 뤼베가 공산주의 음모의 일원으로서 국회의사당을 불태우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판 데르 뤼베가 범행의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리려는 나치의 음모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판 데르 뤼베는 독일 노동자 계급의 상황에 항의하기 위해 혼자 행동했다고 주장했다.[21]

역사가들은 대체로 판 데르 뤼베가 의사당 화재에 관여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그가 혼자서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화재가 건물에 퍼진 속도, 판 데르 뤼베의 정신 불안 방화범이라는 평판, 그리고 나치 지도자들의 애매한 논평은 나치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건에 관여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았다.[22]
몇몇 사람들은 나치나 공산주의자 모두 관계가 없고, 오직 판 데르 뤼베 혼자서 저지른 범죄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제국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은 나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판 데르 뤼베가 "얼간이" 또는 "정신불안자"였다는 생각은 폭력적인 반파시스트와 거리를 두려 했던 공산당의 선전이었다는 것이다. 역사가 한스 몸젠은 사건 당일 나치 지도자들이 공황 상태였고, 그들이 공산혁명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는 그들의 선전 활동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여겼다고 결론지었다.
1960년, 프리츠 토비아스는 판 데르 뤼베가 방화광이며 단독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발표했다.[30][23] 그는 판 데르 뤼베가 사건 발생 며칠 전 여러 건의 방화 공격을 저질렀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2014년, 벤자민 카터 헤트는 토비아스의 분석에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며, 최신 증거는 화재가 개인의 소행일 수 없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그는 공산주의 음모론보다 나치 협력에 대한 증거가 훨씬 더 많다고 주장한다.[31][32]
6. 2. 나치당 개입설
나치당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의사당 방화를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나치당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7] 화재가 건물에 퍼진 속도를 고려할 때, 정신 불안 방화범이라는 판데르뤼버의 평판과 지도급 나치당 관계자의 애매한 논평이 나치 지도자들의 개입을 시사한다는 것이다.[26]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프란츠 할더 장군은 괴링이 "진짜 제국의회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다, 내가 제국의회에 불을 질렀거든."이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9] 대질심문에서 괴링은 이를 부인하며, 의사당이 불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자신이 방화했다는 것은 넌센스라고 주장했다.[9]
화재 발생 직후 경찰 보고에 따르면, 발화점이 60~65개소이고 건물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이는 판데르뤼버 혼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나치의 주장을 의심하게 만들었다.[9]
1933년 3월, SA 대원 "라르"는 강도 혐의로 체포되어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폭로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카를 에른스트가 지휘하는 10명의 SA 대원이 괴링의 국회의장 공관을 통해 의사당에 들어가 방화 연료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이 음모에는 요제프 괴벨스가 아이디어를 냈고, 헤르만 괴링이 협조했으며, 실무 지휘는 에른스트 룀의 수하인 카를 에른스트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르"는 곧 시체로 발견되었고, 관련자들은 룀 숙청 사건 당시 대부분 사망했다.[9]
발터 겜프는 화재 당시 베를린 소방서장이었고, 사건 현장에서 직접 지휘했다. 그는 나중에 나치의 화재 연루를 시사하는 증거를 제시한 혐의로 해고되었고, 투옥 중 사망했다.[10]
이러한 정황 증거들과 증언들은 나치당의 개입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6. 3. 독일 공산당의 "역재판"
1933년 여름, 망명 중인 독일 공산주의자, 민주주의자, 반나치 선전가, 변호사들로 구성된 그룹이 런던에서 "역재판" 예심을 개최했다. 역재판의 재판관은 영국 노동당 정치가 스태포드 크립스 경이었으나, 역재판 배후의 조직 의장은 독일 공산당 소속 빌리 문젠베르크였다. 역재판은 1주일간 지속되었고, 혐의자들이 무죄이며 진짜 방화범은 나치당 지도부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재판에서 괴링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역재판 예심에서는 모든 가능한 시나리오가 검토되었고, 피고들의 모든 진술이 준비되었다. "역재판"은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문젠베르크는 자신의 이름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한 갈색책"을 썼는데, 이는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고 탄압하기 위한 음모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문젠베르크의 책은 실제 저자가 그의 참모 중 하나였고, 이 경우에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인 오토 카츠였다). 오늘날 이 책은 역사가들이 광범위하게 참고하고 있다.[22]7. 사건 이후의 영향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나치당은 이를 빌미로 정치적 탄압을 강화했다. 언론 접근이 차단되고, 지도자들이 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경찰과 SA의 공격을 당한 공산주의자들은 체포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공산주의자들과 몇몇 SPD 당원들은 돌격대가 막아서는 바람에 국회 등원을 할 수 없었다.[50]
나치는 1933년 3월 선거에서 44%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우호 정당인 독일 국가인민당의 8%를 합쳐 52%로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나치가 기대했던 50~55%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과였다. 나치는 전권위임법 통과에 필요한 2/3 이상의 다수표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정당들을 협박하거나 회유했다. 결국 독일 중앙당의 찬성으로 전권위임법이 통과되어 히틀러는 전권을 장악했고, 대부분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류되었다. 1933년 4월,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은 불법화되거나 강제 해산되었다.[51]
1933년 3월 23일, 전소된 국회의사당을 대신해 크롤 오퍼 (크롤 오페라 극장)에서 총선거 후 첫 본회의가 개최되었다. 공산당 의원 81명, 사회민주당 의원 26명 등은 체포, 도주 등의 이유로 불참했고, 의사당 주변에는 친위대가 피켓 라인을 치고 돌격대원이 복도에 늘어서는 등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진행되었다.[52]
전권위임법 성립 이후 의회 민주주의는 사실상 붕괴되었고, 국회는 거의 열리지 않았다. 국회의사당은 수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공습과 베를린 전투로 더욱 파괴되었다.
전후 국회의사당은 서베를린에 위치하여 서독과 동독 모두 사용하지 못했다. 1964년 부분 수리되었으나 의사당으로 사용되지 않고 주로 전시회장으로 사용되었다.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베를린이 다시 수도가 되고 1999년 대규모 수선이 완료된 후에야 국회의사당으로서의 역할을 다시 수행하게 되었다.
7. 1. 대한민국에 주는 교훈
이 사건은 권력자들이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특정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아 대중을 선동하는 수법을 보여준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이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수법을 사용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1933년 2월 28일, 히틀러는 공산주의자들을 "법적 고려에 구애받지 않고 처리"하기 위해[50] 독일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령과 반역 방지 긴급령을 제안하여 승인받았다. 이로 인해 언론의 자유와 소유권이 제한되었고, 정부는 연방 각 주의 전권을 장악했다. 3월 1일, 괴링은 라디오 방송에서 백색 테러를 선언했고,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예방 구금되었다.[51]
공산주의자의 습격이 일어난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나치당의 돌격대는 공산당과 민주주의 정당의 집회를 습격하여 체포자와 사망자가 발생했다. 선거 결과, 공산당은 의석이 줄었고, 나치당은 약진했지만 과반수 획득에는 실패했다.[52] 1933년 3월 23일, 전권 위임법이 성립되어 히틀러 정권은 국회 심의 없이 법령을 제정할 권리를 얻었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지키고, 권력 남용을 견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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