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기라 요시히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기라 요시히사는 1641년에 태어난 인물로, 세이와 겐지 아시카가 가문의 지류 출신이다. 그는 고케로서 의례를 감독했으며, 1701년 아사노 나가노리와의 갈등 끝에 아사노에게 칼로 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아사노는 할복하고, 기라는 처벌받지 않았다. 1703년에는 아사노 가신들에게 습격당해 살해당했다. 기라는 뇌물을 탐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지역 사회에서는 명군으로 칭송받는 전승도 존재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현대에는 아코 사건과 기라를 재조명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라씨 - 니시오 요시쓰구
    니시오 요시쓰구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으로, 혼노지의 변 당시 이에야스의 이가코에를 도운 공로로 중용되어 무사시국 하라시 번주가 되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 기라씨 - 우에스기 쓰나노리
    우에스기 쓰나노리는 에도 시대 요네자와 번의 4대 번주로, 기라 요시히사의 아들이었으나 우에스기 가문의 양자가 되어 번주가 되었으며, 문치주의를 지향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과 아코 사건 대처 미흡으로 비판받았다.
  • 1641년 출생 - 마쓰다이라 요리즈미
    마쓰다이라 요리즈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삼촌으로, 이요 사이조 3만 석을 받아 상근 교대를 하지 않는 정부 다이묘가 되었으며, 그의 사후 가독은 아들 도쿠가와 요리치가 계승하였다.
  • 1641년 출생 - 심익현
    심익현은 조선 효종의 부마이자 청평도위로, 현종과 숙종 시대에 사신으로 활약하며 외교에 기여했고, 오행설에 밝았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던 인물이다.
  • 일본의 암살된 정치인 - 아사누마 이네지로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인으로서 일본 노농당 창립, 도쿄 시의회 의원, 국회 의원, 사회당 재건, 헌법 9조 개정 및 재군사화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나,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개정 반대 투쟁 중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 일본의 암살된 정치인 - 사이토 마코토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로, 해군대신,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하며 해군력 확장, 문화 통치 추진, 만주국 승인, 국제연맹 탈퇴 등의 행적을 남겼으나 2·26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기라 요시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기라 요시나카의 목조 조각상
기라 요시나카 목조상(화장사 소장)
시대에도 시대 전기 - 중기
출생간에이 18년 9월 2일 (1641년10월 6일)
사망겐로쿠 15년 12월 15일 (1703년1월 31일)
아명사부로(三郎)
개명요시히사(義央)
통칭사콘(左近)
보쿠이치(卜一)
묘소만창원 공운사, 가타오카산 화장사
가문기라 씨(세이와 겐지아시카가 씨 계통)
관직 정보
관위종4위하 지주 겸 고즈케노스케, 종4위상 좌근위권소장
막부에도 막부오쿠고케, 고케 간반
가족 관계
아버지기라 요시후유
어머니사카이 다다카쓰의 조카딸(사카이 다다요시의 딸)
형제도조 요시스에, 도조 요시타카, 도조 후유사다, 도조 후유시게, 효쇼
정실우에스기 쓰나카쓰의 여동생, 도미코(바이레이인)
자녀우에스기 쓰나노리, 기라 사부로, 쓰루히메( 시마즈 쓰나타카 실), 후리히메, 아쿠리히메(쓰가루 마사쓰구 실), 기쿠히메(사카이 다다히라 실 → 오오이미카도 쓰네오토 실)
양자요시치카 (친손자, 즉 우에스기 쓰나노리의 차남)
기타 정보
참고 문헌야마모토, 2017, 1. 마쓰노오로카의 칼부림 사건

2. 생애

1641년 기라 요시후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고위 관료인 사카이 씨 가문의 일원이었다.[3] 1668년 아버지 요시후유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아 17대 당주가 되었으며, 4200 곡의 영지를 상속받았다.

그의 가문은 본성겐지이며, 세이와 겐지 아시카가 씨의 지류였다. 가마쿠라 시대 아시카가 종가를 계승할 권리를 가진 채 분가하였으며, 무로마치 시대에는 아시카가 쇼군 가문이 단절될 경우 쇼군을 배출할 수 있는 명문가로 여겨졌다.[3] 증조부 기라 요시사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촌이었다.[3]

1701년 3월 14일, 에도성 마쓰노오로카에서 아사노 나가노리가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베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라는 고케로서 의례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아사노 나가노리에게 의례를 지도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있었다. 아사노는 기라에게 칼을 휘둘렀고, 이 사건으로 아사노는 할복하고 가문은 해체되었으나, 기라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 사건에 불만을 품은 아사노 나가노리의 가신 오이시 요시오 등 아코 낭사들은 1702년 12월 14일에 에도 혼조 마쓰자카정에 있던 기라 저택을 습격하여 요시히사를 살해했다.

기라는 겐로쿠 14년(1701년) 2월 4일, 아코번주 아사노 나가노리 등에게 고미즈노 천황의 칙사 등을 접대하는 어전 요리인을 명받았다. 요시히사는 고가 기모이리 쿄오도 사시소에야쿠였지만, 조정에 대한 연하의 사자로서 교토에 있다가 2월 29일에 에도로 돌아왔다. 나가노리는 이전에 칙사 어전 요리인을 경험했지만, 이전과는 변경된 점이 있어서 실수로 이어졌다. 여기에 엇갈림이 생겼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3월 14일 오전 10시쯤, 마쓰노오오로카에서 요시히사는 아사노 나가노리에게 등과 이마를 베였다. 나가노리는 그 자리에 있던 루스이반 가지카와 요리테루에게 붙잡혔고, 요시히사는 구리사키 도유의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지만, 이마의 상처는 남았다. 그 후, 메츠케 오쿠보 타다토모 등의 심문을 받았지만, 나가노리를 심문한 메츠케 타몬 시게토모의 『타몬 필기』에 따르면, 요시히사는 "저는 아무런 원한을 가진 기억이 없고, 완전히 난심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늙은 몸이라 무엇을 원망할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타몬 필기는 사건 후 한참 뒤에 쓰여진 것으로, 타인의 작품일 수도 있다). 나가노리는 즉시 할복을 명받았다. 요시히사는 3월 26일, 고가 기모이리 직의 면직원을 제출했다. 8월 13일에는 마쓰다이라 노부모치 (5000석의 하타모토)의 혼조의 저택으로 이전을 명받았다.[6]

1703년 1월 30일 밤(일본 달력으로 겐로쿠 15년, 12월 14일), 아사노 가신들은 2년 가까이 신중하고 비밀리에 계획을 세운 끝에 기라의 저택에 쳐들어가 복수를 위해 그를 살해했다.[8][9] 아코 낭사들은 먼저 가신들이 기거하는 행랑의 출입구를 쇠붙이로 막아 기라 가문의 가신들이 나올 수 없도록 조치했다. 이 때문에 응전하거나 도망친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라 가신들은 낭사들과 싸우지 못했다.[8] 기라 가문의 가신 40여 명은 방어에 나섰고,[9] 그 사이 요시히사는 수행원 두 명과 함께 부엌 옆 숯 창고에 숨었다.

아코 낭사들은 요시히사를 찾기 위해 수색했고, 침소의 요가 아직 따뜻한 것을 확인하고는 그가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라 판단했다. 요시다 카네아키라와 아이 마츠키 등이 숯 창고에서 말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숯 창고에서 물건들이 던져지고 기라 가신 두 명이 덤벼들었다. 낭사들은 그들을 베고 숯 창고 안을 조사했고, 안쪽에서 움직이는 요시히사를 발견했다. 아이 마츠키가 창으로 찌르자, 요시히사는 와키자시를 뽑아 저항했지만, 타케바야시 타카시게에게 참살되어 목이 잘렸다. 향년 62세(만 61세)였다.

요시히사의 목은 센가쿠지에 있는 아사노 나가노리의 묘 앞에 바쳐진 후, 상자에 담겨 절에 보관되었다. 절에서는 승려 두 명을 시켜 기라 가문으로 목을 돌려보냈고, 가로인 소다 손베에와 사이토 구나이가 이를 받았다. 이때 두 사람의 연서가 적혀 있는 기라의 목 영수증(목 하나)이 센가쿠지에 남아 있다. 그 후, 칼부림 당시 치료를 담당했던 구리자키 도유가 요시히사의 목과 몸통을 꿰매어 이은 뒤, 요시히사는 보제사인 만쇼지(萬昌寺)에 묻혔다. 계명은 "레이세이지덴 지쓰잔 소코 다이거사(霊性寺殿実山相公大居士)"이다.

아코 낭사들은 막부 당국에 자수했고, 살인죄로 할복을 명령받았다.[12] 도쿠가와 막부는 요시나카의 손자가 ''사무라이''처럼 가족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고 비난하여 사형에 처했다. 또한 기라 가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고케''의 지위를 잃었다. 우에스기 쓰나카쓰가 죽은 후, 우에스기의 수입은 30만 석에서 15만 석으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아사노 나가노리의 형제는 다시 지위를 회복하고 5,000 곡의 수입과 ''하타모토''의 지위를 받았다.

아코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군 충신장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2. 1. 가문과 초기 생애

1641년 기라 요시후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고위 관료인 사카이 씨 가문의 일원이었다.[3] 1668년 아버지 요시후유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아 17대 당주가 되었으며, 4200 곡의 영지를 상속받았다.

그의 가문은 본성겐지이며, 세이와 겐지 아시카가 씨의 지류였다. 가마쿠라 시대 아시카가 종가를 계승할 권리를 가진 채 분가하였으며, 무로마치 시대에는 아시카가 쇼군 가문이 단절될 경우 쇼군을 배출할 수 있는 명문가로 여겨졌다.[3] 증조부 기라 요시사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촌이었다.[3]

2. 2. 경력

1701년 3월 14일, 에도성 마쓰노오로카에서 아사노 나가노리가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베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라는 고케로서 의례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아사노 나가노리에게 의례를 지도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있었다. 아사노는 기라에게 칼을 휘둘렀고, 이 사건으로 아사노는 할복하고 가문은 해체되었으나, 기라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 사건에 불만을 품은 아사노 나가노리의 가신 오이시 요시오 등 아코 낭사들은 1702년 12월 14일에 에도 혼조 마쓰자카정에 있던 기라 저택을 습격하여 요시히사를 살해했다.

기라는 겐로쿠 14년(1701년) 2월 4일, 아코번주 아사노 나가노리 등에게 고미즈노 천황의 칙사 등을 접대하는 어전 요리인을 명받았다. 요시히사는 고가 기모이리 쿄오도 사시소에야쿠였지만, 조정에 대한 연하의 사자로서 교토에 있다가 2월 29일에 에도로 돌아왔다. 나가노리는 이전에 칙사 어전 요리인을 경험했지만, 이전과는 변경된 점이 있어서 실수로 이어졌다. 여기에 엇갈림이 생겼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3월 14일 오전 10시쯤, 마쓰노오오로카에서 요시히사는 아사노 나가노리에게 등과 이마를 베였다. 나가노리는 그 자리에 있던 루스이반 가지카와 요리테루에게 붙잡혔고, 요시히사는 구리사키 도유의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지만, 이마의 상처는 남았다. 그 후, 메츠케 오쿠보 타다토모 등의 심문을 받았지만, 나가노리를 심문한 메츠케 타몬 시게토모의 『타몬 필기』에 따르면, 요시히사는 "저는 아무런 원한을 가진 기억이 없고, 완전히 난심( অঙ্कल)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늙은 몸이라 무엇을 원망할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타몬 필기는 사건 후 한참 뒤에 쓰여진 것으로, 타인의 작품일 수도 있다). 나가노리는 즉시 할복을 명받았다.

요시히사는 3월 26일, 고가 기모이리 직의 면직원을 제출했다. 8월 13일에는 마쓰다이라 노부모치 (5000석의 하타모토)의 혼조의 저택으로 이전을 명받았다.[6]

12월 15일 새벽, 오이시 요시오를 비롯한 아코 낭사 47명이 기라 저택에 쳐들어갔다. 당시 기라 저택에는 우에스기 가문(요네자와번)에서 220명 정도가 파견되어 요시히사의 경호를 맡고 있었다고 한다. 아코 낭사들은 기라 가문의 가신들과 싸우면서 요시히사를 수색했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요시히사의 침소에 도착한 아코 낭사 중, 카야노 와스케가 이부자리에 손을 넣어, 아직 따뜻한 것을 확인하자, 아코 낭사들은 요시히사가 침소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다시 수색에 나섰다.

요시다 카네아키라와 아이 마츠키 등이 부엌 옆의 숯 창고에서 말소리가 들리자,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숯 창고에 있던 요시히사는 와키자시를 뽑아 저항했지만, 타케바야시 타카시게에게 참살되어 목이 잘렸다. 향년 62세(만 61세).

에도 막부가 편찬한 『도쿠가와 실기』의 겐로쿠 14년(1701년) 3월 14일 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59]

: 세상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기라 고즈케노스케 요시히사는 역대 당직을 맡아 오랜 세월 조정을 섬겼으므로 공무의 예절과 전고에 정통하여 당시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명문대가의 무리들도 모두 그에게 아첨하며 매사에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하여 뇌물을 탐하고 그 집은 거만(巨萬)의 재산을 쌓았다고 한다. 나가노리는 아첨하지 않고, 이번에 관반(館伴)으로 수행했음에도 요시히사에게 재물을 주지 않자, 요시히사는 몰래 이를 미워하여 어떤 일도 나가노리에게 알리지 않았으므로, 나가노리는 시각을 놓치고 예절을 잃는 일이 많았기에, 이를 원망하여 이런 일에 이르렀다고 한다.

막부는 기라 요시히사가 예절과 전고에 정통하고 정련된 것에 관하여 그를 따를 자가 없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지위 등으로 인해 뇌물을 탐하고 거액을 얻었던 것과, 나가노리가 아첨하지 않고 뇌물을 건네지 않자 이를 미워하여, 어떤 일에도 방해를 했기에 원한을 사게 되어, 그런 전말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 3. 아코 사건과 죽음

1703년 1월 30일 밤(일본 달력으로 겐로쿠 15년, 12월 14일), 아사노 가신들은 2년 가까이 신중하고 비밀리에 계획을 세운 끝에 기라의 저택에 쳐들어가 복수를 위해 그를 살해했다.[8][9] 아코 낭사들은 먼저 가신들이 기거하는 행랑의 출입구를 쇠붙이로 막아 기라 가문의 가신들이 나올 수 없도록 조치했다. 이 때문에 응전하거나 도망친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라 가신들은 낭사들과 싸우지 못했다.[8]

기라 가문의 가신 40여 명은 방어에 나섰고,[9] 그 사이 요시히사는 수행원 두 명과 함께 부엌 옆 숯 창고에 숨었다. 아코 낭사들은 요시히사를 찾기 위해 수색했고, 침소의 요가 아직 따뜻한 것을 확인하고는 그가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라 판단했다. 요시다 카네아키라와 아이 마츠키 등이 숯 창고에서 말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숯 창고에서 물건들이 던져지고 기라 가신 두 명이 덤벼들었다. 낭사들은 그들을 베고 숯 창고 안을 조사했고, 안쪽에서 움직이는 요시히사를 발견했다. 아이 마츠키가 창으로 찌르자, 요시히사는 와키자시를 뽑아 저항했지만, 타케바야시 타카시게에게 참살되어 목이 잘렸다. 향년 62세(만 61세)였다.

요시히사의 목은 센가쿠지에 있는 아사노 나가노리의 묘 앞에 바쳐진 후, 상자에 담겨 절에 보관되었다. 절에서는 승려 두 명을 시켜 기라 가문으로 목을 돌려보냈고, 가로인 소다 손베에와 사이토 구나이가 이를 받았다. 이때 두 사람의 연서가 적혀 있는 기라의 목 영수증(목 하나)이 센가쿠지에 남아 있다. 그 후, 칼부림 당시 치료를 담당했던 구리자키 도유가 요시히사의 목과 몸통을 꿰매어 이은 뒤, 요시히사는 보제사인 만쇼지(萬昌寺)에 묻혔다. 계명은 "레이세이지덴 지쓰잔 소코 다이거사(霊性寺殿実山相公大居士)"이다.

아코 낭사들은 막부 당국에 자수했고, 살인죄로 할복을 명령받았다.[12] 도쿠가와 막부는 요시나카의 손자가 ''사무라이''처럼 가족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고 비난하여 사형에 처했다. 또한 기라 가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고케''의 지위를 잃었다. 우에스기 쓰나카쓰가 죽은 후, 우에스기의 수입은 30만 석에서 15만 석으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아사노 나가노리의 형제는 다시 지위를 회복하고 5,000 곡의 수입과 ''하타모토''의 지위를 받았다.

아코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군 충신장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3. 논란과 평가

기라 요시히사는 아사노 나가노리와의 갈등 및 아코 사건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의 영지였던 일부 지역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아사노 나가노리와의 갈등: 기라 요시히사는 ''고케''(高家)로서 의전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아사노 나가노리에게 의전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했다.[96] 갈등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 뇌물 요구설: 기라가 아사노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아사노를 괴롭혔다는 설.
  • 의례 지도 방식 차이: 기라 요시히사가 아사노 나가노리에게 의례에 대한 변경된 사항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실수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했다는 설.


에도 성에서 아사노는 기라에게 칼을 휘둘렀고, 이로 인해 할복형을 선고받고 가문이 폐지되었지만, 기라는 처벌받지 않았다. 메츠케의 심문에서 기라는 자신은 나가노리에게 원한을 살 일이 없으며, 나가노리가 난심을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코 사건에 대한 책임: 아코 사건에서 기라 요시히사는 피해자였지만,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아사노는 에도성 내에서 칼부림을 일으킨 죄로 즉시 할복을 명받았고, 아코번은 개역되었지만, 기라는 아무런 문책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에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당시 로주들이 기라에게도 책임을 물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60] 또한, 아코 로시들이 기라 저택에 쳐들어갔을 때, 막부가 기라를 옹호한 것을 비판하는 기록도 있다.[57]
지역 사회에서의 평가: 기라 요시히사의 영지였던 일부 지역에서는 그를 명군으로 칭송하는 전승이 전해진다. 이러한 전승은 미카와국 하즈 군(현 니시오시 키라 정)에 황금 제방을 축조(1686년)하고, 도미요시 신덴의 신전 개척(1688년) 및 염전 개발 등의 치적을 요시히사가 행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68]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 역사적 기록 부재: 1609년부터 1702년까지 키라 가문 3대의 사적을 기록한 『키라 가문 일기』에는 황금제 축조, 도미요시 신덴 간척, 염전 개발 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69]
  • 경제적 어려움: 키라 가문은 우에스기 가문(요네자와 번)에 막대한 빚을 지는 등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69]
  • 신전 개발의 일반성: 당시 신전 개발은 막부에서 장려하는 정책이었고, 전국 각지에서 이루어졌다.[70]
  • "아카우마" 전설의 허구성: 키라 정의 향토 완구 "아카우마"는 요시히사가 황금제 축조 현장을 붉은 말을 타고 시찰했다는 이야기에 유래한다고 하지만,[71] 요시히사가 미카와 영지를 방문한 시기와 황금제 축조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 "황금제" 명칭의 유래: 황금제라는 명칭은 요시히사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는 전승이 있지만,[72] 실제 요시히사가 축조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 테라시마 용수: 요시히사가 테라시마 용수를 개통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테라시마는 키라 영지가 아니었고, 용수 개착도 메이지 시대(1884년)에 이루어졌다.[74]
  • 염전 개발: 요시히사가 염전 개발에 관여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키라 영지에는 염전이 없었고, 키라 가문이 염전 사업을 했다는 기록도 없다.[75]


고즈케 국에서는 요시히사의 생모와 관련된 "더러운 우물" 전설이 있는데, 이는 지역 영민들의 조롱 섞인 이야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 1. 아사노 나가노리와의 갈등

아사노 나가노리가 기라 요시히사를 살해하려 했던 에도 성의 마쓰노오로카(大廊下)가 있던 자리를 표시하는 기념비


19세기 말 우타가와 쿠니테루가 그린, 에도 성의 ''마쓰노 오로카''에서 아사노 나가노리가 기라 요시히사를 공격하는 모습을 묘사한 우키요에


기라 요시히사는 ''고케''(高家)로서 의전에 관한 사항을 감독했다. 1701년, 천황의 사절 방문을 앞두고 아사노 나가노리에게 의전에 관한 사항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기라와 아사노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 뇌물 요구설: 기라가 아사노에게 뇌물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아사노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며 괴롭혔다는 설이다.[96]
  • 의례 지도 방식 차이: 요시히사는 과거 칙사 향응역을 경험한 나가노리에게 이전과 변경된 점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실수가 잦았고, 이로 인해 갈등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쇼군을 에도 성에서 만날 예정이던 날, 아사노는 와키자시를 뽑아 기라를 공격했다. 이 일로 아사노는 할복형을 선고받고 가문은 폐지되었으며, 가신들은 로닌으로 낙인 찍혔지만, 기라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메츠케 오쿠보 타다토모 등이 요시히사를 심문했지만, 나가노리를 심문한 메츠케 타몬 시게토모의 『타몬 필기』에 따르면, 요시히사는 "나는 아무런 원한을 산 기억이 없고, 완전히 나가노리가 난심(乱心)을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늙은 몸이라 무엇을 원망할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타몬 필기는 사건 후 한참 뒤에 쓰여진 것으로, 타인의 작품일 수도 있다).

3. 2. 아코 사건에 대한 책임

아코 사건에서 기라 요시히사는 아사노 나가노리에게 칼로 베이는 피해를 입었지만,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아사노에도성 내에서 칼부림을 일으킨 죄로 즉시 할복을 명받았고, 아코번은 개역(改易)되었다. 반면 기라는 당시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아무런 문책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기라의 행동이 부적절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자신의 자서전으로 여겨지는 『기슈 정사경』에서, 당시 로주(老中)들이 기라에게도 책임을 물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60]

또한, 아코 로시(赤穂浪士)들이 기라 저택에 쳐들어갔을 때, 막부가 기라의 무사로서의 지위를 박탈하고 추방했더라면 오이시도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기라를 옹호한 막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기록도 있다.[57]

3. 3. 지역 사회에서의 평가

기라 요시히사의 영지였던 일부 지역에서는 그를 명군으로 칭송하는 전승이 있다. 이러한 전승은 미카와국 하즈 군(현 니시오시 키라 정)에 황금 제방을 축조(1686년)하고, 도미요시 신덴의 신전 개척(1688년) 및 염전 개발 등의 치적을 요시히사가 행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68]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 역사적 기록 부재: 1609년부터 1702년까지 키라 가문 3대의 사적을 기록한 『키라 가문 일기』에는 황금제 축조, 도미요시 신덴 간척, 염전 개발 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69] 에도 시대의 다른 사료에서도 이러한 사업을 키라 가문이나 요시히사가 주도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 경제적 어려움: 키라 가문은 우에스기 가문(요네자와 번)에 막대한 빚을 지는 등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69] 이러한 상황에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치수 사업을 독자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요시히사가 했다고 전해지는 치적은 실제로는 후세의 영주나 막부 등이 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 신전 개발의 일반성: 당시 신전 개발은 막부에서 장려하는 정책이었고, 전국 각지에서 이루어졌다.[70] 따라서 요시히사가 신전 개발을 했다 하더라도 특별한 치적으로 보기 어렵다.

  • "아카우마" 전설의 허구성: 키라 정의 향토 완구 "아카우마"는 요시히사가 황금제 축조 현장을 붉은 말을 타고 시찰했다는 이야기에 유래한다고 한다.[71] 그러나 요시히사가 미카와 영지를 방문한 것은 생애 단 한 번뿐이었고(1677년),[69] 황금제 축조 시기(1686년)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아카우마"는 요시히사 사후 130여 년 후인 덴포 연간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전국적으로 흔한 모티브였다.

  • "황금제" 명칭의 유래: 황금제라는 명칭은 요시히사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는 전승이 있지만,[72] 실제 요시히사가 축조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1991년 발굴 조사에서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황금제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84년 세토촌 정리도이며, 그 이전 사료에는 황금제에 대한 언급이 없다.[73]

  • 테라시마 용수: 요시히사가 스미 강물을 영내로 끌어오는 테라시마 용수를 개통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테라시마는 키라 영지가 아니었고, 용수 개착도 메이지 시대(1884년)에 이루어졌다.[74]

  • 염전 개발: 요시히사가 염전 개발에 관여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키라 영지에는 염전이 없었고, 키라 가문이 염전 사업을 했다는 기록도 없다.[75] 이 주장은 NHK 대하 드라마 『고갯길의 군상』을 통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고즈케 국에서는 요시히사의 생모와 관련된 "더러운 우물" 전설이 있는데, 이는 지역 영민들의 조롱 섞인 이야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 현대의 재조명

아코 사건을 소재로 한 여러 작품에서 기라 요시히사는 주로 악역으로 묘사되었지만, 최근에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재조명하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4. 1. 역사적 재평가

기라 요시히사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최근에는 기라의 입장을 고려하여 사건을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4. 2. 대중문화

아코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주신구라(忠臣蔵)는 가부키, 분라쿠, 로쿄쿠, 고단, 라쿠고 등 다양한 형태로 공연되었다.[3] 1927년 오사라기 지로는 이 이야기를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아코 로시''(赤穂浪士)라는 제목으로 연재했고, 1929년 닛카쓰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이 영화는 1933년, 1956년, 1961년에 최소 3번 리메이크되었다.[3]

이러한 작품들에서 기라 요시히사는 대체로 악역으로 묘사되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는 작품도 있다.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루팡 3세 2기'' 113화에서는 기라의 유령이 등장하여 루팡에게 보물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3]

기라 요시히사를 연기한 배우에 관해서는 아코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 문서를 참조하면 된다.

참조

[1] 서적 Kenji Mizoguchi, a guide to references and resources https://books.google[...] G.K. Hall
[2] 서적
[3] 서적 流浪の戦国貴族 近衛前久 - 天下一統に翻弄された生涯 中公新書
[4] 문서 日本誌 元禄四年三月四日
[5] 문서 ドイツ人医師の見た吉良上野介
[6] 문서
[7] 서적 赤穂浪士―紡ぎ出される「忠臣蔵」
[8] 서적 赤穂市史
[9] 문서 米沢塩井家覚書
[10] 서적
[11] 문서 赤穂義士修養実話
[12] 서적
[13] 문서
[14] 서적 上杉家御年譜 第6巻 綱憲公
[15] 서적 赤穂事件と四十六士 (敗者の日本史) 吉川弘文館
[16] 간행물 寛政重修諸家譜
[17] 문서 旧高旧領取調帳
[18] 문서
[19] 서적 修身教科書 近代日本の教科書のあゆみ : 明治期から現代まで https://hdl.handle.n[...] サンライズ出版
[20] 문서 人事興信録45版
[21] 문서
[22] 문서 北斎 岩波書店
[23] 문서
[24] 문서
[25] 문서 日光山御社参御行列書 国公立文書館
[26] 문서
[27] 문서 大田南畝全集第十一巻 1988年・昭和63年 岩波書店刊
[28] 문서
[29] 문서 酒井家編年史料稿本 二百二十六 東大史料編纂所
[30] 문서 江赤見聞記
[31] 서적 藩制成立史の綜合研究 米沢藩
[32] 문서 6月8日付須田右近書状 上杉文書目録
[33] 서적 直江兼続と上杉鷹山
[34] 논문 米沢藩
[35] 서적 米沢市史
[36] 서적 上杉家御書集成
[37] 서적 陽和院書状 福武書店
[38] 간행물 吉良家・上杉家からみた赤穂事件 赤穂市立歴史博物館
[39] 문서 世界遺産 仙巌園/尚古集成館 案内図
[40] 뉴스 吉良上野介を慰霊 島津家当主ら菩提弔う 毎日新聞 2017-12-16
[41] 문서 山鹿素行年譜
[42] 문서 山鹿素行日記
[43] 문서 松浦家関係文書
[44] 문서 山鹿語類
[45] 문서 山鹿家系図
[46] 문서 赤穂藩
[47] 문서 甲子夜話
[48] 문서 甲子夜話
[49] 문서 津軽家中에는 같은 七将의 [[福島正則]]의 양손도 있었지만、大名福島家의 재흥을 도모하려다 방해되어、독살되었다고도 한다(『大道寺家譜』)。
[50] 문서 上杉綱憲
[51] 문서 弘前藩庁日記
[52] 문서 山鹿語類
[53] 서적 江戸老人旗本夜話
[54] 간행물 『応円満院基煕公記』百五十二(元禄十四年自正月至三月)
[55] 서적 忠臣蔵 赤穂事件・史実の肉声
[56] 서적 赤穂義士史料 雄山閣 1931
[57] 간행물 定基卿記
[58] 문서 正親町公通卿雜話
[59] 서적 徳川実紀 経済雑誌社
[60] 간행물 紀州政事鏡
[61] 서적 鹿島藩日記
[62] 서적 岡本元朝日記
[63] 문서 梅津忠昭日記
[64] 서적 安中市史
[65] 웹사이트 忠臣蔵にまつわる史跡?! 〜仙石因幡守の石祠・頌徳碑〜 https://annaka-site.[...]
[66] 웹사이트 鎧ケ淵を中心とする岡山瀬戸古絵図 https://www.city.nis[...]
[67] 서적 西尾市史
[68] 웹사이트 黄金堤(こがねづつみ) http://www.aichi-c.e[...]
[69] 서적 吉良家日記
[70] 웹사이트 町人の進めた干拓 http://suido-ishizue[...]
[71] 웹사이트 吉良の赤馬 https://www.okashin.[...]
[72] 서적 瀬戸村整埋図 1885
[73] 간행물 黄金堤発掘調査報告 1991-03
[74] 서적 <元禄赤穂事件と江戸時代>悪評まみれの名君 吉良上野介義央
[75] 웹사이트 塩と歴史 https://www.shiotoku[...]
[76] 문서 赤穂城下町跡発掘調査報告書 赤穂市教育委員会 2005
[77] 서적 『赤穂浪士 紡ぎ出される「忠臣蔵」』 삼省堂 1999
[78] 웹사이트 西尾市公式web「西尾市の文化財」西尾市の文化財一覧 2011-11-25
[79] 문서 「本所松坂町公園」現地説明
[80] 문서 上杉家「須田右近書状」ほか
[81] 문서 うち中島伊勢([[葛飾北斎]]の養父)が一部を使用(飯島虚心『葛飾北斎伝』)
[82] 문서 中央義士会「忠臣蔵史蹟事典 東京都版」 五月書房 2008
[83] 문서 現在の氷川神社は一本松坂を南下した[[アルゼンチン共和国]]領事館向かいに位置する
[84] 문서 『御府内場末往還其外沿革圖書』元禄七年(皇紀二千六百年記念「麻布区史」)
[85] 문서 境内「花岳寺由緒案内板」・一般財団法人「西尾観光協会」西尾観光公式webなど
[86] 문서 宮腰松子『吉良流の研究』("Résumé " A Study on Kira-Ryu ")22頁
[87] 문서 「国宝 上杉家文書」(国会図書館・上杉博物館など)
[88] 웹사이트 「国指定文化財データベース」(文化庁)
[89] 서적 鈴木悦道『新版 吉良上野介』 中日新聞社 1995
[90] 문서 「吉良流四巻書」(東京大学総合図書館所蔵)
[91] 문서 문화13年(1816年)、西尾市(吉良町)教育委員会所蔵 1816
[92] 문서 宮腰松子『吉良流の研究』26頁
[93] 문서 初代・高岡孝信は和歌山時代の浅野家臣
[94] 문서 「吉良流旧法目録抄解」(三原図書館所蔵)
[95] 문서 同『新版 吉良上野介』巻頭カラー写真5頁
[96] 서적 忠臣蔵の収支決算
[97] 서적 横から見た赤穂義士 叢文閣
[98] 간행물 江戸前期のある旗本の財政状況についての考察 : 幕府高家吉良義央の場合 http://www.okuraken.[...] 大倉精神文化研究所
[99] 서적 鹿児島県史料 旧記雑録追録1 鹿児島県
[100] 서적 赤穂義挙録. 上
[101] 뉴스 朝日新聞 朝日新聞 2013-12-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