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크 막 둥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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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리크 막 둥갈은 9세기에 존재했던 인물로,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재위 기간과 통치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이름은 성 키리쿠스와 관련이 있으며, 에오카이드와 함께 공동 통치했거나, 에오카이드의 후견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리크는 "행운의 아들"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전설에서는 픽트족의 억압으로부터 스코틀랜드 교회를 해방시키고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대부분을 정복하여 "그레고리 대왕"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그의 왕위 계승과 관련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며, 역사학자들은 기리크의 출신과 에오카이드와의 관계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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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크 막 둥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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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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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픽트인의 왕 |
재위 | 878년–889년 |
전임자 | 아드 막 키나다 |
후임자 | 돔날 2세 막 카우산틴 |
별칭 | 행운아왕 |
출생일 | 기원후 832년경 |
사망일 | 기원후 890년경 |
사망 장소 | 던던, 스코틀랜드 |
아버지 | 둥갈 |
원래 이름 | Giric mac Dúngail |
게일어 이름 | Griogair mac Dhunghail |
2. 기리크의 이름과 기원
기리크의 이름은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당시 어머니와 함께 순교한 어린 아이인 성 키리쿠스와 관련이 있다. 《스코틀랜드 왕 연대기》에 따르면 성 키리쿠스는 기리크의 수호성인이었는데, 이는 그의 이름이 성인의 라틴어 이름인 Ciricum과 동음이의어이기 때문이며, 성 키리쿠스에게 헌정된 최초의 교회가 기리크의 통치 기간 동안 에클스그레이그(현재의 세인트 사이러스)라는 애버딘셔 지역에 세워졌기 때문이다.[3]
2. 1. 성 키리아쿠스와의 관련성
기리크의 이름은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당시 어머니와 함께 순교한 어린 아이인 성 키리쿠스와 관련이 있다. 《스코틀랜드 왕 연대기》에 따르면 성 키리쿠스는 기리크의 수호성인이었는데, 이는 그의 이름이 성인의 라틴어 이름인 Ciricum과 동음이의어일 뿐만 아니라, 성 키리쿠스에게 헌정된 최초의 교회가 기리크의 통치 기간 동안 에클스그레이그(현재의 세인트 사이러스)라는 애버딘셔의 지역에 세워졌기 때문이다.[3] 축일은 6월 16일이며, 885년 그 날(또는 그 무렵)에 일식이 있었는데, 이는 일식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왕국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기리크와 에오차이드의 왕권과 관련이 있다.[3]3. 기리크와 에오카이드의 관계
기리크와 에오차이드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는데, 모든 기록에 따르면 기리크가 에오차이드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라틴어로 작성된 『알바 왕국 연대기』는 기리크와 에오차이드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alumnus ordinatorque"라는 구절을 사용했다.[4] 번역가 T. H. 윅스는 이 구절을 영어로 "교사이자 재상"으로 번역했지만, 같은 부분에서 "alumnus"를 "양자"로 번역하기도 했다.[4]
대중 역사서와 웹사이트에서는 이 둘을 "사촌" 또는 "이종 사촌"이라고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5] 그러나 기릭의 가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촌 관계는 추측에 불과하다. 에오차이드의 아버지 룬은 "브리튼인의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6] 기릭의 아버지 둥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는 그(둥갈)가 왕족의 혈통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아마도 대중 웹사이트 ''Undiscovered Scotland''의 작가는 기릭을 에오차이드의 "다소 애매한 친족"이라고 칭하며 가장 적절한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다.[7]
두 학자는 혈연관계가 아닌 정치적 관점에서 이 둘을 정의했다. A. 윅스 해설자는 "아마도 기릭은 왕족이 아니었기에 에오차이드를 허수아비로 이용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8] 1904년,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인 존 리스 경은 "기릭이 에오차이드와 맺었을 실제 관계는 픽트족 출신의 비켈트족 왕으로서, 에오차이드는 그에게 어느 정도 복종하며 브리톤인의 포르트렌을 다스리는 관계였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9] 알려진 사실은 878년에 기릭이 에오차이드의 삼촌인 아에드를 아마도 스털링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누리임 마을에서 "전투에서" 죽였다는 것이다. 그 후 기릭과 에오차이드는 그들의 관계가 어떠했든 11년 동안 공동으로 통치했다.[10]
3. 1. 양자와 후견인 관계
기릭과 에오차이드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는데, 모든 기록에 따르면 기릭이 에오차이드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라틴어로 작성된 『알바 왕국 연대기』는 기릭과 에오차이드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alumnus ordinatorque"라는 구절을 사용했다. 번역가 T. H. 윅스는 이 구절을 영어로 "교사이자 재상"으로 번역했지만, 같은 부분에서 "alumnus"를 "양자"로 번역하여 ''Eochodius, cum alum(p)no suo, expulsus est nunc de regno''"를 "에오차이드는 그의 '양자'와 함께 왕국에서 쫓겨났다"로 번역했다.[4]대중 역사서와 웹사이트에서는 이 둘을 "사촌" 또는 "이종 사촌"이라고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5]
그러나 기릭의 가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촌 관계는 추측에 불과하다. 에오차이드의 아버지 룬은 "브리튼인의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6] 기릭의 아버지 둥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이는 그(둥갈)가 왕족의 혈통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아마도 대중 웹사이트 ''Undiscovered Scotland''의 작가는 기릭을 에오차이드의 "다소 애매한 친족"이라고 칭하며 가장 적절한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다.[7]
두 학자는 혈연관계가 아닌 정치적 관점에서 이 둘을 정의했다. A. 윅스 해설자는 "아마도 기릭은 왕족이 아니었기에 에오차이드를 허수아비로 이용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8] 1904년,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인 존 리스 경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여 "기릭이 에오차이드와 맺었을 실제 관계는 픽트족 출신의 비켈트족 왕으로서, 에오차이드는 그에게 어느 정도 복종하며 브리톤인의 포르트렌을 다스리는 관계였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9] 알려진 사실은 878년에 기릭이 에오차이드의 삼촌인 아에드를 아마도 스털링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누리임 마을에서 "전투에서" 죽였다는 것이다. 그 후 기릭과 에오차이드는 그들의 관계가 어떠했든 11년 동안 공동으로 통치했다.[10]
3. 2. 친족 관계에 대한 논쟁
기릭과 에오차이드의 관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는데, 모든 기록에 따르면 기릭이 에오차이드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라틴어로 작성된 『알바 왕국 연대기』는 기릭과 에오차이드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alumnus ordinatorque"라는 구절을 사용했다. 번역가 T. H. 윅스는 이 구절을 영어로 "교사이자 재상"으로 번역했지만, 같은 부분에서 "alumnus"를 "양자"로 번역하여 ''"Eochodius, cum alum(p)no suo, expulsus est nunc de regno"''를 "에오차이드는 그의 '양자'와 함께 왕국에서 쫓겨났다"로 번역했다.[4]대중 역사서와 웹사이트에서는 이 둘을 "사촌" 또는 "이종 사촌"이라고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5]
그러나 기릭의 가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촌 관계는 추측에 불과하다. 에오차이드의 아버지 룬은 "브리튼인의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6] 기릭의 아버지 둥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이는 그(둥갈)가 왕족의 혈통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아마도 대중 웹사이트 ''Undiscovered Scotland''의 작가는 기릭을 에오차이드의 "다소 애매한 친족"이라고 칭하며 가장 적절한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다.[7]
두 학자는 혈연관계가 아닌 정치적 관점에서 이 둘을 정의했다. A. 윅스 해설자는 "아마도 기릭은 왕족이 아니었기에 에오차이드를 허수아비로 이용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8] 1904년,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인 존 리스 경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여 "기릭이 에오차이드와 맺었을 실제 관계는 픽트족 출신의 비켈트족 왕으로서, 에오차이드는 그에게 어느 정도 복종하며 브리톤인의 포르트렌을 다스리는 관계였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9] 알려진 사실은 878년에 기릭이 에오차이드의 삼촌인 아에드를 아마도 스털링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누리임 마을에서 "전투에서" 죽였다는 것이다. 그 후 기릭과 에오차이드는 그들의 관계가 어떠했든 11년 동안 공동으로 통치했다.[10]
3. 3. 정치적 관계
기릭과 에오차이드의 관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는데, 모든 기록에 따르면 기릭이 에오차이드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라틴어로 작성된 『알바 왕국 연대기』는 기릭과 에오차이드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alumnus ordinatorque"라는 구절을 사용했다. 번역가 T. H. 윅스는 이 구절을 영어로 "교사이자 재상"으로 번역했지만, 같은 부분에서 "alumnus"를 "양자"로 번역하여 "''Eochodius, cum alum(p)no suo, expulsus est nunc de regno''"를 "에오차이드는 그의 '양자'와 함께 왕국에서 쫓겨났다"로 번역했다.[4]대중 역사서와 웹사이트에서는 이 둘을 "사촌" 또는 "이종 사촌"이라고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5]
그러나 기릭의 가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촌 관계는 추측에 불과하다. 에오차이드의 아버지 룬은 "브리튼인의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6] 기릭의 아버지 둥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이는 그(둥갈)가 왕족의 혈통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아마도 대중 웹사이트 ''Undiscovered Scotland''의 작가는 기릭을 에오차이드의 "다소 애매한 친족"이라고 칭하며 가장 적절한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다.[7]
두 학자는 혈연관계가 아닌 정치적 관점에서 이 둘을 정의했다. A. 윅스 해설자는 "아마도 기릭은 왕족이 아니었기에 에오차이드를 허수아비로 이용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8] 1904년,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인 존 리스 경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여 "기릭이 에오차이드와 맺었을 실제 관계는 픽트족 출신의 비켈트족 왕으로서, 에오차이드는 그에게 어느 정도 복종하며 브리톤인의 포르트렌을 다스리는 관계였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9] 알려진 사실은 878년에 기릭이 에오차이드의 삼촌인 아에드를 아마도 스털링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누리임 마을에서 "전투에서" 죽였다는 것이다. 그 후 기릭과 에오차이드는 그들의 관계가 어떠했든 11년 동안 공동으로 통치했다.[10]
4. "행운의 아들" (Mac Rath)
''베르찬의 예언''에서는 기리크를 "행운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마크 라스''(Mac Rath)로 부른다.[14]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 나오는 기리크에 대한 내용은 일부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브리튼족(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이자 케네스의 딸의 손자인 룬의 아들 에오카이드가 11년 동안 통치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에오카이드의 양아버지이자 후견인이었던 기리크가 이 시기에 통치했다고 말한다.
[에오카이드]의 두 번째 해에 아에드, 니알의 아들이 죽었고, 그의 아홉 번째 해, [성] 키리쿠스의 바로 그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에오카이드는 그의 양아버지와 함께 이제 왕국에서 추방되었다.[15]
여기서 케네스는 케네스 맥알핀을, 아에드, 니알의 아들은 아에드 핀들리아스를 가리킨다. 아에드 핀들리아스는 879년 11월 20일에 사망했으며, 성 키루스의 날은 6월 16일이었고, 885년 그날에 일식이 있었다.[16]
4. 1. 《베르찬의 예언》에서의 묘사
''베르찬의 예언''은 11세기 운문으로 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왕들의 역사를 예언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예언은 왕들을 별칭으로만 언급하고 이름으로는 언급하지 않아 다른 자료와의 연관이 쉽지 않다. 이 예언은 기리크를 별칭인 "행운의 아들"(''마크 라스'', Mac Rath)로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14]
5. 그레고리 대왕 (Gregory the Great)
12세기 무렵 기리크는 픽트족의 억압으로부터 스코틀랜드 교회를 해방시킨 인물로 전설적인 지위를 얻었고,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대부분을 정복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 결과 '''그레고리 대왕'''으로 알려졌다. 이 이야기는 앤드루 오브 윈턴의 《스코틀랜드 연대기》에 삽입된 《알바 왕들의 연대기》의 변형본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기리크(또는 그리그)는 둥갈의 아들 "맥두갈"로 불린다.[1]
5. 1. 전설적인 업적
12세기 무렵 기리크는 픽트족의 억압으로부터 스코틀랜드 교회를 해방시킨 인물로 전설적인 지위를 얻었고, 놀랍게도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대부분을 정복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 결과 기리크는 '''그레고리 대왕'''으로 알려졌다. 이 이야기는 앤드루 오브 윈턴의 《스코틀랜드 연대기》에 삽입된 《알바 왕들의 연대기》의 변형본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기리크, 또는 그리그는 둥갈의 아들 "맥두갈"로 불린다.[1]전형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D" 목록에는 기리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1]
> 기리크, 둥갈의 아들은 12년 동안 통치했다. 그는 던던에서 죽어 아이오나에 묻혔다. 그는 아일랜드 전체와 거의 [모든] 잉글랜드를 정복했다. 그는 픽트족의 관습과 방식에 따라 그 당시까지 종속 상태에 있던 스코틀랜드 교회에 자유를 부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1]
기리크의 정복은 일부 버전에서 아일랜드(히베르니아)가 아닌 버니시아로 나타난다. 윌리엄 포브스 스킨은 이것과 킹 할프단의 죽음 직후, 노섬브리아인과 노르드인이 구스프리드 왕 아래 연합하여 스코틀랜드의 침략을 격퇴했다는 《히스토리아 데 산토 쿠스베르토》의 설명 간의 연관성을 보았다.[1]
이 설명은 포플턴 필사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D", "F", "I", "K", "N"으로 알려진 목록에는 멜로즈 연대기에 의해 복사된 다른 버전이 포함되어 있다.[1]
5. 2. 역사적 사실과의 불일치
12세기 무렵 기리크는 픽트족의 억압으로부터 스코틀랜드 교회를 해방시킨 인물로 전설적인 지위를 얻었고,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대부분을 정복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 결과 기리크는 '''그레고리 대왕'''으로 알려졌다. 이 이야기는 앤드루 오브 윈턴의 《스코틀랜드 연대기》에 삽입된 《알바 왕들의 연대기》의 변형본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기리크(또는 그리그)는 둥갈의 아들 "맥두갈"로 불린다.[1]"D" 목록에는 기리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 기리크, 둥갈의 아들은 12년 동안 통치했다. 그는 던던에서 죽어 아이오나에 묻혔다. 그는 아일랜드 전체와 거의 [모든] 잉글랜드를 정복했다. 그는 픽트족의 관습과 방식에 따라 그 당시까지 종속 상태에 있던 스코틀랜드 교회에 자유를 부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1]
기리크의 정복은 일부 버전에서 아일랜드(히베르니아)가 아닌 버니시아로 나타난다. 윌리엄 포브스 스킨은 이것과 킹 할프단의 죽음 직후, 노섬브리아인과 노르드인이 구스프리드 왕 아래 연합하여 스코틀랜드의 침략을 격퇴했다는 《히스토리아 데 산토 쿠스베르토》의 설명 간의 연관성을 보았다.[1]
이 설명은 포플턴 필사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D", "F", "I", "K", "N"으로 알려진 목록에는 멜로즈 연대기에 의해 복사된 다른 버전이 포함되어 있다.[1]
6. "Ut regem nostrum Girich"
최근 "던켈드 연도"에 대한 논의에서, 이는 주로 후기 중세와 근대 초기 시대의 독일 스코틀랜드 수도원에서 조작된 것이지만, 토마스 오웬 클랜시는 수정 및 추가된 내용 속에 진정한 9세기 연도가 존재한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기리크의 진실성과 왕권에 대한 이 연도의 중요성은 왕과 군대를 위한 기도문에 담겨 있으며, 거기에는 기리크라는 왕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21]
6. 1. 기도문의 내용
토마스 오웬 클랜시는 "던켈드 연도"에 수정 및 추가된 내용 속에 진정한 9세기 연도가 존재한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기리크의 진실성과 왕권에 대한 이 연도의 중요성은 왕과 군대를 위한 기도문에 담겨 있으며, 거기에는 기리크라는 왕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21]> 우리의 왕 기리크와 그의 군대를 모든 적의 음모로부터 보호하고 방어하시기를, 저희는 당신께 간구하오니,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21]
7. 기리크의 왕위에 대한 논쟁
아치 던컨은 기리크와 에오카이드의 공동 통치는 허구이며, 기리크만이 픽트인의 왕이었고, 케네스 맥알핀의 딸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던컨은 기리크가 에오카이드의 후견인(alumpnus)이었다는 보고는 삼촌(auunculus)을 잘못 읽은 것이라고 주장한다.[1] A. P. 스미스는 기리크가 케네스 맥알핀의 조카, 즉 그의 형제 도널드 맥알핀의 아들이라고 제안했는데, 이는 필사자의 오류로 보인다.[1] 이 기록은 또한 알려지지 않은 카우산틴이 도므날(혹은 둥갈)의 아들이자 왕이었다고 명시한다.[1] 벤자민 허드슨은 기리크가 케네스 맥알핀과 그의 친족 케넬 나가브레인 왕조의 일원이 아니라 북부의 케넬 로어른 - 모레이 가문의 후손이며 기리크의 형제 카우산틴의 존재를 받아들였다고 제안했다.[1]
7. 1. 아치 던컨의 주장
아치 던컨은 기리크와 에오카이드의 공동 통치는 허구이며, 기리크만이 픽트인의 왕이었고, 그는 케네스 맥알핀의 딸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던컨은 기리크가 에오카이드의 후견인(alumpnus)이었다는 보고는 삼촌(auunculus)을 잘못 읽은 것이라고 주장한다.[1] A. P. 스미스는 기리크가 케네스 맥알핀의 조카, 즉 그의 형제 도널드 맥알핀의 아들이라고 제안했는데, 이는 필사자의 오류로 보인다.[1] 이 기록은 알려지지 않은 카우산틴이 도므날(혹은 둥갈)의 아들이자 왕이었다고 명시한다.[1] 벤자민 허드슨은 기리크가 케네스 맥알핀과 그의 친족의 케넬 나가브레인 왕조의 일원이 아니라 북부의 케넬 로어른 - 모레이 가문의 후손이며 기리크의 형제 카우산틴의 존재를 받아들였다고 제안했다.[1]7. 2. A. P. 스미스의 제안
A. P. 스미스는 기리크가 케네스 막 알핀의 조카, 즉 그의 형제 도널드 맥알핀의 아들이라고 제안했는데, 이는 필사자의 오류로 보인다.[1] 이 기록은 또한 알려지지 않은 카우산틴이 도므날(혹은 둥갈)의 아들이자 왕이었다고 명시한다.[1]7. 3. 벤자민 허드슨의 가설
아치 던컨은 기리크와 에오카이드의 공동 통치는 허구이며, 기리크만이 픽트인의 왕이었고, 그가 케네스 맥알핀의 딸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에오카이드의 후견인(alumpnus)이었다는 보고는 삼촌(auunculus)을 잘못 읽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A. P. 스미스는 기리크가 케네스 맥알핀의 조카, 즉 그의 형제 도널드 맥알핀의 아들이라고 제안했는데, 이는 필사자의 오류로 보인다. 이 기록은 또한 알려지지 않은 카우산틴이 도므날(혹은 둥갈)의 아들이자 왕이었다고 명시한다. 벤자민 허드슨은 기리크가 케네스 맥알핀과 그의 친족 케넬 나가브레인 왕조의 일원이 아니라 북부의 케넬 로어른 - 모레이 가문의 후손이며 기리크의 형제 카우산틴의 존재를 받아들였다고 제안한다.[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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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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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arly Sources of Scottish History
https://archive.org/[...]
Oliver & Boyd
201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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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M. General Register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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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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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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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eltic Britain
https://books.google[...]
Society for the Preservation of Christian 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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