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토나리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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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토나리 친왕은 일본 황족으로, 후시미노미야 쿠니이에 친왕의 아들이다. 1860년 고메이 천황의 잠재적 황위 계승자로 입적되었으며, 1866년 불교 승려가 되어 쇼고인에서 봉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환속하여 쇼고인노미야를 계승했지만, 1870년 기타시라카와노미야로 개칭되었다. 1872년 1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기타시라카와노미야는 그의 형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이 상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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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토나리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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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토나리 친왕 |
원어 이름 | 北白川宮智成親王 |
로마자 표기 | Kitashirakawa-no-miya Satonari-shinnō |
별칭 | 야스노미야 (泰宮) |
궁호 | 쇼코인노미야 (照高院宮) 쇼고인노미야 (聖護院宮) 기타시라카와노미야 (北白川宮) |
휘 | 사토나리 (智成) |
법명 | 신뇨 (信仁) |
신위 | 친왕 입도친왕 친왕 |
경칭 | 전하 |
아버지 |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 |
어머니 | 이타미 요시코 |
출생일 | 안세이 3년 6월 21일 (1856년 7월 22일) |
출생지 | 교토, 일본 |
사망일 | 메이지 5년 1월 2일 (1872년 2월 10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매장일 | 알 수 없음 |
매장지 | 알 수 없음 |
칭호 | 태궁 (유칭) |
가문/작위 | 기타시라카와노미야 |
계보 |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13번째 아들 스고 천황의 남계 16세손 레이겐 천황의 여계 6세손 |
작위 | 3품 친왕 |
기타 정보 | 초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
2. 생애
후시미노미야 쿠니이에 친왕의 열세 번째 아들로 태어나, 만엔 원년(1860년) 고메이 천황의 유자(猶子)가 되었다. 처음에는 쇼고인 몬제키의 후계자 후보로 지명되어 게이오 2년(1866년) 출가하였으나, 게이오 4년(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환속하여 '''쇼고인노미야'''(照高院宮)를 칭하고 쇼고인노미야를 계승하였다. 메이지 3년(1870년)에는 궁호를 기타시라카와노미야로 바꾸었다. 그러나 메이지 5년(1872년) 1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고, 후사가 없어 유언에 따라 이복형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이 기타시라카와노미야를 상속했다.
2. 1. 어린 시절 및 출가
교토에서 태어났으며, 후시미노미야 20대 당주이자 황실 분가 중 가장 오래된 후시미노미야 쿠니이에 친왕(1802–1872)의 열세 번째 아들이었다. 후시미노미야는 황실 적통의 후사가 없을 경우 천황 계승자를 배출할 수 있는 네 개의 왕가(세습친왕가) 중 하나였다.만엔 원년(1860년), 고메이 천황의 유자(猶子, 양자와 비슷하지만 후견인 정도의 관계)가 되어 잠재적 황위 계승자로 여겨졌으며, 쇼고인 몬제키 오진 법친왕(후의 쇼고인노미야 요시코토 친왕)의 부제(附弟, 후계자 후보)가 되었다.
게이오 2년(1866년) 2월, 친왕 선하를 받아 사토나리(智成)라는 이름을 받았다. 당시 일본은 아직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 하에 있었기에, 같은 달 쇼고인에 들어가 출가하여 신진 입도친왕(信仁入道親王)이라 칭하고 불교 승려가 되었다.
게이오 4년(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자 '쇼고인노미야(照高院宮)'를 칭하고 환속하여 다시 사토나리 친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쇼고인노미야를 계승했다. 메이지 2년(1869년)에는 3품에 서위되었다. 메이지 3년(1870년), 궁호가 옛 몬제키 시절의 칭호와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타시라카와노미야로 개칭되었다.
메이지 5년(1872년) 정월, 1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후사가 없었기에 그의 유언에 따라 이복형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이 기타시라카와노미야를 상속했다.
2. 2. 환속과 가문 계승
게이오 4년(1868년), 메이지 유신 시기에 '''쇼고인노미야'''(照高院宮)를 칭하고 환속하여 다시 사토나리 친왕이라 칭했다. 이후 쇼고인노미야를 계승했다. 메이지 2년(1869년)에는 3품에 서위되었다. 메이지 3년(1870년), 기존 궁호가 몬제키(門跡) 시절과 구별이 어렵다는 이유로 기타시라카와노미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5년(1872년) 정월, 1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이복형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이 기타시라카와노미야를 상속했다.2. 3. 이른 죽음
메이지 3년(1870년), 기존에 사용하던 궁호 쇼고인노미야가 옛 몬제키(門跡, 황족이나 귀족이 주지로 있는 특정 사찰)와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궁호가 기타시라카와노미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5년(1872년) 정월, 사토나리 친왕은 17세의 젊은 나이로 교토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후손을 남기지 못했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이복형인 요시히사 친왕이 기타시라카와노미야를 상속받았다.3. 가계
- 아버지 : 후시미노미야 쿠니이에 친왕
- 적모 : 타카츠카사 히로코 (관백 타카츠카사 마사히로의 딸)
- 생모 : 이타미 요시코 (가녀방)
- 양자(후계자) :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이복 형)
사토나리 친왕은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20대 당주인 후시미노미야 쿠니이에 친왕의 열세 번째 아들로 교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쿠니이에 친왕이 속한 후시미노미야는 황실의 적통이 후사를 낳지 못할 경우 천황의 계승자를 배출할 수 있는 4개의 세습친왕가 중 가장 오래된 가문이었다.
사토나리 친왕은 후손 없이 사망하였고, 이에 따라 기타시라카와노미야의 칭호는 그의 이복 형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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