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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시라카와 후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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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타시라카와 후사코는 메이지 천황의 딸로 1890년에 태어나 1974년에 사망했다. 1909년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리히사 왕과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었으나, 1923년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1940년에는 장남이 중일 전쟁 중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1947년 황실 전범에 따라 황적에서 이탈한 후에도 여성 최초의 이세 신궁 제주를 맡았으며, 신사 본청 총재를 역임하는 등 꿋꿋하게 삶을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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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시라카와 후사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22년 기타시라카와 후사코 공주. 오귀스트 레옹의 오토크롬 초상화
1922년 오귀스트 레옹이 오토크롬 기법으로 촬영한 기타시라카와 후사코 공주 초상화
본명기타시라카와 후사코 (北白川房子)
일본어 표기北白川 房子 (きたしらかわ ふさこ)
옛 칭호가네노미야 후사코 내친왕 (周宮房子内親王)
로마자 표기Kane-no-miya Fusako Naishinnō
출생1890년 1월 28일
출생지일본 제국 도쿄 시
사망1974년 8월 11일
사망지일본 도쿄
배우자기타시라카와 나루히사 친왕 (1909년 4월 29일 결혼, 1923년 4월 1일 사별)
자녀기타시라카와 나가히사
기타시라카와 미네코
기타시라카와 사와코
기타시라카와 다에코
친척일본 황실
아버지메이지 천황
어머니소노 사치코
묘소도쿄도 분쿄구, 도요시마가오카 묘지
어표거북
칭호내친왕 → 왕비 내친왕 → (황적 이탈)
경칭전하 → (황적 이탈)
칭호
일본어周宮房子内親王 (かねのみや ふさこ ないしんのう)
작위
가문기타시라카와노미야 비
훈장
훈등훈일등 보관장

2. 생애

후사코 여왕(왼쪽)과 쓰네노미야 마사코 내친왕(오른쪽). 육군 여성 군복 차림.


기타시라카와 후사코는 1890년 1월 28일, 메이지 천황과 그의 측실 소노 사치코 사이에서 일곱 번째 자녀이자 딸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궁호는 周宮|가네노미야일본어였다.

1909년 4월 29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리히사 왕과 결혼하여[2]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결혼 생활 중 1917년에는 남편과 함께 대만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3년 프랑스 유학 중 남편 나리히사 왕이 자동차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본인도 복잡 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입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1940년에는 외아들인 나가히사 왕마저 중일 전쟁중국 장자커우에서의 훈련 중 사고로 사망(일본 측에서는 순직으로 처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인 1947년 10월 14일, GHQ의 지시에 따른 황실전범 개정으로 인해 황족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어 '''北白川 房子|기타시라카와 후사코일본어'''로 불리게 되었다. 황적 이탈 후에는 여성 최초로 이세 신궁의 제주(祭主) 및 신사 본청 총재를 역임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여러 개인적인 비극과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삶을 이어간 후사코는 1974년 8월 11일, 노쇠로 인해 궁내청 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이는 일찍 사망한 다른 형제자매들과 달리, 여동생 히가시쿠니 사토코와 함께 메이지 천황의 자녀 중 비교적 장수한 사례에 속한다.

2. 1. 어린 시절



1890년(메이지 23년) 1월 28일, 메이지 천황소노 사치코의 일곱 번째 자녀이자 딸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궁호는 周宮|가네노미야일본어였다.

바로 위의 언니인 쓰네노미야 마사코 내친왕(훗날 다케다노미야 쓰네히사 왕비)과 함께 다카나와 어전에서 양육되었다.

1904년(메이지 37년), 러일 전쟁 당시에는 언니 마사코와 함께 전사자의 이름, 사망지 등을 직접 써서 명부를 만들고 어전의 한 방에 모셨다. 이 친필 명부는 훗날 야스쿠니 신사에 봉납되었다.

2. 2. 결혼과 가족

1909년 (메이지 42년) 4월 29일, 기타시라카와 요시히사 친왕과 토미코 공주의 아들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리히사 왕과 결혼했다.[2] 결혼 전날인 4월 28일에는 훈1등 보관장을 수여받았다.[3] 남편 나리히사 왕과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다.

이름생몰년비고
기타시라카와 나가히사 왕|北白川宮永久王|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 오일본어1910년 2월 19일 – 1940년 9월 4일
기타시라카와 미네코 여왕|美年子女王|미네코 조오일본어1911년 5월 6일 – 1970년 3월 10일타치바나 타네카츠 자작과 결혼
기타시라카와 사와코 여왕|佐和子女王|사와코 조오일본어1913년 10월 21일 – 2001년 7월 1일히가시조노 모토후미 자작과 결혼
기타시라카와 타에코 여왕|多惠子女王|타에코 조오일본어1920년 3월 15일 – 1954년 11월 5일도쿠가와 구니유키의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히사와 결혼



1917년 (다이쇼 6년) 가을, 남편 나리히사 왕과 함께 대만을 방문했다. 10월 26일에는 나리히사 왕의 아버지이자 청일 전쟁 중 타이난에서 사망한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을 기리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어유적소를 참배했고,[4] 10월 28일11월 2일에는 타이베이의 타이완 신사를 참배했다.

1923년 (다이쇼 12년), 부부가 함께 프랑스 유학 중 나리히사 왕이 운전하던 차가 사고를 일으켜 남편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후사코 본인도 복잡 골절의 큰 부상을 입어 이후 다리가 불편해졌다.

1940년 (쇼와 15년) 9월 4일, 외아들인 나가히사 왕중일 전쟁중국 장자커우에서의 훈련 중 사고로 사망(일본 측에서는 순직으로 처리)하는 비극을 겪었다.

1947년 (쇼와 22년) 10월 14일, 일본 점령 하에 시행된 황실 전범 개정에 따라 황족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어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 房子|기타시라카와 후사코일본어)로 불리게 되었다. 이 신적강하 조치로 기타시라카와 가문은 다른 여러 방계 황족 가문들과 함께 특권을 잃었다. 황적 이탈 후에는 여성 최초의 진구 제사 및 신사 본청 총재를 역임했다.

1974년 (쇼와 49년) 8월 11일, 노쇠로 인해 궁내청 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2. 3. 남편과 아들의 죽음

1923년 (다이쇼 12년), 남편 기타시라카와 나리히사 왕과 함께 프랑스 유학 중, 나리히사 왕이 직접 운전하던 자동차가 사고를 일으켰다. 이 사고로 나리히사 왕은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후사코 역시 복잡 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으로 인해 후사코는 이후 다리에 불편을 겪게 되었다.

1940년 (쇼와 15년) 9월 4일, 장남인 나가히사 왕이 중일 전쟁에 참전 중 몽골 장자커우 근처에서 군사 훈련 중 사고로 사망하는(사고사) 비극을 겪었다. 나가히사 왕의 시신이 도쿄의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후사코는 슬픔 속에서도 "오랫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며 아들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후사코의 요청에 따라 나가히사 왕의 장례식에서는 그의 시신이 포차(砲車, 포를 끄는 수레)에 실려 다카나와의 저택에서 도시마가오카 묘지까지 운구되었다.

2. 4. 황적 이탈 이후

1947년 10월 14일, 일본 점령 하에서 시행된 황실전범 제11조 1항에 따라 다이쇼 천황의 직계 후손을 제외한 방계 황족들은 황족 신분과 특권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이로써 후사코는 황적에서 이탈하여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 房子)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전후 혼란기에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셋방살이를 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는 구 황족 가문 중 몰락을 피한 드문 사례로 꼽힌다. 메이지 천황의 딸로 태어나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 모습 때문에 황실 관계자들은 그녀를 황족 시절처럼 "후사코 대비" 또는 "대비님"이라 부르며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황적 이탈 후에는 여성 최초로 이세 신궁의 제주(祭主)가 되었으며, 신사 본청 총재도 역임했다. 또한, 구 사격(社格)이 향사(郷社)였던 다이코쿠다니 이나리 신사의 본전 신축 시에는 이례적으로 친필 사명축과 와카 2수를 봉납하기도 했다[5].

1974년 8월 11일, 노환으로 궁내청 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메이지 천황의 자녀 대부분이 일찍 사망하거나 성인이 된 후에도 40~50대에 사망한 것과 달리, 후사코는 황적 이탈 후에도 장수하여 여동생 히가시쿠니 사토코와 함께 메이지 천황의 자녀 중 가장 오래 생존한 인물이 되었다.

3. 가계도

'''기타시라카와 후사코의 직계 조상'''[1]
1대2대 (부모)3대 (조부모)4대 (증조부모)5대 (고조부모)
1. 가네 후사코 여왕2. 메이지 천황4. 고메이 천황8. 닌코 천황16. 고카쿠 천황
17. 칸슈지 타다코
9. 오기마치 나오코18. 오기마치 사네미츠
19. 요츠지 치에코
5. 나카야마 요시코10. 나카야마 타다야스 후작20. 나카야마 타다요리
21. 오기마치산조 츠나코
11. 마츠라 아이코22. 마츠라 세이잔
23. 모리
3. 소노 사치코6. 소노 모토사치 백작12. 소노 모토시게24. 나카야마 타다오사
25. 산조 나라키미
13. 마츠라 키코26. 마츠라 세이잔
27. 모리
7. 코이데14. 코이데 후사아키28. 코이데 후사타케
29. 와케베
15. 마츠다이라 미네마츠30. 마츠다이라 야스토
31. 마츠다이라


  • '''아버지''': 메이지 천황 (제122대 천황)
  • '''어머니''': 소노 사치코 (메이지 천황의 측실)
  • '''형제자매''' (메이지 천황의 자녀 중 성년까지 생존한 인물):
  • * 다이쇼 천황 (요시히토 친왕, 제123대 천황) - 이복 오빠
  • * 마사코 내친왕 (쓰네노미야) - 동복 언니
  • * 노부코 내친왕 (후미노미야) - 동복 여동생
  • * 도시코 내친왕 (야스노미야) - 동복 여동생
  • '''배우자''':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리히사 왕 (1887년 ~ 1923년)
  • '''자녀''':
  • * 장남: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 왕 (1910년 ~ 1940년)
  • * 장녀: 미네코 여왕 (미네코, 1911년 ~ 1970년) - 다치바나 다네카쓰 백작 부인
  • * 차녀: 사와코 여왕 (사와코, 1913년 ~ 2001년) - 히가시조노 모토후미 자작 부인
  • * 3녀: 다에코 여왕 (다에코, 1920년 ~ 2005년) - 도쿠가와 요시히사 백작 부인

4. 영전

5. 평가

메이지 천황의 딸로 태어났으나, 남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리히사 왕과 장남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 왕을 연이어 사고와 전장에서 잃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다. 1923년 프랑스 유학 중 남편 나리히사 왕이 운전하던 차가 사고를 일으켜 남편은 즉사했고, 후사코 본인도 복잡 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입어 이후 다리가 불편해지는 후유증을 안고 살았다.[2] 1940년에는 장남 나가히사 왕이 중일 전쟁 중 장자커우에서의 훈련 중에 사고로 순직하는 아픔을 겪었다.[6]

하지만 후사코는 이러한 불행 속에서도 강인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아들 나가히사 왕의 시신이 돌아왔을 때 "오랫동안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그의 죽음을 '전사'라 칭하며 노고를 치하했고, 장례식 때는 그의 시신을 포차로 운구하기를 희망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메이지 천황의 황녀답게 무예를 중시하며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1947년 신적강하로 평민 신분이 되었으나, 이후 여성 최초로 이세 신궁의 제주(祭主)가 되어 신사 본청 총재를 맡는 등 황실의 어른으로서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전후 혼란기에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셋방살이 등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여, 몰락한 다른 구 황족 가문들과 달리 가세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삶의 모습 때문에 황실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그녀를 "후사코 대비" 또는 "대비님" 등으로 부르며 여러 불행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삶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메이지 천황의 자녀 대부분이 요절하거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과 달리, 후사코는 여동생 히가시쿠니 사토코와 함께 장수하여 1974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그녀의 삶은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격동의 일본 현대사를 관통하며 황족으로서, 또 한 개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영광과 비극을 동시에 보여준다. 황족 시절의 역할과 신적강하 이후의 활동을 통해 황실의 전통을 지키고자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참조

[1]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7-09-06
[2] 간행물 明治42年宮内省告示第4号(『官報』号外、明治42年4月29日) https://dl.ndl.go.jp[...]
[3] 간행물 『官報』第7750号「敍任及辭令」、明治42年4月29日 https://dl.ndl.go.jp[...]
[4] 서적 台南神社誌 https://dl.ndl.go.jp[...] 台南神社社務所
[5] 문서 太皷谷稲成神社所蔵
[6] 뉴스 明治天皇第七皇女の北白川房子さん死去 朝日新聞 1974-08-12
[7] 간행물 『官報』第4438号・付録「辞令二」1941年10月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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