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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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고인은 1090년 엔조지의 승려 조요가 창건한 사찰로, 구마노 신사를 진수사로 삼았다. 구마노 삼산 겐교를 통괄하며,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오닌의 난으로 소실된 후 여러 차례 이전과 재건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1868년 신불 분리령 이후 덴다이 지몬 종에 소속되었고, 1946년 슈겐종으로 독립했다. 현재는 중요 문화재와 국가 지정 사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다양한 말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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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고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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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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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쇼고인 |
위치 |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쇼고인나카마치 15 |
산호 | 없음 |
종파 | 본산수험종 |
사격 | 총본산 |
본존 | 부동명왕 |
창건 연도 | 간지 4년 (1090년) |
개산 | 조우요 |
정식 명칭 | 쇼고인 몬제키 (聖護院門跡) |
별칭 | 해당 사항 없음 |
후다쇼 등 | 킨키36부동존령장 제18번 엔노교쟈레이세키후다쇼 신부츠레이죠쥰파이노미치 제112번 (교토 제32번) |
공식 웹사이트 | 본산수험종총본산 쇼고인 몬제키 |
문화재 | |
지정 문화재 | 서원 견본저색웅야만다라도 목조지쇼대사 좌상 외 (중요문화재) 쇼고인 옛 임시 황궁 (국가사적) |
2. 역사
쇼고인은 엔조지의 승려 조요가 시라카와 상황의 구마노 참배 안내를 맡은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3] 이후 쇼고인은 슈겐도의 중심지로서 전국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고시라카와 천황의 아들 조에이 법친왕이 궁문적(宮門跡)으로 입사한 이후, 대대로 법친왕[2]이 입사하는 몬제키 사찰로서 높은 격식을 자랑했다.[3] 메이지 시대까지 37대에 걸쳐 몬주(門主)가 이어졌으며, 그중 25대는 황실, 12대는 섭가에서 몬제키가 되었다.[3]
오닌의 난으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으며, 전국 시대를 거치며 아시카가 쇼군 가문과 여러 다이묘들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했다.[5]
에도 시대 후기에는 두 번이나 임시 황거가 되는 등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현재도 "쇼고인 옛 임시 황거"로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메이지 시대에는 신불 분리령과 슈겐도 폐지령으로 인해 덴다이 지몬 종에 소속되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슈겐도 종을 설립하여 독립하였다.[9]
2. 1. 창건과 초기 역사
1090년(간지 4년), 조요는 시라카와 상황의 구마노 참배 안내를 맡은 공로로 구마노 신사 근처의 조코지를 하사받아 쇼고인을 창건하였다.[3] 조요는 초대 구마노 삼산 겐교(구마노 삼산 영장의 통괄 책임자)에 임명되어 전국의 슈겐자를 통괄하였다.[3]조요는 새로운 사찰 명칭으로 "성체호지"에서 글자를 따와 쇼고인으로 개명하고[3], 구마노 신사를 진수사로 삼았다. 다만, 조요와 조치 (후지와라 모로자네의 아들) 시대에는 "시라카와 방"이라고 불렸으며, "쇼고인"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그 후를 이은 카쿠츄 시대이다 (『헤이한키』 호겐 3년 10월 20일 조항·도닌 안 2년 4월 26일 조항).[5]
조요는 구마노 삼산 겐교 및 혼잔파 슈겐도의 관령으로서 전국의 슈겐자를 통괄했다.[3]
2. 2. 몬제키 사찰로서의 발전
고사가 상황의 황자 카쿠조 법친왕은 70년 동안 몬제키 지위에 있으면서 엔조지 조리, 쓰루오카 하치만구 벳토, 구마노 삼산 겐교를 겸임하여 몬제키 사찰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5] 그러나 카쿠조 사후에는 남조와 북조 사이, 혹은 북조 내부에서 몬제키 지위를 둘러싼 다툼이 발생했다.[5]이 다툼은 카쿠요 법친왕 (고하나조노 천황의 황자)[6]이 고고곤 천황의 황자인 카쿠조 법친왕을 후계자로 지명[7]했지만, 메이토쿠 원년(1390년)에 카쿠조 법친왕이 급사하면서 쇼고인은 일시 단절 위기에 직면했다.[5]
무로마치 막부는 쇼고인의 후계자 선정을 논의했지만, 엔조지의 인가인 조조인 몬세키에서 구마노 삼산 겐교를 겸임하던 료유가 자신의 제자이자 실질적인 조카손인 도이 (니조 요시모토의 아들)를 추천하여 인정받았다.[5] 이때 료유는 구마노 삼산 겐교를 도이에게 양보했고, 이후 조조인 대신 쇼고인이 구마노 삼산 겐교 지위를 맡게 되면서[5] 쇼고인은 구마노의 슈겐 조직을 통솔하게 되었다.
도이 사후, 나이 어린 동생 만이가 계승했다. 만이는 료유 사후 쇠퇴한 조조인을 산하에 두었다. 그러나 그 후계를 둘러싸고 무로마치 막부가 개입하여, 이미 후계자로 내정되었던 고노에 후사쓰구의 아들 도코를 배제하고,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아들 기칸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기칸은 갑자기 은퇴를 표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결국 도코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오닌의 난으로 쇼고인은 소실되었고, 몬제키인 도코는 아시카가 요시미와의 친분으로 서군 내통 혐의를 받아 미노국으로 망명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5] 난이 끝난 후 사면된 도코가 락호쿠의 나가타니(현 교토시 사쿄구 이와쿠라 나가타니정)로 이전하여 재건을 도모했다.[5]
2. 3. 에도 시대와 임시 황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가라스마 이마데가와로 이전하였으나, 엠포의 대화재(1673)로 소실되었다. 1676년, 창건 당시의 위치인 현재 위치에 재건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3] 텐메이의 대화재(1788년) 때에는 고카쿠 천황이 이곳을 임시 황거로 사용하였고, 1854년 내리(內裏) 화재 때에는 고메이 천황이 임시 황거로 사용하였다.[3]2. 4. 메이지 시대 이후
1868년(메이지 원년) 1월 8일, 쇼고인 몬세키였던 유닌 법친왕이 환속하여 쇼고인노미야 가겐 친왕이 되었고, 해군 총독 등을 역임했다.[9] 가겐 친왕 사후에는 이복 동생으로 쇼고인에 들어갔던 지성 친왕이 쇼고인노미야 궁호를 계승했지만, 옛 몬세키와 구별이 어렵다는 이유로 기타시라카와노미야로 개칭되었다. 가겐·지성 두 친왕은 모두 자녀를 두지 못했고, 두 사람의 형제였던 전 린노지 몬세키 요시히사 친왕이 기타시라카와노미야가를 계승했기 때문에, 황실에 두 친왕의 혈통은 남지 않았다. 그러나 요시히사 친왕의 자손에 의해 기타시라카와노미야가는 황적 이탈 후 2018년(헤이세이 30년) 현재까지 그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1868년 신불 분리령과 1872년 슈겐도 폐지령으로 인해 덴다이 지몬 종에 소속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6년 슈겐종을 설립[9]하여 덴다이 지몬 종에서 독립했다.
3. 경내
쇼고인은 고시라카와 천황의 아들 조에이 법친왕이 궁문적(宮門跡)으로 입사한 이후, 대대로 법친왕[2]이 입사하는 몬제키 사찰이었다.[3] 메이지 시대까지 37대에 걸쳐 몬주(門主)가 이어졌으며, 그중 25대는 황실, 12대는 섭가에서 몬제키가 되었다.[3] 에도 시대 후기에는 두 번이나 임시 황거가 되는 등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어, 현재 "쇼고인 옛 임시 황거"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11세기 말 현재 위치에 세워진 후 4번의 화재로 시내를 전전하다가 엔포 4년 (1676년)에 현재 위치로 돌아왔다.[3] 메이지 시대까지 서쪽의 "쇼고인 마을"에서 가모가와에 걸쳐 있던 "쇼고인의 숲" 안에 사찰이 있어 "모리 고텐(森御殿)"이라고 불렸으며, 현재도 인근 주민들에게 "고텐(御殿)"이라고 불린다.[3] 쇼고인의 숲은 단풍이 아름다워 "킨린(錦林)"이라고도 불렸으며, 현재도 "킨린"이라는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3]
쇼고인 남서쪽에는 "쇼고인의 숲"의 진수로 알려진 구마노 신사가 있다. 이곳은 "교토의 구마노 산잔"(나머지 2개는 구마노 냐쿠오지 신사, 신구마노 신사) 중 하나로 깊은 신앙을 받았지만, 오닌의 난으로 소실된 후 간분 6년 (1666년)에 도칸 법친왕에 의해 재건되었다.[3]
기온 마츠리의 엔노교자야마(役行者山)에서는 쇼고인이 호마를 시작하고(채등 호마 공), 도사인 야마부시가 호마목을 호마단에 던져 넣는 의식을 행한다.
경내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건물들이 있다.
- 본당
- 진전
- 서원
- 십삼중석탑
- 정문
- 고리
- 정원
- 중어전
- 북어전
- 하룻밤에 지은 어학문소
- 다실
- 어전장 현관
- 서문
- 나가야문
- 산문
- 세키젠인(준제당)
3. 1. 주요 건물
- 본당 - 1968년에 재건되었다.
- 진전 - 에도 시대 중기에 건립되었으며, 고카쿠 천황이 임시 거처로 사용했다.
- 서원(중요문화재) - 에도 시대 초기에 건립되었으며, 고쇼에서 이전해온 건물이라고 전해진다.
- 십삼중석탑
- 정문
- 고리
- 정원
- 중어전
- 북어전
- 하룻밤에 지은 어학문소
- 다실
- 어전장 현관
- 서문
- 나가야문
- 산문
- 세키젠인(준제당) - 탑두. 준제관음을 본존으로 한다.
3. 2. 기타 시설
- 십삼중석탑
- 정원
- 다실
- 세키젠인(준제당) - 탑두. 준제관음을 본존으로 한다.
4. 문화재
쇼고인은 고시라카와 천황의 아들인 조에이 법친왕이 궁문적(宮門跡)으로 입사한 이후, 대대로 법친왕[2]이 입사하는 몬제키 사찰로서 높은 격식을 자랑했다.[3] 메이지 시대까지 37대에 걸쳐 몬주(門主)가 이어졌으며, 그중 25대는 황실, 12대는 섭가에서 몬제키가 되었다.[3] 에도 시대 후기에는 두 번이나 임시 황거가 되는 등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현재 "쇼고인 옛 임시 황거"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3] 궁문적이면서 사찰 세력이기도 했다. 11세기 말에 현재 위치에 세워진 후, 4번의 화재로 인해 시내를 전전하다가 엔포 4년 (1676년)에 현재의 위치로 돌아왔다.[3]
메이지 시대까지는 당시 서쪽에 있던 "쇼고인 마을"에서 가모가와에 걸쳐 펼쳐져 있던 "쇼고인의 숲" 안에 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모리 고텐(森御殿)"이라고도 불렸으며, 현재도 인근 주민들에게 "고텐(御殿)"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다.[3] 쇼고인의 숲은 단풍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킨린(錦林)"이라고도 불렸으며, 현재도 "킨린"이라는 단어가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3]
쇼고인의 남서쪽에는 "쇼고인의 숲"의 진수로서 알려진 구마노 신사가 있으며, "교토의 구마노 산잔" (나머지 2개는 구마노 냐쿠오지 신사, 신구마노 신사) 중 하나로 여겨지는 등 깊은 신앙을 받았지만, 오닌의 난으로 소실된 후, 간분 6년 (1666년)에 도칸 법친왕에 의해 재건되었다.[3]
기온 마츠리의 엔노교자야마(役行者山)에서는 쇼고인이 호마를 시작하고(채등 호마 공), 도사인 야마부시가 호마목을 호마단에 던져 넣는 의식을 행한다.
4. 1. 중요 문화재
- 서원
- 견본 채색 곰노만다라 도
- 목조 지증대사(엔친) 좌상 - 1143년 료세이 제작.
- 목조 부동명왕 입상 2점
- 고카쿠 천황 친한 신변대보살 호 칙서
- 고요제이인 친한 소식
- 엔친 입당구법(닛토구호) 목록 1권, 여의륜심 중심 진언 관 1통, 지증대사상 조립 원문 1통 (이상, 지증대사상의 상내 납입품)
- 야마시로노쿠니 부케도노 산 그림
4. 2. 국가 지정 사적
쇼고인은 에도 시대 후기에 두 번이나 임시 황거로 사용되는 등,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현재도 "쇼고인 옛 임시 황거"로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3]5. 역대 문적
쇼고인은 고시라카와 천황의 아들인 조에이 법친왕이 궁문적(宮門跡)으로 입사한 이후, 대대로 법친왕[2]이 입사하는 몬제키 사찰로서 높은 격식을 자랑했다.[3] 메이지 시대까지 37대에 걸쳐 몬주(門主)가 이어졌으며, 그중 25대는 황실, 12대는 섭가에서 몬제키가 되었다.[3]
고사가 상황의 황자인 카쿠조 법친왕은 70년에 걸쳐 몬세키의 지위에 있으면서 엔조지 조리·쓰루오카 하치만구 벳토·구마노 삼산 겐교를 겸임하여, 쇼고인을 몬세키 사찰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역대 문적은 다음과 같다.[3]
대수 | 이름 | 출신 | 비고 |
---|---|---|---|
1 | 원진 | ||
2 | 조메이 | ||
3 | 세이유 | ||
4 | 지세이 | 시키 씨 | |
5 | 사이엔 | 후지와라노 요리타다의 자식 (일설에 후지와라노 킨토의 자식) | |
6 | 세이카쿠 | 후지와라노 노리미치의 넷째 아들 | |
7 | 조요 | 후지와라노 쓰네스케의 자식 | |
8 | 조치 | 후지와라노 모로자네의 자식 | |
9 | 카쿠츄 |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자식 | |
10 | 세이케이 법친왕 | 고시라카와 천황의 황자 | |
11 | 엔츄 | 고노에 모토미치의 자식 | |
12 | 세이츄 | 고노에 모토미치의 자식 | |
13 | 손엔 법친왕 | 고토바 천황의 황자 | |
14 | 신츄 | 쿠조 미치이에의 자식 | |
15 | 카쿠에 법친왕 | 준토쿠 천황의 황자 | |
16 | 카쿠조 법친왕 | 고사가 천황의 열째 황자 | |
17 | 츄조 법친왕 | 고사가 천황의 황자 | |
18 | 준조 법친왕 | 카메야마 천황의 황자 | |
19 | 손친 법친왕 | 카메야마 천황의 황자 | |
20 | 케이조 법친왕 | 후시미 천황의 황자 | |
21 | 카쿠요 법친왕 | 하나조노 천황의 황자 | |
22 | 닌요 법친왕 | 츠네아키 친왕의 왕자 | |
23 | 쇼조 법친왕 | 고코곤 천황의 황자 | |
24 | 세이손 법친왕 | 고다이고 천황의 넷째 황자 | |
25 | 카쿠조 법친왕 | 고코곤 천황의 황자 | |
26 | 도이 | 니조 요시모토의 자식 | |
27 | 만이 | 니조 요시모토의 자식 | |
28 | 도코 | 고노에 후사쓰구의 자식 | |
29 | 도오 | 후시미노미야 사다츠네 친왕의 왕자 | |
30 | 도조 | 고노에 히사미치의 자식 | |
31 | 도초 | 고노에 타네이에의 자식 | |
기칸 |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자식 | ||
32 | 코이 법친왕 | 고요제이 천황의 황자 | |
33 | 도코 법친왕 | 고요제이 천황의 열한 번째 황자 | |
34 | 도칸 법친왕 | 고미즈노오 천황의 열세 번째 황자 | |
35 | 도유 입도 친왕 | 고사이 천황의 일곱 번째 황자 | |
36 | 도손 법친왕 | 고사이 천황의 아홉 번째 황자 | |
37 | 도쇼 입도 친왕 | 후시미노미야 쿠니나가 친왕의 첫째 왕자 | |
38 | 츄요 입도 친왕 | 나카미카도 천황의 셋째 황자 | |
39 | 조쇼 입도 친왕 | 아리스가와노미야 요리히토 친왕의 왕자 | |
40 | 에이닌 법친왕 | 칸인노미야 스케히토 친왕의 일곱 번째 왕자・고카쿠 천황의 이복동생 | |
41 | 만쥬구 | 후시미노미야 사다타카 친왕의 왕자 | |
42 | 유닌 법친왕 | 후시미노미야 쿠니이에 친왕의 왕자 | |
43 | 타나카 케이신 | ||
44 | 이시마사 미치 | ||
45 | 야마시나 유우타마 | ||
46 | 후지타니 유우마 | ||
47 | 토미코지 칸손 | ||
48 | 케이메이 | ||
49 | 나오바야시 케이엔 | ||
50 | 히노우에 켄테이 | ||
51 | 야나기다 센쿄 | ||
52 | 이와모토 쿄스이 | ||
53 | 하라 케이조 | ||
54 | 오카모토 코신 | ||
55 | 이와모토 코테츠 | ||
56 | 이타미 코준 | ||
57 | 카라이 토쿠센 | ||
58 | 미야기 야스토시 |
6. 행사
- 1월 - 다도 하야미류에 의한 첫 가마가 열린다.[3]
- 8월 - 구마노로의 오미네이리를 위해 야마부시가 당 사찰에 집결하여 구마노로 향한다.[3]
7. 독경
쇼고인에서는 원래 수험도에서 삼라만상은 모두 법신의 드러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삼라만상을 모두 경전으로 생각하고 있다.[3]
실제로는 『법화경』, 『부동경』, 『반야경』, 『석장경』, 『관음경』, 미타찬, 석가찬, 여러 진언, 오대력, 다라니, 수험참법, 『대일경』, 『금광명경』, 『인왕경』, 『금강정경』, 『상생경』, 『하생경』 등을 주로 읽으며, 호국 성취 및 현 천황의 안태안온을 기원한다. 천태종의 영향으로 지관행(법화참법이나 예시작법 등), 축사 대정 사도 가행도 행한다. 다이센 입봉 수행은 현재 여정 100km를 5일간 수행하지만 이전에는 55일 수행이었고, 요시노 가쓰라기 산에서는 뒤쪽 수행도 있었다고 한다. 수험도 개조 엔노 교자는 다이센에서 1000일 동안 거친 수행을 하기도 했다.
쇼고인몬제키 본당 부동당의 일상적인 불공(御勤め)에서는 본존이 있는 정면 외에 裏堂(뒷당)도 있어 이전에는 뒷당에서 마지막으로 근행을 행했지만, 현재는 본당 앞에서만 불간, 진전, 본당 순으로 매일 행한다.[3]
8. 막말의 영지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구고구령취조장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막말 시기 쇼고인의 영지는 야마시로국과 오미국에 걸쳐 7개 촌, 1,408석 남짓이었다.[1]
지역 | 소속 촌 | 석고 |
---|---|---|
야마시로국 아타고군 | 쇼고인 촌 | 425석 남짓 |
타나카 촌 중 | 14석 남짓 | |
시라카와 촌 중 | 116석 남짓 | |
나가타니 촌 중 | 479석 남짓 | |
야마시로국 오토쿠니군 | 카미우에노 촌 중 | 233석 남짓 |
야마시로국 키이군 | 깃쇼인 촌 중 | 19석 남짓 |
오미국 시가군 | 후지오 촌 중 | 120석 |
9. 말사
쇼고인은 일본 전국에 걸쳐 다양한 말사를 두고 있다. 특히 긴키 지방에 많은 말사가 분포하고 있다.
위치 | 명칭 | 비고 |
---|---|---|
교토시 사쿄구 | 적선원 준제당 | 사찰 내 탑두, 정원가 |
교토시 사쿄구 | 상운산 미륵원 | 철학의 길 |
교토시 사쿄구 | 단학산 주심원 비사문당 | 별격사찰, 정원가 |
교토시 사쿄구 | 대비산 봉정사 | 별격본산 |
가메오카시 | 신미산 금륜사 | |
우지시 | 명성산 삼실호사 | 별격본산 |
우지시 | 최승원 | 병등원 봉황당탑두 |
미노오시 | 기오산 롱안사 | 대본산, 역행자 승천지 |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 자운산 신광사 아비코행자당 | |
나라현 요시노 | 호법산 기장원 | 별격본산 |
나라현 고세시 | 모하라산 길상초사 | 대본산, 역행자 탄생지 |
효고현 미키시 | 대곡산 가야원 | 정원가 |
10. 교통
11. 주변
쇼고인 주변에는 다음과 같은 명소들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本山修験宗」の項
http://www.rirc.or.j[...]
[2]
문서
皇族男子で、出家後に親王宣下を受けた者
[3]
웹사이트
聖護院について」(聖護院門跡(公式サイト))
http://www.shogoin.o[...]
[4]
문서
このうち聖護院きゅうりは現存せず、別種の「聖護院節成胡瓜」という名称のきゅうりは存在するが聖護院とは何ら関係ない
[5]
서적
中世の門跡と公武権力
戎光祥出版
2017
[6]
문서
元弘の変を受けた覚助法親王が持明院統から覚誉法親王を迎えていた(『花園天皇日記』元弘元年12月24日条)
[7]
문서
覚助以降に記録されている門跡の多くは自身の早世や政争の影響で正式に門跡を継ぐことは出来なかったと考えられ、実際の門跡の継承は覚助→覚誉→覚増と引き継がれたと考えられている(近藤「聖護院門跡の成立と展開」、永村2017年、pp133-136)。
[8]
웹사이트
聖護院門跡ご紹介 - 京都守護職 新選組巡礼会公式ホームページ
https://www.kyotoshu[...]
2024-01-29
[9]
문서
本山修験宗の設立は1957年(昭和3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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