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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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시양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광해군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전라도 도사로 재직 중 왕의 실정을 비유한 시제를 출제하여 유배되기도 했다. 인조반정 이후 예조 좌랑, 병조 정랑 등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으며, 정묘호란 당시 평안도 관찰사,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척화론을 주장하다 유배되기도 했으며, 이후 청백리에 녹선되고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선조실록≫ 개수에 참여하려 했으나 안질로 불참했다.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하담집≫ 등이 있으며, 시호는 충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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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셋째 아들이자 1605년부터 1623년까지 에도 막부의 제2대 쇼군으로 재임하며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는 데 기여하고 막부의 통치 기반을 강화했으며, 쇄국정책을 추진하고 강력한 반기독교 정책을 시행했다. - 1643년 사망 -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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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통일운동가로서, 동학 입교, 치하포 사건,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한인애국단 조직,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 안동 김씨 (구) - 김재익 (1938년)
김재익은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와 미국 대학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한 경제학자이자 관료로, 한국 경제의 시장 중심 개혁에 기여했으나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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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 좌랑, 병조 정랑, 수찬(修撰), 교리(敎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 겸 문학,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5년(인조 3) 응교 겸 문학, 이듬해 인헌왕후의 산릉역(山陵役) 공로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징후로 평안도 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거쳐 9월에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 ≪선조실록≫ 개수 때 대제학 이식과 총재관(總裁官) 홍서봉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實錄改修)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荷潭破寂錄≫, ≪하담집≫, ≪부계기문 ?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2. 1. 초기 생애
1605년(선조 3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607년 주서(注書)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했으며,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611년(광해군 3) 전라도 도사로 향시를 주관할 때 시제(試題)에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문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種城)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옮겨졌다.
2. 2. 관직 생활과 유배
1605년(선조)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607년 주서(注書)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했으며,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611년(광해군 3) 전라도 도사로 향시를 주관할 때 시제(試題)에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문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에 이배(移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예조 좌랑·병조 정랑·수찬(修撰)·교리(敎理)를 역임하였고,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로 문학을 겸임하고,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5년(인조 3) 응교(應敎)가 되어 문학을 겸했고, 이듬해 인헌왕후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가 9월에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 ≪선조실록≫을 개수할 때 이식과 총재관(總裁官) 홍서봉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實錄改修)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2. 3. 인조반정과 군사적 활약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 좌랑, 병조 정랑, 수찬(修撰), 교리(敎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로 문학을 겸임하고,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1625년(인조 3) 응교(應敎)가 되어 문학을 겸했고, 이듬해 인헌왕후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 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2. 4. 정묘호란과 척화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2. 5. 후기 생애와 사망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예조 좌랑, 병조 정랑, 수찬, 교리를 역임하였고,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이 평정된 후 응교 겸 문학,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1625년(인조 3) 응교 겸 문학, 이듬해 인헌왕후의 산릉역(山陵役) 공로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징후로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 병조판서, 도원수,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거쳐 9월에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 ≪선조실록≫ 개수 때 대제학 이식과 총재관(總裁官) 홍서봉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實錄改修)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荷潭破寂錄≫, ≪하담집≫, ≪부계기문 ?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3. 가족 관계
증조부 | 김언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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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 김석(金錫) |
숙부 | 김충갑, 김제갑 |
부 | 김인갑 |
모 | 홍이곤(洪以坤)의 딸 |
부인 | 이대수(李大遂)의 딸 |
장남 | 김곡 |
자부 | 윤성득의 딸 |
손자 | 김추만 (생부: 관찰공) |
차남 | 김연 |
자부 | 허실 |
손녀 | 서경조에게 출가 |
장녀 | 이도장에게 출가 |
외손자 | 이원정, 이원록, 이원례, 이원지 |
외손녀 | 장벽에게 출가 |
차녀 | 김홍석에게 출가 |
외손자 | 김제, 김오 |
삼녀 | 민점에게 출가 |
외손자 | 민안도, 민종도, 민홍도, 민주도 |
측실 | 이름모름 |
서자 | 김변, 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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