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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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화가이다. 서예를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회화를 시작했으며, 1972년 물방울을 소재로 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1960년대 파리 비엔날레 참여를 시작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1972년 파리 살롱 드 메에서 물방울 그림으로 데뷔했다. 그의 작품은 물방울을 통해 정화, 순수, 삶의 덧없음을 표현하며, 동양적 사유를 서양 미술 기법으로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6년 제주도에 김창열미술관이 개관되었으며, 2021년 9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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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화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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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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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김창열 |
출생일 | 1929년 12월 24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맹산군 |
사망일 | 2021년 1월 5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분야 | 회화, 판화 |
대표작 | 물방울 회귀 |
웹사이트 | 김창열 홈페이지 |
학력 | |
학교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
기타 |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 |
경력 | |
협회 | 현대미술가협회 |
수상 | |
수상 내역 | 상파울루 비엔날레 명예상 (1972) |
2. 생애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나 서예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영향으로 회화를 접했다. 광성보고 재학 중 해방을 맞았고, '격문'이라는 단어를 연습하다가 보안서원에게 구류되기도 했다. 김구 관련 모임에 참여했다가 수배를 받아 16세에 월남했다. 서울에서 아버지와 재회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졸업 자격을 얻었다.[38]
김창열의 작품세계는 '물방울'이라는 소재로 일관되지만, 시대에 따라 변화를 보이며, 이를 10년 단위로 나누어 설명한다.
월남 후 서울의 여러 회화연구소를 다녔으며,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이 중단되었다.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도주 후 은신했고, 동네 아주머니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가족과 다시 만났다.[39] 이후 경찰전문학교에 입교하여 박재식, 정석모 등을 만났다.[40] 휴전 후 서울대학교에 복학하려 했으나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 경력 때문에 거부되었다.
1957년, 김창열은 한국현대미술가협회(현대미협)를 결성하고 앵포르멜 운동에 참여했다.[41] 박서보의 제안으로 동인전 이름을 "현대전"으로 약칭하고 활동을 이어갔다. 1961년 박서보의 주선으로 제2회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했고, 이후 여러 국제 비엔날레에 참여했다.[42] 김환기의 추천으로 록펠러 재단 연구비를 지원받아 미국에서 연수 후,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했다.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파리에 정착했고, 이우환을 만나 교류했다.[42]
파리 근교 빨레소에서 마굿간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현재의 아내 마르틴 질롱을 만나 동거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1972년 물방울 그림을 창안했고, 개인전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름을 알렸다.[43] 같은 해 살롱 드 메 전에 <
2. 1. 유년 시절과 월남 (1929-1948)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군 지덕면 송암리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38] 서예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에게서 붓글씨를 배우며 회화를 접했고, 광성보고 시절 외삼촌에게 데셍을 배웠다.[38]
해방 당시 광성고보 4학년이던 김창열은 학교에서 '격문'이라는 단어를 연습하다 보안서원에게 끌려가 일주일간 구류되었다.[38] 풀려난 후 여러 단체에 가입 권유를 받았고, 김구를 따르는 모임에 나갔다가 연락책을 하라는 말을 듣고 수배를 받게 되었다.[38]
16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월남한 김창열은 서울에서 6개월 만에 아버지를 만났고, 2년 뒤 가족들도 월남하여 상봉했다.[38] 이후 김창열은 제1회 대학입학 검정고시에 응시해 졸업 자격을 획득했다.[38]
2. 2. 미술 수학과 한국전쟁 (1948-1953)
김창열은 월남 후 서울에서 여러 회화연구소를 다녔다. 처음에는 조각가 이국전 연구소에 다니다가 연구소가 폐쇄되자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38]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38] 2학년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업이 중단되었다.[39]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가족들과 헤어진 김창열은 길거리에서 의용군 모병 반에 끌려갔다.[39] 다행히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후방 부대에 배치되었지만, 도중에 도주하여 서울수복 때까지 비어 있던 자기 집에 몸을 숨겼다.[39] 누군가 김창열이 의용군에 있었음을 고자질해서 현병대에 끌려갔으나, 그의 일기가 발견되어 동네 아주머니들의 도움으로 석방되고 피난 중이던 가족을 다시 만났다.[39]
2. 3. 앵포르멜 활동과 현대미협 (1953-1961)
김창열은 1957년 장성순, 하인두, 김서봉 등과 함께 <한국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를 결성하고, 미국 공보원에서 첫 동인전을 개최했다. 이후 박서보를 영입하고 동인전 이름을 "현대전"으로 약칭했다.[41] 현대미협은 당시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1958년 개최된 현대전 3회와 4회는 큰 주목을 받았다. 4회전 이후 현대전은 앵포르멜 운동의 한국판이 되었고, 회원들은 계속 교체되었다.[41] 김창열은 서울 경찰전문학교 도서주임으로 근무하며 일본 화집과 미술서적을 통해 세계적 흐름을 파악하고 창작에 전념했다.[41]
김창열은 보수주의적인 한국 미술계와 정부 주최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개혁을 요구했던 현대미술가협회(1957)의 창립 멤버였다.[19] 이들은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시스템"을 거부하며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실험했고, 자신들의 전시회를 "반 국전"으로 명명했다.[19] 김창열은 한국 전쟁 동안 젊은 한국 예술가들이 겪었던 고통이 외국의 표현 방식을 독특한 한국적 맥락으로 전환시켰다고 주장했다.[20]
1958년 제4회 현대전에서 김창열은 김서봉, 김청관, 박서보 등 동료 현대미술가협회 회원들과 함께 작품을 전시했다.[21] 이 전시는 미술 평론가 방근택에 의해 한국 앵포르멜의 집단적 등장으로 해석되었다.[21][22]
2. 4. 해외 진출과 파리 정착 (1961-1972)
1961년 박서보의 주선으로 제2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이 초청되었고, 김창열은 출품작가 4명 중 한 명이 되었다.[42] 1963년에는 제3회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작가를 선정하는 커미셔너가 되었고,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도 작품을 출품했다.[42] 1961년 파리 비엔날레 이후 해외 전시나 국제 비엔날레에 출품할 기회들이 계속 주어지자 경쟁이 극심해졌고, 108인의 연대 서명과 같은 일까지 벌어졌다.[42]
김환기의 추천으로 1965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고, 1966년 록펠러 재단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미국에서 한달 동안 연수를 받게 된다.[42] 이후 미국에 남아 4년간 갖은 잡일을 하며 그림을 그렸고,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하며 세계미술계에 대한 도전의식을 키웠다.[42]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42] 1971년 박서보의 추천으로 제7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온 이우환과도 이때 만나게 된다.[42]
김창열은 파리 근교 빨레소(Palaiseau)의 마굿간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현재의 아내인 마르틴 질롱(Martine Jillon)을 만나 동거하며 그림에 몰두했다.[43] 1972년 물방울 그림을 창안했고, 근처 골동품 가구점에서의 첫 개인전이 파리 일간지 <콩바(Combat)>의 선임기자 알랭 보스케의 눈에 띄어 기사화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43] 같은 해 파리의 권위있는 초대전 살롱 드 메(Salon de Mai)전에서 물방울 그림인 <
2. 5. 물방울 회화의 탄생과 국제적 명성 (1972-2021)
김창열은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면서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했다. 1971년에는 박서보의 추천으로 제7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온 이우환과 만나기도 했다.[42]
김창열은 파리 근교 빨레소(Palaiseau)에 있는 마굿간을 개조한 독일 젊은 조각가의 작업실을 이어받아, 그곳에서 아내 마르틴 질롱(Martine Jillon)과 동거하며 그림에만 몰두했다. 1972년 마침내 물방울 그림을 창안했고, 근처 골동품 가구점에서 연 첫 개인전이 파리 일간지 콩바(Combat)의 선임기자 알랭 보스케의 눈에 띄어 기사화되면서, 다른 신문사들에서도 앞다투어 취재하여 순식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43] 같은 해, 파리의 권위 있는 초대전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서 물방울 그림 <
2016년 9월, 김창열이 한때 경찰 생활을 했던 제주도에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되었다. 김창열은 한국으로 돌아와 성북동 자택에서 지내다 2021년 1월 5일, 9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유해는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에 수목장되었다.
2. 6. 귀국과 타계
김창열은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했다. 당시 박서보의 추천으로 1971년 제7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온 이우환과도 이때 만나게 된다.[42] 파리 근교 빨레소(Palaiseau)에서 마굿간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지금의 아내인 마르틴 질롱(Martine Jillon)을 만나 동거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1972년 물방울 그림을 창안했고, 근처 골동품 가구점에서 연 첫 개인전이 파리의 일간지 <콩바(Combat)>의 선임기자 알랭 보스케의 눈에 띄어 기사화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43]
1972년 파리의 권위있는 초대전 살롱 드 메(Salon de Mai)전에서 물방울 그림인 <
2016년 9월 김창열이 한때 경찰 생활을 했던 제주도에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되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성북동 자택에서 살다가 2021년 1월 5일, 9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시신은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에서 수목장되었다. 김창열은 이우환, 백남준과 비견되며 "한국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묘사된다.[32][33] 그는 1996년 프랑스 문학 예술 훈장의 슈발리에로 임명되었으며, 201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34]
3. 작품 세계
3. 1. 1960년대: 서정적 추상
1965년부터 1971년까지의 작품은 작가 스스로 '서정적 추상'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미국의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에 영향을 받아 반복되는 형태들의 배열로 구성되어 기계적이며 추상적이다. 대표작으로는 《Rite》 시리즈가 있다.
3. 2. 1970년대: 물방울의 등장
김창열이 파리로 이주한 이후, 물방울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2년 살롱 드 메에 입선한 이후 여러 그림에서 물방울이 단일 모티프로 등장하며, 하나 또는 다수의 물방울이 캔버스 বিভিন্ন 위치에 나타난다. 대표작으로는 《Event of Night》(1972), 《Water Drops》(1974) 등이 있다.[6]
김창열의 회화에 대한 비평적 분석에서는 물방울을 정화, 순수, 그리고 "개별적인 삶의 덧없음"을 나타내는 다층적인 이미지로 언급한다. 빅스는 김창열의 작품에 사용된 ''트롱프뢰유'' (극사실주의 기법)가 "캔버스(또는 신문)가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됨으로써 균형을 이룬다"고 설명한다. 또한 "실제는 그 자체를 나타내고, 그림은 다른 것을 나타내는 묘한 큐비즘 혼합은 한자와 함께 작품에서 더욱 복잡해진다. 여기서 한자는 배경 역할을 하지만, 그 '배경'은 그림으로 표현된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정교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라고 평가했다.[6]
이일(1932–1997)은 한국 단색화 관련 저술로 유명한 미술 평론가인데, 캔버스와 그 위에 그려진 이미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천자문과 물방울 이미지는 친밀하고 상호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 한자는 단순히 (배경)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물방울 이미지의 덮개 역할을 한다."라고 언급했다.[28]
단색화 작가들은 캔버스, 종이 등 재료의 배경을 예술적 표현을 형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김창열의 작품에서 "물방울은 캔버스 표면에 단순히 부착된 것이 아니라, 캔버스에 완전히 맡겨진다."[29]
김창열은 파리로 이주할 즈음 불교로 귀의했는데, 이는 그의 예술적 이야기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30] 자연과의 지속적인 연결, 그리고 "자연과 현대 문화 사이의 양분"은 김창열 자신의 회화 행위와 회화 주제에 대한 이해의 일부를 형성한다. 김창열은 "맑고 흠 잡을 데 없는" 물방울을 그리는 것이 전쟁에서 겪었던 고통, 불안, 어두운 기억을 성찰하고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한다.[11][2][31]
3. 3. 1980년대: 마대와 천자문
김창열은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는 거친 표면이라는 물체의 즉물성(卽物性)을 살리는 한편, 이러한 표면에 맺힐 수 없는 영롱한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바탕과 이질감을 형성하여 실제 물방울이 가진 물질성을 상실하게 한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단순한 마대에서 나아가 바탕에 천자문을 그려넣음으로써 동양의 철학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마대에 물방울들이 몰려있는 《Water Drops》(1987), 천자문 위에 물방울들이 그려진 《Recurrence》(1989) 등이 있다.
3. 4. 1990년대: 회귀(Recurrence)
이 시기에 김창열은 《Recurrence》(회귀)라는 이름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한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물방울들은 단지 맺혀있는 것에서 변화되어 일그러지기도 하고, 뭉개지기도 하며, 지워지기도 한다. 또한 물방울의 바탕에는 끊임없이 천자문이 작게 혹은 크게 등장하는데, 이는 오랜 해외생활로 인해 형성된 작가의 향수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 아래에서 쓰던 천자문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5. 2000년대: 색채와 형태의 실험
작가는 이전 시기까지 계속되었던 채도가 낮은 배경에서 벗어나 다양한 색과 다양한 형태의 변화를 시도한다. 《Bell(2003)》에서는 하늘색 바탕에 천자문을 그려넣고, 《Yellow Earth》(2003)에서는 이전과 달리 채도 높고 적극적인 노란색 바탕을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Meditation》(2004)의 경우에는 물방울 모양의 큰 유리병에 물을 담아 천장에 쇠줄로 매달아 늘어뜨린 설치미술도 시도한다.
4. 작품 해석
김창열이 그리는 물방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동서양의 문화를 함께 접한 작가가 서양 미술의 재료를 통해 동양적인 사고의 세계를 표현하려 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나, 그 철학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다.
4. 1. 작가의 언급
김창열은 "맑고 흠 잡을 데 없는" 물방울을 그리는 것이 전쟁에서 겪었던 모든 고통, 불안, 그리고 어두운 기억을 성찰하고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한다.[11][2][31]4. 2. 평론가의 해석
김창열의 회화에 대한 비평적 분석은 종종 물방울이라는 주제를 정화, 순수, 그리고 "개별적인 삶의 덧없음"의 다층적인 이미지로 언급한다.[6] 빅스는 김창열의 작품에 사용된 ''트롱프뢰유'' 또는 극사실주의 기법이 "캔버스(또는 신문)가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함으로써 균형을 이룬다"고 설명하며, "실제는 그 자체를 나타내고, 그림은 다른 것을 나타내는 기묘한 큐비즘 혼합은 한자와 함께 작품에서 더욱 복잡해진다. 여기서 한자는 배경 역할을 하지만, 그 '배경'은 그림으로 표현된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정교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라고 평론했다.[6]이일은 한국 단색화에 관한 평론으로 유명한 미술 평론가로, 캔버스와 그 위에 그려진 이미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천자문과 물방울 이미지는 친밀하고 상호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 한자는 단순히 (배경)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물방울 이미지의 덮개 역할을 한다."라고 평론했다.[28]
단색화 작가들은 단순한 표면이 아닌 예술적 표현을 형성하는 데 있어 캔버스, 종이, 또는 다른 재료의 배경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공통적인 관심을 가졌다. 김창열의 작품에서 "물방울은 캔버스 표면에 단순히 부착된 것이 아니라, 캔버스에 완전히 맡겨진다."[29]
이우환은 "김창열 선배는 물방울로 세계적으로 이름이 났기 때문에 물방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물방울이라는 하나의 메타포를 가지고 시각적으로 미술사에 남는 일을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평론했다. 그는 "물방울은 현실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림으로 그려진 물방울은 착시현상이지 현실 자체의 물방울은 아니다. 그런데 마대를 거꾸로 해서 그리거나 바탕을 칠하지 않은 캔버스에 그려 물방울이 금방 스며들거나 배어 나오는 듯한 착시 현상은 그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김창열의 물방울은 물질과 환상을 겹침으로써 새로운 시각적인 것을 제시했다."라고 평론했다. 또한 "물방울 하나는 기쁨도 주고 설움도 주고 어떤 추억이나 기억도 되살려 준다. 그리고 우리는 영롱한 물방울 속에서 또 다른 환상도 본다."라고 평론했다.
김창열이 파리로 이주할 즈음, 그는 그의 예술적 이야기에 깊은 영향을 미친 불교로 귀의했다.[30] 물방울과 캔버스의 공간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과의 지속적인 연결,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자연과 현대 문화 사이의 양분"은 김창열 자신의 회화 행위에 대한 이해와 그의 회화 주제의 일부를 형성한다. 김창열은 "맑고 흠 잡을 데 없는" 물방울을 그리는 것이 전쟁에서 겪었던 모든 고통, 불안, 그리고 어두운 기억을 성찰하고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한다.[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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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Arte: è morto Kim Tschang-Yeul, il pittore della goccia d'acqua
2021-01-16
[33]
웹사이트
A Modern Trompe L'Oeil Painter
2021-01-16
[34]
웹사이트
'Water drop' artist Kim Tschang-yeul dies at 91
https://en.yna.co.kr[...]
Yonhap News Agency
2021-01-16
[35]
간행물
Kim Tschang-yeul Jeju dorip misulgwan
2014-01
[36]
간행물
Mulbang-ul, gil eul geotda majuchin jonjae
2017-01
[37]
웹사이트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 홈페이지
http://www.theartstu[...]
[38]
서적
형님과 함께 한 시간들
문예바다
2016
[39]
서적
형님과 함께 한 시간들
문예바다
2016
[40]
서적
형님과 함께 한 시간들
문예바다
2016
[41]
서적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인물과사상사
2019
[42]
서적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인물과사상사
2019
[43]
서적
형님과 함께 한 시간들
문예바다
2016
[44]
웹인용
김창열 홈페이지
http://www.kimtschan[...]
2008-05-31
[45]
웹인용
김창열 홈페이지의 프로필
http://www.kimtschan[...]
2008-05-31
[46]
웹인용
김창열 홈페이지의 프로필
http://www.kimtschan[...]
2008-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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