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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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쾌대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시기를 거치며 활동한 한국의 서양화가로, 뛰어난 인물 묘사 능력을 바탕으로 자화상, 군상, 아내를 모델로 한 작품 등을 남겼다. 그는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해방 후에는 좌익 미술 동맹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한국 전쟁 중 북한으로 귀순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금지되었으나, 1988년 해금 이후 재평가를 받으며 그의 작품이 전시되고 연구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가 - 박문원 (미술가)
박문원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이후 북한에서 활동한 화가이자 미술사학자로, 유화 작품과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반영한 작품을 남겼으며 미술사 저술과 고구려 벽화 평론을 발표하고 조선미술동맹 등에서 활동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가 - 배운성
배운성은 한국인 최초로 유럽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1930년대 유럽 화단에서 활동하며 한국적인 색채의 유화와 판화 작품을 선보인 화가로,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과 광복 후 좌익 활동, 한국 전쟁 중 월북 등으로 논란이 되었으나 북한에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고 해금 조치 이후 재조명받고 있다. - 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 - 추경호
추경호는 경상북도 달성군 출생으로 고려대학교와 미국 오리건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행정고시 합격 후 경제 관료로 활동하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국무조정실장 등을 역임하고 제20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현재 국민의힘 원내대표이다. - 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 - 김윤환 (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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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인천지방법원 판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거쳐 2018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되었으며, 제8대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했다.
이쾌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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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한글) | 이쾌대 |
이름(한자) | 李快大 |
출생 | 1913년 |
사망 | 1965년 |
직업 | 화가 |
학력 | |
학교 | 데구 미술관 |
사조 | |
사조 | 현대 미술 |
2. 생애
이쾌대는 경상북도 칠곡 출신으로, 이여성의 동생이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화단에 데뷔했고, 일본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이중섭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했다.[15]
광복 후 조선조형예술동맹, 조선미술동맹 등에서 활동했고, 1948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16]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 점령하의 서울에서 조선미술동맹 활동을 하다 대한민국 국군에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953년 남북 포로 교환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택했다.
북한에서 '전후 건설성 미술제작소', '조선미술가동맹' 등에서 활동하며 <3.1 운동> 등을 그렸고,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도 창작했다. 1958년 이여성 숙청으로 활동에 타격을 입었으나, 조중(朝中) 우의탑(友誼塔) 벽화 제작에 참여했다.[17]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913-1938)
경상북도 칠곡에서 창원 현감을 지낸 대지주 이경옥의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14] 맏형 이여성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미술, 복식사, 민속사에 관심을 가졌다. 1928년 대구 수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미술 교사 장발에게 미술을 배웠다.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화단에 데뷔했고, 같은 해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회화부 2등상을 수상했다. 1934년 일본으로 유학,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했다. 일본 유학 시절 백우회 및 재일본 한국미술가협회에서 활동했다.[5]
1933년에는 유갑봉(柳甲鳳, 1914–1980)과 결혼했다.[7] 유갑봉은 이쾌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의 모델이 되었다.[7]
2. 2. 한국에서의 활동과 월북 (1938-1953)
1938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쾌대는 1941년 이중섭, 최재덕, 문학수, 김종찬, 김학준, 진환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했다.[15]해방 이후 1946년 조선조형예술동맹 회화부 위원과 조선미술동맹 서양화부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연말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였다. 1947년 8월에는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5] 1948년에는 좌익 인사 사상 전향 기구인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하였다.[16]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 조선미술동맹에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국군에 체포되어 부산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7] 1953년 남북 포로 교환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택했다.[2][7][10]
이쾌대의 월북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다. 해방 이후 한국 전쟁 이전 기간 동안, 이쾌대는 작품 활동을 지속한 몇 안 되는 예술가 중 한 명이었으며,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은 "혼란스러운 사회적 무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그의 의지를 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10] 1948년 그의 형 이여성이 월북한 후, 이쾌대는 그의 이념적 신념 때문에 남한 당국으로부터 잦은 괴롭힘을 당했고, 반공주의 미술 작품과 포스터를 제작하도록 강요받았다.[7]
2. 3. 북한에서의 활동과 사망 (1953-1965)
1953년 남북 포로 교환 때 북한을 택했다. 이쾌대는 1954년부터 미술가로서 활동을 이어가 '전후 건설성 미술제작소'의 미술가, '조선미술가동맹' 평양시, 자강도 현역미술가로 선출되었으며, 1957년 조선미술가동맹 유화분과 임원에 선임되었다. 1958년에는 '동맹 역사편찬위원회'의 '해방 후 남반부 편집 그룹' 위원을 역임했다.[17]북한에서 알려진 이쾌대의 대표작은 <춘앵무>, <박연 초상>, <3.1 운동>, <농악>,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송아지> 등이 있다. <3.1 운동>은 1957년에 제작되어 뛰어난 이쾌대의 인물화 역량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예술 방면의 유일한 테제로 작용하자, 상당수 소련 리얼리즘 화풍을 연상시키는 다수 작품을 창작했다.[17]
1958년 종파분자 숙청사건에서 김두봉이 숙청되자, 이쾌대의 친형인 이여성이 숙청에 휘말리게 된다. 이는 이쾌대에게도 영향을 미쳐, 1950년대 이후부터 활동에 타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7]
이쾌대는 뛰어난 인물화 역량으로 조중(朝中) 우의탑(友誼塔) 벽화 제작에 참여하여 한국 전쟁 중 북한과 중국 우의를 벽화로 나타냈다. 총괄을 담당했으며, 당시 화가인 김진항, 류현숙, 민병제, 임병삼, 최창식, 한기석, 홍성철 등이 참여해 우의탑 좌측에 <전후복구건설 원조>를, 우측에 <조선인민군대와 중국인민지원군의 협동작전>을 묘사했다. 이후 조중 우의탑은 이쾌대 사후 1983년 김정일이 재건을 결정했고, 1984년 탑을 허물고 재건축했다. 현재 북한과 중국에서 방송으로 선보이는 조중 우의탑 벽화는 이쾌대가 총괄했던 벽화 형태만 띠고 있을 뿐, 그가 그린 게 아니다.[17]
북조선에서 발행하는 미술가사전인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 이쾌대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었으나, 이후 1999년 증보판에는 이쾌대를 소개하고 있다.[17]
북한의 한 뉴스 기사에서 이쾌대가 북한에서 재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고, 1965년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7]
3. 작품 세계
이쾌대는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나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 교사 장발에게 그림을 배웠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화단에 데뷔했고, 일본 제국미술학교 유학 후 1941년 이중섭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15]
광복 후에는 조선조형예술동맹, 조선미술동맹 등에서 활동했고, 1947년에는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을 맡았다.[16] 한국 전쟁 중에는 북한을 선택하여 미술가로 활동하며 '조선미술가동맹' 평양시, 자강도 현역미술가로 선출되기도 했다.
북한에서 이쾌대는 〈3.1 운동〉 등 뛰어난 인물화 역량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제작했다.[17]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화풍의 영향도 받았다. 그러나 1958년 종파분자 숙청사건으로 형 이여성이 숙청되면서, 이쾌대 역시 활동에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쾌대는 조중(朝中) 우의탑(友誼塔) 벽화 제작에 총괄로 참여하여 한국전쟁 중 북한과 중국 우의를 묘사하기도 했다.[17]
3. 1. 주요 작품 경향
서사적이고 장엄한 화풍으로 '한국의 미켈란젤로'라는 별칭을 얻었다. 대표작으로는 〈군상〉 시리즈와 〈걸인〉, 〈조난〉, 〈운명〉 등이 있다.[14]이쾌대는 인물화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으며, 특히 〈군상〉 연작은 해방 전후의 사회상과 민족의 염원을 담은 대작으로 평가받는다. 1930년대와 40년대 한국 최고의 인물화가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10]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 작품으로 입선했다.[9][6] 일본의 민간 미술 공모전인 니카텐에서 '무희의 휴식', '운명', '저녁 소풍'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7]
그의 작품에는 아내 유갑봉이 모델로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한국 화가들에게는 드문 일이었다.[10] 이쾌대는 아내를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로 생각했다.[9] 대구미술관에 따르면, 이쾌대는 많은 자화상을 그렸으며 그중 4점이 현존한다.[1] 1930년대 대표작 중 하나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서양 미술과 한국 미술 양식이 혼합된 작품이다.[3] 그는 두루마기를 입고 서양식 모자를 쓴 채, 한 손에는 유화 팔레트를, 다른 한 손에는 한국 전통 붓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당당한 예술가로 묘사했다.[5][1][8]
해방 후, 이쾌대는 대규모 유화 작품인 ''군상'' 연작을 제작했다.[1] 각 연작은 일제강점기 또는 그 직후의 도전적인 시대에 대한 낭만주의적 감성과 정치적 활동성을 담고 있다. ''군상 IV''는 역동적인 움직임과 동작을 나타내는데, 오른쪽 상단에는 폭발과 혼돈이, 오른쪽 하단에는 공포에 질린 여인이 묘사되어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왼쪽에는 희망과 사랑의 징후가 나타나며, 사람들이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통해 새롭게 해방된 한국에 대한 이쾌대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8][1] 1939년 도쿄의 재일본 한국미술가협회에서 인정을 받은 ''두 사람의 초상''에서 이쾌대는 아내 유갑봉과 그녀의 그림자 속에 숨겨진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5][1]
이쾌대의 회화는 일제강점기 동안 "향토색(Hyangtosaek)"이라는 용어와 연관되어 있었는데, 이는 "지역색"과 "토지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향토색 회화는 이국적이고 전통적인 의례가 묘사된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담아냈다.[12][5]
3. 2. 대표작 분석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1930년대)은 서양화와 한국화의 융합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이 그림에서 이쾌대는 전통적인 한국 의상인 두루마기를 입고 서양식 모자를 쓴 채, 한 손에는 유화 팔레트를, 다른 한 손에는 한국 전통 붓을 들고 있다. 이는 서양 미술과 한국 미술 양식의 혼합을 상징한다.[3] 극적인 붓 자국이 보이는 얼굴 표현은 이쾌대의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며, 나무, 호수, 푸른 하늘 등 다채로운 배경은 그가 마음속에 그린 상상의 공간을 나타낸다.[5][1][8]〈군상〉 연작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격동기의 민중의 모습과 희망을 담은 대규모 유화 작품들이다. 특히 〈군상 IV〉는 역동적인 움직임과 동작을 통해 혼돈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8][1]
〈거지〉는 이쾌대가 인체 해부학과 움직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국 전쟁 이전,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연구소를 배회하는 거지를 그린 것으로, 붓의 압력을 이용한 강렬한 표현을 통해 거지 몸의 감정과 움직임을 강조했다.[1]
이쾌대는 아내 유갑봉을 모델로 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 〈두 사람의 초상〉과 〈고스톱 치는 부부〉가 대표적이다. 〈두 사람의 초상〉에서 이쾌대는 아내와 그녀의 그림자 속에 숨겨진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그림 밖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유갑봉은 직접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다.[5][1] 〈고스톱 치는 부부〉(1930년대)에서는 유갑봉과 이쾌대 모두 직접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1953년 남북 포로 교환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택한 이쾌대는 북한에서 〈3.1 운동〉 등을 제작했다. 〈3.1 운동〉은 1957년 제작한 작품으로, 뛰어난 이쾌대의 인물화 역량을 보여주는 작품이다.[17]
3. 3. 드로잉
이쾌대의 드로잉은 인물의 외모, 자세 및 몸짓을 탐구하면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묘사하고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일본 유학 시절 이쾌대는 누드 스케치와 드로잉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인물을 특징으로 하는 ''자화상''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인물 스케치를 제작했다.[1][3] ''거지'' 그림은 이쾌대의 인체 해부학과 움직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시이다. 한국 전쟁 발발 전인 1948년,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던 이쾌대는 연구소를 배회하는 거지를 그렸다. 붓의 압력으로 만들어진 강렬한 표현을 통해 이쾌대는 거지 몸의 감정과 움직임을 강조했다.[1] 한국 전쟁 중 이쾌대가 남한에 도착한 후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때, 그는 이주영을 포함한 동료 수감자들에게 예술적 해부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인체의 제스처, 비율 및 움직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드로잉 노트에 담았다. 그의 지식 상당 부분은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19세기 프랑스 예술 해부학을 기반으로 한 니시다 마사오키 교수에게 배운 기억에서 비롯되었다.[3]4. 유산 및 평가
이쾌대는 한국 전쟁 이후 북한으로 가면서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잊혔다. 그러나 1988년 그의 이름에 대한 금지 조치가 해제되면서, 그의 작품과 예술적 업적은 재평가되기 시작했다.[4] 그의 가족이 보존한 작품들은 대중에게 공개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8]
4. 1. 남한에서의 재평가
한국 전쟁이 끝날 무렵, 이쾌대는 아내와 네 자녀를 대한민국에 남겨두고 북한으로 갔다. 정확한 결정 이유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의 선택이 정부의 예술 활동 제한과 정치적 신념에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도 있다. 그 결과,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금지되고 공론의 장에서 배제되었다.[4] 1988년에 이르러서야 대한민국 정부는 이쾌대의 이름에 대한 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그의 예술적 기여에 대한 연구와 조사를 시작했다.[4] 이쾌대의 작품은 금지되었지만, 그의 가족은 그의 작품을 대한민국에 보존했고, 이는 결국 대중의 인정을 받고 호평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8]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은 1930년부터 1950년까지 이쾌대가 대한민국에 머무는 동안 제작한 약 400점의 작품을 전시하는 특별전을 개최했다. 또한, 이쾌대의 모든 드로잉과 메모를 담은 두 권의 완역본 도서가 있는데, 이 책들은 48페이지가 넘으며 인체 부위, 인체 골격, 근육에서 머리에 이르기까지 내용을 담고 있다.[3]
4. 2. 현대적 의의
이쾌대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격동기 한국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 역사적 기록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서양화 기법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정서와 주제 의식을 융합한 독창적인 화풍은, 한국 근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4]1988년 대한민국 정부가 이쾌대의 이름에 대한 금지 조치를 해제하면서, 그의 예술적 업적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4] 국립현대미술관은 2015년에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이쾌대가 대한민국에서 제작한 약 400점의 작품을 모아 특별전을 개최하기도 했다.[3]
5. 기타
이쾌대가 남북 포로 교환 당시 북한행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이 있다.[18] 1948년 그의 형이 북한으로 귀순한 후, 이념적 신념 때문에 남한 당국으로부터 잦은 괴롭힘을 당했고, 반공주의 미술 작품과 포스터를 제작하도록 강요받았다.[7] 한국 전쟁 중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7] 1950년 말, 대한민국 육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으며,[7] 3년 후 포로 교환 과정에서 대한민국에 가족을 남겨두고 북한으로 귀순하기로 결정했다.[2][7][10]
북한에서 이쾌대는 계속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형이 숙청된 후 미술계에서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북한의 한 뉴스 기사에서 이쾌대가 북한에서 재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고, 1965년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7] 한편, 유명한 한국 예술가 김창열은 이쾌대에게서 미술을 배웠다.[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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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Lee Qoede ! DAEGU A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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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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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Origin of Lee Quedae's Knowledge of Artistic Anatomy
2022-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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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sheds light on tragic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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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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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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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Quede A Legendary Painter Who Lived Through an Age of Turmo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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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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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tmuseum.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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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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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owned Painter of Water Drops Kim Tschang-Yeul Dies at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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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20세기 미술 거장’ 이쾌대 재조명
https://news.naver.c[...]
KBS
201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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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4> 이쾌대...인물 표정묘사·탁월한 조형감각 통해 고난받는 민족현실 적나라하게 표출
https://www.yeongnam[...]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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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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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https://portal.n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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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이쾌대 선생 월북은 이념 아닌 생존이었다
http://news.naver.co[...]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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