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오 하루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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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오 하루카게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우에스기 사다자네의 양자이자 나가오 다메카게의 아들이다. 사다자네의 딸과 결혼하고,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서 이름을 받아 하루카게로 불렸다. 1536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스가 산성 성주가 되었으나, 온건한 정책으로 인해 가신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동생인 나가오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가 두각을 나타내자 가신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1548년 가게토라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1553년 사망했다. 병약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가게토라에게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으나, 일반적인 견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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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오 하루카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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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나가오 하루카게 (長尾 晴景) |
출생 | 에이쇼 6년 (1509년) |
사망 | 덴분 22년 2월 10일 (1553년 3월 23일) |
초명 | 미치카즈 (道一丸), 사다카게 (定景) |
별명 | 야로쿠로 (弥六郎) |
계명 | 센간인덴 화가쿠코에이 (千巌院殿華岳光栄) |
관위 | 단조사에몬노조 (弾正左衛門尉) |
씨족 | 나가오 씨 |
가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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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
아버지 | 나가오 다메카게 |
어머니 | 조조 씨 (上条氏) (우에스기 단조쇼히쓰 (上杉弾正少弼)의 딸) / 다카나시 스미요리(高梨澄頼)의 딸 (또는 마사모리의 딸) |
형제자매 | 나가오 하루카게, 가지 하루쓰나 정실, 센토인 (나가오 마사카게 정실), 가게야스, 가게후사, 가게토라 (우에스기 겐신) |
배우자 | 정실: 우에스기 사다자네의 딸 |
자녀 | 사루치요, 딸 (우에스기 노부토라실) |
양자 | 가게토라 (실제 동생) |
정치 | |
막부 | 무로마치 막부 |
직위 | 에치고 슈고다이 |
주군 | 우에스기 사다자네 |
2. 슈고다이 계승
나가오 하루카게는 에치고 국의 슈고다이로, 우에스기 사다자네의 양자가 되어 그의 딸과 결혼했다.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아 '하루카게'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1536년에 아버지 나가오 다메카게에게서 가독을 이어받았으나, 1540년에 정식으로 가독을 계승했다는 설도 있다.[6] 가스가 산성의 성주가 된 하루카게는 아버지와 달리 온건 정책을 펼쳐 영내 고쿠진 세력과의 융화를 꾀하였으나, 덴분의 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 1. 가독 상속
어려서 주군 우에스기 사다자네의 양자가 되었다.[15] 헨기로 사다자네에게서 사다(定) 자를 받아 '''사다카게'''(定景)라고 이름을 고치고 사다자네의 딸과 결혼했다. 후에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서 헨기로 하루(晴) 자를 받아 '''하루카게'''(晴景)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1536년에 아버지 다메카게로부터 가독을 이어받아 가스가 산성 성주가 되었다.[6]2. 2. 온건 정책과 한계
다메카게와 달리 온건한 정책을 취하여 영내 고쿠진과의 융화를 꾀했다. 에치고의 쟁란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주군인 에치고 슈고 우에스기 사다자네가 다테 가문에게서 양자를 들이는 문제(덴분의 난)로 에치고 국내가 어지러울 때에 나카조 씨 등의 고쿠진들을 제압하지 못하였다.[15] 다테 가문의 내분 덕분에 슈고 우에스기 가문의 복권은 저지되었지만, 구로다 히데타다 등이 반란을 일으켜 에치고 국내의 정세는 점점 불온해졌다.3. 친동생 가게토라의 대두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 아래의 절에 출가해 있던 동생 호치요(후일 우에스기 겐신)가 환속하여 도치오 성 성주가 되어 반란을 진압하고 가문 내에서 명성을 높였다. 하루카게의 적자 사루치요는 요절했기에, 가신들 중 일부가 겐신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면서, 나가오 가문은 분열의 위기에 직면했다.
3. 1. 가게토라의 등장과 가문 분열
이러한 와중에 불문에 입문해 있던 동생 나가오 도라치요(나가오 가게토라, 나중에 우에스기 겐신)가 환속하여 도치오 성 성주가 되어, 반란을 진압하여 가문 내에서 명성을 드높였다. 이때 하루카게의 아들 사루치요는 요절하였으므로, 가신 일부 사이에서 가게토라의 옹립을 바라게 되어 나가오 가문은 분열의 위기를 맞이한다.[7]덴분 17년(1548년) 12월, 하루카게는 사다자네의 중재 하에 가게토라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한다. 최근에는 가게토라 옹립은 수호 권력의 부활을 꾀하는 사다자네가 개입했다는 설이 있으며, 종래에는 하루카게에 대한 반역으로 여겨져 왔던 구로다 히데타다의 반란 발생 시기가 늦춰짐에 따라 오히려 하루카게 옹호의 움직임(가게토라 타도)이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8]
3. 2. 가독 양도와 은거
이러한 와중에 불문에 입문해 있던 동생 나가오 도라치요(나가오 가게토라, 나중에 우에스기 겐신)가 환속하여 도치오 성 성주가 되어, 반란을 진압하여 가문 내에서 명성을 드높이자 가신 일부 사이에서 가게토라의 옹립을 바라게 되었다(하루카게의 아들 사루치요는 요절하였다). 나가오 가문은 분열의 위기를 맞이한다.1548년 12월, 하루카게는 사다미쓰의 중재 하에 경호에게 가독을 양위하고 은거한다. 최근에 경호 옹립은 수호 권력의 부활을 꾀하는 사다미쓰가 개입했다는 설이 있으며, 종래에는 하루카게에 대한 반역으로 여겨져 왔던 쿠로다 히데타다의 반란 발생 시기가 늦춰짐에 따라 오히려 하루카게 옹호의 움직임(경호 타도의 움직임)이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8]
1553년 2월 10일에 사망했다(향년 45세).
병약한 인물인 점이 겐신의 글 외에 여러 사료에서 전해지고 있다. 또 후대의 일부 사서에는 가게토라가 하루카게를 살해하고 가독을 빼앗았다는 기술도 있는데, 많은 사료와 다른 점이 있어서 창작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7]
4. 사망
1548년에 사다자네의 중개로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1553년 2월 10일에 사망했다(향년 42세).[1]
병약한 인물이었다는 점이 겐신의 글 외에 여러 사료에서 전해지고 있다.[1] 후대의 일부 사서에는 가게토라가 하루카게를 살해하고 가독을 빼앗았다는 기술도 있는데, 이는 많은 사료와 다른 점이 있어서 창작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1]
5. 인물
나가오 하루카게는 병약하여 전쟁보다는 예술을 더 좋아했던 인물로, 겐신의 서장 등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9] 동생 나가오 가게토라 (후의 우에스기 겐신)가 환속하여 도치오 성 성주가 되고 반란을 진압하며 명성을 얻자, 가신들 사이에서 가게토라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하루카게의 아들 사루치요는 요절했기 때문에, 나가오 가문은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1548년, 하루카게는 우에스기 사다자네의 중재로 가게토라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1553년 2월 10일에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
후대의 일부 사서에는 가게토라가 하루카게를 살해하고 가독을 빼앗았다는 기술도 있으나, 이는 다른 많은 사료와 상반되므로 창작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9]
하루카게는 아버지 나가오 다메카게와 주군인 우에스기 사다자네를 실력으로 몰아내고 에치고의 실권을 장악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다테 도키무네마루의 에치고 우에스기 씨 가입을 둘러싼 가내 대립을 배경으로, 하루카게는 반(反) 다메카게 파의 지지를 받아 다메카게를 몰아내고 가독을 빼앗았다는 설이 있다.[9] 또한, 덴분 11년(1542년) 4월 5일 자로 우에스기 사다자네가 정치에서 은퇴를 선언하기 위해 하루카게에게 보냈다는 기청문도 실제로는 하루카게가 군사력을 배경으로 사다자네를 압박하여 은퇴하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10]
참조
[1]
서적
総論 長尾為景の研究
戎光祥出版
[2]
서적
上杉謙信
高志書院
[3]
문서
上杉三代日記
[4]
서적
戦国の群雄
読売新聞社
[5]
문서
米沢藩諸士系図
[6]
학술지
戦国期越後における長尾晴景の権力形成ー伊達時宗丸入嗣問題を通してー
[7]
서적
北条氏康とその時代
戒光祥出版
2021-07
[8]
서적
上杉謙信
山川出版社
[9]
서적
総論 長尾為景の研究
戎光祥出版
[10]
서적
上杉謙信
山川出版社
[11]
문서
에이쇼 7년(1527년생 설도 있지만 신뢰성이 낮다)
[12]
문서
가게야스와 가게후사에 대해서 실존을 의심하는 설도 많다
[13]
문서
대일본사료, 우에스기 3대 일기, 호쿠에쓰 군담
[14]
서적
戦国の群雄
読売新聞社
[15]
문서
일본수필대성에 따르면 사다자네가 다메카게의 누이들과 결혼했을 때, 다메카게의 아들 로쿠로(六郞, 나중에 하루카게?)를 양자로 하기로 한 약속을 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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