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에 하루카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에 하루카타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오우치 씨의 중신이자 다이묘였다. 오우치 요시타카의 총애를 받았으나, 요시타카 사후에는 가문의 실권을 장악하고 오우치 요시나가를 옹립했다. 이후 모리 모토나리와 대립하여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결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수호대 - 슈고다이
슈고다이는 무로마치 시대에 수호를 대신하여 임국의 행정과 군사를 담당한 인물로, 점차 세습화되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으나, 국인과의 갈등, 내부 분열, 가신의 배신 등으로 흥망성쇠를 겪으며 전국 시대의 격변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 수호대 - 나가오 하루카게
나가오 하루카게는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우에스기 사다자네의 양자이자 나가오 다메카게의 아들이며, 가스가 산성 성주를 지냈으나 동생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1553년에 사망했다. - 스에씨 - 이쓰쿠시마 전투
이쓰쿠시마 전투는 1555년 모리 모토나리가 스에 하루카타의 오우치 씨 군세를 이쓰쿠시마에서 기습하여 크게 승리한 전투로, 모리 씨가 주고쿠 지방의 패권을 장악하는 발판이 되었으며 뛰어난 전략과 무라카미 수군의 협력이 주요 요인이었다. - 스에씨 - 스에 오키후사
스에 오키후사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스에 씨의 당주였으며, 오우치 가문의 중신으로서 오우치 요시오키를 보좌하고 아시카가 요시타네 옹립에 공헌했으며, 오우치 요시타카 시대에는 규슈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 문무를 겸비한 명장이다. - 스오국 사람 - 고다마 겐타로
고다마 겐타로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만주군 총참모장으로 러일 전쟁 승리에 기여하고 대만 총독으로서 식민 통치를 펼치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관여하는 등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모두 남겼다. - 스오국 사람 - 오우치 요시히로
오우치 요시히로는 규슈, 야마구치 등을 지배한 유력 다이묘로, 남조 세력 격퇴에 기여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와의 갈등으로 반란을 일으킨 후 사망했다.
스에 하루카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스에 다카후사 |
이명 | 니시고쿠 이치노 사무라이 다이쇼 (서국 제일의 사무라이 대장) |
출생 | 1521년 |
사망 | 1555년 10월 16일, 이쓰쿠시마 |
국적 | 일본 |
직업 | 스오의 슈고다이 |
활동 기간 | 불명 |
주요 업적 | 다이네이지 사건과 미야지마 전투 |
기타 이름 | 스에 다카후사 |
개인 정보 | |
씨족 | 다다라 성 오우치 씨 류 몬다 씨 → 다다라 성 오우치 씨 류 스에 씨 |
부모 | 아버지: 몬다 오키유키、어머니: 스에 히로모리의 딸 양아버지: 스에 오키후사、양어머니: 미기타 히로아키라의 딸 |
형제자매 | 몬다 다카모리, 다카후사(하루카타) 의형제: 스에 오키마사, 스에 다카노부 |
배우자 | 오가타(나이토 다카토키의 딸, 나이토 다카요의 누이) |
자녀 | 스에 나가후사、스에 사다아키라、스에 쓰루주마루? |
관직 | |
관위 | 종5위상 오와리노카미 |
생애 | |
주군 | 오우치 요시타카 → 요시나가 |
기타 정보 | |
사망 시 칭호 | 묘호: 다쿠신켄 료오 젠쿄 |
무덤 | 도운지 (히로시마현하쓰카이치시) |
2. 생애
스에 하루카타는 오우치 가문과 관련된 스에 가문에서 태어나 스오 국의 슈고다이로 봉사했다. 어린 시절에는 오우치 요시타카를 섬겼으며, 겐푸쿠 이후에는 요시타카의 이름을 따서 타카후사라는 이름을 받았다.
1539년 아버지 스에 오키후사가 병으로 사망하자 스에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 그는 유능한 가신으로서 서국 제일의 사무라이 대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540년부터 1542년까지 아마고 씨와의 전쟁에서 오우치 요시타카를 대신하여 장군으로 활동했다.[1] 그러나 1542년 오우치 군이 큰 피해를 입자 요시타카는 전쟁에 대한 관심을 잃고 문화 활동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문관인 사가라 타케토와 가까워졌고, 하루카타와 요시타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551년, 하루카타는 다이네이지 사건을 일으켜 사가라 타케토를 살해하고 요시타카를 자결하게 만들었다.[1] 이듬해 요시타카의 양자인 오우치 요시나가(오토모 소린의 이복형제 오토모 하루히데)를 오우치 가문의 가주로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이때 자신의 주군이 요시타카에서 하루히데로 바뀌면서 이름을 타카후사에서 하루카타로 변경했다. 이후 대규모 군사 확장을 실시했지만, 이는 오우치 가신들 사이에 불만을 야기했다.
1554년 이와미 국의 요시미 마사요리와 아키 국의 모리 모토나리가 하루카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오시키바타 전투에서 하루카타의 가신은 모리 모토나리에게 패했다.[2]
1555년, 하루카타는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모리 모토나리에게 패배한 후 자결했다.[3] 패배 후, 그의 아들 나가후사는 와카야마 성에서 자결했으며,[4] 오우치 가문은 크게 쇠퇴했다. 2년 후, 모리 모토나리는 오우치 가문을 멸망시켰다.
2. 1. 가독 상속
덴분 8년(1539년) 아버지 스에 오키후사(陶興房)가 병으로 죽자, 가독을 상속받았다. (단, 아버지 생전에 가독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1]2. 2. 오우치 요시타카 시기
덴분 9년(1540년) 아마고 하루히사가 요시다코오리 산성을 공격해 오자, 오우치 요시타카로부터 총대장의 권한을 받아 모리 모토나리의 원군으로써 덴분 10년(1541년) 1월에 아마고 군을 격퇴해 전공을 올렸다. (제1차 요시다코오리 산성 전투)덴분 11년(1542년)에는 거꾸로 아마고 가의 영지를 침공하였으나, 이때의 이즈모 원정에서 갓산토다 성 공격에는 실패하고(제1차 갓산토다 성 전투), 오우치 하루모치를 비롯해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이후 요시타카는 군사 방면에 흥미를 잃고 문화 활동에 기울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문관인 사가라 다케토가 요시타카와 가까워졌고, 하루카타와 요시타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덴분 14년(1545년) 요시타카의 친아들 요시타카(義尊)가 태어난 것을 계기로 사가라 다케토를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오우치 가문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덴분 17년(1548년) 요시타카가 종2위 관위에 위계되자, 다카후사도 종5위상에 올랐다. 하지만 같은 해 요시타카에 의해 사가라 다케토가 복귀하고, 다카후사는 문치파들에 의해 오우치 가문의 중심에서 배제되었다. 다카후사는 덴분 19년(1550년) 나이토 오키모리와 결탁해 사가라 다케토를 암살하려 했지만 이는 사전에 누설되었고, 다케토로부터 이를 전해 들은 요시타카는 다카후사를 추궁해, 사실상 오우치 집안에서 다카후사의 설 자리는 사라지게 되었다.
2. 3. 모반
덴분 20년(1551년) 1월, 사가라 다케토는 자신도 스에 다카후사(하루카타로 개명하기 전 이름)와 대립하며 파벌 싸움을 벌였던 것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할 것을 우려하여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서장을 올려, "스에 다카후사와 나이토 오키모리가 모반을 꾀하고 있으며, 그들과 다툰 책임은 스기 시게노리에게 있다"라고 참언했다.[1] 이를 계기로 요시타카와 다카후사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사가라 다케토가 8월 10일(9월 10일)에 스오에서 도망쳐 연락이 두절되면서 더욱 사이가 벌어졌다.8월 28일(9월 28일), 다카후사는 병력을 일으켜 오우치 가문의 거점인 야마구치를 공격했다. 9월 1일(9월 30일) 나가토의 다이네이지에서 요시타카를 자결하게 했고, 요시타카의 적자인 요시타카(義尊)까지 죽였다. 그리고 노가미 후사타다에게 명을 내려 지쿠젠을 공격해 사가라 다케토와 스기 오키쓰라도 찾아내 죽였으며, 난이 끝난 후에는 스기 시게노리도 죽였다.[1]
2. 4. 오우치 요시나가 옹립
1551년, 다이네이지의 변에서 사가라 타케토를 살해하고 오우치 요시타카를 자결하게 만든 스에 하루카타는[1] 다음 해에 요시타카의 양자인 오우치 요시나가를 옹립하였다. 오우치 요시나가(오토모 소린의 이복형제인 오토모 하루히데)는 오우치 씨의 가주가 되었고, 하루카타는 오우치 씨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1] 이때 하루카타는 자신의 주군이 요시타카에서 하루히데로 바뀌면서, 이름도 타카후사에서 하루카타로 변경했다.1552년 1월, 분고국의 오토모관에서 오토모 씨와 오우치 씨의 혼례 의식이 거행되었다. 오토모관에서는 오토모 요시시게(후의 오토모 소린)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오토모 하루히데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올라왔다. 그해 2월, 오토모 하루히데는 스오국에 들어갔다.[5]
요시타카의 양자인 오우치 요시나가(당시 분고국 오토모 씨 당주 오토모 요시시게의 이복 동생)를 오우치 씨의 새로운 당주로 옹립하고, 하루카타는 오우치 씨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 때 타카후사는 하루히데를 군주로 맞이하는 것을 안팎으로 알리기 위해, 하루히데로부터 새로운 한 글자("晴"자)를 받아 '''스에 하루카타'''(晴賢)로 이름을 고쳤다. 덧붙여, 오우치 하루히데는 이듬해 1553년에 "오우치 요시나가"로 개명했다.
그 후 오우치 가문의 문서에는 하루히데의 소매 도장에 하시즈메 아키자네, 이다 오키히데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서명이 보인다.[5]
2. 5. 모리 모토나리와의 대립
덴분 21년(1552년) 스에 하루카타는 오우치 요시타카의 양자인 하루후사를 새로운 당주로 옹립하여 오우치 가문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하루후사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자 자신의 이름도 하루카타로 바꾸었다.[1]그 후, 하루카타는 오우치 가문의 내부 결속을 목표로 철저하게 군비를 강화했지만, 이에 반발하는 영주들도 적지 않았다. 덴분 23년(1554년) 요시타카의 매부인 요시미 마사요리와 아키의 모리 모토나리가 반란을 일으켰다.[2] 하루카타는 무나카타 지방(지쿠젠 북부, 기타큐슈시 부근)을 영향 아래 두기 위해 무나카타 우지사다를 파견하고, 야마다 사건을 사주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하루카타는 즉시 요시미 마사요리 토벌에 나섰으나, 주력군이 이와미에 집결한 틈을 타 모리 모토나리가 아키 내부에 있던 오우치 가문의 성채 대부분을 함락시켰다. 하루카타는 미야가와 후사나가를 대장으로 군세를 아키로 보냈지만, 오시키바타 전투에서 대패하여 아키는 모리 가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3]
2. 6. 이쓰쿠시마 전투와 최후
고지 원년(1555년 10월 6일) 스에 하루카타는 2만~3만의 대군을 이끌고 아키국 이쓰쿠시마에 침공하여 모리 측 미야오성을 공략하려 했다. 그러나 모리 모토나리 편에 선 무라카미 수군에 오우치 수군은 패하였고, 모리 군의 기습으로 본진이 공격당하면서 하루카타는 패배했다(이쓰쿠시마 전투).[3]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하루카타는 이쓰쿠시마 섬에서 자결했으며, 향년 35세였다.[3] "무엇을 아쉬워하고 무엇을 원망하리요 원래부터 이 모습으로 정해진 몸인데"라는 사세구(죽기 전에 남긴 시)를 남겼다.하루카타의 유해는 사쿠라오성에서 수급 검사를 거친 뒤 도운지에 묻혔다.[3]
3. 사후
하루카타 사후, 거성인 토다 와카야마성은 하루카타에게 살해된 스기 시게노리의 아들 스기 시게스케에게 함락되었고, 하루카타의 적자 나가후사는 자결했다.[4] 이후 오우치 씨는 급속히 쇠퇴하고, 1557년 모리 군에 의해 멸망했다. 이때, 나가후사의 장남 쓰루스마루(하루카타의 막내 아들이라고도 한다)는 순사했고, 도 씨의 적류는 완전히 끊어졌다.
4. 인물 및 평가
스에 하루카타는 "서국에서 비길 자 없는 사무라이 대장"(西国無双の侍大将)이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유능한 무장이었지만,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히로나카 다카카네의 진언을 무시하고 출전하여 대패하는 등 그릇이 부족한 면모도 보였다.[7]
직선적이고 독단적인 성격으로 오우치 요시타카와의 대립이나 문치파와 무단파의 갈등도 하루카타 자신의 성격이 원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냉혹한 일면도 있어서, 죄 없는 아사 단쇼(厚狭弾正)를 화형에 처하고, 그 직후 낙마 사고를 당했을 때 단쇼의 망령이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6]
의심이 많아 모리 모토나리의 계략에 빠져 유능한 부하 에라 후사히데를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즈모 원정에서 패퇴할 때 자신의 병량은 호위에게 주고 자신은 말린 멸치(干鰯)를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는 일화에서 보듯 신하를 아끼는 면모도 있었다.[7]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서양 문화에 대해 주의하라고 진언하는 등 나라를 지키려는 의식도 강했다.
하쓰카이치의 도운지에 하루카타의 묘소가 있지만, 에도 시대 역사서 『게이한 통지』에서 처음 언급되었을 뿐, 1618년 당시 기록에는 하루카타의 묘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루카타가 자결한 곳은 이쓰쿠시마 산중턱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모리 군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므로 모리 군이 하루카타의 수급을 확인하고 옮겼을 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5. 계보
스에씨는 오우치씨의 분가이므로 같은 시조를 가진다.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가 시조라고 전해지나, 임성태자의 실존 여부에는 의문이 있어 확정할 수는 없다. 일설에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제련기술자 집단인 도래인이라고도 한다. 그 후손이 스오 다타라하마에 기착해 오우치무라에 살았기 때문에 성은 다타라, 씨는 '''오우치'''로 했다고 전해진다.
6. 등장 작품
- 1993년 니혼TV에서 방영된 『쓰루히메 전기-코보 세토나이스 수군-』에서는 류 다이스케가 스에 하루카타 역을 연기했다.
- 1997년 NHK 대하 드라마로 방영된 『모리 모토나리』에서는 진나이 다카노리가 스에 하루카타 역을 맡았다.
- 2009년 NHK 대하 드라마 『천지인』에서는 가자마 토오루가 스에 하루카타 역을 연기했다.
6. 1. 드라마
참조
[1]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陶晴賢」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1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3]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日本の城がわかる事典「若山城」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1-13
[5]
문서
大分県史
[6]
문서
伽婢子
[7]
문서
정어리의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말린 것, 말린 정어리, 비료로 쓰인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