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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테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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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테아 왕국은 기원전 4세기부터 서기 106년 로마 제국에 병합되기 전까지 존재했던 아랍 왕국이다. 대상 무역으로 번영했으며, 수도 페트라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뛰어난 관개 기술로 사막에서도 물 부족을 해결했고, 로마와 대립하면서도 속국으로 존속했다. 106년 로마에 정복되어 아라비아 페트라에아 속주가 되었고, 페트라는 363년 지진으로 쇠퇴했다. 나바테아인은 아람 문자를 변형한 나바테아 문자를 사용했고, 두샤라를 주신으로 숭배했다. 건축 기술이 발달하여 알 카즈네와 같은 유적을 남겼으며, 현재 페트라, 마데인 살레, 보스라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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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테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국명나바테아 왕국
원어 명칭𐢕𐢃𐢋𐢈 (나바테아 문자)
로마자 표기Nabataean Kingdom
지도 정보
나바테아 왕국의 최대 강역
나바테아 왕국의 최대 강역
역사
존속 기간기원전 3세기 – 서기 106년
주요 사건기원전 90년: 오보다스 1세가 하스몬 왕조의 침략을 격퇴
서기 106년: 로마 제국에 의해 정복됨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페트라
인구
민족나바테아인
언어
공용어나바테아 아람어
토착어나바테아 아랍어
종교
종교나바테아 종교
통화
통화나바테아 데나리우스
역대 군주
아레타스 1세 (기원전 168–144년)
라벨 1세 (기원전 140–120년)
아레타스 2세 (기원전 120–96년)
오보다스 1세 (기원전 96–86년)
아레타스 3세 (기원전 86–62년)
오보다스 2세 (기원전 62–59년)
말리쿠스 1세 (기원전 59–30년)
오보다스 3세 (기원전 30–9년)
아레타스 4세 (기원전 9년 – 서기 40년)
말리쿠스 2세 (서기 40–70년)
라벨 2세 (서기 70–106년)
현재 국가
영토요르단
시리아
사우디 아라비아
이집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2. 역사

고대 중동의 교역로. 페트라는 대상들이 운반해 온 향신료가 가자 항구에서 유럽으로 운송되기 전 마지막 기착지였다.


나바테아 왕국은 기원전 168년 아레타스 1세를 초대 왕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원래 유목 생활을 하던 나바테아인들은 페트라에 정착하여 실크로드의 통상 요충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이들은 뛰어난 관개 및 저수 시설을 갖추어 사막 도시임에도 물 부족 문제를 해결했다.[14]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나바테아 왕국은 에돔인을 몰아내고 영토를 확보했으며, 로마 제국과는 대립을 피하며 국정을 안정시켰다.[14] 아레타스 1세 시대에는 이미 화폐 주조가 시작되었으며, 광범위한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누렸다.[11]

건국 초기에는 인근의 하스몬 왕조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대립에서 동맹을 맺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적대 관계로 바뀌었다. 가자 항은 유럽으로 향하는 대상 무역의 종착지였기 때문에 나바테아인의 영향력이 강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항쟁하던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오스는 기원전 100년경 가자가 이집트에 협력적이었다는 이유로 포위했고, 가자는 항복했다. 얀나이오스는 영토 확장을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을 따라 모압 북부와 길르앗, 나바테아 왕국 영토인 트란스요르단 북부를 점령했다.[11] 얀나이오스의 확장은 나바테아의 교역을 위협했고,[15] 오보다스 1세는 기원전 93년경 가다라 전투에서 얀나이오스를 격파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나바테아 왕국을 공격했지만,[16] 나바테아 왕국은 카나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12세를 물리치고 승리했다. 오보다스 1세는 나바테아인들에게 신으로 숭배받았고, 네게브 사막에 아브닷 신전이 세워졌다.[11]

기원전 1세기경부터 대상무역로를 따라 영토를 확장하여 아레타스 3세 시대(기원전 84년~기원전 62년)에는 다마스쿠스와 시나이 반도까지 영토에 편입하여 나바테아 왕국의 최대 판도를 구축했다.[17] 기원전 65년, 아레타스 3세는 하스몬 왕조의 요하네스 히르카누스 2세의 요청에 따라 유대 내전에 개입하여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25] 그러나 이듬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유대 내전에 개입하자 폼페이우스는 나바테아 군을 위협하여 이스라엘에서 철수시켰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 2세를 지원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포위전), 히르카누스 2세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힌 후 로마로 귀환했지만, 폼페이우스 휘하의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오리엔트 지방에 남아 나바테아 왕국을 침공했다. 페트라 코앞까지 다가온 로마군을 앞에 두고 아레타스 3세는 300탈렌트의 은을 지불하고 화해하여 나바테아 왕국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18]

로마 동전에 묘사된 아레타스 3세, 복종의 자세


아레타스 4세 시대(기원전 9년~서기 39년)에는 영토를 다마스쿠스에서 히자즈 지방까지의 사막 주변부와 네게브 지방까지 확장하여 메소포타미아, 남아라비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거의 모든 대상로를 장악했다. 아레타스 4세의 딸은 헤로데 왕조의 군주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시집갔지만, 헤로데가 딸과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결혼한 일로 유대 지방을 침공하여 헤로데 군을 격파했으며, 이 사건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25][19] 신약 성경의 고린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2에는 아레타스 4세가 다마스쿠스에서 바울을 붙잡으려고 시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을 로마의 속국이었던 나바테아 왕국이 붙잡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유대인이 나바테아 왕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20] 아레타스 4세의 이름을 새긴 비문에는 "인민의 친구(Philopatris)"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로마와의 우호를 나타내는 "로마의 친구", "황제의 친구"와 대구를 이루는 말이기 때문에, 이 시대의 나바테아 왕국은 로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추정된다.[20]

서기 1세기경, 홍해를 이용한 해상 무역이 주류를 이루면서 육상 교역로는 페르시아 만에서 시리아 사막을 넘어 지중해로 이어지는 경로가 활성화되었다.[21] 파르티아하트라나 시리아의 팔미라 등이 상업 도시로 부상하면서 나바테아 왕국의 중요성은 감소했다. 아라비아 반도 내 다른 아랍 부족과의 경쟁도 격화되면서 나바테아 왕국의 국력은 점차 쇠퇴했다.[17] 로마 제국은 나바테아인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시리아 속주데카폴리스를 편성했다.[27] 나바테아 왕국은 수도를 페트라에서 보스라로 옮겼지만 쇠퇴는 멈추지 않았다.[21]

106년 라벨 2세 소테르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페트라와 보스라를 정복하여 아라비아 페트라에아 속주로 병합했다.[22] 페트라는 363년 지진으로 대상로 기능을 상실하고 팔미라에 지위를 넘겨주며 쇠퇴했다. 보스라는 아라비아 페트라에아의 주도로 번영했다.[21]

2. 1. 기원과 초기 역사

나바테아인들은 아라비아 사막을 돌아다니며 가축과 함께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하는 여러 유목 베두인 아랍 부족들 중 하나였다.[1] 이들은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생활했고, 흉년에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다.[1]

나바테아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가설내용근거반박
예멘 기원설아라비아 반도 남서부 예멘 지역이 기원남부 아라비아의 신, 언어, 문자와 공통점 없음[1]
아라비아 반도 동해안 기원설아라비아 반도 동쪽 해안에서 기원
헤자즈 기원설헤자즈 지역에서 기원헤자즈의 고대 민족과 많은 신들을 공유, 부족 이름의 어근 자음 nbṭw가 헤자즈의 초기 셈어에서 발견, 신아시리아 제국 시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방언과의 유사성, "나바투"라는 집단이 아시리아인에 의해 반란 아랍 부족 중 하나로 언급[1]



이 중 헤자즈 기원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바테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헤자즈에서 북서부 아라비아와 오늘날 요르단 지역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1] 이들은 아시리아아슈르바니팔에게 패배한 "나바이트"나 히브리 성경의 네바요트와는 다른 집단으로 여겨진다.[1]

나바테아인들은 문자를 사용했지만, 역사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착지에서 발견된 수천 개의 비문과 주조된 동전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1] 아람어 오스트라카의 발견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속주 이두메아가 기원전 363년 이전에 세워졌음을 시사하며, 케다르인들이 반란에 실패한 후 나바테아인들이 그들을 대체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 기원전 400년 이후 페르시아가 에돔 왕국에 대한 관심을 잃으면서 나바테아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데단에서 가자까지의 유향 무역을 통제하게 되었다.[2]

나바테아인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언급은 기원전 30년경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쿨루스의 기록이다. 그는 300년 전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카르디아의 히에로니무스의 기록을 인용하여 나바테아인들이 물이 없는 사막에서 살아남는 방법과 적들을 물리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1] 또한, 기원전 312년에 그리스 장군 안티고노스 1세가 나바테아인들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는 기록을 남겼다.[1]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은 장군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알렉산더의 장군들 간의 갈등 동안 안티고노스는 레반트를 정복했고, 페트라 북쪽 에돔 지역까지 진출했다.[3]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안티고노스는 시리아페니키아 영토에 "나바테아인이라고 불리는 아랍인들의 땅"을 추가하려 했다.[4] 나바테아인들은 유향, 몰약 등 향신료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5]

안티고노스는 나바테아인을 습격하여 재산을 약탈하려 했지만, 나바테아인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역시 공격을 시도했지만, 나바테아인들은 연기 신호를 사용하여 적의 접근을 알리고, 가축과 소유물을 안전한 곳으로 분산시키는 등 효과적으로 대응했다.[2] 데메트리오스는 평화를 제안하고 철수했지만, 사해의 역청 매장량에 대한 보고는 안티고노스의 관심을 끌었다.[2] 이후 안티고노스는 카르디아의 히에로니무스를 보내 역청을 채취하려 했지만, 나바테아인들의 공격으로 실패했다.[2] 이 사건은 중동의 석유 제품으로 인해 발생한 최초의 분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6]

그리스 장군들 간의 전쟁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셀레우코스 제국 간의 분쟁으로 이어졌고, 이 분쟁은 나바테아인들이 에돔 너머로 왕국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7]

디오도로스는 나바테아인들이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상선을 공격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나바테아인들이 해상 무역에 대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일 수 있다.[8]

기원전 4세기 전후 1만 명 정도였던 나바테아인의 인구는 기원전 2세기경 20만 명 가까이 증가하여 인구 증가 문제를 겪게 된다.[9] 이들은 을 이용한 유목 생활을 했으며, 아랍 역사상 최초로 말을 도입한 민족으로 여겨진다.[9] 유목 생활로는 인구를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나바테아인들은 정착 생활로 전환하여 페트라에 정착했고, 기원전 168년에 아레타스 1세를 초대 왕으로 하여 나바테아 왕국이 성립되었다.[9]

2. 2. 발전과 번영



말을 이용한 무역을 하던 나바테아인이 정착하면서 실크로드의 통상 요충지였던 페트라는 대상 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뛰어난 관개・저수 시설을 갖추어 사막 도시임에도 물 부족을 겪지 않았다고 한다.[14]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나바테아 왕국은 페트라에서 에돔인을 몰아내고 영토 지배를 굳건히 하는 한편, 로마 제국과는 대립을 피하며 국정을 안정시켰다.[14] 아레타스 1세 시대에는 이미 화폐 주조가 시작되었으며, 광범위한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누렸다.[11]

건국 초기부터 인근의 하스몬 왕조와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대립에서는 동맹을 맺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적대 관계로 바뀌었다. 유럽으로 향하는 대상 무역의 종착지가 가자 항이었기 때문에 가자에서는 나바테아인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항쟁하던 하스몬 왕조의 왕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오스는 기원전 100년경 가자가 이스라엘보다 이집트에 협력적이었다는 이유로 가자를 포위했고, 가자는 얀나이오스에게 항복했다. 얀나이오스는 영토 확장을 위해 군사 작전을 시작하여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을 따라 모압 북부와 길르앗, 그리고 나바테아 왕국 영토인 트란스요르단 북부를 점령했다.[11] 이러한 얀나이오스의 확장 정책은 나바테아의 교역 관계자를 위협했기에,[15] 지역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당시 국왕 오보다스 1세는 하스몬 왕조와의 전쟁을 감행하여 기원전 93년경 가다라 전투에서 얀나이오스를 격파했다. 이후 나바테아 왕국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은 셀레우코스 제국은 나바테아 왕국을 공격했지만,[16] 나바테아 왕국은 카나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12세를 물리치고 승리했다. 이 승리로 오보다스 1세는 나바테아 국민들에게 신으로 숭배받게 되었고, 네게브 사막에 그를 기념하기 위한 아브닷 신전이 세워졌다.[11]

2. 3. 로마 제국과의 관계 및 멸망

로마 제국 최대 영토 지도, 트라야누스의 나바테아 정복 지역을 붉은색으로 표시


기원전 1세기경부터 대상로를 따라 영토를 확장하여 기원전 84년부터 기원전 62년에 걸친 아레타스 3세 시대에는 다마스쿠스와 시나이 반도까지 영토에 편입하여 나바테아 왕국의 최대 판도를 구축했다.[17] 기원전 65년, 아레타스 3세는 하스몬 왕조의 요하네스 히르카누스 2세의 요청에 따라 유대 내전에 개입하여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25] 그러나 이듬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유대 내전에 개입하자 폼페이우스는 나바테아 군을 위협하여 이스라엘에서 철수시켰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 2세를 지원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포위전), 히르카누스 2세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힌 후 로마로 귀환했지만, 폼페이우스 휘하의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오리엔트 지방에 남아 나바테아 왕국을 침공했다. 페트라 코앞까지 다가온 로마군을 앞에 두고 아레타스 3세는 300탈렌트의 은을 지불하고 화해하여 나바테아 왕국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18]

기원전 9년부터 서기 39년까지의 아레타스 4세 시대에는 그 영토를 다마스쿠스에서 히자즈 지방까지의 사막 주변부와 네게브 지방까지 확장하여 메소포타미아, 남아라비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거의 모든 대상로를 장악했다. 아레타스 4세의 딸은 헤로데 왕조의 군주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시집갔지만, 헤로데가 딸과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결혼한 일로 유대 지방을 침공하여 헤로데 군을 격파했으며, 이 사건은 예수세례를 행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25][19] 신약 성경의 고린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2에는 아레타스 4세가 다마스쿠스에서 바울을 붙잡으려고 시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을 로마의 속국이었던 나바테아 왕국이 붙잡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유대인이 나바테아 왕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20] 아레타스 4세의 이름을 새긴 비문에는 "인민의 친구(Philopatris)"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로마와의 우호를 나타내는 "로마의 친구" "황제의 친구"와 대구를 이루는 말이기 때문에, 이 시대의 나바테아 왕국은 로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추정된다.[20]

서기 1세기경이 되자 아라비아 반도 서부를 통과하는 교역 루트는 홍해를 이용한 해상 무역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육상 교역로로서는 페르시아 만에서 시리아 사막을 넘어 지중해 지역으로 이어지는 교역로가 활성화되었다.[21] 그 때문에 파르티아하트라나 시리아의 팔미라 등 페르시아 만 루트상의 도시가 상업 도시로 부상하면서, 상대적으로 나바테아 왕국의 상업 도시로서의 중요성은 감소했다. 또한 아라비아 반도 내의 다른 아랍 부족과의 경쟁도 격화되면서 나바테아 왕국의 국력은 점차 쇠퇴했다.[17] 로마 제국은 나바테아인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나바테아 왕국에 인접한 시리아 속주데카폴리스를 편성했다.[27] 이후 나바테아 왕국은 수도를 페트라에서 보스라로 옮겼지만 쇠퇴는 멈추지 않았다.[21]

106년에 나바테아 왕국의 왕 라벨 2세 소테르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나바테아 왕국의 주요 도시였던 페트라 및 보스라를 정복하여 아라비아 페트라에아 속주로 병합했다.[22] 나바테아 왕국의 멸망 후에도 나바테아인의 근거지였던 페트라는 아라비아 페트라에아의 한 도시 (주도였다는 설도 있다[23][24])로서 세력을 유지했지만,[17] 363년에 발생한 대지진의 영향으로 페트라는 대상로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육상 교역의 요충지로서의 지위를 팔미라에 넘겨주면서 점차 쇠퇴하게 된다. 한편, 아라비아 페트라에아 병합 직전에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가 된 보스라는 이후 아라비아 페트라에아의 주도로 번영했다.[21]

3. 정치

나바테아 아랍인들은 갑작스럽게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두 단계를 거쳐 성장했다.[2] 첫 번째 단계는 기원전 4세기로, 당시에는 원로원 회의가 통치했으며,[3] 나바테아인들은 무역로와 다양한 부족, 마을에 대한 통제력을 키웠다. 기원전 4세기 말, 안티고노스의 작전을 통해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나바테아인들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며, 제논 파피루스는 기원전 3세기 중반에 나바테아인들이 하우란에 침투했음을 증명한다.[4] 또한, 나바테아인들은 아라바를 넘어 서쪽으로 네게브 사막 지대로 이동했다.[5] 초기 역사에서 나바테아인들은 더 큰 세력에 맞서 영토를 성공적으로 방어하면서 잘 조직된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었다.[6]

두 번째 단계는 기원전 3세기 중반에 나바테아 정치 국가가 창설된 것을 보여준다.[7] 왕권은 국가와 도시 사회의 특징으로 여겨진다.[8] 나바테아 왕권 제도는 무역 조직, 전쟁의 필수 불가결성,[9] 그리고 그리스 원정의 결과와 같은 여러 요인의 결과로 생겨났다. 초기 나바테아 왕에 대한 언급은 밀라노 파피루스에서 찾을 수 있는데, 어떤 나바테아 왕의 아라비아 기병대를 묘사하고 있다.[10] 스트라보에 따르면 나바테아 왕권은 효과적이었고, 나바테아 왕국은 "매우 잘 통치"되었으며 왕은 "백성의 사람"이었다.[11]

마카베오기 2서에서 "아랍인의 폭군"(기원전 169-168년)으로 언급된 아레타스 1세는 나바테아인의 첫 번째 명시적으로 명명된 왕으로 여겨진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인 야손은 그의 경쟁자에게 쫓겨 아레타스의 보호를 구했으나, 아레타스는 야손을 투옥했다.[12]

나바테아인들은 기원전 2세기에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들이 누렸던 광범위한 경제적, 정치적 독립성을 보여준다.[1] 페트라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문명 세계의 최고의 도시로 여겨졌다.[1]

3. 1. 왕권과 귀족

나바테아 왕국은 군주제였으나 상업 귀족이 큰 권력을 가지고 있어, 어느 정도 민주 정치에 가까웠다. 수도인 페트라 외의 각 도시에는 왕의 대관이 거주하며 정치를 행했다. 또한, 페트라에는 법원과 비슷한 것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 상당히 고도의 통치를 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2. 군사

나바테아 왕국은 기마대를 보유하여 대상로를 방어하고 주변국과의 전쟁에 활용했다.

건국 초기에는 하스몬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고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적대 관계로 변했다. 가자 항을 둘러싼 분쟁으로 하스몬 왕조의 왕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오스가 가자를 포위하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목과 나바테아 왕국 영토를 점령하자, 당시 국왕 오보다스 1세는 가다라 전투(기원전 93년경)에서 얀나이오스를 격파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이 나바테아 왕국을 공격했으나, 카나 전투에서 승리하여 오보다스 1세는 나바테아인들에게 신으로 숭배받았고, 네게브 사막에 아브다트 신전이 세워졌다.[11]

기원전 65년, 아레타스 3세는 하스몬 왕조의 내전에 개입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개입으로 철수했다.[25]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요하네스 히르카누스 2세를 왕위에 앉혔다. 폼페이우스의 부하는 나바테아 왕국을 침공했으나, 아레타스 3세는 300talent의 은을 지불하고 화해하여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18]

헤로데 왕조의 군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아레타스 4세의 딸과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결혼한 일로, 아레타스 4세는 유대 지방을 침공하여 헤로데 군을 격파했다.[25][19]

4. 경제

나바테아 왕국은 향료 무역과 관세 수입이 주 수입원이었고, 대부분의 나바테아인들은 대상 활동에 종사했다. 이들은 원래 유목 민족이었으나 정착 후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무화과 등을 과수 재배하고 가축을 길렀으며,[13] 생산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기도 했다.[9]

4. 1. 국제 무역

나바테아 왕국의 주요 수입원은 향료를 중심으로 한 무역과 교역에 따른 관세 수입이었다. 나바테아인 대부분은 대상 활동에 종사했다.[13] 원래 유목 민족이었던 나바테아인은 실크로드의 통상 요충지였던 페트라를 중심으로 정착하여 대상 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그들은 뛰어난 관개・저수 기술을 갖추어 사막 도시임에도 물 부족을 겪지 않았다고 한다.[14]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나바테아 왕국은 페트라에서 에돔인을 몰아내고 영토 지배를 굳건히 했다.[14]

유럽으로 향하는 대상 무역의 종착지가 가자 항이었기 때문에, 가자에서는 나바테아인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경부터 대상 무역로는 홍해를 이용한 해상 무역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육상 교역로로는 페르시아 만에서 시리아 사막을 넘어 지중해 지역으로 이어지는 교역로가 활성화되었다.[21] 그 때문에 파르티아하트라시리아팔미라 등 페르시아 만 루트상의 도시가 상업 도시로 부상하면서, 나바테아 왕국의 상업 도시로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4. 2. 농업

나바테아인은 원래 유목 민족이었으나 정착하면서 농업을 시작했다.[13] 포도, 무화과 등의 과수를 재배하고 가축을 길렀다.[9] 또한, 생산한 포도를 이용하여 와인을 만들기도 했다.[9]

5. 사회와 문화

알 카즈네


나바테아인은 고대 아랍인의 종교관을 바탕으로 오아시스의 풍요를 관장하는 두샤라를 주신으로 숭배했다. 두샤라는 "샤라 산의 분"이라는 뜻으로, 산악 신앙의 일종으로 여겨진다.[33] 두샤라 신전에는 스텔라(돌기둥)가 숭배 대상이었으며, 석주 숭배의 측면도 있었다.[35] 알라트, 마나트 등 아랍 전통 신들과 쿠투바라는 고유 신도 숭배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 문화의 영향으로 이 신들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습합되었다.[36] 이집트와도 교류하여,[37] 페트라알 카즈네에는 이집트 이시스 신을 본뜬 조각상도 있다.[30] 스트라본의 『지리지』에 따르면, 나바테아인은 종교 의식에서 향목을 태우고 태양을 숭배했으며, 신전 유적에서 향을 피운 대가 발견되어 향목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38]

나바테아 왕국은 에돔인의 거주지에 영토를 두었기 때문에 에돔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13] 에돔인에게 배운 도예 기술로 토기를 제작했다.[27] 시리아 남부와 시나이 반도를 지배하면서 로마 제국, 하스몬 왕조와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이들 국가의 문화적 영향도 크게 받았다.[17] 초기에는 조각 기술이 없었지만, 기원전 1세기 이후 로마의 영향을 받아 신상 등 다양한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다.[28]

건축 기술은 아시리아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으며, 페트라 등 나바테아 왕국 시대 유적은 아름다움으로 인해 현대에도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29][30] 권력 과시를 위해 웅장한 암굴 묘를 만들었는데,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에 등장하여 유명해진 알 카즈네가 대표적이다.[31][32] 이러한 암굴 묘를 포함한 나바테아 왕국의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요르단의 페트라, 사우디 아라비아의 마데인 살레, 시리아의 보스라)[33][34]

나바테아인은 종교 의식에서 향을 중요하게 사용했다. 스트라본의 『지리지』에는 나바테아인이 향목을 태우며 태양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전 유적에서 향을 피우는 대가 발견되기도 했다.[38] 또한, 도시에 정착한 나바테아인은 와인을 생산하여 자주 연회를 열었는데, 이들의 주연은 종교 의식과 결합되어 13명이 한 조를 이루어 회식을 하고, 술은 11잔 이상 마시지 않는 등 독특한 규칙이 있었다. 페트라 등의 유적에서는 이러한 연회 시설이 발견되었다.[9][39]

5. 1. 언어와 문자

나바테아인의 언어에 관해서는, 마카베오기 1, 2,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서 나바테아 왕국을 "아라비아의 왕"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발굴된 나바테아 문자 비문의 인명 연구에서 아라비아어의 특징이 현저하기 때문에 아라비아어의 한 갈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타바리 등의 아바스 왕조 시대 이후 이슬람권의 역사가들도 나바테아인을 아랍인의 한 갈래로 인식했다. 그들은 제국 아람 문자의 후신 중 하나인 나바테아 문자를 사용했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기원후 5세기경까지 시리아 북부에서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예멘에 걸친 넓은 지역에서 다수의 나바테아 문자 비문군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나바테아인의 활동 범위의 확산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비문군은 대부분 아람어로 쓰여 있다.

기원 전후부터 아라비아 반도에서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전역에 아랍계 여러 부족이 교역이나 정착 등으로 대거 진출했음이 알려져 있다. 이들 아랍계 여러 세력은 원래 완전한 독자적인 문자를 갖지 않았지만, 구어는 아라비아어 계통이었으나, 대부분 문어로서 아람 문자와 아람어를 차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바테아인 역시 마찬가지로 아람 문자를 독자적인 서체로 변화시킨 나바테아 문자를 사용하며, 아람어로 비문 등을 썼다. 오늘날의 아라비아 문자의 기원이 된 것은 4세기부터 5세기경에 아라비아 반도 서안의 히자즈 지방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나바테아 문자의 일종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5세기 이후부터 나바테아 문자나 최초의 아라비아 문자로 아람어가 아닌 아라비아어로 쓰인 비문이 나타난다. 1952년에 사우디 아라비아의 타부크 주에서 영국의 존 필비가 사모드어, 나바테아어의 새로운 비문 2500개를 수집했다.

그 외 페트라 주변에서는 남아라비아 문자라고 불리는 문자가 다수 발견되었으나, 어떤 경위로 나바테아인에게 전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5. 2. 종교

나바테아인은 고대 아랍인의 종교관을 바탕으로, 오아시스의 풍요를 관장하는 두샤라를 주신으로 숭배했다. 두샤라는 "샤라 산의 분"이라는 뜻으로, 산을 신성시하는 산악 신앙의 일종으로 여겨진다.[33] 두샤라 신전에는 스텔라(돌기둥)가 숭배 대상이었으며, 석주 숭배의 측면도 있었다.[35]

나바테아인은 알라트, 마나트 등 아랍 전통 신들과 쿠투바라는 고유 신도 숭배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 문화의 영향으로 이 신들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습합되었다.[36] 이집트와도 교류하여,[37] 페트라알 카즈네에는 이집트 이시스 신을 본뜬 조각상도 있다.[30] 스트라본의 『지리지』에 따르면, 나바테아인은 종교 의식에서 향목을 태우고 태양을 숭배했으며, 신전 유적에서 향을 피운 대가 발견되어 향목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38]

5. 3. 건축



나바테아 왕국은 에돔인의 거주지에 영토를 두었기 때문에 에돔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13] 에돔인에게 배운 도예 기술로 토기를 제작하기도 했다.[27] 시리아 남부와 시나이 반도를 지배하면서 로마 제국, 하스몬 왕조와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이들 국가의 문화적 영향도 크게 받았다.[17] 초기에는 조각 기술이 없었지만, 기원전 1세기 이후 로마의 영향을 받아 신상 등 다양한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다.[28]

건축 기술은 아시리아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으며, 페트라 등 나바테아 왕국 시대 유적은 아름다움으로 인해 현대에도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29][30] 나바테아 왕국은 권력 과시를 위해 웅장한 암굴 묘를 만들었는데,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에 등장하여 유명해진 알 카즈네가 대표적이다.[31][32] 이러한 암굴 묘를 포함한 나바테아 왕국의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요르단의 페트라, 사우디 아라비아의 마데인 살레, 시리아의 보스라)[33][34]

5. 4. 기타 문화

나바테아인은 에돔인에게서 배운 도예 기술을 바탕으로 토기를 제작하는 등 여러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27] 초기에는 조각 기술이 없었지만, 로마 제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기원전 1세기 이후에는 신상 등의 조각을 다수 만들기 시작했다.[17][28] 아시리아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건축 기술은 알 카즈네와 같은 아름다운 유적을 남겼으며, 이 유적들은 오늘날 관광 명소가 되었다.[29][30]

나바테아인은 종교 의식에서 향을 중요하게 사용했다. 스트라본의 『지리지』에는 나바테아인이 향목을 태우며 태양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전 유적에서 향을 피우는 대가 발견되기도 했다.[38]

나바테아인은 주연 문화를 발전시켰다. 원래 사막의 유목민은 음주 습관이 없었지만, 도시에 정착한 나바테아인은 와인을 생산하여 자주 연회를 열었다. 이들의 주연은 종교 의식과 결합되어 13명이 한 조를 이루어 회식을 하고, 술은 11잔 이상 마시지 않는 등 독특한 규칙이 있었다. 페트라 등의 유적에서는 이러한 연회 시설이 발견되었다.[9][39]

6. 나바테아 왕 목록

재위 기간이름비고
기원전 169년아레타스 1세
기원전 120/110년 - 기원전 96년아레타스 2세일부 자료에서는 아레타스 1세의 후계자로 언급된다.
기원전 96년 - 기원전 85년오보다스 1세
기원전 85/84년라벨 1세일부 자료에서는 아레타스 1세의 후계자로 언급된다.
기원전 84년 - 기원전 60/59년아레타스 3세기원전 62년에 로마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음 (기원전 63년부터 로마의 속국이 됨)
기원전 62/61년 - 기원전 60/59년오보다스 2세 (?)최근까지 존재가 불확실했다. 통치 기간은 아마 수개월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59년 - 기원전 30년말리쿠스 1세로마 및 헤로데 대왕의 속국
기원전 30년 - 기원전 9년오보다스 3세로마의 속국. 이전에는 오보다스 2세로 알려짐
기원전 9/8년 - 서기 39/40년아레타스 4세
풀두, 왕비서기 16년까지 화폐에 초상이 나타나지만, 몇 년 후 아레타스 4세가 발행한 화폐에는 두 번째 왕비 샤킬라트 1세의 초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서기 39/40년 - 서기 69/70년말리쿠스 2세
샤킬라트 2세, 왕비
서기 70/71년 - 서기 106년라벨 2세
가밀라트, 왕비

[25][26]

참조

[1] 서적 Petra and the Lost Kingdom of the Nabataeans https://books.google[...] I.B.Tauris 2016-07-08
[2] 문서 Diodorus Siculus, Book XIX, 95-100 https://penelope.uch[...] Loeb Classical Library edition 2019-12-27
[3] 서적 A History of the Jews Weidenfeld and Nicolson
[4] 서적 The Jewish War Penguin
[5] 서적 Rome in the East: The Transformation of an Empir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6-06-10
[6] 서적 Petra Aurum Press Ltd
[7] 서적 Jordan Rough Guides
[8] 서적 'Al Kanfei Yonah https://books.google[...] BRILL 2014-08-27
[9] 웹사이트 第1回 松戸オリエント協会セミナー 「オリエント文明と砂漠」 http://www.orient-ma[...] 松戸オリエント協会 2014-05-11
[10] 서적 Arabs in the Shadow of Israel: The Unfolding of God's Prophetic Plan for Ishmael's Line https://books.google[...] Kregel Academic 2016-07-08
[11] 서적 Petra and the Lost Kingdom of the Nabataeans https://books.google[...] I.B.Tauris 2016-07-08
[12] 서적 The Modern History of Jordan https://books.google[...] I.B.Tauris 2016-07-11
[13] 문서 徳永 (2012)
[14] 서적 遥かなる中東の風: 何者でもなく、いずこにもなく 文芸社
[15] 서적 The Jewish War Penguin
[16] 서적 Rome in the East: The Transformation of an Empir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6-07-10
[17] 문서 徳永 (2012)
[18] 웹사이트 THE WARS OF THE JEWS http://www.gutenberg[...] プロジェクト・グーテンベルク 2014-05-11
[19] 간행물 歴史的シリアをゆく:シリア・ヨルダン総合研究紀行 (シリア・ヨルダン総合研究特集号) https://doi.org/10.3[...] 専修大学人文科学研究所
[20] 웹사이트 ARETAS IV http://www.jewishenc[...] Jewish Encyclopedia 2014-05-11
[21] 문서 蔀 (2002)
[22] 문서 江添 (2010)
[23] 문서 江添 (2010)
[24] 웹사이트 ペトラ【Petra】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2014-05-11
[25] 웹사이트 The Nabatean Kings http://www.jewishvir[...] Jewish Virtual Library 2014-05-10
[26] 문서 Rulers and Governments of the World - Vol1, Earliest Times to 1491 Bowker Publishing Company Ltd
[27] 웹사이트 ペトラ 歴史と文化 http://jp.visitjorda[...] ヨルダン政府観光局 2014-05-10
[28] 문서 徳永 (2012)
[29] 문서 徳永 (2012)
[30] 웹사이트 世界遺産ライブラリー ペトラ http://www.nhk.or.jp[...] NHK世界遺産ライブラリー 2014-05-10
[31] 문서 徳永 (2012)
[32] 웹사이트 ヨルダン探訪 歴史と文化 http://jp.visitjorda[...] ヨルダン政府観光局 2014-05-10
[33] 문서 徳永 (2012)
[34] 웹사이트 イスラムの一族 千年の祈り ボスラ https://web.archive.[...] NHK世界遺産 世界遺産への招待状 2014-05-11
[35] 문서 徳永 (2012)
[36] 서적 徳永 (2012)
[37] 서적 徳永 (2012)
[38] 서적 徳永 (2012)
[39] 서적 徳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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