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베시마 나오히로 (18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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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베시마 나오히로(1846년)는 사가 번의 제11대 번주이자,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이다. 그는 1861년 아버지 나베시마 나오마사의 은퇴로 번주가 되었으며, 파리 만국 박람회에 아리타야키를 출품하는 등 번정 쇄신을 추진했다. 보신 전쟁에서 정부군에 합류하여 사가 번 병사를 이끌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군제 개혁과 해군 창설에 기여했다. 이탈리아 특명전권공사를 역임하고, 귀족원 의원, 궁중 고문관 등을 지냈다. 메이지 천황과 다이쇼 천황의 신임을 받았으며, 록메이칸 건설, 와세다 대학 설립에도 관여했다.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딸들은 일본 황실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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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베시마 나오히로 (184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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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나베시마 나오히로 |
다른 이름 | 나베시마 초쿠다이 |
일본어 표기 | 鍋島 直大 |
로마자 표기 | Nabeshima Naohiro |
다른 이름 | 나베시마 모치자네 |
일본어 표기 | 鍋島 茂実 |
국적 | 일본 |
출생일 | 1846년 10월 17일 |
사망일 | 1921년 6월 19일 |
아버지 | 나베시마 나오마사 |
배우자 | 나베시마 나가코 |
자녀 | 나시모토 이츠코 나베시마 노부코 |
관직 | |
사가 번주 | 재임 시작: 1861년 재임 종료: 1871년 전임: 나베시마 나오마사 후임: 없음 |
귀족원 의원 | 재임 시작: 1890년 2월 재임 종료: 1921년 6월 18일 |
원로원 의관 | 재임 시작: 1882년 5월 31일 재임 종료: 1886년 2월 15일 |
직책 | 주 이탈리아 왕국 특명전권공사 |
학력 | |
출신 학교 | 옥스퍼드 대학교 |
가문 | |
씨족 | 나베시마 씨 |
가몬 | Japanese Crest Nabesima Gyouyou.svg |
가몬 설명 | 나베시마 행엽 |
작위 및 훈장 | |
작위 | 후작 |
훈장 | 종1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
외국 훈장 | 대한제국 대훈위 이화대수장 |
가족 관계 | |
정실 | 나베시마 다네코 |
계실 | 나베시마 나가코 (구 히로하시 에이코) |
아들 | 나베시마 나오미쓰 |
아들 | 나오타다 |
형제 | 동생: 나베시마 나오토라 동생: 나베시마 나오토 |
친척 | 의형: 후지나미 고토타다 (귀족원 의원) 동생: 나베시마 나오토라 (귀족원 의원) 동생: 나베시마 나오토 (귀족원 의원) 의제: 히로하시 가타미쓰 (귀족원 의원) 사위: 마에다 도시쓰구 (귀족원 의원) 사위: 마쓰다이라 쓰네오 (참의원 의장) 사위: 야나기사와 야스시게 (귀족원 의원) 생질: 호소카와 모리타쓰 (귀족원 의원) 생질: 호소카와 모리나리 (귀족원 의원) 종형: 나베시마 나오아키라 (오키나와 현령) |
2. 생애
나베시마 나오마사 사가 번 제10대 다이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61년 부친 나베시마 나오마사가 은퇴하자 16세의 나이로 사가 번의 제11대이자 마지막 번주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 시기에는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사쓰마-조슈 동맹에 가담하여 사가 번 군대를 이끌고 메이지 천황을 지지했으며, 도쿠가와 막부 잔당 및 오우에쓰 열반 동맹과의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폐번치현으로 번주 자리를 반납한 후, 1871년부터 두 남동생과 함께 영국에서 유학했다.[1] 1880년에는 주 이탈리아 왕국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고, 1882년 귀국했다. 영국 체류 중에는 세인트 제임스 궁정의 일본 공식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원로원 의관, 궁중 고문관, 귀족원 의원 등 다양한 정치적 직책을 역임하며 메이지 천황과 다이쇼 천황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884년 7월 7일 화족령에 따라 후작 작위를 받았다.[1] 1911년부터는 고쿠가쿠인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다.
일본 황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둘째 딸 이츠코는 나시모토 모리마사 왕자와 결혼했으며, 이 결혼으로 태어난 손녀 마사코는 한국 이씨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되었다. 넷째 딸 노부코는 외교관 마쓰다이라 쓰네오와 결혼했고, 그들의 딸 세츠코는 지치부노미야 비가 되었다. 1921년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도쿄 아오야마 영원에 있었으나 후에 사가시의 가스가야마 묘소로 이장되었다.
2. 1. 막부 말기
1846년(고카 3년) 8월 27일, 나베시마 나오마사 사가 번 제10대 다이묘의 차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준이치로였으며, 이후 나오쓰나, 시게자네 등으로 불리다가 1868년부터 나오히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나오히로는 1849년(가에이 2년) 4세 때, 당시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우두를 번의 의사 이토 겐보쿠의 진언에 따라 접종받았다. 이는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데지마의 의사 오토 고토리에 모니케가 구해온 우두 묘를 나라바야시 소켄의 아들에게 시험 접종한 후 시행된 것이었다.1861년(분큐 1년)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로부터 이름 일부(시게)를 받는 편휘를 받았고 마츠다이라 성씨 사용을 허가받았다.[3] 같은 해 11월 20일, 아버지 나베시마 나오마사가 은거함에 따라 16세의 나이로 사가 번 제11대 번주 자리를 이어받았다. 번주가 된 후에는 번의 행정 개혁을 추진하고 산업 육성에 힘썼으며, 1867년에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 사가 번의 특산품인 아리타야키 도자기를 출품하기도 했다.
1868년(게이오 4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나오히로는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메이지 천황을 지지하는 사쓰마-조슈 동맹 측에 가담하여 사가 번의 병력을 이끌고 정부군으로 참전했다. 그는 도호쿠 지방으로 파병되어 각지를 전전했으며, 특히 간토 지방에서는 우에노 전투와 야스 야나다 전투 등에서 도쿠가와 막부 잔존 세력 및 오우에쓰 열반 동맹과 싸웠다. 같은 해 5월에는 시모후사노 진무부에 임명되어 시모사 국과 가즈사 국 지역의 관리를 맡았다. 그러나 시모츠케 국에서의 구 막부군과의 전투가 치열해지자, 사가 번 병력을 주둔시킨 채 6월에 진무부를 우츠노미야 성으로 옮겨 7월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2. 2.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에 참여하여 군제 개혁과 해군 창설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의정(議定)직 외국사무국 보좌, 요코하마 재판소 부총독, 외국관 부지사 등을 역임했다. 1868년 3월 26일, 아버지 나베시마 나오마사 대에 네덜란드에서 구입하여 메이지 정부가 징발한 군함 덴류마루를 타고 오사카 덴포잔 앞바다에서 열린 일본 최초의 "관함식"에 기함으로 참여했다. 1869년에는 반적봉환 상표서(上表書)에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사가) 4개 번의 번주 중 한 명으로 서명했다. 같은 해 의정관(議政官)이 행정관으로 통합될 때, 기존 31명의 의정 중에서 공선으로 선출된 4명의 의정(이와쿠라 도모미, 도쿠다이지 사네쓰네) 중 다이묘 가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되었다. 보신 전쟁에서의 공적으로 상전록 2만 석을 받았다. 이때 나오히로는 보신 전쟁에서 사망한 번 소속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사가현 호국 신사를 건립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사가 지번사가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처음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갔다가, 1873년에는 두 남동생 나오토라, 나오야스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4] 이 때문에 시마 요시타케, 에토 신페이 등이 일으킨 사가의 난 당시에는 일본에 없었다. 영국 유학 중이던 1876년에는 도쿄부 시부야정 오야마에 있던 기슈 도쿠가와가의 저택 부지를 매입하여, 메이지 유신으로 직장을 잃은 무사들을 모아 차 재배원 "쇼토엔(松濤園)"을 열었다. 이는 현재 도쿄도 시부야구 쇼토 지역과 나베시마 쇼토 공원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영국 체류 중 일본 정부에 의해 세인트 제임스 궁정의 일본 공식 대표로 임명되기도 했다.[1]
1878년 귀국하여 이듬해 외무성 어용계(御用掛)가 되었다. 1879년에는 와타나베 고키,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과 함께 도쿄 지학 협회를 설립했고, 도쿠다이지 사네쓰네, 데라시마 무네노리 등과 공동 경마 회사 설립에도 참여했다. 1880년 주 이탈리아 왕국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로마에 부임했다. 그의 둘째 딸 이토코는 이때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서 유래했다. 공사로서의 활동은 요코하마 상인 후시마 킨조의 이탈리아 방문 기록 등에 남아 있다.
1882년 귀국하여 원로원 의관, 궁중 고문관 등을 역임했다. 메이지 천황과 다이쇼 천황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883년에는 서양 문물에 밝은 인물로서 록메이칸 건설과 우에노 불인사 경마장 운영, 외국인 거류지 및 별장지 정비, 철도 건설, 서양 음악 보급 등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일본의 근대화 정책 추진에 기여했다. 부인 에이코와 함께 록메이칸에서 춤을 출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화족 중 한 명이었으며, 록메이칸의 무도 연습회 간사장을 맡기도 했다.
1884년 7월 7일 화족령에 따라 후작 작위를 받았다.[1] 1886년에는 대일본 음악회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1890년 2월에는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11월 29일 제국의회 개원식에서는 식부관 장관으로서 메이지 천황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도쿄 음악 학교 개교와 "주악당(奏楽堂)" 완공을 기념하는 개교 기념가 "미야코노하루(都の春)"의 가사를 작사하기도 했다.
와세다 대학의 대학부 설치와 이공과 증설을 위한 모금 활동에 협력했으며, 특히 이공과 신설 시에는 화족 중 가장 많은 금액을 기부하여 1908년 11월 야스다 젠지로와 함께 와세다 대학 최초의 교빈(校賓)으로 추대되었다.[5] 1911년에는 황전강구소 제4대 소장과 고쿠가쿠인 대학 학장에 취임했다.
일본 황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둘째 딸 이츠코는 나시모토 모리마사 왕자와 결혼했다. 이 결혼을 통해 나오히로는 두 명의 손녀를 두었는데, 첫째 손녀 마사코는 이씨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이다. 넷째 딸 노부코는 마쓰다이라 쓰네오와 결혼했으며, 그들의 딸 중 한 명인 세츠코는 지치부노미야 비가 되었다. 노부코는 또한 도쿠가와 이에마사의 딸 도쿠가와 토요코와 결혼한 아들 마쓰다이라 이치로를 낳았고, 이치로는 도쿠가와 종가 제18대 당주인 도쿠가와 쓰네나리의 아버지가 된다.
1921년 사망했으며, 향년 76세였다. 처음에는 도쿄 아오야마 영원에 묻혔으나, 2015년 나베시마 가문이 묘지를 정리하면서[6] 사가시의 가스가야마 묘소로 이장되었다. 사가 신사에서는 아버지 나오마사와 함께 모셔지고 있다.
'''성덕 기념 회화관 소장 그림 속 나베시마 나오히로'''
3. 가족 관계
- 아버지: 나베시마 나오마사 (1815–1871)
- 어머니: 하마(浜), 타키무라(Taki-mura) - 나베시마 시게하루의 딸
- 정실: 코마히메(駒姫), 타네코(胤子), 소시(琮子) (18??–1880) - 우메가이 미치젠의 딸.[29] 1864년 나오히로와 결혼하여 1870년 장녀 사에코를 낳았다. 1874년 남편 나오히로와 함께 유럽으로 건너가 서양 문화를 익혔으며, 1878년 귀국 후 1880년 병사했다.[30][31][32]
- 장녀: 사에코(朗子) (1870–1949) - 마에다 도시쓰구(가가번 마에다 후작가 초대 당주)의 후실
- 장남: 나오미쓰(直映) (1872–1943) - 부인 사다코(禎子)는 구로다 나가토모 (지쿠젠국 후쿠오카번주)의 딸.
- 계실: 나가코(栄子) (1855–1941) - 히로하시 다네야스의 딸. 전 남편은 이와쿠라 도모사다.
- 차녀: 이쓰코(伊都子) (1882–1976)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의 비. 딸 마사코 여왕(方子女王)은 대한제국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 이은(李垠)의 비가 되었다.
- 삼녀: 시게코(茂子) (1885–1920) - 처음 구조 미치자네와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이후 마키노 다다아쓰와 재혼했다.
- 사녀: 노부코(信子) (1886–1969) - 마쓰다이라 쓰네오(아이즈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아들)의 부인. 딸 세쓰코(勢津子)는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비가 되었다.
- 사남: 나오쓰네(直庸) (1889–1939) - 나베시마 나오타다(히젠국 가시마번주)의 양자로 들어갔다.
- 칠녀: 지카코(直子) (1894–1973) - 야나기사와 야스쓰구의 부인.
- 측실: 아사치요(朝千代) - 오키 마스토모(於置增伴)의 차녀.
- 차남: 데이지로(貞次郎) (1887–1920) - 해군 대위.
- 삼남: 노부타카(信孝) (1888–?) - 난부 노부카타의 딸에게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 오녀: 키쿠코(喜久子) - 요절.
- 육녀: 도시코(俊子) (1890–1985) - 마쓰다이라 유타카(다카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분가, 해군 대좌)의 부인.
- 오남: 데쓰오(哲雄) (1895–1938) - 부인은 나베시마 나오하루의 딸.
- 양자:
- 아쓰코(淳子) (1867–1941) - 아베 마사타케(가즈사국 사누키번주)의 계실. 나베시마 나오토라(하스이케번주)의 차녀.
4. 연표
종4위 하 시종 겸 시나노노카미에 서임 (이후 히젠노카미로 개칭).[7]
외국 사무국 권보(権補) 임명.[7] 요코하마 재판소 부총재 겸임.[7] 외국관 부지사 임명.[7]
정4위 하 우근위 권소장 서임.[7]
사가현 지사 임명.
지사직 사임 후 남동생 2명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1][7]
종3위 서임.
외무성 어용계(御用掛, 임시 고용직) 임명.[7]
5월 31일: 원로원 의관 임명, 식부두(式部頭) 겸임.[7][8][9]
10월 3일: 식부 장관(式部長官) 겸임.[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