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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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양수사는 1867년 상하이에 창설된 청나라의 해군 함대이다. 초기에는 영국인 오스본 대령이 지휘하는 근대 해군을 모델로 하였으나, 지휘권 문제로 해산되었다. 이후 증국번의 지휘 아래 재창설되어 장강 연안 방어를 담당했으며, 독일에서 순양함을 구매하고 자체 건조를 통해 전력을 강화했다. 청불전쟁에서 프랑스 해군에 맞서 싸웠으나, 청일전쟁 이후 북양 함대에 밀려 점차 쇠퇴했다. 20세기 초 청나라 해군 재편 과정에서 창강함대로 통합되었고,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해군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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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수사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존속 기간 | 1870년대 – 1909년 |
국가 | 청나라 |
소속 | [[파일:Imperial standard of the Qing Emperor.svg|23px]] 황제 |
군종 | 청나라 해군 |
유형 | 해군 |
주둔지 | 상하이 |
전투 | 청불 전쟁 청일 전쟁 |
명칭 | |
중국어 간체 | 南洋水师 |
설명 |
2. 전사(前史) · 오스본 함대 (아사본 수사)
청나라는 17세기에 성립된 초기부터 연안의 치안 유지를 위해 정크를 주축으로 하는 녹영 수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까지 거의 편성과 장비의 갱신이 이루어지지 않아,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영국·프랑스의 근대 해군에 참패했다.
1867년, 양강 총독 증국번은 상하이를 거점으로 남양함대를 창설하여 장쑤 일대와 장강 연안 방어를 담당하게 했다. 상하이의 강남 제조국은 복건함대의 복주선정국과 함께 중국의 주요 조선소로 성장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1880년대 초, 남양함대는 독일에서 구입한 순양함과 자체 건조한 포함 등 10여 척의 전력을 보유했다.[1]
1851년, 태평천국의 난으로 장강 하류 지역의 치안이 악화되자, 함풍제의 동생 공친왕은 강남 방어를 위해 고용 외국인에 의한 근대 해군 설립을 결정했다.
해군 운용은 영국 해군의 오즈번(아사본) 대령이 맡았으며, 그의 지휘 아래 영국에서 구입한 6척의 군함과 주로 영국인으로 구성된 600명의 승무원이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1863년, 수사의 지휘권을 둘러싸고 오즈번과 증국번 등 강남의 독무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다. 오즈번은 수사의 독립성을 요구하며 양보하지 않아 해임되었고, 함대는 해산되었다. 함선은 1865년까지 일본을 포함한 여러 외국에 매각되었다.
3. 남양함대의 창설과 발전
3. 1. 함대 구성
청나라의 근대 해군은 1866년부터 1871년에 걸쳐 각지의 독무에 의해 편성되었다. 이 때문에 각 수사는 황제를 따르는 청나라 해군의 한 함대인 동시에 각 지방 유력자의 사병(군벌)이기도 하여, 통일된 운용이 가능한지는 수사 간의 협상에 달린 미묘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 중 남양 수사는 1867년, 양강 총독 증국번에 의해 설립되어 상하이를 거점으로 장쑤 일대와 창장 연안의 방어를 담당했다. 상하이에는 증국번의 부하였던 이홍장이 1864년에 설립한 강남 제조국이 있어, 복건 함대의 복주선정국과 함께 중국의 대조선소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1880년대 전반, 남양 수사는 독일에서 구입한 순양함 "남침", "남예"와 국산 포함 10여 척으로 이루어진 전력을 보유했다. 그러나 1885년 청불 전쟁 발발 후, 남양 수사는 복건 수사의 구원 요청에 응하여 출격했지만, 도착 전에 복건 수사는 프랑스 함대의 공격으로 괴멸되었다(마강 해전). 남양 수사도 요격당하여 패주하였고, 포함 2척을 잃었다(석포 해전).
청불 전쟁 이후, 타이완의 영유와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일본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에 1885년 이후, 해군 예산은 이홍장의 북양 수사에 집중 투입되었고, 강남 제조국은 육군용 총포 증산이 우선시되면서 조선에서 철수했다. 이 때문에 이후 남양 수사는 큰 전력 변화가 없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도 남양 수사는 광동 수사처럼 북양 수사에 가세하지 않고, 타이완 방면의 경비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북양 수사가 괴멸되자, 남은 남양 수사는 청나라가 새롭게 독일·영국에 발주한 함정이 도착할 때까지 수 년 동안 청나라의 귀중한 해상 전력이 되었다.
3. 1. 1. 1884년 8월 남양 함대 구성
1885년 이전, 상하이를 거점으로 한 '''남양 함대'''는 중국의 4개 지역 함대 중 가장 규모가 컸다. 1880년대 초 남양 함대의 주력 함선은 복주 해군 공창에서 1884년에 완성된 현대적인 복합 순양함 ''개제'', 복주 해군 공창(1878년 및 1880년)에서 제작된 복합 슬루프 ''강제''와 ''징칭'', 그리고 1873년 강남 조선소에서 건조된 2800ton급 목조 증기 프리깃함 ''유위안''이었다. 원래 이 함대는 1879년에 완성된 강철 렌델 포보트 4척을 보유할 예정이었으나, 이홍장이 이 함선들을 북양 함대로 가져갔고, 그 대신 남양 함대에게 1876년부터 톈진에서 운용되던 4척의 철제 렌델 '알파벳' 포보트인 ''용양'', ''호위'', ''비정'' 및 ''책전''을 주었다.[1]
또한 이 함대에는 노후된 목조 포함인 ''조강'', ''측해'', ''위정'', ''정원''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처음 세 척은 강남 조선소 제품(1869년 및 1870년)이었고, 네 번째 함선은 1872년 복주 해군 공창에서 건조되었다. 1884년 함대에 속하거나 양쯔강에서 운용되던 다른 함선으로는 복주 해군 공창에서 건조된 복합 슬루프 ''초무''와 ''징칭''(1878년 및 1880년), 1872년 강남 조선소에서 건조된 2800ton급 목조 증기 프리깃함 ''하이안'', 복주 해군 공창에서 건조된 목조 수송선 ''원개''와 ''등영주''(1875년 및 1876년), 그리고 강남 조선소의 실험적인 제품으로 유럽인들이 '서방 세계의 공포'라는 별명을 붙인 소형 철갑선 ''진우''(1876년)가 있었다.
1884년 7월, 청불전쟁 직전, 남양 함대는 독일에서 건조된 강철 순양함 ''남예''와 ''남침''으로 강화되었으며, 이들은 1884년 3월 독일에서 출항했다.
1884년 8월 남양 함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이름 (병음) | 이름 (웨이드-자일스) | 한자 | 함종 | 건조 | 제원 |
---|---|---|---|---|---|
조강 | Ts'ao-chiang | 操江 | 목조 포함 | 1869, 강남 조선소 | 640ton, 9노트, Vavasseur영어 포 4문(16cm) |
측해 | Ts'e-hai | 測海 | 목조 포함 | 1869, 강남 조선소 | 600ton, 12노트, 12cm 포 15문 |
위정 | Wei-ching | 威靖 | 목조 포함 | 1870, 강남 조선소 | 1000ton, 12노트 |
하이안 | Hai-an | 海安 | 목조 증기 프리깃함 | 1872, 강남 조선소 | 2800ton, 12노트, 21cm 포 2문, 15cm 포 4문, 12cm 크루프 포 2문 |
정원 | Ching-yuan | 靖遠 | 목조 포함 | 1872, 복주 해군 공창 | 572.5톤, 8노트, Vavasseur영어 포 2문(16cm), 40파운드 포 2문 |
유위안 | Yu-yuen | 馭遠 | 목조 증기 프리깃함 | 1873, 강남 조선소 | 2800ton, 14노트, 21cm 포 2문, 15cm 크루프 포 4문, 12cm 포 20문 |
원개 | Yuan-k'ai | 元凱 | 목조 수송선 | 1875, 복주 해군 공창 | 1250ton, 10노트, 16cm 포 1문, 40파운드 포 4문 |
등영주 | Teng-ying-chou | 登瀛洲 | 목조 수송선 | 1876, 복주 해군 공창 | 1258ton, 10노트, 16cm 포 1문, 12cm 포 4문 |
진우 | Chin-ou | 金歐 | 철갑선 | 1876, 강남 조선소 | 상세 제원 미상 |
용양 | Lung-hsiang | 龍驤 | 철제 렌델 포함 | 1876, 미첼 & Co. | 319ton, 26.5톤 암스트롱 포 1문 |
비정 | Fei-t'ing | 飛霆 | 철제 렌델 포함 | 1876, 미첼 & Co. | 400ton, 9노트, 38톤 암스트롱 포 1문, 12파운드 포 2문 |
책전 | Ts'e-tien | 策電 | 철제 렌델 포함 | 1876, 미첼 & Co. | 319ton, 38.5톤 암스트롱 포 1문, 12파운드 포 2문 |
호위 | Hu-wei | 虎威 | 철제 렌델 포함 | 1876, 미첼 & Co. | 319ton, 26.5톤 암스트롱 포 1문 |
초무 | Ch'ao-wu | 超武 | 복합 슬루프 | 1878, 복주 해군 공창 | 1250ton, 11.5노트, 19cm 포 1문, 40파운드 포 4문 |
강제 | K'ang-chi | 康濟 | 복합 슬루프 | 1879, 복주 해군 공창 | 1200ton, 7인치 MLR 1문, 4.7인치 MLR 6문 |
징칭 | Cheng-ching | 澄慶 | 복합 슬루프 | 1880, 복주 해군 공창 | 1200ton, 7인치 MLR 1문, 4.7인치 MLR 6문 |
개제 | K'ai-chi | 開濟 | 복합 순양함 | 1884, 복주 해군 공창 | 2153ton, 15노트, 21cm 크루프 포 2문, 12cm 크루프 포 6문, 노르덴펠트 포 4문 |
남침 | Nan-ch'en | 南琛 | 강철 순양함 | 1884, Howaldt, 킬 | 2200ton, 15노트, 8인치 암스트롱 포 2문, 12cm 속사포 8문 |
남예 | Nan-jui | 南瑞 | 강철 순양함 | 1884, Howaldt, 킬 | 2200ton, 15노트, 8인치 암스트롱 포 2문, 12cm 속사포 8문 |
4. 청불전쟁 (1884-1885)
아메데 쿠르베 제독이 1884년 8월 23일 푸저우 해전에서 복건 함대를 공격하면서 프랑스와 청나라는 전쟁에 돌입했다. 남양 함대 사령관들은 함대를 분산시켜 상하이와 난징 병기창을 보호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두 곳은 향후 프랑스 해군의 공격 목표가 될 수 있었다. 렌델 포를 장착한 포함 '롱샹', '페이팅', '체뎬', '후웨이'는 상하이에 남아 있었고, 프리깃함 '하이안'은 돌로 채워져 프랑스군이 대규모로 나타날 경우 황푸강 입구에 침몰시켜 차단선으로 사용할 준비를 했다. 독일에서 건조된 순양함 '난루이'와 '난천'은 남양 함대의 다른 여러 함선들과 함께 난징으로 철수했다. 1884년 8월 말, 쿠르베 제독은 '파르세발'에게 상하이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 순양함 한 척은 전쟁 발발 후 일주일 동안 남양 함대의 사정권 안에 있었지만, 청나라 군은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1884년 8월 30일 밤, '파르세발'의 토넨스 대령은 우숭 요새의 포격을 뚫고 사상자 없이 공해로 탈출했으며, 남양 함대는 출항을 방해하지 않았다.[3]
1885년 2월, 남양 함대의 일부는 프랑스의 타이완 봉쇄를 뚫기 위해 출격 작전을 감행했다. 프리깃함 '유위안'과 복합 슬루프 '청칭'은 스푸 해전(1885년 2월 14일)에서 침몰했는데, '유위안'은 프랑스 어뢰 공격으로, '청칭'은 아군 오사로 침몰했다.[4]
5. 청불전쟁 이후의 발전
1884년~1885년 청불전쟁 중 석포 해전에서 패배하여 포함 2척을 잃었으나, 남양 함대는 꾸준히 함선을 확충하였다. 1885년 강남 조선소에서 강철 순양함 '보민'을 건조하였고, 1886년과 1887년에는 복주 해군 공창에서 복합 순양함 '징칭'과 '환태'를 건조하였다.[6]
그러나 청불전쟁 이후 타이완 영유권 및 조선 종주권 문제로 일본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1885년 이후 해군 예산은 이홍장의 북양 수사에 집중 투입되었다. 이에 따라 강남 제조국은 육군용 총포 증산을 우선시하게 되었고, 남양 함대는 큰 전력 변화를 겪지 못했다.
5. 1. 1885-94년 남양 함대 추가 함선
1885년 2월, 유원과 징칭의 손실로 인해 남양 해군 함대는 북양 해군 함대에 대한 우위를 잃게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이홍장이 북양 함대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남양 함대는 점차 그 우위를 잃어갔다. 1894년 청일 전쟁 직전에 북양 함대는 함선 수와 질에서 남양 함대를 압도했다.[6]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양 함대는 청불 전쟁 이후에도 신규 함선을 계속해서 확보했으며, 일부는 상당한 품질을 갖추고 있었다. 새롭게 추가된 함선 중 첫 번째는 1885년 강남 조선소에서 건조된 강철 순양함 바오민이었다. 그 다음으로 복주 해군 공창에서 제작된 복합 순양함 징칭과 환타이가 추가되었다 (1886년과 1887년).[6]
이름 (병음) | 이름 (웨이드-자일스) | 한자 | 설명 | 건조 | 제원 |
---|---|---|---|---|---|
바오민 (Baomin) | 파오-민 (Pao-min) | 保民 | 강철 순양함 | 1885년, 강남 조선소 | 1477ton, 16노트, 200파운드포 2문, 70파운드포 6문 |
징칭 (Jingqing) | 칭-칭 (Ching-ch'ing) | 靖清 | 복합 순양함 | 1886년, 복주 해군 공창 | 1477ton, 15노트, 15cm 크루프포 2문, 12cm 크루프포 5문 |
환타이 (Huantai) | 환-타이 (Huan-t'ai) | 寰泰 | 복합 순양함 | 1887년, 복주 해군 공창 | 1477ton, 15노트, 15cm 크루프포 2문, 12cm 크루프포 5문 |
6. 청일전쟁과 이후
청일 전쟁에서 남양함대는 타이완 방면 경비 임무를 수행하며 소극적인 역할에 그쳤다. 북양함대 괴멸 이후, 남양함대는 청나라의 유일한 해상 전력으로 기능했다.[1]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재건된 북양함대는 강남으로 패주했다. 19세기 말, 청나라 해군 재편 과정에서 남양함대는 다른 함대들과 통합되어 창강함대로 재편되었다.[1] 1909년 청나라의 수상 전력은 대형 함선을 집중 운용하는 순양함대와 소형 함선 위주의 창장 함대로 재편성되었다.[1] 신해혁명 이후 남양함대는 중화민국 해군으로 이어졌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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