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풍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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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풍제는 1850년 19세의 나이로 즉위한 청나라의 황제이다. 재위 기간 동안 태평천국의 난, 제2차 아편전쟁 등 국내외적 어려움을 겪었고, 러시아 제국과의 영토 분쟁으로 만주의 일부를 상실했다. 그는 1861년 열하에서 사망했으며, 아들 동치제가 즉위했지만 서태후가 섭정했다. 함풍제는 쇠퇴하는 청나라를 다스리며, 정무에 힘썼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과 국내 반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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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풍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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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함풍제 (咸豐帝) |
전체 이름 | 아이신 교로 이주 (愛新覺羅·奕詝) |
만주어 이름 | I ju (ᡳ ᠵᡠ) |
재위 기간 | 1850년 3월 9일 – 1861년 8월 22일 |
출생일 | 1831년 7월 17일 |
출생지 | 원명원, 베이징 |
사망일 | 1861년 8월 22일 |
사망지 | 피서산장, 열하 |
묻힌 곳 | 동릉, 정릉 |
배우자 | 효덕현황후 효정현황후 효흠현황후 |
자녀 | 동치제 고륜 영안공주 |
연호 | 함풍 (咸豐) |
묘호 | 문종 (文宗) |
시호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
만주어 시호 | Iletu hūwangdi (ᡳᠯᡝᡨᡠ ᡥᡡᠸᠠᠩᡩᡳ) |
만주어 묘호 | Wendzung (ᠸᡝᠨᡯᡠᠩ) |
만주어 연호 | Gubci elgiyengge (ᡤᡠᠪᠴᡳ ᡝᠯᡤᡳᠶᡝᠩᡤᡝ) |
몽골어 연호 | Tügemel Elbegtü (ᠲᠦᠭᠡᠮᠡᠯ ᠡᠯᠪᠡᠭᠲᠦ) |
아버지 | 도광제 |
어머니 | 효전성황후 |
통치 | |
즉위 | 1850년 3월 9일 (도광 30년 1월 26일) |
계승자 | 동치제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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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치세
도광제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나 1850년 황위에 올랐다. 함풍제의 치세는 청나라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중 하나로, 내부 반란과 외부 열강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즉위 직후인 1851년 1월 11일에는 홍수전이 이끄는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여 청나라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 거대한 농민 반란은 십수 년간 이어지며 청나라의 통치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대외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압박이 거세졌다. 1856년부터 1860년까지 이어진 아로우 전쟁(제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청나라는 굴욕적인 조약을 연이어 체결해야 했다. 1858년에는 톈진 조약을 맺어 베이징에 외국 공사관 설치를 허용하고, 기독교 포교와 아편 무역을 공인하는 등 막대한 이권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러시아 제국과는 아이군 조약을 체결하여 아무르 강 북쪽의 영토를 할양했다.
1860년, 영프 연합군은 베이징까지 침공했다. 함풍제는 숙순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친왕에게 수도를 맡기고 열하로 피난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베이징에 입성하여 황제의 여름 별궁인 원명원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결국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여 톈진을 추가 개항하고 영국에 구룡반도 남단을 할양했으며, 러시아에는 연해주 지역까지 넘겨주게 되었다.
이러한 내우외환 속에서 함풍제는 1861년 열하 피서산장에서 결핵으로 3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청동릉에 안장되었다.
함풍제는 재위 기간 동안 방대한 공문서를 직접 검토하고 결재하는 등 정무에 힘썼으며, 행정 부패를 개혁하고 숙순과 같은 인물을 등용하여 내정 개혁을 시도했다. 또한 만주족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증국번, 좌종당 등 유능한 한족 관료를 등용하여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나서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취미인 경극 관람을 즐겨 피난지에서도 계속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치세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 무력하게 굴복하고 막대한 영토와 주권을 상실한 시기로 기록되었다. 함풍제의 죽음은 이후 서태후가 공친왕과 손잡고 신유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청나라의 쇠락을 더욱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2. 1. 즉위 배경
함풍제는 청나라 제8대 황제 도광제(道光帝)의 네 번째 아들로, 1831년 베이징 북서쪽의 원명원(圓明園)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애신각라 이주(愛新覺羅 奕詝)이다. 어머니는 만주족 니오후루 씨(鈕祜祿氏) 출신의 효전성황후(孝全成皇后)로, 처음에는 권귀비(全貴妃)였다가 1834년 황후가 되었다. 함풍제는 문학과 행정 능력에서 대부분의 형제들보다 뛰어나다는 평판을 받았고, 이는 아버지 도광제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그를 후계자로 삼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함풍제는 10살 때 생모 효전성황후를 여의고, 이복동생 공친왕(恭親王) 애신각라 혁흔(愛新覺羅 奕訢)의 생모이자 도광제의 후궁이었던 효정성황후(孝靜成皇后) 보르지기트 씨(博爾濟吉特氏) 밑에서 양육되었다. 주요 형제로는 이복형 돈친왕(惇親王) 애신각라 이총(愛新覺羅 奕誴), 이복동생 공친왕 애신각라 혁흔, 순친왕(醇親王) 애신각라 혁현(愛新覺羅 奕譞) 등이 있다.
도광제는 여러 아들 가운데 네 번째 아들인 함풍제의 인품과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후계자로 결정했다. 이는 효정성황후의 친아들이자 함풍제보다 한 살 어렸던 공친왕 역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함풍제의 역량을 더 중시한 결과였다.
2. 2. 태평천국의 난과 내정 혼란
함풍제 재위 기간은 태평천국 운동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민란과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점철된 내우외환의 시기였다. 1850년 즉위 직후, 객가 출신 홍수전이 기독교 교리를 기반으로 태평천국을 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빠르게 확산되어 청나라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다. 1853년에는 남경이 함락되었고, 한때 베이징까지 위협받았으나 북벌 실패로 위기를 넘겼다. 함풍제는 증국번, 좌종당 등 한족 관료와 몽골족 장군 승격린친 등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태평천국 외에도 니안의 난, 묘족 반란, 빤타이 반란 등 여러 민란이 연이어 발생하여 청나라의 통치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내부 혼란과 더불어 서구 열강의 압박도 거세졌다. 1854년 영국, 프랑스, 미국은 난징 조약 개정을 요구하며 중국 내륙 및 연안 도시 개방, 양쯔강 자유 항행, 아편 무역 합법화, 외국 사절의 베이징 상주 등을 요구했다.[2] 1856년에는 미국 공사가 중국 전역 개방과 선교의 자유 등을 추가로 요구했으나, 함풍제는 이를 거부했다.[2]
결국 1856년, 해안에서 발생한 사소한 충돌을 빌미로 영국과 프랑스는 애로호 전쟁을 일으켰다. 함풍제는 여전히 중국의 우월성을 믿고 열강의 요구를 거부했으며, 협상을 위해 공친왕 이흔을 보냈으나 결렬되었다. 특히 1860년 9월, 협상 중이던 영국 외교관 해리 파크스가 청군에 억류되면서 상황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영프 연합군은 팔리카오 전투에서 승격린친이 이끄는 청군 주력 부대, 특히 정예 몽골 기병을 격파하고 10월 6일 베이징에 입성했다. 함풍제는 숙순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베이징을 공친왕에게 맡기고 연례 황실 사냥을 명분 삼아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피난했다. 10월 18일, 영프 연합군은 황제의 부재 속에서 원명원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 소식은 함풍제의 건강을 급격히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쟁 패배로 청나라는 불평등 조약을 연이어 체결해야 했다. 1858년 톈진 조약을 통해 베이징에 외국 공사관 설치, 기독교 포교 공인, 아편 수입 공인 등을 허용했다. 같은 해 러시아 제국과는 아이군 조약을 체결하여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무르 강 사이의 만주 땅을 할양했다. 1860년에는 베이징 조약을 통해 톈진 추가 개항, 영국에 주룽반도 할양 등을 인정했으며, 러시아에는 우스리 강 동쪽 연해주 지역마저 넘겨주었다. 러시아는 이 땅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했다.
열하로 피난한 함풍제는 건강 악화와 함께 통치력을 상실해갔고, 조정은 숙순, 재원, 단화 등이 이끄는 파벌과 서태후 및 공친왕 등이 이끄는 파벌로 나뉘어 대립했다. 결국 함풍제는 베이징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1861년 8월 22일, 결핵으로 30세의 나이에 피서산장에서 사망했다. 그의 치세 동안 청나라는 외세에 막대한 이권을 넘겨주었으며, 비록 증국번, 좌종당, 숙순 등을 등용하여 태평천국 진압과 일부 내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근본적인 국력 쇠퇴를 막지 못했다. 함풍제의 죽음은 이후 서태후가 신유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오랜 수렴청정을 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2. 3. 제2차 아편 전쟁과 서구 열강의 압력
함풍제 재위 기간은 태평천국 운동으로 인한 내부 혼란과 더불어 서구 열강의 거센 압박에 직면한 시기였다. 1854년 4월, 영국, 프랑스, 미국 공사는 광저우에서 양광총독 섭명침에게 난징 조약 개정을 요구했다. 주요 내용은 중국 내륙 및 연해 도시 전면 개방, 상선과 군함의 양쯔강 자유 왕래 허용, 아편 무역 합법화, 내륙 통관세 폐지, 외국 사절의 베이징 상주 등이었다.[2] 1856년 5월에는 미국 공사가 다시 공사의 베이징 상주, 중국 전역 개방, 기독교 선교의 자유 등을 요구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2]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856년 해안에서 발생한 사소한 사건을 빌미로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아편 전쟁(애로호 전쟁)을 일으켰다. 청나라는 톈진 근처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군사적 충돌 이후 협상을 시도했으나, 함풍제는 중국의 우월성을 믿고 서구 열강의 어떤 요구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협상을 위해 공친왕을 내세웠지만, 1860년 9월 18일 협상 중 영국 외교관 해리 파크스가 청군에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관계는 완전히 결렬되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 외곽으로 진격했다. 1860년 9월 21일 팔리카오 전투에서 승격린친이 이끄는 1만 명의 청나라 군대, 특히 정예 몽골 기병대는 연합군의 집중적인 화력 앞에 여러 차례 돌격을 감행한 끝에 완전히 궤멸되었다. 10월 6일 연합군은 베이징에 입성했고, 함풍제는 숙순 등의 건의에 따라 만리장성 너머 열하(피서산장)로 황실 사냥을 명목 삼아 피난길에 올랐다. 베이징을 맡은 공친왕은 연합군이 진입하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860년 10월 18일,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황제의 여름 별궁인 원명원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증거 인멸을 위해 불태웠다. 이 소식은 열하에 있던 함풍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전쟁 패배로 청나라는 굴욕적인 조약을 연이어 체결해야 했다. 1858년에는 제2차 아편 전쟁 중에 톈진 조약을 맺어 베이징에 외국 공사관 설치 허용, 기독교 포교 공인, 아편 수입 공인, 추가 항구 개항 등을 강요당했다. 같은 해 러시아 제국과는 아이군 조약을 체결하여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무르 강 사이의 만주 땅을 할양했다.
1860년 베이징이 점령된 후에는 공친왕을 통해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톈진 조약의 내용이 재확인되었고, 추가로 톈진 개항과 영국에 구룡반도 남단 할양이 이루어졌다. 또한 러시아는 이 조약을 통해 연해주(우스리 강 동쪽 지역)를 차지하고 이곳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했다.
열강의 침략과 연이은 불평등 조약 체결, 영토 상실로 국력이 크게 약화된 가운데, 함풍제는 건강 악화로 통치력을 상실해갔다. 조정 내에서는 숙순, 재원, 단화 등이 이끄는 파벌과 서태후(당시 의비)를 중심으로 융루, 예허나라씨 등이 결집한 파벌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다. 결국 함풍제는 베이징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861년 8월 22일,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결핵으로 3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치세는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막대한 영토와 주권을 상실한 시기로 기록되었다.
2. 4.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
함풍제 재위 기간 동안 청나라는 러시아 제국에 만주의 일부 영토를 넘겨주었다. 1858년, 제2차 아편전쟁의 혼란 속에서 러시아는 청나라와 아이군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무르 강 사이의 지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됐다. 이후 1860년에는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면서 우스리 강 동쪽 지역마저 러시아에 할양됐다. 러시아는 이 조약을 통해 획득한 영토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해 극동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다.2. 5. 신유정변과 함풍제의 죽음
1856년 이후 영국 및 프랑스와의 애로 호 전쟁이 격화되자, 1860년 함풍제는 열하(熱河)의 피서산장으로 피난을 갔다. 그 사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공세는 베이징까지 이르렀고, 별궁인 원명원이 전소되었다. 함풍제는 결국 피서산장에서 1861년 8월 22일, 과도한 향락과 결핵 등으로 인해 3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 그는 베이징 동쪽 125km 거리에 있는 청동릉의 정릉(定陵)에 안장되었다.함풍제는 사망 하루 전, 자신의 뒤를 이을 다섯 살 난 아들 재춘(載淳)의 섭정을 위해 8명의 고명대신(顧命大臣)을 임명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는 황제의 유고 시 어린 황제를 보좌하며 국정을 이끌도록 지명된 신하들이었다. 함풍제는 이 8명에게 섭정의 권한을 부여하였으나, 그들의 칙령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후궁이었던 의귀비(서태후)와 진황귀비(동태후)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는 권력 분산과 견제를 의도한 조치였으나, 결과적으로 권력 투쟁의 불씨를 남겼다.[1]
이름 | 만주 성씨 및 작위 | 비고 |
---|---|---|
재원(載垣) | 아이신기오로, 이혁친왕(怡親王) | |
단화(端華) | 아이신기오로, 정친왕(鄭親王) | 재원의 형제 |
경수(景壽) | 부차가(富察氏), 어전대신(御前大臣) | 도광제의 사위 |
숙순(肅順) | 아이신기오로, 협판대학사(協辦大學士),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 | 단화의 동생, 종인부 종령(宗人府 宗令) |
목음(穆蔭) | 탁화락(托和絡氏), 군기대신(軍機大臣) | |
광원(匡源) | 제남(濟南) 출신, 군기대신 | |
두한(杜翰) | 만주 정백기 한군 기인, 군기대신 | |
교유영(焦祐瀛) | 한족, 군기대신 |
함풍제는 효덕현황후, 효정현황후(동태후), 효흠현황후(서태후) 등 세 명의 황후를 두었다. 이 중 효흠현황후는 유일한 아들인 동치제를 낳았다. 여러 후궁 사이에서 융안고륜공주 등 자녀를 두었으나 아들 하나는 요절하였다. 또한 광서제와 영수고륜공주를 양자녀로 삼았다.
함풍제의 관이 베이징으로 운구되는 동안, 의귀비와 진귀비는 각각 서태후와 동태후가 되었다. 두 태후는 먼저 베이징으로 돌아가 함풍제의 동생이자 당시 외세와의 협상을 주도했던 공친왕 혁흔(奕訢)과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 이들은 고명대신들이 황제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권력을 독점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1861년 11월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켰다. 이 정변으로 고명대신 8인은 모두 축출되었고, 특히 숙순을 비롯한 핵심 인물들은 처형되거나 자결을 강요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1] 이후 서태후는 동치제의 수렴청정을 명분으로 동태후, 공친왕과 함께 권력을 장악했으며, 이후 약 47년간 청나라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는 청나라의 약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3. 가족 관계
함풍제의 자세한 가족 구성원은 아래 내용을 참고하라.
3. 1. 황후
3. 2. 후궁
'''황후'''
시호 | 성씨 | 생몰년도 | 자녀 | 비고 |
---|---|---|---|---|
효덕현황후 | 사크다 씨 (薩克達氏) | 1831년 ~ 1850년 | - | 함풍제가 황자 시절 맞이한 적복진(嫡福晉). 함풍제 즉위 전 사망하여 황후로 추존됨. |
효정현황후 | 뉴호록 씨 (鈕祜祿氏) | 1837년 ~ 1881년 | - | 함풍제의 계후.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 동태후)로 불림. |
효흠현황후 | 예허나라 씨 (葉赫那拉氏) | 1835년 ~ 1908년 | 황장자 동치제 | 이름은 행정(杏貞). 의귀비(懿貴妃)에서 황후로 추존됨.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 서태후)로 불림. |
'''황귀비'''
봉호 | 시호 | 성씨 | 생몰년도 | 자녀 | 비고 |
---|---|---|---|---|---|
여황귀비 (麗皇貴妃) | 장정황귀비 (莊靜皇貴妃) | 타타라 씨 (他他拉氏) | 1837년 ~ 1890년 | 황장녀 융안고륜공주 | 초봉 여귀인(麗貴人)[8] |
기황귀비 (祺皇貴妃) | 단각황귀비 (端恪皇貴妃) | 퉁기야 씨 (佟佳氏) | 1844년 ~ 1910년 | - | 초봉 기귀인(祺貴人)[9] |
'''귀비'''
봉호 | 성씨 | 생몰년도 | 자녀 | 비고 |
---|---|---|---|---|
민귀비 (玟貴妃) | 서가 씨 (徐佳氏) | 1835년 ~ 1890년 | 황차자 민군왕 (요절) | 초봉 민상재(玟常在)[10] |
완귀비 (婉貴妃) | 소초로 씨 (索綽絡氏) | 1835년 ~ 1894년 | - | 초봉 완귀인(婉貴人)[11] |
'''비'''
봉호 | 성씨 | 생몰년도 | 비고 |
---|---|---|---|
부비 (璷妃) | 여허나라 씨 (葉赫那拉氏) | 1841년 ~ 1895년 | 초봉 부귀인(璷貴人). 사후 황고부빈(皇考璷嬪)을 거쳐 황고부비(皇考璷妃)로 추증. |
희비 (禧妃) | 차하르 하탕춘 (察哈喇 海棠春) | ? ~ 1877년 | 초봉 희귀인(禧貴人). 사후 황고희빈(皇考禧嬪)을 거쳐 황고희비(皇考禧妃)로 추증. |
길비 (吉妃) | 왕가 씨 (王佳氏) | 1846년 ~ 1905년 | 초봉 길귀인(吉貴人). 사후 황고길빈(皇考吉嬪)을 거쳐 황고길비(皇考吉妃)로 추증. |
경비 (慶妃) | 장가 씨 (張佳氏) | 1840년 ~ 1885년 | 초봉 경귀인(慶貴人). 사후 황고경빈(皇考慶嬪)을 거쳐 황고경비(皇考慶妃)로 추증. |
'''빈'''
봉호 | 성씨 | 생몰년도 | 비고 |
---|---|---|---|
운빈 (雲嬪) | 무가 씨 (武佳氏) | ? ~ 1855년 | 함풍제가 황자 시절 맞이한 측복진(側福晉). 입궁 후 운귀인(雲貴人)으로 봉해졌다가 빈으로 진봉. |
용빈 (容嬪) | 이르건기오로 씨 (伊爾根覺羅氏) | 1837년 ~ 1869년 | 초봉 용상재(容常在) → 용귀인(容貴人) |
숙빈 (璹嬪) | 여허나라 씨 (叶赫那拉氏) | 1840년 ~ 1874년 | 초봉 숙귀인(璹貴人) |
옥빈 (玉嬪) | 여허나라 씨 (叶赫那拉氏) | 1843년 ~ 1863년 | 초봉 옥귀인(玉貴人) |
'''상재'''
봉호 | 성씨 | 생몰년도 | 비고 |
---|---|---|---|
평상재 (玶常在) | 이르건기오로 씨 (伊爾根覺羅氏) | ? ~ 1856년 | |
춘상재 (瑃常在) | 명암 씨 (暝諳氏) | ? ~ 1859년 | |
진상재 (鑫常在) | 대가 씨 (戴佳氏) | ? ~ 1859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