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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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다 사건은 1979년 9월 초등학교 1학년 여아가 살해된 사건이다. 피해자는 알몸 상태로 양손과 양발이 묶인 채 질식사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경찰은 지적 장애인 아오야마 다다시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경찰의 조서와 증거품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특히 피해자의 책가방과 핸드백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심에서 징역 12년이 선고되었고, 항소와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아오야마는 형기 만료 후 출소했으며, 재심을 청구했지만 사망했다. 이 사건은 증거 조작 의혹으로 인해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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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 사건 | |
---|---|
사건 개요 | |
사건 종류 | 살인 사건, 정신병에 의한 오심 사건 |
발생 위치 | 일본, 지바현, 노다시 |
발생 날짜 | 1979년 |
관련 인물 | 고이즈미 가즈오 (피해자) 스기야마 마사오 (범인으로 오인된 사람) |
재판 과정 | |
1심 | 무죄 |
2심 | 유죄 |
상고 | 파기환송 |
재심 | 무죄 |
노다 간장 노동 쟁의 | |
유형 | 노동쟁의 |
위치 | 일본, 지바현, 노다시 |
날짜 | 1922년 |
2. 사건의 발생
1979년 9월 11일, 초등학교 1학년(7세) 여자아이가 하굣길에 지바 현의 대나무 숲에 있는 오래된 우물터에서 알몸으로 양손과 양발이 묶인 채 질식사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1] 경찰은 시신 발견 상황 등으로 미루어 변태(성도착자)에 의한 범행으로 보고 수사를 시작했다.[2]
경찰은 1979년 9월 11일, 하굣길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가 대나무 숲 우물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자, 변태(성도착자)에 의한 범행으로 보고 수사를 시작했다. 현장 근처에 사는 지적 장애인 아오야마 다다시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내사를 진행했고, 사건 발생 18일 후인 1979년 9월 29일, 아오야마를 체포했다.
3. 경찰 조사
아오야마는 초기 혐의를 부인했으나, 경찰의 계속된 조사에 부분적으로 답변하기 시작했고, 경찰은 이를 토대로 조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이 조서는 앞뒤가 맞지 않고 사건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등 문제점이 많았다.
3. 1. 증거 조작 의혹
경찰은 9월 13일 발견된 피살자의 유류품 중 책가방을 유력한 증거품으로 제시하였다. 당시 책가방은 이름표 부분이 잘려나간 상태였는데, 잘려나간 부분을 아오야마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판명되어 경찰은 아오야마를 범인으로 의심하였다. 그러나 피살자의 책가방은 가품이었던 반면, 경찰이 제시한 증거품은 진품이어서, 경찰 측에서 증거품을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1992년 3월, 사건 당시 공개된 피해자 핸드백 사진과 현재 경찰이 보관하고 있는 핸드백에 차이점이 발견되었다. 핸드백은 당시 인기였던 캔디 캔디의 핸드백이었지만 모조품도 유통되었고, 공개된 것은 모조품일 가능성이 높았다. 경찰 보관품은 상표 등록도 명시된 정품이었기에, 경찰이 증거를 조작하고 아오야마의 자백을 유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사건 당시 핸드백 사진의 초점 흐림 때문에 재판에서 증거 조작이 인정되지 않아 유죄 판결을 뒤집지는 못했다. 그러나 억울한 누명 의혹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그 후에도 지원자들의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4. 재판
1980년 1월 28일, 지바 지방 법원에서 첫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는 지적 장애를 가진 아오야마에게 책임 능력과 소송 능력이 있는지가 주요 쟁점이었다. 경찰 측과 변호인 측은 각자 실시한 정신 감정을 근거로 이를 다투었으나, 재판부는 책임 능력 유무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심리를 진행했다. 1987년 1월 26일, 지바 지방 법원은 아오야마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4. 1. 항소 및 상고
변호인단은 도쿄 고등 법원에 항소했으나, 재판부는 변호인 측의 요구를 대부분 거부하고 1989년 6월 9일 항소를 기각했다. 변호인단은 경찰이 물증으로 채택된 피해자의 가방 일부를 조작했을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며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1993년 12월 20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12년 형을 확정했다.5. 형기 만료 이후
1994년 8월 14일, 아오야마는 형기 만료로 출소했다. 이후 재심을 청구하려 했지만 2010년까지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출소 후, 아오야마는 오사카의 지적 장애인 지원 센터에서 생활하였다. [3]
2014년 7월 14일, 아오야마는 지바 지방 법원 마츠도 지부에 재심을 청구했다.
2018년 9월 19일, 아오야마는 병으로 사망했다.
6. 사건의 의문점 및 사회적 영향
이 사건은 증거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뒤집히지 않아 억울한 누명에 대한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언론에서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사건의 진실 규명과 사법 시스템의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TV 아사히 계열의 『더 스쿠프』(2002년)와 『슈퍼 모닝』(2008년 9월 11일)에서 이 사건을 특집으로 다루며 지속적인 취재 상황을 방영하기도 했다.
6. 1. 남겨진 의문점
경찰은 사건 다음 날인 9월 13일에 피해자의 핸드백을 다른 소지품과 함께 발견했다. 빨간색 핸드백 뒷면 일부, 피해자의 주소와 이름이 적힌 부분만 잘려나가 있었다. 그 후 피의자의 "자백"대로 잘린 핸드백 일부가 발견되었고, 절단면도 일치하여 이것이 물증으로서 유죄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1]그러나 1992년 3월, 사건 당시 공개된 피해자 핸드백 사진과 현재 경찰이 증거품으로 보관하고 있는 핸드백에 차이점이 발견되었다. 핸드백은 당시 인기였던 캔디 캔디의 핸드백이었지만 모조품도 유통되었고, 공개된 것은 모조품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반해 경찰 보관품은 상표 등록도 명시된 정품이었기 때문에, 피의자에게 핸드백 조각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한 경찰이 새로 핸드백을 준비하여 조각을 잘라내고, 본래 증거품인 핸드백과 바꿔치기한 후, 자백을 통해 핸드백 조각을 피의자 A의 소지품에서 "발견"하여 비밀 폭로를 연출한 것이 아니냐는 증거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다.[1] 그러나 사건 당시 핸드백 사진이 다소 초점 흐림이었기 때문에 재판에서 인정되지 않아 유죄를 뒤집지는 못했다. 하지만, 억울한 누명의 의혹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며, 그 후에도 지원자들의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1]
한편, 2002년에는 TV 아사히 계열의 『더 스쿠프』에서 특집이 편성되었고, 그 후의 지속적인 취재 상황이 2008년 9월 11일 『슈퍼 모닝』에서 방영되었다(https://www.tv-asahi.co.jp/scoop/update/special_back/20020119_010.html 더 스쿠프).[1] 당시 담당 경찰관은 "증거 조작은 절대 없었다"라며 취재를 거부했다.[1]
참조
[1]
뉴스
"どうして俺が犯人になっちゃったのかな」野田事件・35年目の真実"
https://www.huffingt[...]
HUFFPOST SOCIETY -社会-
2014-07-31
[2]
뉴스
女児殺害で再審請求 証拠偽装の可能性 地裁松戸支部
http://www.chibanipp[...]
千葉日報
2014-07-15
[3]
뉴스
再審請求中の元受刑者病死、千葉 79年の女児殺害事件
https://www.nishinip[...]
201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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