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 피로스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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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코 피로스마니는 1862년경 조지아에서 태어나 1918년 사망한 조지아의 소박파 화가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으며, 검은 유포에 유화로 그림을 그렸다. 피로스마니는 조지아의 평범한 사람들과 일상생활을 주로 그렸으며, 1910년대에 그의 재능을 발견한 러시아 시인과 예술가들에 의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간판 제작, 건물 페인트칠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으며,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영양실조와 간부전으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작품은 조지아에서 국민 화가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생애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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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 피로스마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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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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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니콜로즈 아슬라니스 제 피로스마나슈빌리 |
다른 이름 | 니코 피로스마니 |
국적 | 조지아 |
생애 | |
출생 | 1862년 5월 5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트빌리스 주 미르자아니 |
사망 | 1918년 4월 9일 |
사망지 |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 트빌리시 |
활동 | |
분야 | 회화 |
사조 | 나이브 아트 |
교육 | 독학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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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피로스마니는 러시아 제국 치하 조지아 동부 카헤티 지방의 미르자아니 마을[9]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소규모 포도원과 가축을 소유한 농부였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두 누나와 함께 1870년 트빌리시로 이주했다. 트빌리시에서 부유한 가정의 하인으로 일하며 러시아어와 조지아어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1876년에는 잠시 고향 미르자아니로 돌아가 목동으로 일했다.
피로스마니는 독학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익혔으며, 특히 검은색 유포에 직접 그리는 것을 선호했다. 1882년에는 동료와 함께 간판 제작 화실을 열었고, 1890년에는 철도 차장으로 일했으며, 1893년에는 낙농장을 공동 설립하기도 했으나 1901년에 그만두었다. 평생 가난했던 그는 생계를 위해 건물 페인트칠이나 백색 도장 같은 일반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로 트빌리시 상인들의 주문을 받아 간판, 그림, 초상화를 제작하며 생활했다. 그의 그림은 지역에서 어느 정도 인기를 얻었지만(약 200점 현존), 전문 예술가들과의 관계는 불안정했으며, 그에게는 예술적 추구보다 생계 유지가 더 시급한 문제였다.
1918년 4월, 1918년 인플루엔자 유행의 여파 속에서 영양실조와 간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는 니노 묘지에 묻혔으나, 정확한 매장 위치는 기록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았다.
2. 1. 초기 생애 (1862년?~1890년)
니코 피로스마니는 러시아 제국 치하 조지아 동부 카헤티 지방의 미르자아니 마을[9] 농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니콜라이 아스라노비치 피로스마나슈빌리'''(Никола́й Асла́нович Пиросманашви́ли|니콜라이 아슬라노비치 피로스마나슈빌리ru)[10][11]였다. 그의 부모인 아슬란 피로스마나슈빌리와 테클레 토클리키슈빌리는 소규모 포도원과 소 몇 마리를 가진 가난한 농부였다. 피로스마니의 출생을 증명하는 공적 문서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생년월일은 불분명하지만, 1862년생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는 그가 철도 회사에 취직했을 때 제출한 기록을 토대로 추정한 것이다. 그는 가족의 차남으로 태어나 형 게오르기, 누나 마리암, 페페와 함께 자랐다.그러나 1870년경 아버지를 여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 형마저 병으로 잃으면서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피로스마니와 막내 여동생 페페는 이미 결혼한 맏누나 마리암에게 의지하여 1870년 트빌리시로 이주했지만, 마리암도 얼마 지나지 않아 콜레라로 사망했다. 이후 페페는 고향 카헤티로 돌아갔고, 홀로 남은 피로스마니는 1872년부터 트빌리시 기차역 근처 작은 아파트에 살며 아르메니아계 부유한 귀족 칼란타로프 가문에 하인으로 고용되었다[12]. 그는 칼란타로프 가문에서 숙식하며 조지아어, 아르메니아어, 러시아어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조지아의 고전 문학, 민화, 연극, 오페라 등을 접하며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다.
1876년, 피로스마니는 고향 미르자아니로 돌아가 목동으로 일했다. 이후 그는 점차 독학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익혔다. 특히 검은색 유포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을 선호했다. 1882년에는 마찬가지로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조지 자지아슈빌리와 함께 간판을 만드는 화실을 열었다. 1890년에는 잠시 철도 차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2. 2. 독학 화가의 길 (1890년~1910년)
칼란타로프 가문을 떠난 후, 피로스마니는 조지아 철도에서 제동수로 잠시 일하며 조지아 곳곳을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또한 자신의 가게를 열기도 했으나, 건강 문제와 원만하지 못한 대인 관계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는 생계를 위해 독학으로 익힌 그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그의 화풍은 원시주의(Primitivism) 또는 소박파(naive art)로 분류되며, 주로 들판의 동물이나 식탁에 둘러앉은 조지아인들의 소박한 일상을 주제로 삼았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조지아를 떠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 판매하는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물감이나 캔버스를 살 돈이 부족하여 값싼 테이블보용 검은색 방수포(клеёнка|클레욘카ru)를 캔버스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12]
2. 3. 국제적인 주목과 비극적 말년 (1910년~1918년)
러시아의 시인이자 미술 평론가 일리야 즈다네비치와 프랑스 출신 미셸 르당티크 등이 조지아를 방문했을 때 그의 재능을 발견하면서[12], 피로스마니는 러시아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이 알려졌지만, 소박한 화풍 때문에 신문 등에서는 유치한 그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트빌리시의 러시아 미래파 예술가였던[13] 즈다네비치 형제[14] 등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작품 수집을 시작했을 무렵[12], 그는 이미 만년에 접어들고 있었다.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혼란 속에서 간판을 그리는 일감마저 크게 줄어들었다. 1918년 4월,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영양실조와 간부전으로 고통받던 피로스마니는 1918년 봄 부활절 무렵, 실의와 빈곤 속에 트빌리시에서 사망했다. 이는 조지아 민주 공화국이 성립되기 직전이었다. 그는 니노 묘지에 묻혔으나, 정확한 위치는 등록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았다.
3. 작품 세계
1910년대에 들어 러시아 예술계에서 피로스마니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러시아 시인 미하일 르-단튀와 예술가 키릴 즈다네비치, 그리고 그의 형 일리아 즈다네비치는 피로스마니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특히 일리아 즈다네비치는 1913년 2월 13일 자 신문 ''자카프카스카야 레치''에 피로스마니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그의 그림을 모스크바에 알리려 노력했다. 1913년 1월 7일, 모스크바 신문 ''모스콥스카야 가제타''는 독학 화가들의 작품을 선보인 "미셴" 전시회를 소개하며 피로스마니의 작품 네 점("즈다네비치의 초상", "정물", "맥주 잔을 든 여자", "사슴")이 포함되었다고 보도했다. 이후 이 신문의 비평가들은 그의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평을 남겼다.
같은 해, 조지아 신문 ''테미''에도 니코 피로스마니와 그의 예술 세계를 다루는 기사가 실렸다. 1916년에는 디토 셰바르드나제가 설립한 조지아 화가 협회로부터 회의에 초대받는 등 교류가 시작되었지만, 그의 협회와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 "조지아 결혼"을 협회에 제출했으나, 한 회원이 그를 풍자하는 캐리커처를 게재하여 큰 불쾌감을 느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지속적인 가난 속에서 피로스마니는 평생 동안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인정을 거의 받지 못했다.
3. 1. 주제와 소재

피로스마니의 그림들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장소의 사회적 조건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는 상인, 가게 주인, 노동자, 귀족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피로스마니는 특히 자연과 시골 생활을 좋아했으며, 도시 풍경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는 평범한 조지아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생활에 매료되었고, 이를 그림의 주요 소재로 삼았다.
또한 피로스마니는 동물을 즐겨 그렸는데, 조지아의 유일한 동물 화가로 평가받기도 한다. 역사적 인물과 주제에도 관심을 가져 쇼타 루스타벨리, 타마르 여왕, 기오르기 사아카제 등을 그리기도 했다.
피로스마니는 주로 유포(oilcloth)에 그림을 그렸다. 그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모방하는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세부적인 묘사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부 작품은 모노크롬 기법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인물을 정면으로 배치하여 작가의 독특한 구성 감각을 보여주며, 인물들의 얼굴은 특정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특징이 있다.
3. 2. 화풍과 기법
피로스마니는 주로 검은 유화(oilcloth) 위에 그림을 그렸다. 다른 화가들과 달리,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고 세부 사항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대상의 본질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그의 그림 중 일부는 모노크롬(단색) 기법으로 그려졌으며, 작품들은 작가의 날카로운 구성적 고찰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 속 인물들은 대부분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얼굴 표정은 특정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 주제는 당대 조지아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여 상인, 가게 주인, 노동자, 귀족 등 다양한 인물들을 다루었다. 피로스마니는 자연과 시골 생활을 선호하여 도시 풍경은 거의 그리지 않았으며, 특히 동물을 많이 그려 조지아의 유일한 동물 화가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쇼타 루스타벨리, 타마르 여왕, 기오르기 사아카제와 같은 역사적 인물이나 평범한 조지아 사람들의 일상생활에도 매료되어 이를 화폭에 담았다.
4. 평가 및 유산
니코 피로스마니는 사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소박한 화가'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1918년 조지아 화가들의 첫 전시회에 작품이 포함되었고, 1926년에는 첫 모노그래프가 여러 언어로 출판되었다.
1950년대 이후 피로스마니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져, 파블로 피카소가 그의 초상 스케치를 그리고(1972년),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피로스마니''(1969년)가 제작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되었다. 조지아에서는 국민 화가로 추앙받아 그의 초상이 조지아 라리 화폐 도안으로 사용되었고, 기념비와 박물관[8]이 세워졌다. 그의 작품은 조지아 미술관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으며[7], 세계 주요 도시에서 꾸준히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미술사가 에라스트 쿠즈네초프[15] 등은 그의 작품 세계를 민속 예술의 전통과 연결하여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정보 부족, 소련 시대의 정치적 상황 등으로 인해 연구에는 어려움이 따랐으며,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에는 약 15년간 관련 출판물이 나오지 못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4. 1. 사후의 재평가


피로스마니는 사망 후 파리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소박파' 화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은 1918년 조지아 화가들의 첫 대규모 전시회에 포함되었으며, 1920년대부터 그에 관한 많은 글들이 발표되었다. 1926년에는 조지아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로 된 최초의 피로스마니 모노그래프(평전)가 출판되었다.
피로스마니에 대한 관심은 1950년대 들어 더욱 커졌고, 사후 조지아에서는 국민 화가로 인정받았으며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소련 시절, 특히 대숙청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에 이르는 1939년부터 1953년까지 약 15년 동안은 그에 관한 출판물이 전혀 나오지 못했다.
1969년에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으며, 같은 해 그의 생애를 다룬 기오르기 셴겔라야 감독의 전기 영화 ''피로스마니''[16]가 제작되었다. 1972년에는 파블로 피카소가 그의 초상 스케치를 그리기도 했다. 1983년에는 에라스트 쿠즈네초프가 피로스마니의 작품 목록인 ''니코 피로스마니, 1862-1918''[4]을 처음으로 편찬했다. 1985년에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 ''피로스마니의 아라베스크''[17](원제: Фильм Арабески на тему Пиросманиru)를 공개했다.
그의 작품은 세계 여러 도시에서 전시되었다. 주요 전시회 개최지는 다음과 같다.
연도 | 도시 | 장소 (알려진 경우) |
---|---|---|
1931 | 키이우 | |
1968 | 바르샤바 | |
1969 | 파리 | 루브르 박물관 |
1969 | 빈 | |
1983 | 니스, 마르세유 | |
1986 | 도쿄 | |
1995 | 취리히 | |
1999 | 낭트 | |
2002 | 토리노 | |
2008 | 키이우, 이스탄불 | |
2008–2009 | 민스크, 베즐레, 빌뉴스 | |
2018–2019 | 빈 | [5] |
2023–2024 | 바젤 | 베이에르 재단 [6] |
오늘날 그의 작품 146점은 조지아 미술관에, 16점은 시그나기의 역사-민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쾰른의 잔더 컬렉션에도 그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7] 트빌리시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조지아 미르자아니에는 그가 머물렀던 곳 중 하나를 개조한 니코 피로스마나쉬빌리 박물관이 있다.[8]
피로스마니는 조지아 라리 지폐 도안에도 등장했다(1 라리 지폐). 이스탄불에서는 '피로스마니'라는 이름의 정기 간행 신문이 두 언어로 발행된다. 소련에서는 1991년 그의 탄생 125주년을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었으며, 일부 조지아 와인 브랜드는 피로스마니 상표의 도자기 병에 그의 그림을 사용하기도 한다.
소련의 미술사학자 에라스트 쿠즈네초프는 그의 저서 『니코 피로스마니』[15](1983)에서 피로스마니가 단순히 보이는 대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리는 대상의 상징이나 기호"를 표현하려 했다고 평가했다. 쿠즈네초프는 피로스마니의 작품에서 민속 예술의 전통, 특히 스테레오타입의 활용이 두드러진다고 지적하며 "피로스마니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민속 예술의 전통이다. 서민적·민속 회화는 스테레오 타입의 다용도로 특징지을 수 있다. 사실, 이 민속적 수법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또한 쿠즈네초프는 피로스마니가 다른 원시주의 화가들처럼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으며, 그의 그림 속 동물들의 눈이 인간의 눈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사자, 사슴, 기린 등을 그린 작품은 화가 자신의 자화상과 같아서, 이 동물들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피로스마니 연구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그의 생애나 작품에 대한 정보가 대부분 추정이나 증언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의 사후 수십 년간 조지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생전의 그를 알던 사람들과의 접촉이 어려웠다. 또한 관련 문헌이나 논문 대부분이 조지아어나 러시아어로만 출판되어 조지아 외부에서의 연구 접근성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일본의 문화인류학자 야마구치 마사오는 저서 『지의 즉흥 공간』에서 쿠즈네초프의 피로스마니 평가를 소개한 바 있다. 2011년 간행된 『방랑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에서는 일본에 거주하는 조지아 출신 유전학자 알렉산드레 레자바가 피로스마니를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상징"이라고 평가한 내용이 실려 있다.
4. 2. 조지아의 국민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는 사망 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특히 파리 등지에서 '소박한 화가'로 존경받았다. 그의 그림은 1918년 조지아 화가들의 첫 대규모 전시회에 포함되었고, 1920년대부터 그에 관한 많은 글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피로스마니에 대한 첫 번째 모노그래프는 1926년에 조지아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
피로스마니에 대한 관심은 1950년대에 다시 높아졌다. 1969년에는 그의 생애를 다룬 조지아 영화 ''피로스마니''가 제작되었고, 1972년에는 파블로 피카소가 그의 초상 스케치를 그리기도 했다. 사후 조지아에서는 국민 화가로 추앙받으며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도 유명해졌지만, 소련 시절,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였던 1939년부터 1953년까지 약 15년간은 대숙청과 제2차 세계 대전 등의 영향으로 그에 관한 출판물이 전혀 나오지 못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15]
오늘날 피로스마니는 조지아를 대표하는 국민 화가로 여겨진다. 그의 초상은 조지아 라리 지폐(1라리, 5라리)에 사용되었으며, 조지아 와인 상표나 도자기 병 디자인에도 그의 그림이 활용되고 있다. 이스탄불에서는 '피로스마니'라는 이름의 정기 간행물이 두 언어로 발행된다. 트빌리시에는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그의 고향 미르자아니에는 생가를 복원한 니코 피로스마나쉬빌리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8] 1991년에는 소련에서 그의 탄생 125주년을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세계 여러 도시에서 전시되었다. 주요 전시 목록은 다음과 같다.
- 키예프 (1931년, 2008년)
- 바르샤바 (1968년)
- 파리 (루브르 박물관, 1969년)
- 빈 (1969년, 2018–19년)[5]
- 니스 및 마르세유 (1983년)
- 도쿄 (1986년)
- 취리히 (1995년)
- 낭트 (1999년)
- 토리노 (2002년)
- 이스탄불 (2008년)
- 민스크, 베즐레, 빌뉴스 (2008–2009년)
- 바젤 (베이에르 재단, 2023–2024년)[6]
현재 그의 작품 146점은 조지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6점은 시그나기의 역사-민족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쾰른의 잔더 컬렉션에도 그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7]
소련의 미술사가 에라스트 쿠즈네초프는 피로스마니가 단순히 보이는 대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리는 대상의 상징이나 기호라고 해야 할" 존재를 그리려 했다고 논했다. 쿠즈네초프는 피로스마니 작품에서 민속 예술의 전통, 특히 스테레오타입의 다용이 두드러진다고 지적하며 "피로스마니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민속 예술의 전통이다. 서민적·민속 회화는 스테레오 타입의 다용도로 특징지을 수 있다. 사실, 이 민속적 수법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쿠즈네초프는 피로스마니가 다른 원시파 화가들처럼 인간과 자연 사이에 경계선을 긋지 않았으며, 그의 그림 속 동물(특히 사자, 사슴, 기린)의 눈이 인간과 유사하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 동물들이 작가 자신의 내면과 감정을 투영한 자화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피로스마니 연구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그의 생애나 작품에 관한 정보가 대부분 추정이나 증언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의 생존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가 수십 년간 조지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관련 문헌 대부분이 조지아어나 러시아어로만 출판되어 조지아 외 국가에서의 연구 접근성을 낮추는 요인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69년 조지아의 기오르기 셴겔라야 감독이 전기 영화 ''피로스마니''[16]를 제작했으며, 1985년에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 ''피로스마니의 아라베스크''[17]를 만들었다.
현대 조지아인들에게 피로스마니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지아 출신 유전학자 알렉산드레 레자바는 피로스마니를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상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4. 3. 연구의 어려움
피로스마니는 조지아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의 생애와 작품 연구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첫째, 피로스마니 개인이나 그의 작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대부분 추정이나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한다. 둘째, 피로스마니 사후 수십 년 동안 조지아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하여, 생전의 그를 알았던 사람들을 만나 증언을 듣기가 어려웠다. 셋째, 피로스마니 관련 문헌이나 논문 대부분이 조지아어나 러시아어로만 출판되어, 조지아 외부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도 연구의 장벽이 되고 있다.5. 마르가리타와의 로맨스
니코 피로스마니는 프랑스 배우 마르가리타에게 반해 그녀가 머물던 집 앞 길을 꽃으로 가득 채웠다는 일화로 유명하다[12]. 이 이야기는 러시아 가수 알라 푸가초바 등이 부른 노래 「백만 송이 장미」의 모티브가 되어 널리 알려졌다.
5. 1. 로맨스의 진위 논란
니코 피로스마니는 1894년 자신의 마을을 방문한 프랑스 배우 마르가리타를 만나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가 머물던 집 앞 길을 꽃으로 가득 채워 마음을 표현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12]. 그는 방랑 생활을 하던 중 15년 뒤에 그림 「배우 마르가리타」를 남겼다. 이 이야기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가 쓴 시의 소재가 되었고, 이 시를 가사로 한 노래가 러시아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이 노래는 후에 일본에서도 가토 토키코가 부른 「백만 송이 장미」로 인기를 얻었다.하지만 이 로맨틱한 이야기는 이전부터 전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1975년 피로스마니에 관한 연구서를 저술한 에라스트 쿠즈네초프는 마르가리타라는 인물의 실존 자체에 강한 의문을 표했다[18].
또한, 일본의 연구가 야마노우치 시게미는 2002년 저작에서 피로스마니에게 마르가리타라는 이름의 연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일 수 있으나, 그녀가 장미를 좋아했다거나 피로스마니가 그녀에게 대량의 진홍색 장미를 선물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는 보즈네센스키의 창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마노우치의 주장은 확실하지 않다. 1923년 트빌리시에 체류했던 작가 콘스탄틴 파우스토프스키는 당시 이미 그 지역에서 "피로스마니가 마르가리타에게 넘쳐날 만큼 많은 꽃을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었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보즈네센스키 역시 파우스토프스키의 저작이나 트빌리시 출신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를 썼을 가능성이 있으며, 완전히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한편, 1969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피로스마니의 전시회에 마르가리타 본인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나타났다는 기록과 함께 당시 찍힌 사진이 남아있다[19]. 그녀는 파리의 소극장 '벨 뷰(Belle Vue)'에서 활동했던 배우이자 댄서 겸 샹송 가수였다고 한다[20]. 마르가리타는 이 전시회를 방문했을 때 피로스마니와의 사연에 대해 적은 편지를 관계자에게 전달했지만, 이 편지는 안타깝게도 나중에 분실되었다. 일본의 평론가 야마다 고로에 따르면, 당시 신문 보도 등에서는 마르가리타 본인이 조지아에서 공연 중 화가를 만난 적은 있지만, 그로부터 많은 꽃을 선물 받은 적은 없다고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21]. 이처럼 피로스마니와 마르가리타의 로맨스 일화는 여전히 그 진위를 둘러싼 논란 속에 남아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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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ПИРОСМАНАШВИЛИ НИКО • Большая россий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 электронная верси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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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ress Marguerite, 1909, 94×12 cm by Niko Pirosmani (Pirosmanashvili): History, Analysis & F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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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lete mystery and marvellous enigma of Niko Pirosmani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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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r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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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時の[[ロシア帝国]]{{仮リンク|チフリス県|ru|Тифлисская губерния|en|Tiflis Governate}}、現在の[[ジョージア (国)|ジョージア]]・[[カヘティ州]]の{{仮リンク|シグナギ地区|ka|სიღნაღის_მუნიციპალიტეტი|en|Signagi Municip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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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иросманашвил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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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所によっては'''ピロスマニシュビリ'''({{lang|ru|Пиросманишви́ли}})と記される場合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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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ンスタンチン・パウストフスキー#あらすじ|パウストフスキー]]『生涯の物語』第5部の後半に詳しい。
[13]
문서
Wikipedia 日本語版「[[未来派]]」はイタリア未来派の記述が中心。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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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は画家・美術評論家の{{仮リンク|キリル・ズダネーヴィチ|ru|Зданевич,_Кирилл_Михайлович}}(1892-1969)、弟は詩人の[[イリヤ・ズダネーヴィチ]](1894-1975)。
[15]
문서
"{{Lang-ru|Эраст Кузнецов - Пиросмани}}"
[16]
문서
1978年の日本封切時の邦題は『ピロスマニ』。2015年公開のデジタルリマスター版にて『放浪の画家ピロスマニ』に改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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絵画の主人公を模した俳優たちが演じるイメージ・ショットをまじえており、純粋なドキュメンタリーとも言い切れ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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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2008年]][[11月1日]]土曜版 be on Saturday Enter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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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 PIROSMANI
https://mzekhamakh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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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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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 Pirosmani, forgotten Georgian painter
https://profibeer.ru[...]
Profibeer
202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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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ジョージアのアンリ・ルソー】泣ける!放浪の画家ピロスマニの悲劇【加藤登紀子・百万本のバラ】
https://www.youtube.[...]
山田五郎
202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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