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클라이 드 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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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클라이 드 톨리는 스코틀랜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러시아 제국 군인이다. 그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러시아-스웨덴 전쟁, 코시치우슈코 봉기, 나폴레옹 전쟁 등 다양한 전쟁에 참전하여 군 경력을 쌓았다. 1812년 러시아 원정 당시 서부 제1군 사령관으로서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나폴레옹에 맞섰으나, 비(非)러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비난받고 쿠투조프에게 사령관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후 1813년 독일 전역과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 활약하며 여러 훈장을 받았고, 나폴레옹 전쟁 종전 후에는 공작이 되었다. 그는 군 개혁에 힘썼으며, 건강 악화로 군을 떠나 에스토니아에서 사망했다. 사후 그의 군사적 업적과 전략적 통찰력은 재평가되었으며, 기념 동상과 유산으로 그의 공헌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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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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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르클라이 데 톨리 |
다른 이름 | 미하일 보그다노비치 바르클라이 데 톨리 |
출생 | 1761년 12월 |
출생지 | 파무시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현재의 리투아니아 샤울랴이 주 파무시스) |
사망 | 1818년 9월 24일 (56세) |
사망지 | 인스터부르크, 프로이센 왕국 (현재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 체르냐홉스크) |
묻힌 곳 | 베크호프 (현재의 에스토니아 요게베스테, 발가 주) |
충성 | 러시아 제국 |
복무 기간 | 1776년–1818년 |
최종 계급 | 원수 |
군 경력 | |
소속 | 러시아 제국 육군 |
지휘 | 핀란드 총독 전쟁부 장관 |
참전 전투 | 러시아-튀르크 전쟁 (1787년-1791년) 오차코프 공성전 제1차 러시아-스웨덴 전쟁 코시치우슈코 봉기 빌뉴스 점령 프라가 전투 핀란드 전쟁 나폴레옹 전쟁 푸우투스크 전투 아일라우 전투 비테프스크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 발루티노 전투 보로디노 전투 바우첸 전투 드레스덴 전투 쿨름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 라 로티에르 전투 아르시-쉬르-오브 전투 페르 샹페누아즈 전투 파리 전투 |
수상 | 성 게오르기 훈장 |
2. 초기 생애 및 가문
바클레이 드 톨리 가문은 17세기에 리가로 이주해 온 스코틀랜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리프란디아가 러시아에 병합된 후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서구에서는 영어식 발음인 '''마이클 앤드리어스 바클레이 드 톨리'''('''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로 알려져 있다.[3] 미하일 안드레아스는 1761년 리투아니아의 Pamūšis|파무시스lt에서 태어났다.[5]
2. 1. 가문 배경
바클레이 드 톨리 가문은 스코틀랜드의 바클레이 씨족의 독일어 사용 후손이었다. 그들의 조상인 피터 바클레이는 가문의 토위 또는 톨리 분파에 속했으며 1621년 로스토크에 정착했다. 그의 아들은 나중에 리보니아의 리가로 이주했다.[3]미하일 안드레아스의 할아버지 빌헬름 바클레이 드 톨리는 리가의 시장을 지냈고, 그의 아버지 베인골리드 고타르트는 러시아군에서 복무한 후 중위로 퇴역하고 러시아 귀족 반열에 올랐다. 어머니 마르가리타 엘리자베타는 대대로 스웨덴군에 복무하는 귀족 출신인 스미튼 가문 출신이다.[5]
2. 2. 유년 시절
미하일 안드레아스는 고트하르트 바클라이 드 톨리(1734–1781)와 그의 아내 마르가레테 엘리자베스 폰 스미텐(1733-1771) 사이에서 태어났다. 바클레이 드 톨리 가문은 스코틀랜드의 바클레이 씨족의 독일어 사용 후손이었다. 그들의 조상인 피터 바클레이는 가문의 토위 또는 톨리 분파에 속했으며 1621년 로스토크에 정착했다. 그의 아들은 나중에 리보니아의 리가로 이주했다.[3] 미하일 안드레아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Pamūšis|Pamūšis (Pašvitinys)lt에서 태어나 그의 어머니의 가문 영지인 리보니아의 베크호프에서 자랐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의 출생일인 1761년 12월 27일은 실제로는 자우멜 마을의 루터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날이다.[5]미하일 안드레아스의 할아버지 빌헬름 바클레이 드 톨리는 리가의 시장을 지냈고, 그의 아버지는 차르에 의해 러시아 귀족의 반열에 오르기 전에 러시아군에서 복무했다. 1765년부터 젊은 바클레이 드 톨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랐고 그의 이모에게 길러졌다. 이것은 독일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었으며, 젊은이에게 발트 지방에서는 얻을 수 없는 상류 사회와의 접촉을 제공했다.
3. 군 경력
바클라이는 1776년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하여 평생을 군에서 복무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바클라이는 푸우투스크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아일라우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중장으로 진급했다.[6] 요양 후, 1808년 핀란드 전쟁에서 스웨덴에 맞선 작전을 지휘했다. 1809년, 얼어붙은 보트니아 만을 행군하여 기습으로 스웨덴의 우메오를 점령했다.[6] 이 업적은 예브게니 바라틴스키에 의해 불멸화되었으며, 대장으로 진급, 핀란드 총독이 되었다. 1년 후 1813년까지 전쟁 장관직을 맡았다.[6]
3. 1. 초기 군 복무
바클라이는 1776년 5월 13일 프스코프 기병 연대에 입대하여 1778년 5월에 코르넷(기병 소위) 계급을 얻었다.[6] 같은 해에 그는 제국 예거 연대에 합류했으며, 그의 부대는 그리고리 포툠킨 공작의 군대에 배속되었다. 1788년부터 1789년까지 러시아-튀르크 전쟁 (1787–92) 중 바클라이는 안할트-베른부르크-샤움부르크-호임의 빅토르 아마데우스의 지휘하에 복무했다. 이 작전에서 그는 오차코프와 아케르만 점령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오차코프 점령에 기여한 공로로 그는 포툠킨 공작으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았다.1789년, 러시아-스웨덴 전쟁 중 그는 핀란드 전선으로 전출되었다.[6] 4년 후, 그는 1794년 폴란드 원정에 참전하여 빌뉴스 점령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6] 그는 여러 작전에서 다양한 고위 장교들의 부관으로 복무한 후 1794년까지 중령이 되었다. 그 해에 그는 에스틀란드 예거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3년 후에는 제4 예거 연대 사령관이 되었으며, 1799년에는 그 연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의 공로로 소장으로 진급했다.[6]
3. 2. 러시아-튀르크 전쟁 (1787-1792)
1787년부터 1792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바클라이는 안할트-베른부르크-샤움부르크-호임의 빅토르 아마데우스 휘하에서 복무했다.[6] 그는 오차코프 교외 전투에서 처음 참전하여 오차코프를 점령하고, 아케르만을 탈취하는 데 공을 세웠다.[6] 특히 오차코프 점령에 기여한 공로로 그리고리 포툠킨 공작으로부터 직접 4급 성 블라디미르 훈장(러시아군에서 두 번째로 수상)을 받았으며, 소령으로 진급했다.[6]3. 3. 러시아-스웨덴 전쟁 (1788-1790)
1789년, 러시아-스웨덴 전쟁 중 바클라이는 핀란드 전선으로 전출되었다.[6] 1790년 4월, 핀란드에서 스웨덴군과 싸웠으며 켈니코스키 교외 전투에서 공을 세워 사령관 니콜라이 살티코프 백작의 부관이 되었다. 이후 바클라이는 본부에 소속된 채 토볼리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다.3. 4. 코시치우슈코 봉기 (1794)
바클라이는 1794년 폴란드 원정에 참전하여 빌뉴스 점령에 기여한 공로로 4급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6] 17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척탄병 연대로 전속되었고, 1792년 반란 진압을 위해 폴란드로 파견되었다. 본격적인 전투는 1794년 봄부터 시작되었고, 바클라이는 대대장으로 빌뉴스에 돌입하여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격파했다.그는 여러 작전에서 다양한 고위 장교들의 부관으로 복무한 후 1794년까지 중령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에스틀란드 예거 군단의 제1대대장이 되었다. 1798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제4엽병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1799년 3월, 연대의 모범적인 훈련에 대해 파벨 1세는 바클라이를 소장으로 진급시켰다.[6]
3. 5. 진급 및 지휘관 임명
바클라이는 1794년 중령으로 진급하여 에스틀란드 예거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6] 1797년 제4 예거 연대 사령관이 되었으며, 1799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그 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6]4. 나폴레옹 전쟁
바클라이 드 톨리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러시아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1806년 프루츠크 전투에서 장 란 원수의 부대와 교전하여 승리하고 3등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1]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오른팔에 총상을 입었으나, 알렉산드르 1세의 주치의 덕분에 팔을 절단하지 않고 치료받았다. 이후 중장으로 승진하여 제6 보병 사단장에 임명되었다.[1]
- 1808년부터 1809년까지 벌어진 핀란드 전쟁에서 원정대를 이끌고 핀란드에 침공하여 쿠오피오 시를 점령하고 스웨덴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보트니아만 빙상 침공 작전을 성공시켜 스웨덴군을 우메오까지 몰아내고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이 공로로 보병 대장으로 승진하고 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을 받았다. 1810년까지 핀란드 주둔 러시아군 총사령관 겸 핀란드 대공국 총독을 역임했다.
-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당시, 러시아 서부 제1군 사령관으로서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후퇴하는 전략을 사용했다.[1] 그러나 비(非)러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반대에 부딪혔고,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후 쿠투조프에게 총사령관직을 넘겨주었다.[1] 보로디노 전투에서는 우익을 지휘하며 용감하게 싸웠고,[1] 필리 회의에서 모스크바를 포기할 것을 주장했다.[1]
- 1813년부터 1814년까지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참전하여 바우첸 전투에서 러시아군 총사령관 대행을 맡았고, 드레스덴 전투, 쿨름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연합군을 지휘했다. 라이프치히 전투의 공로로 백작 칭호를 받았다.[8]
- 1814년 프랑스 침공에 참여하여 파리 전투를 지휘하고 원수 지휘봉을 받았다. 1815년 백일천하 이후에는 프랑스를 점령한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종전 후 공작이 되었다.[8][9]
4. 1. 1806년 전쟁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륙군과의 첫 충돌은 1806년 12월 14일, 프루츠크 교외에서 일어났다. 바클라이는 제77 텐긴 보병 연대, 3개 엽병 연대, 5개 기병 중대를 지휘하며 란 원수의 부대와 교전하여 진지 확보에 성공했다. 이 공적으로 바클라이는 3등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1]아일라우 전투에서 바클라이는 시의 방어를 조직하면서 스스로 기병 돌격에 참가하여 오른팔에 총탄을 맞아 부상당했다. 상처가 심각하여 오른팔 절단까지 검토되었으나, 알렉산드르 1세는 자신의 주치의 제임스 빌리에를 보내 그의 오른팔을 구했다. 치료 중 알렉산드르 1세가 직접 문병을 왔고, 이후 바클라이의 지위는 높아져 1등 성 안나 훈장과 2등 성 블라디미르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807년 4월 9일에는 중장으로 승진하여 제6 보병 사단장에 임명되었다.[1]
4. 2. 핀란드 전쟁 (1808-1809)
1807년 11월, 러시아는 프랑스와 체결한 틸지트 조약에 따라 영국에 선전 포고했다. 동시에 스웨덴에도 반영국 동맹 참가가 제안되었지만,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4세는 이를 거부했고, 1808년 2월 제2차 러시아-스웨덴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전황이 러시아군에게 유리하여 F. 부크스게브덴 지휘하의 부대가 핀란드 수도 오보를 점령했다. 그러나 진격하면서 보급선이 길어지고, 스웨덴군의 습격으로 손해가 늘어났다.이러한 상황에서 바클라이는 원정대를 이끌고 핀란드에 침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808년 6월, 쿠오피오 시를 점령하고 스웨덴의 산델스 대령의 돌격을 격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해야 했다. 여기서 바클라이는 군사 회의 의원이 되었고, 알렉산드르 1세의 측근에 합류했다.
1808년 12월, 바클라이는 겨울에 보트니아 만에서 빙상 침공하는 구상을 제안했다. 이 작전을 위해 표트르 바그라티온, P. 슈발로프, 그리고 바클라이의 3개 군단이 준비되었다. 바클라이의 군단은 바스 시에서 우메오 시까지 약 100km의 여정이었다. 1809년 3월, 이 횡단은 성공하여 스웨덴군은 우메오까지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의 귀추는 결정되었다. 이 공적에 대해 바그라티온과 바클라이는 보병 대장으로 승진했으며, 바클라이에게는 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이 수여되었다.
작전 종료 후 1810년까지 핀란드 주둔 러시아군 총사령관 겸 핀란드 대공국 총독을 역임했다.
4. 3. 1812년 러시아 전역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당시 바클라이는 나폴레옹에 맞서는 러시아군 중 가장 규모가 큰 서부 제1군 사령관이었다.[1] 그는 프랑스군의 보급선을 러시아 영토 깊숙이 끌어들이기 위해, 작전 초반부터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후퇴하는 전략을 사용했고, 모스크바와 스몰렌스크 사이의 차료보-자이미셰 마을까지 물러났다.[1]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러한 전략이 한 개인의 의지가 아닌, 다양한 상황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결과로 간주하기도 한다.[1]러시아인들은 비(非)러시아인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1] 그의 경쟁자들은 그가 나폴레옹의 첩자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민중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비난했다.[1] 바클라이는 부하들과 차르의 압박에 못 이겨 스몰렌스크 (1812년 8월 17일~18일)에서 나폴레옹과 교전을 벌였다.[1] 나폴레옹은 바클라이의 유일한 퇴각로를 위협하여 그를 후퇴시켰다.[1] "성스러운 도시" 스몰렌스크의 손실 이후, 장교들과 시민들의 항의는 너무 거세져 차르는 더 이상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1] 그는 이전에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장군을 지낸 쿠투조프를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1] 바클라이는 서부 제1군 사령관으로 남았다.[1]
바클라이는 보로디노 전투 (1812년 9월 7일)에서 용감하게 우익을 지휘했으며, 필리 회의에서 쿠투조프에게 요새화되지 않은 모스크바를 적에게 넘겨줄 것을 조언했다.[1] 그 당시부터 그의 병세가 나타났고, 그는 곧 군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1]
4. 4. 1813-1814년 전역
바클라이는 다시 현장에 투입되어 1813년 독일 전역과 1814년 프랑스 전역에 참여하여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1812-1814)을 종결시켰다.[8]쿠투조프가 사망한 후, 바클라이는 바우첸 전투 (1813년 5월 21일)에서 러시아군 총사령관 대행이 되었고, 드레스덴 전투 (1813년 8월 26-27일), 쿨름 전투 (1813년 8월 29-30일) 및 라이프치히 전투 (1813년 10월 16-19일)에서 연합군을 지휘했다. 후자의 전투에서 그는 연합군의 중부 부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차르는 그에게 백작 칭호를 수여했다.

바클라이는 1814년 프랑스 침공에 참여하여 파리 전투를 지휘하고 그 보상으로 원수 지휘봉을 받았다. 1815년에는 다시 백일천하 이후 프랑스를 점령한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종전 후에는 공작이 되었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는 군대를 떠나 현재 에스토니아 남부에 있는 그의 요게베스테 영지 (독일어: ''Beckhof'', 폴란드어: ''Tepelshof'')에 정착했다.[9]
4. 5. 백일천하
바클라이는 1814년 프랑스 침공에 참여하여 파리 전투를 지휘하고 그 보상으로 원수 지휘봉을 받았다.[8] 1815년 백일천하 이후에는 프랑스를 점령한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종전 후 공작이 되었다.[9]5. 전후 활동 및 사망
나폴레옹 전쟁 이후 바클라이 드 톨리는 군 강화에 힘썼다. 둔전병 도입을 비판하며 다른 고관들과 대립했지만, 황제의 신임은 두터웠다.[1] 1817년 황제의 국내 여행에 동행했다.
1818년 건강이 악화되어 의사의 권고로 마리엔바트와 카를스바트에서 요양하려 했으나, 여행 중 병세가 악화되어 동프로이센 인스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장례는 리가에서 거행되었고, 유해는 헤림을 거쳐 베크고프에 매장되었다.
5. 1. 군 개혁
나폴레옹 전쟁 종결 후, 바클라이는 러시아군 강화에 힘썼다. 그는 둔전병 도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다른 고위 관리들과 대립했지만,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 그의 지위에는 영향이 없었다.[1] 1817년에는 황제의 국내 여행에 동행하기도 했다.[1]5. 2. 건강 악화 및 사망
1818년 바클라이의 건강은 현저하게 악화되었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업무를 떠나 오스트리아의 휴양지였던 마리엔바트 및 카를스바트에서 요양하기로 했지만, 이 여행 중에 병세가 악화되어 1818년 5월 14일에 동프로이센의 인스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바클라이의 장례는 리가에서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처음에는 헤림, 나중에는 베크고프에 매장되었다. 그의 시신과 그의 아내 헬레네 아우구스테 엘레오노레 폰 슈미텐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1832년 아폴론 셰드린과 바실리 데무트-말리노프스키의 설계에 따라 요게베스테에 세워진 묘소에 안치되었다.
5. 3. 장례 및 유해 안치
바클라이 드 톨리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리보니아 영지에서 독일로 가던 중 1818년 5월 26일 (구력 5월 14일) 동프로이센의 인스터부르크(체르냐홉스크)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과 그의 아내 헬레네 아우구스테 엘레오노레 폰 슈미텐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었다. 바클라이의 장례는 리가에서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처음에는 헤림, 나중에는 베크고프에 매장되었다. 1832년 아폴론 셰드린과 바실리 데무트-말리노프스키의 설계에 따라 요게베스테에 세워진 묘소에 안치되었다.[10]6. 평가 및 유산
바클라이 드 톨리는 당대에는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현대에는 그의 군사적 업적과 전략적 통찰력이 재평가되고 있다. 특히 초토화 작전 입안[1] 및 군의 근대화 착수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좌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니콜라이 1세의 명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대성당 앞에 웅장한 동상이 세워졌다.[10] 체르냐홉스크에는 블라디미르 수로브체프가 제작한 실물 크기의 청동 동상이, 타르투에는 흉상 기념비가 있다.[10] 타르투에는 "바클레이의 기울어진 집"이 있는데, 이 집은 그가 사망한 후 미망인이 인수했다.[10] 리가에 있던 그의 현대적인 동상은 2024년 10월 16일에 해체되었다.[10]
- 1981년 류드밀라 주라블레바가 발견한 소행성 4524 바클라이데톨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7]
-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바클라이의 마지막 전장에 기념비를 세웠다.
- 러시아에서는 183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잔 광장, 1849년 타르투, 1913년~1915년 리가에 바클라이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 서 시베리아 강 운송 회사 MRF RSFSR (바르나울)은 증기 예인선 바클라이를 운영했다.[15]
- "바클라이 드 톨리"는 1820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투아모투 제도에 있는 라로이아 섬에 부여된 이름이었다.
- 2013년, JSC 아에로플로트-러시아 항공은 탁월한 러시아 군 지도자 M. 바클라이 드 톨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보잉 777-300ER 항공기를 보잉사로부터 받았다.[16]
6. 1. 당대 평가
당시 보병 지휘관 중에서는 특히 뛰어났다. 끈기 있는 전투, 수성과 공격 양면의 지휘 능력에 정평이 있었고, 국지전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초토화 작전 입안[1] 및 군의 근대화 착수 등,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좌절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사령관으로서도 일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한편으로는 인망이 부족하여 부하들을 통솔하지 못해 적 앞에서 전군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적도 있었다. 또한, 초토 작전이 성공적으로 완료되기 전까지는 국민들로부터의 인지도가 낮았고, 악평도 많았다.
6. 2. 현대적 재평가
당시 보병 지휘관 중에서는 특히 뛰어났다. 끈기 있는 전투, 수성과 공격 양면의 지휘 능력에 정평이 있었고, 국지전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초토화 작전 입안 및 군의 근대화 착수 등,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좌절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사령관으로서도 일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한편으로는 인망이 부족하여 부하들을 통솔하지 못해 적 앞에서 전군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적도 있었다. 또한, 초토 작전이 성공적으로 완료되기 전까지는 국민들로부터 인지도가 낮았고, 악평도 많았다.
6. 3. 기념 및 헌정
니콜라이 1세 황제의 명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대성당 앞에 웅장한 동상이 세워졌다.[10] 체르냐홉스크에는 블라디미르 수로브체프가 제작한 실물 크기의 청동 동상이, 타르투에는 흉상 기념비가 있다.[10] 타르투에는 소위 "바클레이의 기울어진 집"이 있는데, 이 집은 그가 사망한 후 미망인이 인수했다.[10] 그는 또한 리가에 현대적인 동상으로 기념되었으나,[10] 2024년 10월 16일에 해체되었다.[10]- 1981년 류드밀라 주라블레바가 발견한 소행성 4524 바클라이데톨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7]
-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바클라이의 마지막 전장에 기념비를 세웠다.
- 러시아에서는 183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잔 광장, 1849년 타르투, 1913년~1915년 리가에 바클라이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 서 시베리아 강 운송 회사 MRF RSFSR (바르나울)은 증기 예인선 바클라이를 운영했다.[15]
- "바클라이 드 톨리"는 1820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투아모투 제도에 있는 라로이아 섬에 부여된 이름이었다.
- 2013년, JSC 아에로플로트-러시아 항공은 탁월한 러시아 군 지도자 M. 바클라이 드 톨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보잉 777-300ER 항공기를 보잉사로부터 받았다.[16]
참조
[1]
Britannica
Mikhail Bogdanovich, Prince Barclay de Tolly
https://www.britanni[...]
2022-12-20
[2]
서적
Baltisches Wappenbuch
https://personen.dig[...]
Stockholm
2019-04-03
[3]
서적
A History of the Barclay Family
https://archive.org/[...]
St Catherine Press
[4]
웹사이트
Biography on the official website of the Russian Ministry of Defense
http://www.old.mil.r[...]
[5]
웹사이트
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of Lithuania
http://www.liuterona[...]
[6]
문서
Russian Officer Corps
[7]
서적
War and Peace by graf Leo Tolstoy
http://www.gut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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