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무라 히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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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무라 히토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외야수, 지명 타자로 활약했다.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특히 2006년에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일본 대표팀으로 우승에 기여했다. 2010년에는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으며,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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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무라 히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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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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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명 | 다무라 히토시 |
본명 | 다무라 진 (多村 仁) |
출생지 | 가나가와현 아쓰기시 (가나가와 현 아이코군 기요카와촌 태생) |
생년월일 | 1977년 3월 28일 |
신장 | 180cm |
체중 | 82kg |
수비 위치 | 외야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 1994년 |
드래프트 순위 | 4순위 |
첫 출장 | 1997년 4월 4일 |
최종 출장 | 2015년 4월 30일 |
대표팀 | 일본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2006년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요코하마 고등학교 |
프로 구단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995 - 2006)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7 - 2012)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013 - 2015) 주니치 드래건스 (2016) |
메달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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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년도 | 2006 |
종목 | 야구 |
개인 기록 (NPB) | |
타율 | 0.281 |
타점 | 643 |
홈런 | 195 |
2. 선수 경력
2. 1. 프로 입단 전
다무라 히토시는 아이코군 기요카와촌에서 태어났지만[3][4][5], 미야가세 댐 건설로 인해 본가가 수몰되면서[7] 1984년에 아쓰기시로 이사했다.[6][7] 시립 이이야마 초등학교와 시립 코아야 중학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3][6][8] 초등학교 2학년 때 형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했으며[9], 발이 빨라 중학교 때는 육상부에 소속되었지만, 시니어 리그 감독의 권유로 아쓰기 시니어에서 다시 야구를 시작했다.[46][10] 중학교까지는 유격수와 투수를 맡았다.[11]중학교 졸업 후 요코하마 고등학교에 진학하여[6] 1학년 봄부터 벤치에 들어갔고, 강한 어깨를 살려 1학년 도중에 내야수에서 외야수로 전향했다.[11] 3학년 때는 사이토 요시유키, 키타 아키카즈와 클린업 타선을 형성하여 1994년 봄과 여름 연속으로 고시엔에 출전했다.[12] 3학년 여름 현 대회 준준결승, 준결승에서는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홈런을 기록했다.[13] 고교 통산 14홈런을 기록했다. 고등학교 동급생으로는 사이토, 키타 외에 당시 에이스 투수였던 야노 에이지, 2학년 선배에 베사카 토시유키, 나카노 에이이치, 스즈키 아키히토, 1학년 선배에 다카하시 미츠노부, 시라사카 카츠시, 1학년 후배에 요코야마 미치야, 2학년 후배에 아베 마사히로, 마츠이 코스케, 마쿠타 켄지가 있었다.
1994년 드래프트에서 4순위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입단했다. 담당 스카우트는 이나가와 마코토였으며[14], 등번호는 '''52'''번을 배정받았다.
2. 2.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시절 (1995-2006)
다무라 히토시는 입단 초 2군 연습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같은 고졸 출신이자 동기 입단인 아이카와 료지, 가토 겐냐와 함께 기초 연습에 매달렸다.[15] 1995년과 1996년에는 1군(센트럴 리그) 공식전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1996년 오프 교육 리그에서 홈런, 타점 기록을 세워 1군에 불려가게 되었다.[15]1997년 4월 4일, 개막전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공식전 첫 출전했다. 이 경기는 나고야 돔 첫 공식전으로, 7회 초에 모리타 유키의 대타로 등장하여, 야마모토 마사를 상대로 외야 플라이를 기록했다. 4월 8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다무라 쓰토무를 상대로 프로 데뷔 첫 안타를 기록했다. 4월 25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마에다 유키나가를 상대로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5월 경기 중 오른쪽 어깨 회전근개가 파열되어 볼트 4개를 넣는 대수술을 받고 장기 이탈하게 되었다.[15]
1998년에는 2군(이스턴 리그)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하고 재활 생활을 보냈고, 요코하마가 38년 만에 리그 우승을 결정한 날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다음 해인 1999년에도 1군 출전 없이 끝났다.[15][16]
2000년에는 등번호를 '''55'''로 변경하고 1군에 복귀하여 주로 대타, 교체 출전으로 84경기에 출전, 타율 .257, 7홈런을 기록했다. 2001년에는 33경기 출전, 타율 .163, 1홈런으로 부진했다. 2002년에는 8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35, 5홈런을 기록했다.
2003년에는 9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93, 18홈런, 14도루를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냈다.
2004년에는 등번호를 '''6'''으로 변경하고 개막전에서 프로 데뷔 첫 선발 출전했다. 이후 레귤러로 정착하여 8월 15일에는 일본인 타자로서 구단에서 타시로 토미오 이후 23년 만에 30홈런을 기록했다. 10월 6일에는 다이요 시절을 포함하여 요코하마 소속 일본인 타자로서 구단 사상 첫 40홈런을 달성했다. 123경기에 출전하여 규정 타석에 처음으로 도달했고, 구단 사상 첫 3할, 40홈런, 100타점을 기록했다. 10도루를 기록하여 2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했다. 주로 우익수 수비를 맡았지만 가네시로 타츠히코와 수비 위치를 변경하여, 2006년에 이적할 때까지 중견수를 맡았다.
2005년, 요코하마 스타디움 홈 개막전이었던 4월 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연장 12회에 단 미세리를 상대로 프로 첫 번째 끝내기 적시타를 날렸다.[17] 세・퍼 교류전에서 통산 12홈런으로 초대 홈런왕이 되었다. 6월 18일 경기 종료 시점에서 타율 .344, 21홈런으로 잠정 2관왕에 올랐지만, 6월에 사고로 일시 입원할 정도의 큰 부상을 입었다. 7월 29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부터 복귀하여, 9월 17일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8회에 통산 100호 홈런을 달성했고, 구단 일본인 첫 2년 연속 3할 30홈런을 달성했다.
2006년,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 대회에서 전 경기에 출전하여 3홈런, 9타점으로 활약하며 일본 대표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아쓰기시는 이 활약을 칭찬하여 다무라에게 시민 공로상을 증정하기로 결정했다.[3] 시즌에서는 4월 4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9회 말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동점 2점 홈런을 날리는 등 활약했지만, 6월 7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홈 크로스 플레이 시 포수와의 충돌로 갈비뼈 4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어 장기 이탈, 39경기 출전에 그쳤다.
2. 3.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2007-2012)
2006년 12월 5일 데라하라 하야토와의 1대1 트레이드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하였다[18]。 등번호는 요코하마 시절과 같은 '''6'''번이었다.2007년에는 개막전에 3번 타자로 출전하여 2개의 홈런을 날리는 등 3안타 맹타상을 기록했다. 시즌 중에 4차례의 근육 파열을 겪으면서도 개인 최다인 13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71, 13홈런, 68타점으로 2년 만에 규정 타석을 채웠다. 베이징 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 후보로 등번호 1번을 부여받았지만, 치료를 위해 직전에 멤버에서 제외되었다.
2008년에는 개막부터 순조롭게 출전했지만, 4월 25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3회 초 수비 중 오츠카 아키라의 좌중간으로 향하는 타구를 쫓아 좌익수 하세가와 유야와 충돌하여 오른쪽 다리 비골이 골절되어 전반기를 통째로 날렸다. 9월 상순부터 복귀하여 2경기 연속 맹타상을 기록했지만, 장기 이탈의 영향으로 39경기 출전에 그쳤다.
2009년에는 등록명을 '''다무라 히토시'''(읽는 방법은 동일)로 변경했다. 93경기에서 타율 .282, 17홈런, 57타점의 성적을 기록, 해외 이적도 가능한 FA권을 획득했지만,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잔류했다.
2010년 5월 8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6회에 프로 통산 150호 홈런을 기록했다. 5월 26일부터 고쿠보 히로키를 대신해 소프트뱅크의 4번 타자로 출전을 계속했다. 교류전에서 사상 최고 타율인 .415로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7월 23일 팬 투표로 16년 만에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 후쿠오카 야후! JAPAN 돔에서 열린 제1전에서 4번 타자로 출전했다. 8월 24일 오릭스 버팔로스전에서 1회에 곤도 카즈키로부터 6년 만의 만루 홈런을 쳤다. 개인 최다인 140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24, 27홈런, 166안타, 출루율 .374를 기록하며 2003년 이후 7년 만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외야수 중 최고 득표로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11월 15일 메이저 리그 이적도 고려하여 FA권을 행사했지만, 소프트뱅크 회장인 오 사다하루의 한마디에 따라 11월 24일에 잔류를 표명, 2011년 1월 28일에 1년 계약을 체결했다.

(2011년 7월 20일、후쿠오카 돔에서)
2011년 4월 23일 롯데전에서 일본 프로 야구 통산 10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10월 2일 세이부전에서 3회 초에 이시이 히사쿠로부터 우전 적시타를 날려 일본 프로 야구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 100경기 출전에 타율 .241, 4홈런에 그쳤다. 그러나 처음으로 출전한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일본 시리즈에, 골절된 상태에서도 강행 출전하여 제3전에서 팀 첫 홈런인 2점 홈런을 쳐 팀에 기세를 불어넣었고, 제5전에서 2타점을 올려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시상식에서는 "MVP는 다무라다"라고 상대 팀인 주니치 선수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로 활약했다.
2012년에는 더욱 출전 기회가 줄어, 79경기에서 전년과 거의 같은 성적이었다.
2. 4.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복귀 (2013-2015)
2012년 11월 5일에 요시무라 히로키, 에지리 신타로, 야마모토 쇼고와의 트레이드로 칸나이 야스시, 요시카와 테루아키와 함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로 이적하여 7년 만에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등번호는 요코하마 시절 프로 입단 초와 같은 '''52'''가 되었다.2013년 4월 11일 히로시마전 홈 경기 6회에 시즌 첫 번째 대타 홈런을 쳤다. 5월 10일 요미우리전 홈 경기에서 3대 10으로 7점 차로 뒤진 7회말에 대타로 2점 홈런을 쳐서 이후 1점 차까지 따라붙었고, 9대 10으로 맞이한 9회 1사 1, 2루에서 니시무라 켄타로를 상대로 프로 데뷔 첫 끝내기 3점 홈런을 쳤다. 동일 경기에서 대타 홈런과 끝내기 홈런을 기록한 것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5번째였다. 이 해에는 96경기에 출전하여 3년 만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는 등 여러모로 활약하며 팀 6년 만의 최하위 탈출에 기여했다.
2014년에는 카지야 타카유키와 츠츠고 요시토모가 외야로 컨버트되면서 이 두 명이 선발로 거의 고정되었고, 남은 외야 1자리를 아라나미 쇼나 카네시로 타츠히코 등과 일일히 오더로 출전하거나 우타 대타 요원이 되어 73경기에 출전했다.
2015년은 팀의 젊은 선수 기용을 위해 1군 공식전에 4경기 출전하는 데 그쳤고, 홈런을 치지 못해 연속 홈런 기록이 16년 만에 멈췄으며, 5월 3일에 출전 선수 등록이 말소되었다. 말소 후에는 젊은 선수 육성을 중시하는 팀 사정으로 인해 이스턴 리그 공식전에 출전 기회가 "1경기당 2타석"으로 제한되었다. 실제로는 이 조건 하에서 타율 .319, 7홈런을 기록했지만, 1군 복귀를 이루지 못한 채 10월 3일에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12월 2일자로 NPB에서 자유 계약 선수로 공시되었다.
2. 5.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2016)
2015년 11월 10일 구사나기 구장에서 개최된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2015년 12월 말에 요코하마 시대의 팀 동료였던 타니시게 모토노부가 1군 감독을 맡고 있는 주니치 드래곤스 관계자가 다무라에게 접촉했다.[20][21] 요코하마 시대의 2001년 추계 캠프에서 임시 코치로 지도를 받았던 오치아이 히로미츠 제너럴 매니저와의 면담에서 그 자리에서 입단이 결정되었다.[20][21]2016년 1월 15일에 육성 선수로 주니치에 입단하는 것이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등번호는 '''215'''였다.[20][21] 당초, 구단은 2016년 초반에 다무라의 지배하 등록을 검토하고 있었고[22], 개막 전에는 2007년에 육성 선수로 주니치에 입단하여, 후에 지배하 선수로 등록되어 그 해의 일본 시리즈에서 MVP를 획득한 나카무라 노리히로와 같은 활약이 기대되었다[8]。
4월 12일에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오릭스 버팔로스와의 웨스턴 리그 공식전에서 대타 출장으로 실전 복귀를 했고[23], 4월 19일에 타마홈 스타디움 지쿠고에서 열린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공식전에서는 4번 지명 타자로 첫 선발 출장을 했다[24]。이후, 주로 4번 지명 타자로 선발 출장을 고정하여, 4월 22일에 공식전 첫 안타를 기록했다[25]。4월 24일에는 2점 적시 2루타를 날려 첫 타점을 기록하는 등, 활약을 보였다[26]。5월 18일에는 나고야 구장 밖으로 넘어가는 공식전 첫 홈런과 첫 맹타상을 기록했지만[27], 지배하 등록은 되지 않았고, 웨스턴 리그 공식전 28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0.279, 1홈런, 8타점을 기록했다.
10월 1일에 현역 은퇴를 표명했지만, 규정에 의해, 육성 선수는 은퇴 취급이 되지 않아, 10월 31일에 자유 계약 공시되었다[28]。자유 계약 후에 받은 인터뷰에서는 지배하 복귀를 하지 못한 시점에서 은퇴를 모색하고 있었고, 스스로 구단에 은퇴를 신청했음을 밝혔다[29]。
3. 은퇴 후
2016년 주니치에서 선수 은퇴 후 2017년부터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30] J SPORTS, SPOTV, tvk, TBS 채널, DAZN, 도쿄 MX, RKB 라디오, TBS 라디오, e스포츠 등 다수의 중계에 출연하고 있다. 다카기 유타카의 YouTube 채널에 출연하기도 했다.
2020년부터 DAZN이 특별 협찬하여 신설된 프로 야구 최우수 배터리상의 월간상에서 센트럴 리그, 퍼시픽 리그의 선정 위원을 맡았다.[30]
2021년부터 NPB・KONAMI가 공동 주최하는 프로 야구 e스포츠 리그 "eBASEBALL 프로스피A 리그"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4. 선수로서의 특징
다무라 히토시는 강하고 유연한 손목을 활용한 스윙으로 넓은 방향으로 장타를 때려내는 타격이 특징이다.[31] 공을 몸쪽으로 끌어당겨 오른쪽으로 장타를 날리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32] 소프트뱅크 이적 후 2010년까지 통산 득점권 타율 .322를 기록할 정도로 상황에 관계없이 자신의 타격을 할 수 있는 유연함도 갖추고 있다.[33]
요코하마 시절 타격 코치 다케노우치 마사시에게 타구를 멀리 날리는 방법을 배우면서 프로 입단 3년차부터 비거리가 늘어났다.[15] 2001년 캠프에서 임시 코치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권유로 로버트 로즈를 참고한 타격 폼에서 신주(神主) 타법으로 바꾸었다.[15] 하지만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고, 2002년 가을 캠프 이후 다시 로즈 타법으로 돌아갔으며, 최종적으로는 양자의 절충이라고 할 수 있는 폼으로 정착하여 파워와 확실성을 겸비한 주력 타자로 성장했다.[34] 전성기에는 "메이저 리그에 가장 가까운 일본인 야수"라고 칭찬받았다.[35]
연 도 | 소 속 | 경 기 | 타 석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자 | 희 생 번 | 희 생 플 | 볼 넷 | 고 4 | 사 구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출 루 율 | 장 타 율 | O P S |
---|---|---|---|---|---|---|---|---|---|---|---|---|---|---|---|---|---|---|---|---|---|---|---|---|
1997년 | 요코하마 | 18 | 27 | 26 | 2 | 7 | 1 | 0 | 1 | 11 | 4 | 0 | 0 | 0 | 1 | 0 | 0 | 0 | 9 | 0 | .269 | .259 | .423 | .682 |
2000년 | 84 | 245 | 226 | 21 | 58 | 6 | 1 | 7 | 87 | 29 | 2 | 0 | 0 | 2 | 13 | 3 | 4 | 64 | 3 | .257 | .306 | .385 | .691 | |
2001년 | 33 | 54 | 43 | 8 | 7 | 2 | 0 | 1 | 12 | 2 | 0 | 0 | 0 | 0 | 8 | 2 | 2 | 15 | 1 | .163 | .321 | .279 | .600 | |
2002년 | 81 | 196 | 183 | 23 | 43 | 8 | 0 | 5 | 66 | 16 | 3 | 1 | 2 | 0 | 9 | 1 | 2 | 54 | 1 | .235 | .278 | .361 | .639 | |
2003년 | 91 | 260 | 242 | 29 | 71 | 12 | 0 | 18 | 137 | 46 | 14 | 7 | 1 | 0 | 12 | 1 | 5 | 65 | 7 | .293 | .340 | .566 | .906 | |
2004년 | 123 | 492 | 449 | 80 | 137 | 19 | 2 | 40 | 280 | 100 | 10 | 7 | 1 | 1 | 39 | 0 | 2 | 126 | 8 | .305 | .363 | .624 | .987 | |
2005년 | 117 | 499 | 450 | 71 | 137 | 26 | 2 | 31 | 260 | 79 | 2 | 4 | 0 | 1 | 43 | 1 | 4 | 108 | 6 | .304 | .369 | .578 | .947 | |
2006년 | 39 | 145 | 127 | 24 | 35 | 3 | 0 | 8 | 62 | 20 | 5 | 1 | 0 | 1 | 14 | 2 | 3 | 29 | 5 | .276 | .359 | .488 | .847 | |
2007년 | 소프트뱅크 | 132 | 553 | 509 | 61 | 138 | 28 | 3 | 13 | 211 | 68 | 3 | 2 | 2 | 1 | 38 | 0 | 3 | 117 | 8 | .271 | .325 | .415 | .740 |
2008년 | 39 | 158 | 149 | 17 | 45 | 6 | 1 | 3 | 62 | 15 | 0 | 1 | 0 | 1 | 6 | 0 | 2 | 29 | 6 | .302 | .335 | .416 | .751 | |
2009년 | 93 | 338 | 308 | 39 | 87 | 17 | 1 | 17 | 157 | 57 | 0 | 1 | 0 | 4 | 22 | 1 | 4 | 66 | 11 | .282 | .334 | .510 | .844 | |
2010년 | 140 | 559 | 513 | 74 | 166 | 33 | 1 | 27 | 282 | 89 | 2 | 2 | 0 | 3 | 33 | 2 | 10 | 93 | 11 | .324 | .374 | .550 | .924 | |
2011년 | 100 | 356 | 323 | 28 | 78 | 16 | 0 | 4 | 106 | 36 | 1 | 1 | 0 | 1 | 29 | 0 | 3 | 66 | 11 | .241 | .309 | .328 | .637 | |
통산: 13년 | 1090 | 3882 | 3548 | 477 | 1009 | 177 | 11 | 175 | 1733 | 561 | 42 | 27 | 6 | 16 | 266 | 13 | 44 | 841 | 78 | .284 | .340 | .488 | .828 |
- 2011년 기준.
- 1995년, 1996년, 1998년, 1999년은 1군 출장 없음.
=== 수비 ===
다무라 히토시는 뛰어난 타구 판단 능력을 바탕으로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했다. 프로 입단 당시부터 노 스텝으로 120미터를 던지는 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으며, 젊은 시절 어깨에 볼트를 넣는 큰 수술을 받은 후에도 강견은 여전했다. 2010년에는 리그 우익수 중 2위의 UZR 2.3을 기록했다. 요코하마 시절, 수비에 정평이 있던 우익수 김성룡과는 철벽 수비를 자랑하는 콤비로 활약했다.
=== 주루 ===
1루 도달까지 4.13초를 기록하는 준족도 겸비했으며,[38] 주전으로 자리 잡은 2003년, 2004년 2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했다.
4. 1. 타격
다무라 히토시는 강하고 유연한 손목을 활용한 스윙으로 넓은 방향으로 장타를 때려내는 타격이 특징이다.[31] 공을 몸쪽으로 끌어당겨 오른쪽으로 장타를 날리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32] 소프트뱅크 이적 후 2010년까지 통산 득점권 타율 .322를 기록할 정도로 상황에 관계없이 자신의 타격을 할 수 있는 유연함도 갖추고 있다.[33]요코하마 시절 타격 코치 다케노우치 마사시에게 타구를 멀리 날리는 방법을 배우면서 프로 입단 3년차부터 비거리가 늘어났다.[15] 2001년 캠프에서 임시 코치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권유로 로버트 로즈를 참고한 타격 폼에서 신주(神主) 타법으로 바꾸었다.[15] 하지만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고, 2002년 가을 캠프 이후 다시 로즈 타법으로 돌아갔으며, 최종적으로는 양자의 절충이라고 할 수 있는 폼으로 정착하여 파워와 확실성을 겸비한 주력 타자로 성장했다.[34] 전성기에는 "메이저 리그에 가장 가까운 일본인 야수"라고 칭찬받았다.[35]
연 도 | 소 속 | 경 기 | 타 석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자 | 희 생 번 | 희 생 플 | 볼 넷 | 고 4 | 사 구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출 루 율 | 장 타 율 | O P S |
---|---|---|---|---|---|---|---|---|---|---|---|---|---|---|---|---|---|---|---|---|---|---|---|---|
1997년 | 요코하마 | 18 | 27 | 26 | 2 | 7 | 1 | 0 | 1 | 11 | 4 | 0 | 0 | 0 | 1 | 0 | 0 | 0 | 9 | 0 | .269 | .259 | .423 | .682 |
2000년 | 84 | 245 | 226 | 21 | 58 | 6 | 1 | 7 | 87 | 29 | 2 | 0 | 0 | 2 | 13 | 3 | 4 | 64 | 3 | .257 | .306 | .385 | .691 | |
2001년 | 33 | 54 | 43 | 8 | 7 | 2 | 0 | 1 | 12 | 2 | 0 | 0 | 0 | 0 | 8 | 2 | 2 | 15 | 1 | .163 | .321 | .279 | .600 | |
2002년 | 81 | 196 | 183 | 23 | 43 | 8 | 0 | 5 | 66 | 16 | 3 | 1 | 2 | 0 | 9 | 1 | 2 | 54 | 1 | .235 | .278 | .361 | .639 | |
2003년 | 91 | 260 | 242 | 29 | 71 | 12 | 0 | 18 | 137 | 46 | 14 | 7 | 1 | 0 | 12 | 1 | 5 | 65 | 7 | .293 | .340 | .566 | .906 | |
2004년 | 123 | 492 | 449 | 80 | 137 | 19 | 2 | 40 | 280 | 100 | 10 | 7 | 1 | 1 | 39 | 0 | 2 | 126 | 8 | .305 | .363 | .624 | .987 | |
2005년 | 117 | 499 | 450 | 71 | 137 | 26 | 2 | 31 | 260 | 79 | 2 | 4 | 0 | 1 | 43 | 1 | 4 | 108 | 6 | .304 | .369 | .578 | .947 | |
2006년 | 39 | 145 | 127 | 24 | 35 | 3 | 0 | 8 | 62 | 20 | 5 | 1 | 0 | 1 | 14 | 2 | 3 | 29 | 5 | .276 | .359 | .488 | .847 | |
2007년 | 소프트뱅크 | 132 | 553 | 509 | 61 | 138 | 28 | 3 | 13 | 211 | 68 | 3 | 2 | 2 | 1 | 38 | 0 | 3 | 117 | 8 | .271 | .325 | .415 | .740 |
2008년 | 39 | 158 | 149 | 17 | 45 | 6 | 1 | 3 | 62 | 15 | 0 | 1 | 0 | 1 | 6 | 0 | 2 | 29 | 6 | .302 | .335 | .416 | .751 | |
2009년 | 93 | 338 | 308 | 39 | 87 | 17 | 1 | 17 | 157 | 57 | 0 | 1 | 0 | 4 | 22 | 1 | 4 | 66 | 11 | .282 | .334 | .510 | .844 | |
2010년 | 140 | 559 | 513 | 74 | 166 | 33 | 1 | 27 | 282 | 89 | 2 | 2 | 0 | 3 | 33 | 2 | 10 | 93 | 11 | .324 | .374 | .550 | .924 | |
2011년 | 100 | 356 | 323 | 28 | 78 | 16 | 0 | 4 | 106 | 36 | 1 | 1 | 0 | 1 | 29 | 0 | 3 | 66 | 11 | .241 | .309 | .328 | .637 | |
통산: 13년 | 1090 | 3882 | 3548 | 477 | 1009 | 177 | 11 | 175 | 1733 | 561 | 42 | 27 | 6 | 16 | 266 | 13 | 44 | 841 | 78 | .284 | .340 | .488 | .828 |
- 2011년 기준.
- 1995년, 1996년, 1998년, 1999년은 1군 출장 없음.
4. 2. 수비
다무라 히토시는 뛰어난 타구 판단 능력을 바탕으로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했다. 프로 입단 당시부터 노 스텝으로 120미터를 던지는 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으며, 젊은 시절 어깨에 볼트를 넣는 큰 수술을 받은 후에도 강견은 여전했다. 2010년에는 리그 우익수 중 2위의 UZR 2.3을 기록했다. 요코하마 시절, 수비에 정평이 있던 우익수 김성룡과는 철벽 수비를 자랑하는 콤비로 활약했다.4. 3. 주루
1루 도달까지 4.13초를 기록하는 준족도 겸비했으며,[38] 주전으로 자리 잡은 2003년, 2004년 2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했다.5. 인물
다무라는 제1회 WBC에서의 활약으로 쿠바에서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얻었다.[39] 프레데리크 세페다는 다무라가 소프트뱅크 시대에 사용하던 배트를 사용하며, 그립에 "H6"이라고 새겨져 있다.[39] 율리에스키 구리엘은 DeNA에서 다무라와 팀 동료가 되었을 때 "다무라 씨는 쿠바에서 전설적인 사람. 함께 플레이할 수 있어서 기쁘다"라고 말했다.
요코하마・소프트뱅크 시대에는 등번호 6에 맞춰 5툴 플레이어(5툴=타격 기술, 파워, 발, 수비, 어깨)에 패션을 더한 "6툴 플레이어"를 자칭했다.[40] 사용하는 용구에 "6TOOLS"라고 각인했으며, 공식 사이트명에도 사용했다. 2009년부터는 패션을 멘탈리티로 변경했다.
프로 입단 이후 매년 부상에 시달려 일부 팬들로부터 『'''스페랑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41]
사용했던 야구 용구는 미즈노, SSK, 푸마(스파이크)를 거쳐[42][43] 최종적으로 언더 아머 제품을 사용했다. 일본인 프로 야구 선수로 언더 아머제 야구 용구를 사용한 첫 번째 선수이다.[44] 로버트 로즈로부터 받은 배트가 자신의 타격 스타일과 맞아 현역 은퇴까지 같은 형태의 배트를 계속 사용했다.[45]
어릴 적부터 가족과 친척도 지역 다이요 웨일즈 팬이었고, 요코하마에 드래프트 지명되었을 때 친족들로부터 "잘했다"라며 기뻐했다. 당시부터 형의 영향으로 메이저 리그를 보며 메이저 리거를 동경했다.[46] 프로 입단 당시 목표로 하는 선수로 리키 헨더슨을 꼽았다.[9]
고향에 은혜를 갚고, 자원 봉사자들의 힘이 되고 싶다며, 현역 시절 자선 사업 팀 "라이무 로드 다무라"를 창설하여 여러 단체에 기부하고 지원을 계속해 왔다.[47][48][49]
6. 수상 및 타이틀 경력
다무라 히토시는 2010년에 베스트 나인에 1회 선정되었다. 2005년에는 우수 JCB·MEP상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아쓰기 시민 공로상과 WBC 우승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자수포장(紫綬褒章)을 받았다.
7. 개인 기록
다무라 히토시는 1997년 4월 4일 주니치 드래곤스전에서 첫 출장했다. 같은 해 4월 8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첫 안타, 4월 10일 한신전에서 첫 타점을 기록했다. 4월 22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8번 타자 겸 우익수로 첫 선발 출장했으며, 4월 25일 주니치 드래곤스전에서 첫 홈런을 기록했다. 2000년 9월 1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첫 도루를 성공시켰다.
2004년 4월 2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첫 만루 홈런을 기록했고, 같은 해 7월 17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는 3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2004년 4월 21일부터 4월 24일까지, 그리고 2006년 5월 19일부터 5월 23일까지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2005년 4월 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첫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고, 같은 해 9월 17일 요미우리전에서 통산 100홈런을 달성했다. 2009년 6월 2일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를 상대로 홈런을 기록하며 전 구단 상대 홈런을 달성했다.
2010년 5월 8일에는 통산 150홈런, 2011년 4월 23일에는 1000경기 출장, 10월 2일에는 1000안타를 달성했다. 2013년 5월 1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첫 끝내기 홈런을 기록했다.
그 외 기록으로는 리그 외야수 수비율 레인지 팩터(RF/G) 1위(2004년: 2.09)를 기록했고, 2010년에는 올스타전에 출장했다.
8. 등번호
다무라 히토시는 1995년부터 1999년, 그리고 2013년에는 등번호 52번을 사용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는 55번을, 2004년부터 2012년까지는 6번을 사용했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는 8번을, 2016년에는 215번을 등번호로 사용했다.
9. 등록명
1995년부터 2009년 5월 21일까지는 를, 2009년 5월 22일부터는 를 등록명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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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の人が語る 〜わが青春に悔いな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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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A戦力外の多村が中日と育成契約 背番215 - 野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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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村仁志、最後まで「バットマンの誇り」持ち続け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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