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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노부시게 (15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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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케다 노부시게는 1525년 다케다 노부토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인 다케다 신겐을 보좌하며 시나노 지역 공략에 참여했다. 그는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학문적 소양도 갖추어 99개 조항의 가훈을 저술했으며,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양측 모두 노부시게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으며, 에도 시대에도 존경받는 인물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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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노부시게 (1525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540년대에 우타가와 구니요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사무라이 다케다 노부시게 그림
1540년대에 우타가와 구니요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사무라이, 다케다 노부시게
이름다케다 노부시게
로마자 표기Takeda Nobushige
이명다케다 덴큐
출생과 사망
출생1525년
사망1561년 10월 18일
소속
충성다케다 가문
가족 관계
관련 인물다케다 신겐
군사 경력
참전 전투시나노 전투 (1542-1557)
가와나카지마 전투 (1561)
일본어 정보
일본어 이름武田 信繁
가명덴큐 (典厩), 고텐큐 (古典厩)
계명쇼소인덴 가쿠잔소게쓰 다이코지 (松操院殿鶴山巣月大居士)
묘소덴큐지 (나가노시 시노노이 기네부치)
관위사마노스케 (左馬助)
주군다케다 신겐
씨족가이 다케다 씨, 요시다 씨
부모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 어머니: 오이노카타
형제자매다케마쓰
신겐
이누치요
신시게
신모토 (신토모?)
노부카도
노부아키라
이치조 노부타쓰
무네토모
마쓰오 노부코레
가와쿠보 노부자네
노부토모
가쓰토라
조케이인
난쇼인덴 (아나야마 노부토모 정실)
네네
겟코인 (우라노 씨 부인)
가메고료닌 (오이 노부타메 정실)
시모조 노부우지 정실
네쓰 신베이 부인
가쓰라야마 씨 부인
기쿠고료닌 (기쿠테이 하루스에 부인)
배우자요슈인 닛토니, 출신 불명
자녀모치즈키 노부요리
노부토요
모치즈키 노부나가
딸 (니시나 모리노부 부인)

2. 생애

다이에이 5년(1525년) 다케다 노부토라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8] 어릴 적 이름은 '''지로'''였다. 노부토라는 어린 시절부터 노부시게를 총애하여 적자인 하루노부(후의 다케다 신겐)를 폐하고 노부시게에게 가독을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덴분 10년(1541년), 하루노부가 노부토라를 스루가국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영지로 추방하는 쿠데타에 노부시게는 하루노부와 힘을 합쳤다[9]。다만, 가이국지에 따르면 양자 간의 합의 하에 노부토라가 은거했다고 한다. 하루노부가 가독을 상속받을 당시 노부시게는 누나의 남편인 아야마 노부토모와 함께 고이치몬슈 중 몇 안 되는 성인이었으며, 하루노부의 보좌역으로서 시나노 경략에 종사했다.

덴분 11년(1542년)의 스와 침공에서는 노부시게가 대장으로서 숙로인 이타가키 노부카타와 함께 출병을 주도했으며, 같은 해 9월의 다카토 요리쓰구의 반란 당시에도 진압의 대장을 맡았다. 이때 하루노부에게 미움을 받고 있던 나가사카 도라후사가 요리쓰구의 동생인 렌포사이(蓮芳斎)를 쳐서 죽였고, 노부시게가 중재하여 사면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스와를 제압한 다케다 씨는 노부카타를 군대(郡代)로 임명하고, 노부시게에게도 스와 시중(諏訪衆)을 동심으로 부속시켰다고 한다.[10] 덴분 13년(1544년)에는 노부토라의 고야산 참배에 즈음하여 숙방(宿坊)이 된 인두원(引導院)에 대한 답장을 발급했으며, 대외 교섭에 관여한 것도 확인된다.

덴분 20년(1551년) 2월 1일, 『고하쿠사이키』에 따르면 노부시게는 다케다 씨의 서류인 요시다 씨를 습명했다. 신겐 시대에는 다케다 일족 중에서도 다케다 성을 면허받는 가문은 고이치몬슈에서도 제한되었으며, 노부시게에 대해서는 요시다 씨를 습명한 기록이 보이지만 문서상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고이치몬슈 필두로서 특별한 입장에 있었다고 생각된다.[11] 같은 시기에는 하루노부의 적남인 요시노부가 원복을 치렀으며, 노부시게의 요시다 씨 계승은 다케다 종가에서 벗어나 서류 가문의 당주가 됨으로써 요시노부의 다케다 종가 후계자로서의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한 정치적 배려였을 가능성도 생각된다.[12]

덴분 20년 7월, 무라카미 요시키요 토벌을 위한 선봉으로 출진[13]。덴분 22년(1553년) 4월에는 가이슈(甲斐衆)인 이마이 이와미노카미에게 함락된 시나노국 카리야하라 성주로 임명하는 통지를 했다. 같은 해 4월에는 무라카미 측으로부터 탈취한 카츠라오 성에 주둔하고 있던 아키야마 도라시게에게도 상위(上位)를 통지하는 등[8], 은상을 부여했다. 또한 다케다 씨는 곧 북시나노 지역을 둘러싸고 에치고국의 나가오 카게토라(후의 우에스기 겐신)와 항쟁을 벌였지만(가와나카지마 전투), 덴분 24년(1555년)에는 카게토라의 에치고 귀진을 보고했다.

다케다 씨는 정복한 시나노 여러 종족에게 일족을 양자로 들여 회유하는 방책을 취했는데, 노부시게의 아들인 노부요리와 노부나가도 시나노 사쿠군의 모치즈키 씨의 양자가 되었다.

에이로쿠 4년(1561년) 9월 10일,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전사한다. 향년 37세[14]

노부시게의 유해는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노부시게 본진이 되었던 쓰루스사(鶴巣寺)에 매장되었다. 쇼오 3년(1654년), 마쓰시로 번 주(主)인 사나다 노부유키가 쓰루스사를 텐큐지로 개칭하고, 노부시게의 명복을 빌었다.[15][16] 사나다 씨가 노부시게에게 보인 경애는 다케다 씨를 섬겼던 노부유키의 아버지인 사나다 마사유키에서 비롯되었으며, 마사유키는 자신의 차남에게 그 이름을 하사했다(사나다 노부시게)[9]

노부시게는 『다케다 호쇼인 신겐공 어대 총수인수지사』, 『고요 군감』등의 다케다 가신단에서 동복 동생인 노부스미와 함께 다케다 성의 칭호를 면허받는 고이치몬슈에 속하며, 노부시게·노부토요의 다케다 덴큐가(武田典厩家)는 노부스미의 다케다 쇼요켄가와 함께 고이치몬슈의 필두에 위치한다. 노부시게는 다케다 영내에서 성번(城番)으로서 영역 지배를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고후에 거주하며 다케다 가문의 외교에 참여하고, 합전 시에는 신겐의 대리로서 군사를 지휘하고, 선봉을 통제하는 입장에서 출진했다고 생각된다.[17]

자손으로는 원구라인을 맡았던 다케다 하루치카가 있다.[18]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다이에이 5년(1525년), 다케다 노부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지로'''(次郎)이다.[8] 덴분 10년(1541년)에 형 하루노부(후의 신겐)가 아버지 노부토라를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문으로 추방하였다.[3] 《고요군칸(甲陽軍鑑)》에 따르면, 노부토라가 노부시게를 어렸을 때부터 총애하여 적남인 하루노부를 폐하고 노부시게에게 가독을 물려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9] 다만, 가이국지에 따르면 양자 간의 합의 하에 노부토라가 은거했다고 한다.

하루노부 대에 다케다 가문은 시나노 침공을 본격화하여,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비롯한 시나노의 고쿠진 영주와 에치고우에스기 겐신과의 고에쓰 대립구도가 생기게 된다. 노부시게는 하루노부의 보좌역으로서 시나노 경략에 종사하여 덴분 20년(1551년) 7월 무라카미 공격에 선진으로 출진하였고,[13] 덴분 22년(1553년)의 시나노 카리야하라 성(苅屋原城) 공략, 무라카미 가문의 가쓰라오 성 공략 등에서 공을 세웠다.[5] 다케다 가문은 정복한 시나노 제후에 대해 일족을 양자로 보내는 회유책을 택하여, 노부시게의 아들도 시나노 사쿠 군(佐久郡)의 모치즈키 씨의 양자로 들어갔다.[8]

신겐 대에는 다케다 일족에서도 다케다 성을 쓰도록 허락받은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노부시게는 동생인 다케다 노부카도(武田信廉)와 함께 다케다 성을 쓰는 것을 허락받았다.[11] 노부시게·노부토요의 다케타 덴큐가문(典厩家)은 노부카도의 다케다 쇼요켄가문(逍遥軒家)과 함께 일문의 필두로서 지배지의 성을 지키는 역할이 아니라, 다케다 가문의 본거지 고후(甲府)에 주재하며 다케다 가문의 외교에 참여하며 전투 시에는 선봉을 통솔하는 역할로 출진하는 중책을 맡았다.[17]

2. 2. 시나노 공략과 활약

다이에이 5년(1525년) 다케다 노부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지로(次郎)이다.[8]

덴분 10년(1541년) 형 하루노부(후의 신겐)가 아버지 노부토라를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문으로 추방했다. 《고요군칸(甲陽軍鑑)》에 따르면, 노부토라가 노부시게를 총애하여 적남인 하루노부를 폐하고 가독을 물려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3] 다만, 가이국지에 따르면 양자 간의 합의 하에 노부토라가 은거했다고 한다.

하루노부 대에 다케다 가문은 시나노 침공을 본격화하여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비롯한 시나노 고쿠진 영주와 에치고우에스기 겐신과의 고에쓰 대립 구도가 생기게 된다. 노부시게는 하루노부의 보좌역으로서 시나노 경략에 종사했다.[9] 덴분 11년(1542년) 스와 침공에서는 노부시게가 대장으로서 이타가키 노부카타와 함께 출병을 주도했다.[10] 덴분 20년(1551년) 7월 무라카미 공격에 선진으로 출진하였고,[13] 덴분 22년(1553년) 시나노 카리야하라 성(苅屋原城) 공략, 무라카미 가문의 카츠라오 성 공략 등에서 공을 세웠다.[8] 다케다 가문은 정복한 시나노 제후에 대해 일족을 양자로 보내는 회유책을 택하여, 노부시게의 아들도 시나노 사쿠 군(佐久郡) 모치즈키 씨의 양자로 들어갔다.

에이로쿠 4년(1561년) 9월 10일, 제 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우에스키 군의 조총탄에 왼쪽 가슴을 맞아 나가노현 가와나카지마에서 전사하였다. 향년 37세.[14] 그의 유해는 노부시게 본진이 있던 쓰루스사(鶴巣寺)에 매장되었고, 쇼오 3년(1654년) 마쓰시로 번 주인 사나다 노부유키가 텐큐지로 개칭하고 명복을 빌었다.[15][16]

신겐 대에는 다케다 일족 중에서도 다케다 성을 쓰는 것이 허락된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노부시게는 동생인 다케다 노부카도(武田信廉)와 함께 다케다 성을 쓰는 것을 허락받았다. 노부시게·노부토요의 다케타 덴큐가문(典厩家)은 노부카도의 다케다 쇼요켄가문(逍遥軒家)과 함께 일문의 필두로서 다케다 가문의 본거지 고후(甲府)에 주재하며 외교에 참여하고 전투 시에는 선봉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았다.[17]

노부시게는 다케다 씨 가문을 위한 99개의 규칙 또는 규율을 담은 구십구개조(九十九箇条)를 저술했는데, 이 중 일부는 때때로 신겐 자신의 것으로 잘못 여겨지기도 한다.

2. 3. 가와나카지마 전투와 죽음

다케다 노부시게는 다이에이 5년 다케다 노부토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지로(次郎)이다.[3][8]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총애를 받아 형 하루노부(후의 신겐) 대신 가독을 이을 예정이었으나,[3] 덴분 10년 형 하루노부가 아버지 노부토라를 스루가국으로 추방할 때 이에 협력하였다.[9]

하루노부(신겐)가 다케다 가문의 수장이 된 후, 다케다 가문은 시나노국 침공을 본격화했고, 무라카미 요시키요 등 시나노 호족들과 우에스기 겐신에치고국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노부시게는 신겐의 보좌역으로 시나노 경략에 종사하며, 덴분 20년 7월 무라카미 공격에 선봉으로 출진하고, 덴분 22년 시나노 카리야하라 성(苅屋原城) 공략, 무라카미 가문의 가쓰오 성(葛尾城) 공략 등에서 공을 세웠다.[5] 다케다 가문은 정복한 시나노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일족을 양자로 보냈는데, 노부시게의 아들도 시나노 사쿠 군의 모치즈키 씨의 양자로 들어갔다.[8]

노부시게는 다케다 덴큐(典厩)라고도 불렸으며,[4] 다케다 가문 내에서 중요한 장군으로 활약하며 여러 차례 군대를 이끌었다. 덴분 13년 신겐이 반란에 직면했을 때, 노부시게는 후지사와 요리치카의 코진야마 성을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5] 덴분 22년에는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주성인 가쓰라오 성을 함락시켜 요시키요가 우에스기 겐신에게 의탁하게 만들었고, 이는 가와나카지마 전투 발발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5]

에이로쿠 4년 9월 10일,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노부시게는 우에스기 군의 조총에 왼쪽 가슴을 맞고 나가노에서 전사하였다.[5] 향년 37세였다.[14] 그의 유해는 가와나카지마의 쓰루스사(鶴巣寺)에 매장되었고, 후에 쇼오 3년 마쓰시로 번주 사나다 노부유키가 텐큐지(典厩寺)로 개칭하여 노부시게의 명복을 빌었다.[15][16]

신겐 시대에 다케다 일족 중에서도 다케다 성을 쓰는 것이 허락된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노부시게는 동생 다케다 노부카도와 함께 다케다 성을 쓰는 것이 허락되었다. 노부시게와 노부토요의 다케다 덴큐 가문(典厩家)은 노부카도의 다케다 쇼요켄 가문(逍遥軒家)과 함께 일문의 필두로서 다케다 가문의 본거지 고후에 주재하며 외교에 참여하고, 전투 시에는 선봉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았다.[17] 사나다 유키무라의 초기 이름인 사나다 노부시게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6][9]

3. 가문의 주요 인물

4. 인물 및 평가

노부시게는 상당한 교양을 갖추고 있었던 듯, 구게 요쓰츠지 스에토오(四辻季遠) 등이 가이에 방문하였을 때 와카를 읊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논어》 등의 중국 고전에서 인용한 구절이 보이는 99개 조항의 가훈을 작성하였다.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노부시게가 전사하자 신겐은 노부시게의 유해를 안고 통곡했다고 전해지며, 우에스기 겐신 쪽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다고 한다. 다케다 가신단에서도 만일 노부시게가 살아있었다면 신겐의 장남 요시노부의 모반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자가 많았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도 “진짜 무장”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아, 적자 노부토요에게 남긴 《다케다 노부시게 가훈》은 부시의 수칙으로서 널리 읽혔으며, 유학자 무로 규쇼(室鳩巣)는 “덴분, 에이로쿠 연간에 현자라고 칭할만한 인물이 있었다. 고슈(甲州) 다케다 신겐 공의 아우, '''고텐큐 노부시게 공'''이다.”라고 칭송하였다.[19]

무타케다 씨(武田氏)에서는 신겐을 비롯하여 문학적 업적을 남긴 인물도 여러 명 있지만, 노부시게(信繁)도 덴분(天文) 17년(1548년), 요츠츠지 스에토오(四辻季遠) 등이 가이를 방문했을 때 와카를 읊었다.

에이로쿠(永禄) 원년(1558년) 4월, 99개 조에 달하는 『다케다 노부시게 가훈』(고슈 하도노 시다이(甲州法度之次第)의 원형)을 작성하여 적자(嫡子)인 조로(信豊)에게 주었다. 서문은 조젠지(長禅寺) 주지인 슌고쿠 코신(春国光新)이 찬술(撰文)했으며, 내용도 『논어』를 비롯한 중국 고전에서 인용된 부분이 있어, 노부시게의 교양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가훈은 에도 시대 무사의 마음가짐으로 널리 읽혀졌으며, 노부시게는 "진정한 무장"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신겐은 전사한 노부시게의 유해를 껴안고 통곡했다고 전해지며, 적이었던 우에스기 데루토라를 비롯하여 우에스기 가신단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케다 가신단에서도 "아까워해도 오히려 아까워해야 한다"고 평가받았으며, 만약 노부시게가 살아있었다면 신겐과 요시노부 부자의 대립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또한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고텐큐 노부시게, 나이토 마사토요야말로 모든 일에서 서로 조화로운 진정한 부장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20]

4. 1. 군사적, 정치적 능력

다케다 노부시게는 상당한 교양을 갖춘 인물로, 구게 요쓰쓰지 스에토오(四辻季遠) 등이 가이에 방문하였을 때 와카를 읊었다는 기록이 있으며,[19]논어》 등의 중국 고전에서 인용한 구절이 보이는 99개 조항의 가훈을 작성하였다.[3][19] 특히 다케다 씨 가문의 구성원을 위한 99개의 짧은 규칙 또는 규율을 담은 구십구개조(九十九箇条)를 저술했는데, 이 중 일부는 때때로 신겐 자신의 것으로 잘못 여겨지기도 한다.

노부시게는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의 총애를 받아 다케다 가문의 수장이 될 운명이었으나, 형 신겐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영토와 권력을 빼앗았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시게는 신겐을 지원하며 형과 함께 싸웠으며, 전략적 통찰력뿐만 아니라 지혜로도 유명했다.

가와나카지마에서 노부시게가 전사하자 신겐은 노부시게의 유해를 안고 통곡했다고 전해지며, 우에스기 겐신 측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다고 한다. 다케다 가신단에서도 만일 노부시게가 살아있었다면 신겐의 장남 요시노부의 모반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자가 많았다.[20] 에도 시대에 들어서도 “진짜 무장”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19] 적자 노부토요에게 남긴 《다케다 노부시게 가훈》은 부시의 수칙으로서 널리 읽혔다. 유학자 무로 규쇼(室鳩巣)는 “덴분, 에이로쿠 연간에 현자라고 칭할만한 인물이 있었다. 고슈(甲州) 다케다 신겐 공의 아우, '''고텐큐 노부시게 공'''이다.”라고 칭송하였다.[19]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고텐큐 노부시게, 나이토 마사토요야말로 모든 일에서 서로 조화로운 진정한 부장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20]

4. 2. 학문적 소양과 가훈

다케다 노부시게는 상당한 교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게 요쓰쓰지 스에토오(四辻季遠) 등이 가이에 방문하였을 때 와카를 읊었다는 기록이 있으며,[19]논어》 등의 중국 고전에서 인용한 구절이 보이는 99개 조항의 가훈을 작성하였다. 이 가훈은 고슈 하도노 시다이(甲州法度之次第)의 원형으로, 에도 시대 무사의 마음가짐으로 널리 읽혀졌다.[19]

노부시게는 특히 다케다 씨 가문의 구성원을 위한 99개의 짧은 규칙 또는 규율을 담은 구십구개조(九十九箇条)를 저술했는데, 이 중 일부는 때때로 신겐 자신의 것으로 잘못 여겨지기도 한다. 에이로쿠(永禄) 원년(1558년) 4월에 작성된 이 가훈의 서문은 조젠지(長禅寺) 주지인 슌고쿠 코신(春国光新)이 찬술(撰文)했다.[19]

유학자 무로 규쇼(室鳩巣)는 "덴분, 에이로쿠 연간에 현자라고 칭할만한 인물이 있었다. 고슈(甲州) 다케다 신겐 공의 아우, '''고텐큐 노부시게 공'''이다.”라고 칭송하였다.[19]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고텐큐 노부시게, 나이토 마사토요야말로 모든 일에서 서로 조화로운 진정한 부장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20]

4. 3. 후대의 평가

다케다 노부시게는 상당한 교양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게인 요쓰쓰지 스에토오(四辻季遠) 등이 가이를 방문했을 때 와카를 읊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19] 논어 등 중국 고전에서 인용한 구절이 보이는 99개 조항의 가훈을 작성하기도 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노부시게가 전사하자 신겐은 그의 유해를 안고 통곡했으며, 우에스기 겐신 측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다고 한다. 다케다 가신단에서는 노부시게가 살아있었다면 신겐의 장남 요시노부의 모반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고텐큐 노부시게, 나이토 마사토요야말로 모든 일에서 서로 조화로운 진정한 부장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20]

에도 시대에 들어서도 “진짜 무장”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적자 노부토요에게 남긴 《다케다 노부시게 가훈》은 부시의 수칙으로서 널리 읽혔다. 유학자 무로 규쇼는 “덴분, 에이로쿠 연간에 현자라고 칭할만한 인물이 있었다. 고슈 다케다 신겐 공의 아우, '''고텐큐 노부시게 공'''이다.”라고 칭송하였다.[19]

5. 가족 관계


  •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 (1493-1574)
  • 형제:
  • * 다케마츠 (1517-1523)
  • * 다케다 신겐 (1521-1573)
  • * 이누치요 (1523-1529)
  • * 다케다 노부모토
  • * 다케다 노부카도 (1529-1582)
  • * 마쓰오 노부코레 (1530년대-1571)
  • * 다케다 소우치
  • * 다케다 노부자네 (1530년대-1575)
  • * 이치조 노부타츠 (1539년경-1582)
  • 자매:
  • * 조케이인 (1519-1550),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결혼
  • * 난쇼인 (1520년 출생) 아야마 노부토모와 결혼
  • * 네네 (1528-1543) 스와 요리시게와 결혼

6. 대중문화 속의 다케다 노부시게

가시마 노리토시가 2006년 NHK의 대하드라마에서 노부시게를 연기했다.

7. 각주

참조

[1] 웹사이트 Takeda Nobushige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3
[2] 서적 The Samurai banner of Furin Kazan https://books.google[...]
[3] 서적 Battles of the Samurai Arms and Armour Press
[4]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5]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6] 웹사이트 真田昌幸も憧れた信玄の弟・信繁 https://www.rekishij[...] 歴史人 2021-10-28
[7] 간행물 武田信玄とその一族 新人物往来社
[8] 문서 高白斎記
[9] 웹사이트 真田昌幸も憧れた武田信玄の弟・信繁 | 歴史人 https://www.rekishij[...] 2023-04-08
[10] 문서 甲陽軍鑑
[11] 간행물 武田信玄の家臣団編成
[12] 문서 丸島 2007
[13] 문서 恵林寺旧蔵文書
[14] 문서 勝山記
[15] 웹사이트 長野市「信州・風林火山」特設サイト https://www.nagano-c[...] 2023-04-08
[16] 웹사이트 長野市文化財データベース 頭で感じる文化財 デジタル図鑑(頭感) http://bunkazai-naga[...] 2023-04-08
[17] 문서 平山(2008)
[18] 서적 地下家伝 第1-7 (日本古典全集 ; 第6期) https://dl.ndl.go.jp[...] 日本古典全集刊行会
[19] 문서 駿台雑話
[20] 문서 甲陽軍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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