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노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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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나다 노부시게는 1567년 또는 1570년에 태어난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그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차남으로, 다케다 신겐을 섬기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패배 후 유배되었으나,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싸우다 49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그는 용맹한 무장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오사카 전투에서의 활약은 유명하다. 그의 깃발인 육문전은 용맹함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상징하며, '사나다 유키무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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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노부시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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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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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사나다 노부시게 |
다른 이름 | 사나다 노부시게, 사나다 사에몬노스케, 벤마루 |
출생 | 1567년 |
사망 | 1615년 6월 3일 |
배우자 | 호타 가문 여인, 다카나시 가문 여인, 지쿠린인 |
가족 | 사나다 마사유키 (아버지) 간쇼인 (어머니) 사나다 노부유키 (형) 오타니 요시쓰구 (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양아버지) 고마쓰히메 (형수) |
자녀 | 사나다 유키마사 (다이스케) 가타쿠라 모리노부 (다이하치) 사나다 유키치카 (곤자에몬) |
가문 | [[파일:Japanese Crest rokumonsen.svg|15px]] 사나다 가문 |
소속 | [[파일:Japanese Crest Takeda Hisi.svg|15px]] 다케다 가문 [[파일:Oda emblem.svg|15px]] 오다 가문 [[파일:Japanese Crest Uesugi Sasa.svg|15px]] 우에스기 가문 [[파일:Japanese Crest Houjou Uroko.svg|15px]] 후기 호조 가문 [[파일:Mitsubaaoi.svg|15px]] 도쿠가와 가문 [[파일:Goshichi no kiri inverted.svg|15px]] 도요토미 가문 [[파일:大一大万大吉.svg|15px]] 서군 |
주요 전투 | 오시 성 포위전 (1590년) 조선 campaign (1592-1598년) 우에다 성 포위전 (1600년) 오사카 전투 (1614-1615년) |
인물 정보 | |
일본어 표기 | 真田 信繁 |
일본어 다른 이름 | 真田 幸村 |
별명 | 일본 제일의 무사 |
어린 시절 이름 | 벤마루 |
법명 | 고하쿠 |
통칭 | 겐지로 |
사망일 | 1615년 6월 3일 (음력 5월 7일) |
계명 | 다이코인덴 겟산 덴신 다이코지 |
묘소 | 나가노현 나가노시 조코쿠지 교토부 교토시 료안지 탑두 다이주인 교토부 교토시 묘신지 탑두 요토쿠인 미야기현 시로이시시 묘소 후쿠이현 후쿠이시 효켄지 아키타현 유리혼조시 묘케이지 가고시마현 미나미큐슈시 묘소 아키타현 오다테시 잇신인 오사카부 오사카시 덴노지구 심간지 |
관위 | 종오위하 사에몬노스케 |
주군 | 다케다 가쓰요리 사나다 마사유키 우에스기 가게카쓰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리 |
씨족 | 무토 씨 → 사나다 씨 ( 세이와 겐지 우미노류), 도요토미 증성 |
부모 |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 어머니: 야마노테도노 (이설 있음) |
형제 | 무라마쓰도노 사나다 노부유키 사나다 노부시게 사나다 노부카쓰 사나다 마사치카 외 |
아내 | 정실: 지쿠린인 (오타니 요시쓰구의 딸) 측실: 류세이인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딸), 호타 오키시게의 딸 또는 여동생, 다카나시 나이키의 딸 |
자녀 | 아키쿠 (이시아이 시게사다/미치사다의 아내) 오이치 아우메 (가타쿠라 시게나가의 후처) 아쿠리 (가모 사토요시의 아내) 사나다 유키마사 나호 (미타히메, 이와키 노부타카의 아내) 아쇼 ( 가타쿠라 사다히로의 아내) 오카네 (이시카와 시게마사 또는 이시카와 사다키요의 아내) 사나다 다이하치 미요시 유키노부 외 |
기타 정보 | |
참고자료 | BS-TBS THE 넘버2 ~역사를 움직인 그림자 주역들~ 도쿠가와 측도 칭찬 "일본 제일의 무사"~사나다 유키무라(1567~1615) |
2. 생애
에이로쿠(永禄) 10년(1567년) 또는 겐키(元亀) 원년(1570년)[94],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덴쇼(天正) 3년(1575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다케다 가문(武田氏)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연합군에게 패하고, 아버지 마사유키의 두 형이 전사하면서 마사유키가 사나다 가문을 이었다. 노부시게는 부친을 따라 고후(甲府)에서 고즈케국(上野国) 이와비쓰 성(岩櫃城)으로 갔다.
1582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한 뒤,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간나가와 전투(神流川の戦い)에서 호조 가문에게 패하여 이세로 퇴각하였다. 사나다 가문은 오다 가문의 방패를 잃고 영지를 지키기 위해 호조, 도쿠가와, 우에스기 사이에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1585년 마사유키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간의 불화로 일어난 제1차 우에다 전투(第一次上田合戦) 때, 노부시게는 우에스기 가문에 인질로 보내졌으나 우에스기를 배신하고 도쿠가와 쪽에 붙은 야시로 가문의 땅을 영지로 받았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하면서 노부시게는 오사카로 보내졌다. 그는 오타니 요시쓰구의 딸 다케바야시인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37] 1589년(덴쇼 17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노부유키는 누마다 성을 호조 가문에게 넘겼으나, 호죠 우지나오가 나구루미 성을 공격하여 오다와라 정벌이 시작되었다. 노부시게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지휘 아래 오시 성 공격에 참전하였다.
임진왜란(분로쿠의 역) 당시, 노부시게는 히젠 나고야 성에 주둔하며 700명의 병력을 지휘하였다.[37] 1594년(분로쿠 3년) 11월 2일, 종오위하 사에몬노스케에 서임됨과 동시에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37] 이러한 노부시게의 출세에는 장인 요시쓰구와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38] 최근 연구에 따르면, 노부시게는 히데요시의 마와리슈였으며, 아버지 마사유키와는 별도로 1만 9천 석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39] 그는 후시미 성 재건에 참여하고, 오사카와 후시미에 저택을 받는 등 독립된 다이묘로 대우받았다.[39]
1600년 (게이초 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자, 이시다 미쓰나리가 반(反) 도쿠가와 기치를 올리며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했다. 노부시게는 아버지 마사유키와 함께 서군에 가담했고, 형 노부유키는 동군에 가담하여 사나다 가문은 둘로 나뉘었다. 형 노부유키는 도쿠가와의 중신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도노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마사유키와 노부시게는 우에다 성에서 농성하여, 나카센도로 진군해 온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을 상대로 선전했다.(제2차 우에다 전투) 소수의 사나다 군에게 고전하던 히데타다 군은 우에다 성 공략을 단념하고 미노의 세키가하라로 이동했으나, 이미 전투는 끝난 뒤였다.[96] 히데타다 군이 물러간 뒤에도 가이즈 성의 모리 다다마사는 가쓰라오 성에 병사를 배치하여 우에다 성의 움직임을 감시하였다. 이에 노부시게는 9월 18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야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은 9월 15일에 히데타다 군이 빠진 동군에 패하였다. 마사유키와 노부시게는 패장으로서 할복을 명받았어야 했으나, 노부유키의 노력으로 기이의 구도잔에 유배되는 것으로 그쳤다.[96]
1614년(게이초 19년), 호코지 사건을 계기로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의 관계가 악화되자, 도요토미 측은 낭인을 모으기 시작했다. 노부시게는 황금 200매, 은 30관을 받고 오사카성(大坂城)에 입성했다. 노부시게가 이끄는 군세는 군장을 붉은 색으로 통일했다고 한다(사나다의 아카조나에(赤備え)).[48]
그 해 겨울에 오사카 성 겨울의 진이 개전되었고, 노부시게는 오사카 성의 약점인 산노마루 남쪽, 다마즈쿠리구치 밖에 별성(사나다마루)을 건축하고 철포부대를 이용하여 도쿠가와 군과 싸웠다. 이 전투에서 에치젠 마쓰다이라 부대, 가가 마에다 부대 등을 격파하여 명성을 떨쳤다.[49] 그러나 겨울과 여름 사이에 양측은 휴전했고, 강화 조건으로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우면서 사나다마루도 함께 메워졌다.
도쿠가와 군은 해자가 없어지자 강화를 깨고 오사카 성을 다시 공격했는데, 이 전투가 오사카 성 여름의 진이다. 노부시게는 방어 거점이 사라진 상태에서 직속 부대를 이끌고 정면으로 도쿠가와 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다테 마사무네의 군대를 긴창 부대를 매복시켜 싸우는 전법으로 격파했다. 그러나 숫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후퇴, 도쿠가와의 본진으로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했다. 이 돌격은 약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결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최후에는 돌파에 실패하고 시텐노지 근처 야스이 신사의 경내에서 전사했다. 향년 49세(1615년).[50]
최근 사료에 따르면, 이쿠쿠니신사와 쇼만인 암자 사이의 고지대에서 쉬고 있던 노부시게를 니시오 니자에몬이 상대를 모른 채로 말을 걸고 서로 말에서 내려 창으로 싸운 끝에 목을 베었으며, 후에 사나다가를 섬기던 사람이 노부시게의 목을 알아보았다고 한다.[3][4][5]
2. 1. 어린 시절 및 다케다 가신 시대
에이로쿠(永禄) 10년(1567년) 또는 겐키(元亀) 원년(1570년)[94],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덴쇼(天正) 3년(1575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주군인 다케다 가문(武田氏)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고, 이 전투에서 아버지 마사유키의 두 형이 전사하면서 마사유키가 사나다 가문을 잇게 되었다. 노부시게는 부친을 따라 고후(甲府)를 떠나 고즈케국(上野国) 이와비쓰 성(岩櫃城)으로 갔다.2. 2. 혼노지의 변 이후
1582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한 뒤,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간나가와 전투(神流川の戦い)에서 호조 가문에게 패하여 이세로 퇴각하였다. 오다 가문이라는 방패를 잃게 된 사나다 가문은 영지를 지키기 위해 주변의 호조, 도쿠가와, 우에스기 사이에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1585년 마사유키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간의 불화로 일어난 제1차 우에다 전투(第一次上田合戦) 때, 노부시게는 우에스기 가문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때 인질이면서도 우에스기를 배신하고 도쿠가와 쪽에 붙은 야시로 가문의 땅을 영지로 받았다고 한다.2. 3. 도요토미 가신 시대
사나다 마사유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하면서, 노부시게는 인질로 오사카로 보내졌다. 그는 도요토미 가신인 오타니 요시쓰구의 딸 다케바야시인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37]1589년(덴쇼 17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노부유키는 누마다 성을 호조 가문에게 넘겼으나, 호죠 우지나오가 이에 따르지 않고 나구루미 성을 공격하여 오다와라 정벌이 시작되었다. 노부시게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지휘 아래 오시 성 공격에 참전하였다.
임진왜란(분로쿠의 역) 당시, 노부시게는 히젠 나고야 성에 주둔하며 700명의 병력을 지휘하였다.[37] 1594년(분로쿠 3년) 11월 2일, 종오위하 사에몬노스케에 서임됨과 동시에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37] 이러한 노부시게의 출세에는 장인 요시쓰구와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38]
최근 연구에 따르면, 노부시게는 히데요시의 마와리슈였으며, 아버지 마사유키와는 별도로 1만 9천 석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39] 그는 후시미 성 재건에 참여하고, 오사카와 후시미에 저택을 받는 등 독립된 다이묘로 대우받았다.[39]
2. 4.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5년(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자, 이시다 미쓰나리가 반(反) 도쿠가와 기치를 올리며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했다. 노부시게는 아버지 마사유키와 함께 서군에 가담했고, 형 노부유키는 동군에 가담하여 사나다 가문은 둘로 나뉘었다. 형 노부유키는 도쿠가와의 중신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도노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동군은 도카이도와 나카센도 두 방면으로 나뉘어 진군하였다. 마사유키와 노부시게는 우에다 성에서 농성하여, 나카센도로 진군해 온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을 상대로 선전했다.(제2차 우에다 전투) 소수의 사나다 군에게 고전하던 히데타다 군은 결국 우에다 성 공략을 단념하고 결전장인 미노의 세키가하라로 급히 이동했으나, 이미 전투는 끝난 뒤였다.[96] 히데타다 군이 물러간 뒤에도 가이즈 성의 모리 다다마사는 가쓰라오 성에 병사를 배치하여 우에다 성의 움직임을 감시하였다. 이에 노부시게는 9월 18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야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은 9월 15일에 히데타다 군이 빠진 동군에 패하였다. 마사유키와 노부시게는 패장으로서 할복을 명받았어야 했으나, 노부유키의 노력으로 기이의 구도잔에 유배되는 것으로 그쳤다.[96]
2. 5. 오사카 전투
1614년(게이초 19년), 호코지 사건을 계기로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의 관계가 악화되자, 도요토미 측은 낭인을 모으기 시작했다. 노부시게는 황금 200매, 은 30관을 받고 오사카성(大坂城)에 입성했다. 노부시게가 이끄는 군세는 군장을 붉은 색으로 통일했다고 한다(사나다의 아카조나에(赤備え)).[48]그 해 겨울에 오사카 성 겨울의 진이 개전되었고, 노부시게는 오사카 성의 약점인 산노마루 남쪽, 다마즈쿠리구치 밖에 별성(사나다마루)을 건축하고 철포부대를 이용하여 도쿠가와 군과 싸웠다. 이 전투에서 에치젠 마쓰다이라 부대, 가가 마에다 부대 등을 격파하여 명성을 떨쳤다.[49] 그러나 겨울과 여름 사이에 양측은 휴전했고, 강화 조건으로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우면서 사나다마루도 함께 메워졌다.
도쿠가와 군은 해자가 없어지자 강화를 깨고 오사카 성을 다시 공격했는데, 이 전투가 오사카 성 여름의 진이다. 노부시게는 방어 거점이 사라진 상태에서 직속 부대를 이끌고 정면으로 도쿠가와 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다테 마사무네의 군대를 긴창 부대를 매복시켜 싸우는 전법으로 격파했다. 그러나 숫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후퇴, 도쿠가와의 본진으로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했다. 이 돌격은 약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결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최후에는 돌파에 실패하고 시텐노지 근처 야스이 신사의 경내에서 전사했다. 향년 49세(1615년).[50]
최근 사료에 따르면, 이쿠쿠니신사와 쇼만인 암자 사이의 고지대에서 쉬고 있던 노부시게를 니시오 니자에몬이 상대를 모른 채로 말을 걸고 서로 말에서 내려 창으로 싸운 끝에 목을 베었으며, 후에 사나다가를 섬기던 사람이 노부시게의 목을 알아보았다고 한다.[3][4][5]

3. 인물 및 일화
- 하타지루시(旗印, 일본의 무장들이 신분을 과시하기 위하여 사용하던 깃발)인 육문전(六文銭)은 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 관에 넣는 여섯 문의 동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삼도천을 건너는 노잣돈이라고 한다. 이렇게 육문전을 하타지루시로 삼은 것은 불석신명(不惜身命, 불법을 위해 신명을 바쳐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70]
- 형 사나다 노부유키는 《유키무라군 전기(幸村君伝記)》에서 노부시게에 대해 "나라를 다스릴 진실된 사무라이로, 그에 비하면 우리는 겉모습을 필사적으로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는 시종에 불과할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라고 평했다. 노부유키에 따르면 노부시게는 온화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매사에 조용하고 화내는 법이 없는 인품이었다고 한다.[98]
- 에도 시대에 강담 등에서 그 활약상이 알려졌으나, 도쿠가와 가문에 적대했음에도 막부 측에서는 굳이 그러한 강담을 금지하지 않았다. 이는 “그 충성과 용맹에 적도 존경을 표했다”거나 “마지막까지도 주군에게 충의를 다했다는 강담의 줄거리가 막부의 마음에 들어 용인하였다”고 여겨진다. 또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우에다 전투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 늦게 도착한 것을 희석시키기 위해, 노부시게 부자를 뛰어난 장수로 묘사하는 편이 좋았다는 견해도 존재한다.[98]
-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 전투에서 노부시게에게 위협을 느껴, 오사카 겨울 전투 후 노부시게의 형 노부유키에게 시나노국 40만 석을 조건으로 귀순을 권유했으나, 노부시게는 거절하고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다했다.[98]
- 노부시게 충신설에는 이견도 있다.
- * 노부시게와 도쿠가와 가문은 “불구대천의 원수”사이였다고 여겨지는 게 일반적이나, 이는 후세의 속서와 소설 등에 의한 영향이다.
-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했다가 패전 후 가이에키당했으나, 다시 다이묘로 부활한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니와 나가시게는 1만 석을 받았다. 노부시게에게 시나노 국 전체 40만 석을 제안한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 * 이에야스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는지는 실증할 수 없고, “노부시게는 도쿠가와 쪽의 스파이일 것이다”라는 비방도 있었다.
- * 유키무라는 후대에 창작된 이름이기에 노부유키가 '''노부시게'''가 아니라 '''유키무라'''라고 이야기할 리가 없으므로, 후세에 각색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 노부시게가 장남이고 노부유키가 차남이었으나, 노부시게의 모친 신분이 낮아 장남과 차남을 바꿔치기 했다는 이설이 있다. 노부유키(겐자부로(源三郎))와 노부시게(겐지로(源二郎))의 아명 순서가 거꾸로 되어있는 것이 그 방증 중 하나이다. 그러나, 부친 마사유키(겐고로(源五)) 역시 동생 노부타다(겐지로(源次郎))와 아명의 순번이 엇갈리고 있어 이 이설은 억측으로 보인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저승에 가면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 인물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 노부시게는 십문자창(十文字槍)이라는, 양쪽으로 날이 선 낫 모양의 창을 강화하여 만든 날이 얇은 창을 애용했다. 창 자루는 붉은 색으로 칠했다. 가타나는 마사무네(正宗), 와키자시는 사다무네(貞宗)를 사용했다.
3. 1. 용맹한 무장
노부시게는 용맹한 무장으로, 특히 오사카 전투에서의 활약은 널리 알려져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을 공격하여 이에야스를 자결 직전까지 몰아넣을 정도로 용맹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61]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동계의 진에서 노부시게는 오사카성의 약점인 다마즈쿠리구치 밖에 사나다마루라는 별성을 쌓아 조총 부대를 활용하여 도쿠가와 군과 싸웠다. 이 전투에서 에치젠 마쓰다이라 부대, 가가 마에다 부대 등을 격파하여 명성을 떨쳤다.[49]
오사카 하계의 진에서는 도묘지 전투에 참가하여 다테 마사무네 부대의 선봉을 총격전 끝에 일시적으로 후퇴시켰다. 덴노지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진을 목표로 결사의 돌격을 감행했다. 이 돌격은 사나다 부대만이 아니라, 모리·아카시·오노 하루후사 부대 등 도요토미 여러 부대가 전선에 걸쳐 분전하여, 도쿠가와 세력은 총붕괴의 모습을 보였다.[59] 사나다 부대는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부대 1만 5천의 대군을 돌파하고, 10부대 이상의 도쿠가와 세력과 교전하면서[60] 이에야스 본진에 두 번에 걸쳐 돌입했다. 사나다 부대의 공격이 너무나 맹렬하여 이에야스는 자결을 두 번이나 각오했다고 한다.[61]
결국 노부시게는 시텐노지 근처의 야스이 신사 경내에서 전사했다.[63][64] 향년 49세였다. 최근 발견된 사료에 따르면, 이쿠쿠니 신사와 쇼만인 암자 사이의 고지대에서 쉬고 있던 노부시게를 니시오 니자에몬이 상대를 모른 채로 말을 걸고 서로 말에서 내려 창으로 싸운 끝에 목을 베었으며, 후에 사나다가를 섬기던 사람이 노부시게의 목을 알아보았다고 기술되어 있다.[68]
에도 시대 중기의 문인인 가미자와 도구치는 수필집 『옹초』에서 "역사상 단독 1위는 사나다, 2위의 공은 모리"라고 기록하며, 모리 가쓰나가의 활약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3. 2. 온화한 성품
형 사나다 노부유키는 《유키무라군 전기(幸村君伝記)》에서 노부시게에 대해 "나라를 다스릴 진실된 사무라이로, 그에 비하면 우리는 겉모습을 필사적으로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는 시종에 불과할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라고 평했다. 사나다 노부유키에 따르면 노부시게는 온화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매사에 조용하고 화내는 법이 없는 인품이었다고 한다.[98]3. 3. 충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 전투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위협을 느껴, 오사카 겨울 전투 이후 노부시게의 형 사나다 노부유키를 통해 시나노국 40만 석을 조건으로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노부시게는 이 파격적인 조건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마지막까지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고 전해진다.[98] 이러한 일화는 에도 시대에 널리 알려져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하지만 노부시게의 충신설에는 이견도 존재한다.
- 노부시게와 도쿠가와 가문이 "불구대천의 원수"였다는 인식은 후세의 소설 등에 의한 영향이라는 주장.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했다가 패전 후 다이묘로 부활한 다치바나 무네시게나 니와 나가시게도 1만 석 정도의 영지를 받았던 것에 비해, 노부시게에게 시나노 국 전체 40만 석을 제안한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
- 노부시게가 도쿠가와 측의 스파이라는 의혹이 도요토미 가신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는 주장.
3. 4. 기타
사나다 노부시게의 깃발(하타지루시)에는 육문전(六文銭)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 관에 넣는 여섯 문의 동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삼도천을 건너는 노잣돈이라고 한다. 이렇게 육문전을 깃발로 삼은 것은 불석신명(不惜身命), 즉 불법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다고 한다.[70]일반적으로 에도 시대 이후 강담 등을 통해 노부시게의 활약상이 널리 알려졌는데, 도쿠가와 가문에 적대했음에도 막부 측에서는 이러한 강담을 금지하지 않았다. 이는 "충성과 용맹에 적도 존경을 표했다"거나 "마지막까지 주군에게 충의를 다했다는 이야기가 막부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우에다 전투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 늦게 도착한 것을 희석시키기 위해, 노부시게 부자를 뛰어난 장수로 묘사하는 편이 좋았다는 견해도 있다.[98]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한 노부시게에게 위협을 느껴, 오사카 겨울 전투 이후 노부시게의 형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시나노국 40만 석을 조건으로 귀순을 권유했으나, 노부시게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고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및 진보 진영에서는 그의 이러한 충성심과 용맹함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노부시게의 충신설에는 이견도 존재한다. 노부시게와 도쿠가와 가문이 "불구대천의 원수"였다는 것은 후세의 속설과 소설 등에 의한 영향이라는 것이다. 또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했다가 패전 후 다이묘로 부활한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니와 나가시게가 받은 영지에 비해, 노부시게에게 제시된 시나노 국 40만 석은 지나치게 파격적이라는 점도 의문으로 제기된다.
노부시게는 십문자창(十文字槍)이라는, 양쪽으로 날이 선 낫 모양의 창을 강화하여 만든 날이 얇은 창을 애용했다. 창 자루는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가타나는 마사무네(正宗), 와키자시는 사다무네(貞宗)를 사용했다.
4. 전설
사나다 노부시게는 주요 역사 자료 및 개인 서한에서 유키무라로 불린 적이 없다. 유키무라는 에도 시대 군사 소설에서 등장한 이름으로, 이후 연극, 책, 소설 등 다양한 매체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역사 기록에는 그의 본명인 "노부시게"가 사용된다.
전설에 따르면 노부시게는 오사카 성 전투에서 활약한 10명의 영웅, 즉 사나다 십용사라는 닌자 집단을 이끌었다고 한다. 사나다 10용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고하라.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노부시게는 실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죽였지만, 이에야스는 오가사와라 히데마사라는 대역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이는 일본인들이 노부시게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1614년 겨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사절을 보내 도요토미 가문을 버리면 시나노 현 전체와 40만 곡의 곡물을 주겠다고 제안했다는 전설이 있다. 노부시게는 이 제안을 비웃으며 성벽에 게시하여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겐나 원년(1615년) 5월 7일, 향년 49세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나다 삼대기』에는 노부시게의 분신이 7명이나 있었다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90] 오사카 성이 함락될 때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지키고 성을 빠져나와 천수를 누렸다는 속설이 전해지며, "꽃 같은 히데요리 님을, 귀신 같은 사나다가 데리고, 멀리 멀리 가고시마로 물러났다"라는 노래가 교토 아이들 사이에서 불렸다고 한다.[91] 유키무라 생존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고하라.
4. 1. 유키무라 생존설
겐나 원년(1615년) 5월 7일, 사나다 노부시게는 49세로 사망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나, 노부시게에게는 그림자 무사(影武者)가 여럿 있었다는 전승이 있다. 이 때문에 오사카 성이 함락될 때,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호위하며 성에서 탈출하여 천수를 누렸다는 속설이 있으며, “꽃다운 히데요리 님을 귀신 같은 사나다가 데리고, 도망가고 도망갔다네 가고시마로[99]”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4. 2. 사나다 10용사
사나다 노부시게를 섬긴 10명의 용맹한 닌자들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며, 이들은 사나다 10용사로 불린다. 사나다 10용사는 가공의 인물들이지만, 일부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100]사나다 10용사는 에도 시대 겐로쿠 연간의 역사소설 《사나다 삼대기》와 《나니와 전기(難波戦記)》를 출처로 하여, 다이쇼 시대에 다쓰가와 문고(立川文庫)로 출판된 〈사루토비 사스케(猿飛佐助)〉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그 총편집본의 제목으로 쓰인 것이 시초로 여겨진다.
사나다 10용사로 주로 거명되는 이름은 다음과 같다.
사나다 노부시게의 장남인 사나다 다이스케(사나다 유키마사)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사루토비 사스케와 기리카쿠레 사이조는 가공 인물로 여겨지나, 운노 로쿠로, 네즈 진파치, 모치즈키 로쿠로의 성은 사나다 가문의 본가인 운노 가문(海野氏)의 세 분가에서 나온 것이다.[100] 미요시 세이카이 뉴도, 미요시 이산 뉴도 형제는 각각 미요시 마사야스, 미요시 마사카쓰[101]가 그 모델로 여겨지고 있다.
5. '사나다 유키무라'라는 이름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라는 이름은 에도 시대 군담 소설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31] 실제 역사 기록에서는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31]
1672년에 간행된 군기물(軍記物)인 『난파전기(難波戰記)』에 '사나다 좌위문좌 유키무라(左衛門佐幸村)'[27] 또는 '사나다 좌위문위 해야 유키무라(眞田左衛門尉海野幸村)'[28][29]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지만, 실제로 사용한 흔적은 없으며 오사카 입성 후의 서장에서도 '노부시게(信繁)'를 사용하고 있다.[31]
하지만 '유키무라(幸村)'라는 이름이 공식 문서 외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유키(幸)'는 사나다가(真田家)나 (사나다가의 본가인) 해노가(海野家)의 통자(通字)이며, '무라(村)'는 도쿠가와 가문에 적대하는 무라마사(村正)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형인 노부유키(信之)가 생전에 "노부시게(信繁)는 고야산에 들어갔을 때 유키무라(幸村)로 개명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겐로쿠(元禄) 시대에는 '유키무라(幸村)'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30] 에도 막부 편찬 계도 자료집인 『관정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나 형 노부유키의 자손이 번주를 역임한 마쓰시로번(松代藩)의 공식 계도에도 '유키무라(幸村)'가 채용되었다.[31]
6. 대중문화 속 사나다 노부시게
다이쇼 시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다치카와 문고의 강담은 『사나다 쇼코쿠 만유키』 등 20권이 넘는 분량이었으며, 특히 『사루토비 사스케』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속편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사나다 영지 근처에는 닌자 마을로 유명한 「토가쿠시의 마을」 전승이 있었는데, 이른바 현재의 유키무라 전설과 그를 둘러싼 십용사라는 조합은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 쇼와 시대에 걸쳐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92][93]
'''애니메이션'''
- 냐옹냐옹 일본사
'''소설'''
- 『사나다 유키무라』(오자키 시로), 마스쇼보, 1956년 (후에 슌요도 문고, 고사이도 출판, 가와데 문고에서 2015년 간행)
- 『사나다 유키무라』(시바타 렌자부로), 분게이슌주신샤, 1963년 (후에 문고판)
- 『군사 2인』(단편) (시바 료타로), 『하나부사 스케베』 수록, 도겐샤, 1963년
- 『사나다 유키무라―이에야스가 두려워했던 남자의 일생』(사타케 신고), 세이주샤, 1967년 (후에 PHP문고)
- 『이문 사나다 유키무라』(나카타 고지), 도토쇼보, 1967년 (후에 다이리쿠 문고)
- 『사나다 태평기』(이케나미 쇼타로) 전16권, 아사히 신문사, 1974년~1983년 (후에 신초 문고)
- 『사나다 유키무라』(가이온지 조고로), 롯코 출판, 1983년 (후에 가도카와 문고, 인물 문고)
- 『마풍해협 사투! 사나다 인법단 대 고려칠인중』(아라야마 도루), 쇼덴샤, 2000년 (후에 문고판)
- 『사나다 유키무라와 고토 마타베』(다카하시 나오키), PHP문고, 2014년
- 『유키무라를 쳐라』(이마무라 쇼고), 주오코론신샤, 2022년
'''영화'''
- 사나다 유키무라 (1910년, 연기: 오노에 마츠노스케)
- 사나다 만유기 (1913년, 연기: 오노에 마츠노스케)
- 사나다 삼대기 제1편 유키무라 편 (1920년, 연기: 오노에 마츠노스케)
- 사나다 유키무라 만유기 (1920년, 연기: 사와무라 시로고로)
- 사나다 유키무라 최후의 결전 (1921년, 연기: 사와무라 시로고로)
- 사나다 유키무라와 다이스케 (1922년, 연기: 아라시 카쿠마츠로)
- 사나다 유키무라의 모략 (1979년, 연기: 마츠카타 히로키)
- 영화 강담·난바 전기 -사나다 유키무라 홍련의 맹장- (2015년)
'''드라마'''
- 풍운 진다성(1964년, ABC, 주연: 고다 고키치)
- 전국태평기 사나다 유키무라(1966년, TBS・내셔널 극장, 주연: 나카무라 킨노스케)
- 사나다 태평기(1985년, NHK 신대형 시대극, 주연: 쿠사카리 마사오)
- 풍운! 사나다 유키무라(1989년, 텔레비 도쿄, 도에이, 주연: 키타노미치 킨야)
- 이에야스가 가장 두려워한 남자 사나다 유키무라(1998년, 텔레비 도쿄・12시간 초 와이드 드라마, 주연: 마츠카타 히로키)
- 사나다마루(2016년, NHK 대하드라마, 주연: 사카이 마사토)
'''게임'''
- 삼국무쌍 시리즈(목소리: 쿠사오 타케시, 사이토 유카)
- * 삼국무쌍 ~사나다마루~
- 전국 BASARA 시리즈(목소리: 호시 소이치로)
- 전국대전(목소리: 오노 다이스케, 하타노 와타루, 호리우치 켄유, 미우라 히로아키)
'''기타'''
- 닌자극장, 닌자극장(시대 테마파크)
- 뮤지컬 『도검난무』 천전 창공의 병 -오사카 겨울의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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