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민주한국당 후보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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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민주한국당 후보 선출은 1981년 1월, 민주한국당이 유치송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과정을 다룬다. 5·17 쿠데타와 제5공화국 헌법 제정으로 야당 활동이 금지된 후, 정치 활동이 해금된 야당 인사들은 신군부의 개입 속에서 민주한국당 창당을 추진했다. 신군부는 처음 채문식을 야당 당수로 내세우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유치송을 당수로 결정했다. 유치송은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아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당내 경선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1월 17일 창당대회에서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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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민주정의당 후보는 1981년 1월 15일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민주정의당 창당대회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당 총재 및 대선 후보로 추대함으로써 선출되었다. -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한국국민당 후보 선출
1980년 10·26 사건 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치러진 한국국민당 대통령 후보 선출은 신군부의 영향으로 김종철이 후보로 결정되었으나, 낮은 득표율로 한국국민당의 정치적 한계를 드러내고 당의 쇠퇴에 영향을 주었다.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민주한국당 후보 선출 | |
---|---|
선거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이전 선거 |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 경선 |
이전 선거 연도 | 1971년 |
차기 선거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통일민주당 후보 선출 |
차기 선거 연도 | 1987년 |
선거명 |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민주한국당 후보 선출 |
선거일 | 1981년 1월 17일 |
선거 전 인물 | 김대중 |
선거 후 인물 | 유치송 |
유형 | 대통령 |
직책 | 대통령 후보 |
후보 | 유치송 |
득표율 | 추대 |
선거 전 정당 | 신민당 |
선거 후 정당 | 민주한국당 |
색 | 노랑 |
정당 | 민주한국당 |
2. 창당 배경
1980년 5·17 조치로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던 야당 인사들이 11월 25일 대거 해금되면서 야당 재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신군부는 야당 창당에 깊숙이 개입하였으며, 채문식, 유치송, 한건수 등을 야당 당수로 고려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유치송을 선택하였다.
2. 1. 신군부의 야당 창당 개입
신민당, 민주통일당 등 야당은 1980년 5·17 조치로 정치 활동이 금지된 데 이어 그해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 제정 후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나 11월 25일 정치 활동 금지 조치를 당했던 야당 인사들이 대거 해금되자 이들은 즉시 야당 재건에 착수하였다. 해금 전 야권 신당 창당 작업은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을 맡고 있어 비교적 활동이 자유롭던 한영수, 고재청, 유한열 등 3명의 전 신민당 의원들이 주도하였다.야당 창당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던 신군부는 민주한국당의 조직 구도를 두고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다.
- 채문식 입법회의 부의장을 당수로 내세우고 김영삼계를 포섭
- 유치송 전 신민당 최고위원을 당수로 내세우고 이철승계를 포섭
- 한건수 전 신민당 원내부총무를 당수로 내세우고 김대중계를 포섭
당초 신군부는 채문식 입법회의 부의장을 야당의 당수로 내정했으나, 채문식 부의장은 이를 거부하고 민주정의당행을 선택하였다. 훗날 채문식은 인터뷰에서 "당시 (신군부가) 나보고 야당 가서 보스 하라고 하기에 나는 야당 보스 기질이 없다고 사양했다, 내 성격이 어떤 정당을 정점에서 끌고 갈 성격은 아니라고 설명했다"며 "이왕 입법회의에 참여해 부의장도 했으니까 이 기회에 여당 쪽에 들어서면 좋겠다고 피력했다"고 회고하였다.[1]
신군부는 채문식 설득을 포기하고 그 대신 유치송 전 최고위원을 당수로 결정하였다.[2] 유치송은 민주당계 정당의 대주주인 진산계 출신이라 정통 보수 야당의 법통을 확보할 수 있는데다, 박정희 정권 시절 양김씨의 강경투쟁론 대신 이철승의 중도통합론을 지지하는 등 온건한 노선을 취해온 인사라는 점에서 신군부가 찾는 야당 당수 상에 부합했다.
3. 창당 과정
1980년 5·17 쿠데타로 정치 활동이 금지되고, 제5공화국 헌법 제정으로 기존 야당들이 강제 해산된 후, 야권 인사들은 정치 활동 재개와 함께 야당 재건에 나섰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이었던 한영수, 고재청, 유한열 등 전 신민당 의원 3명이 야권 신당 창당 작업을 주도했다.
신군부는 민주한국당 조직 구상에 대해 여러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유치송 전 신민당 최고위원을 당수로 하고 이철승계를 포섭하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채문식 입법회의 부의장을 야당 당수로 내정했으나, 채문식은 이를 거부하고 민주정의당을 선택했다. 결국 신군부는 진산계 출신으로 정통 보수 야당의 법통을 확보할 수 있고, 온건 노선을 걸어온 유치송을 당수로 결정하였다.[2]
3. 1. 대통령 후보 추대 과정
1981년 1월 9일, 유치송 민주한국당 창당준비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3]유치송 위원장은 전당대회에서 단일 후보 합의 추대 방식으로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해주길 희망했으나, 당 일각에서 대통령 후보는 자유 경선을 통해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당내 의견 충돌이 빚어졌다.
결국 민주한국당은 창당대회 이틀 전인 1월 15일 기획운영위원회 회의를 열고 유치송 위원장을 경선 없이 총재 및 대통령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4][5]
4. 1981년 대통령 선거
민주한국당은 1981년 1월 1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대의원 407명 중 402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유치송 위원장을 당 총재와 대통령 후보로 각각 추대하였다.[6]
그러나 야권 인사들이 기대보다 많이 해금되지 않아 당 조직 재건에 어려움을 겪었고, 자금난과 인물난으로 제대로 된 선거를 치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또한 선거인을 입후보시키려면 필요한 주민 추천장을 받을 때도 사람들이 야당 후보에게 추천장을 써주는 것을 꺼려해, 많은 지역에서는 선거인 후보를 내는 것조차 어려운 실정이었다. 민주한국당은 2월 11일 대통령 선거인 선거에서 411명의 당선자를 내었으며, 유치송 후보는 2월 25일 대통령 선거에서 404표를 득표하였다.
참조
[1]
웹인용
구여보다 구야 인사에 더 눈독
https://newslibrary.[...]
2019-07-14
[2]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5-11
[3]
웹인용
유치송 씨 대통령 출마 선언
https://newslibrary.[...]
2019-09-18
[4]
웹인용
民正(민정) 내일·民韓(민한) 17일 創黨大會(창당대회) 兩黨(양당) 週末(주말)부터 選擧體制(선거체제)본격화
https://newslibrary.[...]
2019-03-29
[5]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3-29
[6]
서적
대한민국 정당사 제3집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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