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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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주정의당은 1981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창당된 대한민국의 보수 정당이다. 전두환 대통령을 배출하고, 1981년과 1985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집권 여당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6월 민주 항쟁을 겪으며 위기를 맞았고, 1990년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으로 흡수되었다. 당은 억압적인 정책과 인권 유린으로 비판받았으며, 3당 합당 이후 보수 정당의 계보를 잇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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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국명 | 대한민국 |
한자 표기 | 民主正義黨 |
로마자 표기 | Minjujeonguidang |
약칭 | 민정당 |
영어 약칭 | DJP |
창립자 | 전두환 |
지도자 | 노태우 (1985–1990) |
설립일 | 1981년 1월 15일 |
해산일 | 1990년 1월 22일 |
이전 정당 | 민주공화당 (사실상) |
후계 정당 | 민주자유당 |
본부 위치 | 서울특별시 |
합병 대상 | 민주자유당 |
색상 | 하늘색 "1987년 이전:" 진한 파란색 |
이념 및 정치 성향 | |
이념 | 보수주의 (대한민국) 권위주의 (1987년까지) |
정치적 위치 | 우익 1987년 이전: 극우 |
기타 | |
당내 계파 | 하나회 |
표어 | 안정, 평화, 그리고 번영을! |
중앙당사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길 49 (관훈동) |
2. 역사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은 지역구 제1당에 전국구 2/3(61석)을 배분하는 선거법 덕분에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1]
민주정의당은 폭압적인 독재 정치와 고문, 감금 등 인권 유린으로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1986년 건국대 항쟁,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에서 촉발된 6월 민주 항쟁으로 최대 위기를 맞았으나, 같은 해 12월 부정 선거 의혹을 받는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켜 집권 연장에 성공했다.[1]
그러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에 패하여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안이 부결되는 등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1] 결국 1990년 2월 9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선언하고,[1]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하여 해산되면서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계보를 이어 나가게 됐다.[3]
2. 1. 창당 배경과 과정 (1979년 ~ 1981년)
1979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과 민주주의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축출했다. 하나회는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을 강제로 해산하고, 부패 정치인으로 몰아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1]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은 구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규제하며 1981년 1월 15일 민주정의당을 창당했다. 이는 사실상 전두환의 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정당이었다. 창당 슬로건은 안정, 평화, 번영이었는데, 이는 민주당의 사회 불안, 민주공화당의 정국 불안, 잦은 계엄령 및 긴급조치, 대통령 암살 등 정부 수립 이후 이어져 온 불안을 떨쳐내고자 내건 것이었다. 신군부 인사들(전두환, 노태우, 권정달, 허화평, 이춘구 등), 검찰 출신(이한동, 박희태),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 인사(김윤환, 박준규) 등이 슬로건에 동참했다. 소수지만 유신 시절 야당 인사들(이재형, 채문식, 김정례 등)도 변절하여 민정당에 참여했다.[1]
이후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며 민주정의당은 정식 여당이 되었다. 초대 총재는 전두환 대통령이었고, 1987년 6·29 선언 이후 전두환이 총재에서 사퇴하자 하나회의 핵심 인물인 노태우가 권한 대행을 거쳐 신임 총재가 되었다.[1]
2. 2. 전두환 정부 시기 (1981년 ~ 1987년)
1979년 12·12 군사 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억누르고, 최규하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다. 하나회는 민주공화당을 강제 해산하고 부패 정치인으로 몰아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1]1981년 1월 15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구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규제하면서 민주정의당을 창당했다. 이는 사실상 전두환의 집권을 위한 정당이었다. 민주정의당은 안정, 평화, 번영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는데, 신군부 인사들(전두환, 노태우, 권정달, 허화평, 이춘구 등), 검찰 출신(이한동, 박희태),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 인사(김윤환, 박준규) 등이 참여했다. 유신 시절 야당 인사들(이재형, 채문식, 김정례 등)도 변절하여 민주정의당에 합류했다.[1]
전두환은 대통령에 취임하여 민주정의당을 여당으로 만들었다. 초대 총재는 전두환 대통령이었고, 1987년 6·29 선언 이후 전두환이 총재에서 물러나자 하나회의 핵심 인물인 노태우가 권한 대행을 거쳐 총재가 되었다.[1]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은 지역구 제1당에 전국구 2/3(61석)을 배분하는 선거법 덕분에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1]
민주정의당은 폭압적인 독재 정치와 고문, 감금 등 인권 유린으로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1986년 건국대 항쟁,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에서 촉발된 6월 민주 항쟁으로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부정 선거 의혹을 받는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켜 집권 연장에 성공했다.[1]
2. 3. 노태우 정부 시기 (1987년 ~ 1990년)
1987년 6·29 선언 이후 전두환이 총재에서 사퇴하자 하나회의 핵심 인물인 노태우가 총재 권한 대행을 거쳐 신임 총재가 되었다.[1]같은 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김영삼(통일민주당)과 김대중(평화민주당)의 분열에 힘입어 40%가 채 안 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나, 부정 선거 의혹을 받았다.[1]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여 여소야대 정국이 되었다.[1] 이로 인해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안이 부결되는 등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1]
2. 4. 3당 합당과 민주자유당 창당 (1990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다.[3]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안이 부결되는 등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90년 1월 22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선언하였다.[3]1990년 2월 9일 3당 합당을 선언하고,[1] 2월 15일 통합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하면서 민주정의당은 해산되었다.[3] 이는 김영삼에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한 합당으로 여겨졌지만, 실제로는 합당 이후 구당파 간에 격렬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3] 그러나 결과적으로 김영삼이 민자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가 되어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과 대결하였다.[3]
3. 이념 및 정책
민주정의당(민정당)은 공식적으로 민족, 민주, 정의, 복지, 평화통일의 5대 이념을 내세웠지만[10], 실제 정책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 표면적으로는 야간 외출 금지령 해제, 중학교·고등학교 교복 폐지 등 자유화 조치를 취했지만[10], 이는 억압적인 통치를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임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총재의 권한을 대행하는 대표의원을 두고 그 아래 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원장 등 당 3역을 두는 체제를 갖추었다.
1987년 민주화 선언 이후에는 온건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사회민주주의 정당 육성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10]
3. 1. 창당 이념
민정당은 1981년 1월 15일 열린 창당 대회에서 공식적인 창당 이념으로 민족, 민주, 정의, 복지, 평화통일의 5개항을 제시하였다.[10] 당명은 전두환의 "사회정의를 구현한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 "사회정의"의 실천으로 전두환 정권 장악 직후 많은 폭력배와 노숙자, 비행청소년이 강제 수용소(삼청교육대)로 보내졌다.3. 2. 실제 정책
민정당은 야간 외출 금지령 해제, 중학교·고등학교 교복 폐지 등 표면적으로 자유화 정책을 내세웠다.[10] 그러나 이러한 조치 이면에는 억압적인 통치가 있었다.밤 9시 KBS 뉴스에서는 항상 전두환의 동정을 가장 먼저 보도하는 '땡전뉴스'가 방송되었고, 전두환과 닮은 코미디언의 텔레비전 출연은 금지되었다.[10] 반체제 정치인이나 학생 운동가는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삼청교육대에는 폭력배, 노숙자, 비행청소년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까지 강제로 수용되어 가혹행위를 당했다.[10]
선거 제도는 여당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여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학생 운동가들은 민정당을 “살인 정당”이라고 비판했다.[10]
4. 당내 역학 구도
전두환과 노태우에 의해 정계로 발탁된 민주정의당 출신 정치인들은 '민정계'로 불렸다. 이들은 3당 합당 이전까지 양김이 이끄는 민주계와 대립했고, 김종필의 공화계와도 달랐다. 민정계 주요 인사로는 김윤환, 이한동, 박희태, 최병렬, 강재섭, 김용갑, 정형근, 이상득 등이 있었다.[1]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면서, 민정계는 보수정당 내 계파로 자리 잡았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을 지지했고, 김윤환과 최병렬 등은 김영삼 캠프에서 활동했다.[1]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개혁 정책으로 민정계와 갈등이 생겼다. 1995년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일부 민정계 인사들이 합류했다. 5.18 특별법과 전두환, 노태우 구속으로 민정계 세력은 약화되었다. 김영삼은 1996년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개혁 노선을 추진하며 민주계가 당권을 장악했다.[1]
1997년 이회창 등장 이후 민정계 인사들이 등용되며 입지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김윤환은 이회창을 지지했고, 선거 캠프에서 중책을 맡았다. 이회창은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으나 대선에서 패배했다.[1]
이회창은 한나라당 총재가 되어 민정계를 등용하며 위상을 높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 민정계는 민주계, 소장파와 함께 당권에서 주요 역할을 했고, 이로 인해 민주계와 충돌하기도 했다. 2000년 총선에서 이회창이 중진들을 공천 탈락시키자, 김윤환은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일부 민정계가 이탈했다. 2002년 대선에서 민정계는 이회창을 지지했으나, 이회창은 다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다.[1]
2003년 최병렬이 한나라당 대표가 되며 민정계가 당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불법 대선자금 의혹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지지율이 하락했고, 최병렬은 사퇴 후 정계 은퇴했다. 박근혜가 대표가 되면서 민정계 대다수는 친박으로 편입되었고, 단일 계파로서의 민정계는 소멸했다. 한편, 자유민주연합에서 활동하던 민정계 출신 의원들도 2006년 한나라당에 합당되면서 친박에 합류했다.[1]
2007년 대선에서 민주계는 이명박 세력으로 집결했고, 구 민정계 인사들은 대부분 친박에서 활동했으나, 강재섭 등은 이명박 캠프에 합류했다.[1]
5. 주요 인물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고 1980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전두환은 1981년 민주정의당을 창당하여 초대 총재가 되었다.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노태우는 이후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승계하였다.
5. 1. 역대 총재
대수 | 역대 대표 | 직함 | 임기 | 비고 |
---|---|---|---|---|
초대 | 전두환 | 총재 | 1981년 1월 15일 ~ 1987년 7월 10일 | 사퇴 |
임시 | 노태우 | 총재권한대행 | 1987년 7월 10일 ~ 1987년 8월 5일 | |
2 | 노태우 | 총재 | 1987년 8월 5일 ~ 1990년 2월 2일 | 3당 합당 |
5. 2. 역대 대표
대수 | 역대 대표 | 직함 | 임기 | 비고 |
---|---|---|---|---|
1 | 이재형 | 대표위원 | 1981년 1월 16일 ~ 1983년 3월 21일 | |
2 | 진의종 | 1983년 3월 21일 ~ 1983년 10월 15일 | 총리 임명으로 사퇴 | |
3 | 정래혁 | 1983년 10월 15일 ~ 1984년 6월 26일 | 부정축재로 경질 | |
4 | 권익현 | 1984년 6월 26일 ~ 1985년 2월 23일 | 총선 패배로 경질 | |
5 | 노태우 | 1985년 2월 23일 ~ 1987년 8월 1일 | 총재로 선출, 대표제 폐지 | |
6 | 채문식 | 1988년 1월 14일 ~ 1988년 5월 2일 | 대표제 부활, 총선 패배로 사퇴 | |
7 | 윤길중 | 1988년 5월 2일 ~ 1988년 12월 8일 | ||
8 | 박준규 | 1988년 12월 8일 ~ 1989년 12월 29일 | 당 해체 발언으로 사퇴 | |
9 | 박태준 | 1990년 1월 6일 ~ 1990년 2월 2일 | 3당 합당 |
6. 역대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의 주요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년도 | 선거 | 후보자 | 득표수 | 득표율 | 당락 |
---|---|---|---|---|---|
1981년 2월 25일 | 제12대 대통령 선거 | 전두환 | 4,755 | 90.2% | 당선 |
1987년 12월 16일 | 제13대 대통령 선거 | 노태우 | 8,282,738 | 36.6% | 당선 |
: 1981년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투표였다.
날짜 | 선거 | 의석수 (지역구+비례대표) | 득표율 |
---|---|---|---|
1981년 3월 25일 | 제11대 총선 | 151석 (90석+61석) | 35.6% |
1985년 2월 12일 | 제12대 총선 | 148석 (87석+61석) | 35.2% |
1988년 4월 26일 | 제13대 총선 | 125석 (87석+38석) | 34.0% |
6. 1. 대통령 선거
民主正義黨중국어은 1981년 1월 15일 창당대회를 통해 전두환을 총재 겸 제12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했다. 민주정의당은 민족, 민주, 정의, 복지, 통일의 5대 이념을 강령으로 내걸었다.[1]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 선거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 후보는 90.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1]
1987년 12월 16일 16년 만의 국민 직접 선거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 후보가 김영삼(통일민주당), 김대중(평화민주당) 후보 간의 분열에 힘입어 3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1]
6. 2. 국회의원 선거
날짜 | 선거 | 의석수 (지역구+비례대표) | 득표율 |
---|---|---|---|
1981년 3월 25일 | 제11대 총선 | 151 (90+61) | 35.6% |
1985년 2월 12일 | 제12대 총선 | 148 (87+61) | 35.2% |
1988년 4월 26일 | 제13대 총선 | 125 (87+38) | 34.0% |
1981년 제11대 총선에서는 지역구 제1당에 전국구의 3분의 2를 배분하는 선거 제도에 힘입어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는 민정당이 과반수에 크게 미치지 못하면서 야당이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다(여소야대(與小野大)).
7. 평가 및 비판
민주정의당은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1980년대를 통틀어 한국의 여당이었지만, 노태우 정권으로 이양하는 과정에서 발표된 1987년의 민주화 선언 이후에는 온건한 모습을 보였으며,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적극적인 육성에도 언급한 바 있다.[2]
7. 1. 부정적 평가
민주정의당은 12·12 군사반란과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여당으로, 군사독재 정권의 연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0년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제한했지만, 전두환은 1987년 은퇴를 발표하면서도 정권의 추가적인 개방 요구에는 저항했다.민주정의당은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창당되었으며, 민주공화당의 후신으로 여겨졌다. 당명은 전두환의 “사회정의를 구현한다”는 생각을 반영했지만, 실제로는 삼청교육대와 같은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여 폭력배, 노숙자, 비행청소년 등을 가두는 등 인권 유린 행위를 자행했다.[1]
정책 면에서는 야간 외출 금지령 해제, 중학교·고등학교 교복 폐지 등 자유화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KBS 뉴스의 "땡전뉴스"에서 볼 수 있듯이 언론을 통제하고, 코미디언의 텔레비전 출연을 금지하는 등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 또한, 반체제 정치인과 학생 운동가를 탄압하고, 선거 제도를 여당에 유리하게 만들어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이유로 학생 운동가들로부터 “살인 정당”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2]
1987년 민주화 선언 이후에는 온건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군사독재 정권의 연장, 민주주의 탄압, 인권 유린, 부정부패 등의 부정적인 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
참조
[1]
논문
The Politics of Coalition in Korea: Between institutions and culture
Routledge
[2]
서적
韓國言論 100年史
한국 언론인 연합회 (Federation of Korean Reporter) (until 1987)
[3]
논문
Defeat in victory, victory in defeat: the Korean conservatives in democratic consolidation
Routledge
[4]
논문
Defeat in victory, victory in defeat: the Korean conservatives in democratic consolidation
Routledge
[5]
논문
Defeat in victory, victory in defeat: the Korean conservatives in democratic consolidation
Routledge
[6]
서적
韓國言論 100年史
한국 언론인 연합회 (Federation of Korean Reporter) (until 1987)
[7]
일반텍스트
[8]
논문
The Politics of Coalition in Korea: Between institutions and culture
Routledge
[9]
서적
韓國言論 100年史
한국 언론인 연합회 (Federation of Korean Reporter)
[10]
뉴스
민정당 창당대회 전두환을 후보·총재로
동아일보
198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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