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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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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비 존슨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선수이자 감독으로, 1962년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하여 1978년 은퇴했다. 2루수로서 3번의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으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43홈런을 기록하며 재기상을 받았다. 일본 프로 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활약했다. 감독으로서는 뉴욕 메츠를 1986년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고, 신시내티 레즈, 볼티모어 오리올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워싱턴 내셔널스 등을 지휘했다. 2012년에는 워싱턴 내셔널스를 지구 우승으로 이끌어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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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 존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2년 볼티모어 오리올스 시절의 존슨
이름데이비 존슨
출생일1943년 1월 30일
출생지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포지션2루수 / 야구 감독
타석우타
투구우투
신장185 cm
체중83 kg
선수 경력
메이저 리그 데뷔1965년 4월 13일, 볼티모어 오리올스
일본 프로 야구 데뷔1975년 4월 2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메이저 리그 최종 경기1978년 9월 29일, 시카고 컵스
일본 프로 야구 최종 경기1976년 11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 팀 (선수)볼티모어 오리올스 (1965–1972)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973–1975)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5–1976)
필라델피아 필리스 (1977–1978)
시카고 컵스 (1978)
선수 기록 (메이저 리그)
타율.261
홈런136
타점609
선수 기록 (일본 프로 야구)
타율.241
홈런39
타점112
감독 경력
소속 팀 (감독)뉴욕 메츠 (1984–1990)
신시내티 레즈 (1993–1995)
볼티모어 오리올스 (1996–1997)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9–2000)
워싱턴 내셔널스 (2011–2013)
감독 통산 기록1372승 1071패
승률0.562
수상 및 업적
올스타 선정4회 (1968, 1969, 1970, 1973)
월드 시리즈 우승3회 (1966, 1970, 1986)
골드 글러브 수상3회 (1969–1971)
올해의 감독상 수상2회 (1997, 2012)
명예의 전당 헌액볼티모어 오리올스 명예의 전당
뉴욕 메츠 명예의 전당
국가대표 경력 (감독)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09 미국 대표팀 (동메달)
하계 올림픽 야구2008 베이징 미국 대표팀 (동메달)
야구 월드컵2007 미국 대표팀 (금메달)

2. 선수 경력

(내용 없음)

2. 1. 메이저 리그 (MLB)

텍사스 A&M 대학교에서 한 시즌 동안 야구를 한 후, 존슨은 1962년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 신분으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했다.[1] 계약 후 마이너 리그 캘리포니아 리그의 스탁턴 포츠에서 뛰며 97경기 타율 .309, 10홈런, 63타점을 기록했고, 1963년에는 AA 엘미라 파이오니어스와 AAA 로체스터 레드윙스를 거쳤다. 1964년 시즌 전체를 로체스터 레드윙스에서 보내며 19홈런, 73타점, 87득점을 기록했다.[1]

1965년 스프링 캠프를 통해 오리올스 로스터에 합류했으나, 20경기에서 타율 .170에 그치며 시즌 후반은 다시 마이너 리그(로체스터 레드윙스)에서 보냈다.[1] 1966년 다시 오리올스로 복귀했고, 6월 13일 기존 2루수 제리 아데어가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면서 주전 2루수 자리를 확보했다. 그해 타율 .257, 7홈런, 56타점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투표에서 3위에 올랐고, 이후 8시즌 동안 메이저 리그 주전 선수로 활약하며 시즌 평균 142경기 이상 출전했다.

오리올스 소속으로 1966년, 1969년, 1970년, 1971년 등 총 네 차례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으며, 이 중 1966년1970년에 우승 반지를 차지했다. 특히 1966년 월드시리즈에서는 샌디 쿠팩스의 마지막 등판 경기에서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뛰어난 수비력을 인정받아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2루수 부문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했다. 당시 오리올스 유격수 마크 벨랑거는 1969년과 1971년에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여 존슨과 함께 같은 시즌에 상을 받은 유격수-2루수 조합이 되었다. 3루수 브룩스 로빈슨 역시 존슨과 벨랑거가 상을 수상할 당시 16년 연속 골드 글러브 수상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다.

1972년 시즌 후, 주전 2루수 자리를 바비 그리치에게 내주고 팀이 강타자 포수를 필요로 함에 따라, 1972년 12월 1일 팻 돕슨, 조니 오츠, 로릭 해리슨과 함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상대: 얼 윌리엄스, 테일러 덩컨)[2] 1973년 브레이브스에서 존슨은 타격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커리어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는 43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로저 혼스비가 가지고 있던 2루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42개)과 동률을 이루는 대기록이었다 (43개 중 1개는 대타 홈런).[3][4] 이 기록은 2021년 마커스 세미엔이 45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48년간 유지되었다. 존슨의 이전 한 시즌 최다 홈런은 1971년의 18개였다. 1973년 애틀랜타에서는 대럴 에번스(41홈런), 행크 에런(40홈런)도 40홈런 이상을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로 한 팀에서 세 명의 타자가 40홈런 이상을 기록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존슨은 그 해 MLB 올해의 재기상을 수상했다.

1975년 시즌 개막 후 4경기 만에 브레이브스에서 방출되었고, 이후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계약하여 1975년1976년 두 시즌 동안 일본에서 활동했다.[5]

1977년 미국으로 돌아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하며 메이저 리그에 복귀했다. 주로 유틸리티 내야수로 출전하며 78경기에서 타율 .321, 8홈런을 기록했고, 팀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게 패배한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도 한 경기 출전했다.

1978년 시즌에는 4월 30일과 6월 3일(끝내기)에 대타로 나와 만루 홈런을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에 대타 만루 홈런을 두 번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6] (이후 마이크 아이비(1978), 대릴 스트로베리(1998), 벤 브루사드(2004), 브룩스 콘래드(2010)가 이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7] 시즌 중인 8월 6일, 래리 앤더슨과의 트레이드로 시카고 컵스로 이적했고, 컵스에서 마지막 24경기를 뛴 후 시즌 종료와 함께 현역에서 은퇴했다.

존슨은 행크 에런과 왕정치 모두와 팀 동료로 뛴 유일한 선수로 알려져 있다.

2. 2. 일본 프로 야구 (NPB)

1975년 4월 18일, 감독 1년 차 나가시마 시게오가 이끄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당시 나가시마 감독은 '클린 베이스볼'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출신 야수가 자이언츠에 입단한 것은 구단 역사상 처음이었다. 같은 달 20일 일본항공 비행편으로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으며, 22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원정 경기(나고야 구장)에 대타로 출전하며 일본 무대에 데뷔했다. 전년도에 은퇴한 구로에 도루의 등번호 5번을 이어받았고,[37] 약 86.36cm(86.36cm), 약 935.53g(935.44g) 배트와 브룩스 로빈슨에게 물려받은 글러브를 사용했다. 이후 주로 3번 타자 겸 3루수로 기용되면서 나가시마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시즌 전반기에는 일본 투수들의 정교한 변화구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익숙하지 않은 3루 수비에 대한 부담까지 더해져 타격 부진을 면치 못했다. 6월에는 센트럴 리그 신기록인 8타석 연속 삼진이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시즌 후반, 팀 동료 오 사다하루의 조언을 받아들여 배트 그립을 수정한 뒤 타격감을 회복할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8월 6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와의 경기 도중 상대 투수 다케우치 히로아키가 던진 공에 왼쪽 어깨를 맞아 견갑골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다. 이 부상으로 약 한 달간 전력에서 이탈했고, 그 사이 후지타 모토시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시즌 막판에 복귀했지만, 팀은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 최하위라는 수모를 겪었다. 월드 시리즈 4회 출전 및 2회 우승이라는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내자, 팬들의 비판에 직면했고 팀의 최하위 추락에 대한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38] 한편, 자이언츠 구단 측의 미숙한 지원도 문제로 지적되었는데, 고용된 통역의 어학 능력이 부족하여 시즌 도중 세 차례나 교체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39]

이듬해인 1976년에는 다카다 시게루가 3루수로 전향함에 따라 존슨은 본래 포지션인 2루수로 복귀했다. 일본 야구에 적응한 모습을 보이며 개막전부터 6번 타자로 출전했으나, 고질적인 무릎 통증에 더해 4월 7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히라마쓰 마사지에게 맞은 사구 여파로 오른손 엄지 통증이 악화되었다. 결국 6월 9일 치료를 위해 일시적으로 미국으로 귀국했다. 6월 22일 팀에 복귀했지만, 손가락 치료를 위한 추가 귀국 요청은 구단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심지어 코치진에게 타격 연습을 강요받으면서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전반기 성적은 타율 .276, 8홈런으로 다소 평범했다. 존슨은 미국에서 저명한 프랭크 조브 박사에게 오른손 엄지 치료를 받기를 희망했고,[40] 올스타전 휴식기를 이용한 일시 귀국을 나가시마 감독에게 요청했다. 나가시마 감독은 일본 내 치료를 고수하며 반대했지만, 존슨은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결국 팬 투표로 선출되었음에도 올스타전 출전을 포기하고, 휴식 기간을 활용해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았다.[39]

치료 효과 덕분인지 후반기에는 59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타율 .275, 18홈런, 47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최종적으로 시즌 타율 .275, 26홈런(팀 내 2위), 74타점을 기록했으며, 베스트 나인과 다이아몬드 글러브상(현재의 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나가시마 감독 체제 하의 자이언츠가 센트럴 리그 첫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9월 19일 주니치 드래건스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오 사다하루와 하리모토 이사오의 홈런에 이어 도노우에 아키라를 상대로 시즌 20호 홈런(일본 통산 33호)을 쏘아 올렸다. 9월 29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사에키 가즈시로부터 일본 무대에서 기록한 유일한 만루 홈런(시즌 22호)을 터뜨렸다. 또한 10월 16일 시즌 최종전이었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 원정 경기(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는 다카하시 사토시로부터 시즌 26호 솔로 홈런을 뽑아내며 팀의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결정타를 날렸다.

하지만 이어진 한큐 브레이브스(현 오릭스 버펄로스)와의 1976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극심한 부진에 빠졌다. 1, 2차전에서 8타수 무안타로 침묵했고, 3차전에서는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다. 시즌 후반기 시작 당시 존슨은 나가시마 감독으로부터 '남은 시즌 동안 선발 제외나 대타 기용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의 선발 제외를 약속 위반으로 받아들였고, 이 일을 계기로 자이언츠를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39] 결국 시리즈 동안 3경기에 선발 출전했지만, 13타수 무안타 6삼진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시즌 종료 후 진행된 재계약 협상에서 구단 측은 연봉 30% 삭감(추정 7만달러)을 제시했고, 존슨은 나가시마 감독의 사과를 요구하는 등 양측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결국 1977년 1월 21일, 존슨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결별을 공식화했다.[41] 이후에도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을 희망했던 존슨에게 긴테쓰 버펄로스(현 오릭스 버펄로스)가 영입 의사를 보였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반대로 이적이 성사되지 못했다는 보도가 나왔다.[42] 존슨 자신은 일본에서 선수 경력을 마무리하고, 은퇴 후에는 자이언츠 2군 코치로서 후진 양성에 기여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43]

3. 감독 경력

은퇴 후 1979년부터 마이너 리그 감독을 맡았다. 1983년에는 뉴욕 메츠 산하 AAA팀인 노퍽 타이즈(Tidewater Tides)를 이끌고 리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 뉴욕 메츠 감독으로 부임했다.[44] 1984년에는 신인 드와이트 구든을 마이너 리그 A급에서 곧바로 메이저 리그로 발탁하는 등 과감한 선수 기용을 통해 팀을 리그 2위로 이끌었고,[45] 1986년에는 메츠를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메이저 리그에서 데이터 분석과 선수 기용에 컴퓨터를 활용하기 시작한 초창기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1993년 5월 24일 신시내티 레즈 감독으로 부임하여 1995년 팀의 지구 우승을 이끌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감독을 거쳐 1995년 10월 30일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 감독으로 자리를 옮겨 두 시즌 연속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다.

2003년부터는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 대행 및 코치를 맡아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했다. 2005년부터는 미국 대표팀 감독을 맡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3위 결정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승리한 후 상대 감독 호시노 센이치에 대해 "교체 타이밍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호시노 센이치는 좋은 감독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46] 또한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는 미국 대표팀 코치를, 2009년 WBC에서는 미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2011년 6월 26일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으로 부임하여[47] 2012년 팀을 창단 후 첫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그해 내셔널 리그 최우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48] 2013년 9월 29일 감독직에서 은퇴했다.[49]

3. 1. 마이너 리그

1979년 존슨은 AAA 인터아메리칸 리그(Inter-American League)의 마이애미 아미고스(Miami Amigos) 감독으로 고용되었다. 존슨은 방출되거나 드래프트되지 않은 선수들로 구성된 팀을 이끌고 0.708의 승률을 기록했지만, 리그는 130경기 시즌을 계획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시즌 72경기 만에 해체되었다.[8] 1981년 존슨은 뉴욕 메츠 산하 AA팀인 잭슨 메츠(Jackson Mets) 감독으로 고용되어, 팀을 이끌고 68승 66패의 성적을 거두었다.[8] 1983년 존슨은 메츠 산하 AAA팀인 타이드워터 타이즈(Tidewater Tides)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71승 68패의 성적을 거두었다.[8] 같은 해 타이드워터 타이즈에서 리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44]

3. 2. 뉴욕 메츠

1986년 봄 훈련 중인 데이비 존슨


1984년, 존슨은 1973년 이후 페넌트 레이스 우승 경험이 없던 뉴욕 메츠의 감독으로 부임했다.[44] 그는 내셔널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부임 후 첫 다섯 시즌 동안 매년 90승 이상을 거둔 감독이 되었다. 존슨은 데이터 분석 및 선수 기용에 컴퓨터를 활용한 초기 감독 중 한 명이었다.

부임 첫해인 1984년, 존슨은 신인 드와이트 구든을 싱글 A 리그 팀에서 곧바로 메이저 리그로 승격시키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고,[45] 키스 허난데스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등 팀 전력 강화에 힘썼다. 메츠는 그해 90승을 거두며 리그 2위를 차지했고, 이는 전년도 68승에 비해 크게 향상된 성적이었다. 이미 전년도에 잠재력을 보여준 신인 대릴 스트로베리와 1985년 영입된 가리 카터 등 젊고 유능한 선수들의 성장을 이끌며 팀의 기틀을 마련했다.

존슨의 감독 철학은 "선수들을 어른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나를 위해 승리하는 한, 그들이 경기 외적으로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9] 이러한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메츠는 1985년 98승을 기록했으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3경기 차로 아쉽게 지구 우승을 놓쳤다.

1986년은 존슨과 메츠에게 최고의 해였다. 팀은 메이저 리그 전체 최고 승률인 108승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성적으로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1969년 이후 메츠 역사상 두 번째 100승 이상 시즌이었다. 이어 1986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극적인 승부를 펼친 끝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흥미롭게도 존슨은 선수 시절인 1969년 볼티모어 오리올스 소속으로 메츠와의 월드 시리즈에서 마지막 아웃을 당한 장본인이었다.

메츠는 1987년에도 92승을 거두었지만 다시 세인트루이스에 밀려 2위에 머물렀고, 1988년에는 100승을 달성하며 지구 우승을 되찾았다. 그러나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NLCS)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게 7차전 접전 끝에 패배하며 월드 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존슨은 선수단 운영 방식을 두고 단장 프랭크 캐시와 갈등을 겪었다.[10] 결국 1990년 시즌 초반, 팀이 20승 22패로 부진하자 존슨은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메츠에서 정규 시즌 통산 595승 417패, 포스트시즌 11승 9패를 기록했으며,[11] 현재까지 메츠 역사상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감독으로 남아있다.

2010년 8월 1일, 데이비 존슨은 프랭크 캐신, 대릴 스트로베리, 드와이트 구든과 함께 뉴욕 메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 3. 신시내티 레즈

2년 이상 야구계를 떠나 있다가 1993년 시즌 44경기가 진행된 후 신시내티 레즈 감독으로 부임했다.[44] 메츠 시절처럼 존슨은 레즈를 빠르게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는 1994년 선수 파업으로 시즌이 중단될 당시 팀을 내셔널 리그 중부 선두로 이끌었고, 1995년에는 첫 공식적인 내셔널 리그 중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95년 시즌 초, 레즈의 구단주 마지 쇼트는 팀 성적과 관계없이 존슨이 1996년 시즌에 감독으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쇼트는 존슨 밑에서 뛰었던 전 레즈 3루수 레이 나이트를 벤치 코치로 임명하며, 1996년 감독직을 맡길 것임을 시사했다.

존슨과 쇼트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1994년 시즌 후 존슨이 해임될 뻔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존슨의 주장에 따르면, 쇼트는 자신의 개(세인트 버나드)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2] 결정적인 불화의 원인은 쇼트가 존슨이 당시 약혼녀였던 수잔과 결혼 전에 동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두 사람은 1993년에 만나 1년 후 결혼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쇼트는 1995년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그 해가 존슨의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라고 결정한 상태였다.[13]

존슨의 마지막 해였던 1995년, 레즈는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NLDS)에서 다저스를 꺾고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NLCS)에 진출했으나, 그해 월드 시리즈 우승팀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게 스윕 패배를 당했다. 존슨은 신시내티 레즈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규 시즌 204승 172패, 포스트시즌 3승 4패의 성적을 기록했다.[11] 이후 1995년 10월 30일 볼티모어 오리올스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3. 4. 볼티모어 오리올스

1996년, 데이비 존슨은 3년 225만달러 계약으로 볼티모어 오리올스 감독으로 복귀했다. 전년도 71승 73패에 그쳤던 오리올스였지만, 칼 립켄 주니어, 마이크 무시나, 에디 머레이, 로베르토 알로마르 등 미래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를 포함한 유망한 선수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존슨의 지휘 아래 팀은 88승 74패를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에서 뉴욕 양키스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와일드 카드 자격을 얻어 1983년 월드 시리즈 우승 이후 13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그해 메이저리그 최고 승률(99승)을 기록한 디펜딩 챔피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만났다. 오리올스는 1, 2차전을 승리한 뒤 4차전에서 로베르토 알로마르의 12회말 끝내기 홈런으로 시리즈 승리를 확정짓고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했다. 상대는 뉴욕 양키스였다. 1차전에서 오리올스는 8회말 4-3으로 앞서고 있었으나, 데릭 지터의 플라이볼 타구를 우익수 토니 타라스코 위로 팬이 낚아채 홈런으로 판정되는 논란의 장면 속에 동점을 허용했고, 결국 11회 연장 끝에 패배했다. 오리올스는 2차전을 잡았지만 이후 내리 3경기를 패하며 월드 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1997년 시즌, 오리올스는 에디 머레이가 팀을 떠났지만 시즌 중반 해롤드 베인스를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고, 98승 64패로 아메리칸 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시애틀 매리너스를 4경기 만에 제압했다. 챔피언십 시리즈 상대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였다. 오리올스는 시리즈 내내 접전을 펼쳤으나, 패배한 4경기가 모두 1점 차 패배였고 그중 2경기는 연장전 끝에 패하는 등 불운이 따랐다 (3차전에서는 번트 타구에 대한 오심 논란도 있었다). 결국 6차전에서 패배하며 또다시 월드 시리즈 문턱에서 좌절했다.

데이비 존슨 감독


두 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도 불구하고, 존슨과 구단주 피터 앙겔로스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은 거의 대화조차 나누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1997년 4월, 로베르토 알로마르가 팀 행사와 시범 경기에 불참하자 존슨이 벌금을 부과하면서부터였다. 존슨은 알로마르에게 자신의 아내가 후원하는 자선 단체에 벌금을 내도록 지시했으나, 알로마르는 메이저 리그 선수 협회 변호사의 이해 상충 문제 조언에 따라 다른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시즌 종료 후, 앙겔로스는 존슨의 벌금 처리가 해고 사유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부적절했다고 주장했다.[14] 존슨은 벌금 부과 방식에 판단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할 의사가 있었지만, 앙겔로스는 존슨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행동 자체가 '무모했다'고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앙겔로스에게 존슨을 정당하게 해고할 명분을 주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존슨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존슨은 계약 마지막 해인 다음 시즌 복귀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밝혔고,[15] 앙겔로스에게 연락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팩스로 사임 의사를 전달했다. 공교롭게도 앙겔로스는 존슨이 1997년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감독상 수상자로 발표된 11월 5일에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13] 앙겔로스는 존슨의 사임 편지에 대한 답변을 공개하며, 알로마르 벌금 문제와 존슨 자신의 언론 발언 등이 사임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책임을 존슨에게 돌렸다.[16]

존슨의 후임으로는 투수 코치였던 레이 밀러가 임명되었으나 (이 역시 앙겔로스가 1996년 시즌 후 팻 돕슨 코치를 해임하라고 지시한 후 존슨이 마지못해 기용한 인물이었다[14]), 오리올스는 이후 2012년까지 포스트시즌은 물론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하는 시즌조차 만들지 못하는 암흑기를 겪었다. 존슨이 오리올스 감독으로 재임한 2년간 팀의 승률은 .574였다.[17]

3. 5.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7년 시즌 후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감독직 인터뷰를 했으나 채용되지 못했고, 2년 뒤인 1999년 메이저 리그로 복귀하여 전년도 88승을 거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5월 3일,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7-0 승리를 거두며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했다.[18] 이는 그의 감독 경력 1,740번째 경기에서의 기록으로, 당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가장 빠른 1,000승 달성이었다. 이 기록은 2020년 조 지라디가 1,808경기 만에 1,000승을 달성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19]

그러나 1999년 시즌, 다저스는 77승 85패(.475)로 내셔널 리그 서부 3위에 그쳤고, 이는 존슨 감독 경력 중 유일하게 시즌 전체를 패배로 마감한 해였다. 2000년에는 86승 76패(.531)로 2위로 반등했지만, 팀은 그를 해고했다. 케빈 브라운, 가리 셰필드 등 고액 연봉 선수들과 미래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애드리안 벨트레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케빈 말론 단장 체제 하에서 존슨은 2년간 163승 161패의 성적을 남기며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했다.[20][11][21]

3. 6. 워싱턴 내셔널스

2012년 워싱턴 내셔널스와 함께한 존슨


데이비 존슨은 2006년 6월 7일, 당시 부사장이자 단장이었던 짐 보든에 의해 고문으로 임명되면서 워싱턴 내셔널스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24] 이후 2009 시즌이 끝난 뒤에는 현 단장인 마이크 리조의 수석 자문관으로 활동했다. 2011년 6월 26일, 짐 리글먼 감독이 갑작스럽게 사임하자 존슨은 내셔널스의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2011 시즌 남은 기간 동안 팀을 이끌었고, 팀은 총 80승을 거두며 3위를 기록했다. 이는 워싱턴으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구단 최고 성적이었다. 시즌 종료 후인 10월 31일, 내셔널스 구단은 존슨이 2012 시즌에도 감독직을 계속 수행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25]

2012년 10월 1일, 존슨 감독은 내셔널스를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는 팀이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이었던 1981년 이후 31년 만에 차지한 첫 지구 우승이었다. 내셔널스는 그해 메이저 리그 전체 최다승인 98승을 거두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 시기 팀은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지오 곤잘레스, 이안 데스몬드, 브라이스 하퍼와 같은 젊은 스타 선수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전력을 구축했다. 하지만 팀은 에이스 투수 스트라스버그 없이 포스트시즌을 치러야 했다. 구단은 2011년 UCL 수술을 받았던 스트라스버그의 팔을 보호하기 위해 그 해 투구 이닝을 160이닝으로 제한하기로 결정했고, 그는 9월 7일 마지막 등판(시즌 성적 15승 6패, 평균자책점 3.16)을 끝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는 79년 만에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첫 포스트시즌 경기였다. 내셔널스는 전년도 월드 시리즈 우승팀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맞붙었다. 1차전을 접전 끝에 승리했지만, 이어진 2, 3차전에서 연달아 패배하며 탈락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4차전에서 제이슨 워스의 끝내기 홈런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시리즈를 최종 5차전으로 끌고 갔다. 5차전에서 내셔널스는 3회까지 6-0으로 크게 앞서 나갔으나, 이후 점차 리드를 잃어 9회 초에는 7-5까지 쫓겼다. 마무리 투수 드류 스토렌이 9회 말 등판했지만,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겨두고 카디널스에게 4점을 내주며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했다. 이로써 존슨은 정규 시즌 최고 성적을 거두고도 월드 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세 번째 경험을 하게 되었다.

11월 10일, 존슨은 2013 시즌에도 내셔널스 감독으로 복귀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11월 13일, 그는 내셔널 리그 올해의 감독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26] 하지만 존슨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수상 직전에 구단주 마크 러너와 단장 마이크 리조로부터 2013 시즌 후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 대신 은퇴 서류에 서명하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 존슨은 2013 시즌을 "월드 시리즈 우승 아니면 실패"라고 공언했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27]

2013년 팀은 시즌 초반 10경기 중 7승을 거두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올스타 브레이크 시점에는 48승 47패로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다. 9월에 18승 9패로 막판 스퍼트를 올렸지만, 와일드카드 진출에 4경기 차로 뒤지며 결국 86승 76패,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2013년 9월 29일, 존슨은 시즌 종료와 함께 감독직에서 은퇴할 것을 발표했다. 그는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으로서 통산 224승을 기록했으며, 이는 2021년 데이브 마르티네즈 감독이 경신하기 전까지 구단 역대 최다승 기록이었다. 2014년 존슨은 다시 구단의 고문 역할을 맡았다.[28]

3. 7. 국가대표팀

2003년 로버트 에인혼 감독이 자리를 비운 동안 잠시 네덜란드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22] 이후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에인혼 감독 아래 네덜란드 대표팀의 수석 코치를 지냈다.[22][44]

2005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2005년 야구 월드컵에서는 미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22] 미국 팀은 조별 예선에서 6승 2패로 2위에 올랐으나, 8강전에서 대회 우승팀인 쿠바에게 11-3으로 패배했다. 이후 순위 결정전에서 니카라과에 9-0으로 패했고, 최종 7위 결정전에서 푸에르토리코를 11-3으로 꺾고 7위를 기록했다.[22]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미국 대표팀의 수석 코치를 역임했다.[23][44]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다시 미국 대표팀 감독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23][44] 이 대회 3위 결정전에서 일본 대표팀을 꺾고 동메달을 획득했다.[46]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미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23][46]

4. 야구 철학 및 평가

데이비 존슨은 선수 시절부터 야구에 통계적인 접근 방식을 도입하려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투수 동료들에게 스트라이크 존의 중앙을 공략하라고 조언하기도 했으며,[32] 감독 얼 위버가 라인업 구성에 활용할 수 있도록 컴퓨터 분석 자료를 만들기도 했으나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다.[32] 이후 메츠 감독이 되어서는 컴퓨터를 활용한 세이버메트릭스 분석을 야구 전략에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32]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하던 시절, 당시 감독이었던 장훈(나가시마 시게오)은 훗날 존슨의 수비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51] 특히 왕정치(오 사다하루)가 통산 715호 홈런을 기록했던 1976년 10월 11일 경기에서는 여러 차례 뛰어난 수비로 팀의 위기를 막고 호리우치 쓰네오의 완투승에 기여했다.[52] 호리우치는 존슨을 "인격자였다"고 회상하며 "배트는 필요 없고 글러브만 끼고 2루에 있어도 도움이 되는 선수"라고 극찬했다.[52] 당시 3루수였던 다카다 시게루 역시 존슨 덕분에 병살 플레이가 수월해져 신인 3루수였던 자신까지 돋보일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했다.[53]

감독이 된 후에는 일본 구단으로부터 외국인 선수 영입에 대한 조언 요청을 받기도 했다. 그는 "MLB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좋은 선수가 많다"며 당시 메츠 산하 마이너 리그 팀에 있던 게리 레이시치를 추천했고, 실제로 레이시치는 1986년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하여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55]

한편, 존슨은 경기에 부진했던 날에는 동료들이 모두 귀가한 뒤에도 분함을 삭이며 홀로 벤치에 남아있을 정도로 승부욕이 강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54] 일본의 유명 배우 다무라 마사카즈는 당시 요미우리 선수 중 존슨을 가장 좋아한다고 공언하며, 그가 건방져 보이는 면과 함께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54]

5. 수상 내역


  • '''MLB'''
  • * 골드 글러브상: 3회 (2루수: 1969년 - 1971년)
  • * 올해의 부활 선수상: 1973년
  • * 감독상: 2회 (1997년, 2012년)

  • '''NPB'''
  • * 베스트 나인: 1회 (1976년)
  • * 골든 글러브상: 1회 (1976년)

5. 1. 선수

텍사스 A&M 대학교에서 한 시즌 동안 야구를 한 후, 1962년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 신분으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했다. 계약 후 C 클래스 캘리포니아 리그의 스톡턴 포츠에 배정되어 97경기에서 타율 0.309, 10홈런, 63타점을 기록했다. 1963년에는 AA 엘미라 파이오니어스로 승격하여 63경기에서 타율 0.326을 기록했고, 시즌 후반에는 AAA 로체스터 레드윙스로 올라가 63경기를 더 뛰었다. 1964년 시즌 전체를 레드윙스에서 보내며 19홈런, 73타점, 87득점을 기록했다.[1]

1965년 스프링 캠프에서 오리올스에 합류했으나, 20경기에서 타율 0.170에 그쳐 시즌 후반은 다시 레드윙스에서 보냈고, 52경기에서 타율 0.301을 기록했다. 1966년 오리올스로 복귀한 존슨은 초반에는 출전 시간이 제한적이었으나, 6월 13일 2루수 제리 에이더가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면서 주전 자리를 확보했다. 그해 타율 0.257, 7홈런, 56타점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다. 이후 8시즌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풀타임 주전으로 활약하며 시즌 평균 142경기 이상 출전했다.

오리올스 소속으로 1966년, 1969년, 1970년, 1971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여 1966년과 1970년에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 특히 1966년 월드시리즈에서는 그해 은퇴한 전설적인 좌완 투수 샌디 쿠팩스에게 선수 경력 마지막 안타를 기록하게 했다. 1969년 월드시리즈에서는 1승 3패로 뒤진 5차전 9회 2사 상황에서 마지막 타자로 나서 범타로 물러나며, 훗날 자신이 감독을 맡게 될 뉴욕 메츠의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확정 짓는 장면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연속으로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당시 오리올스의 유격수였던 마크 벨렌저 역시 1969년과 1971년에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여, 같은 시즌에 골드 글러브를 수상한 유격수-2루수 조합이라는 드문 기록을 남겼다. 3루수 브룩스 로빈슨 역시 이 기간 동안 16년 연속 골드 글러브 수상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다.

바비 그리치에게 주전 2루수 자리를 내주고, 팀이 강타자 포수를 필요로 하게 되자, 존슨은 1972년 12월 1일 윈터 미팅 마지막 날 팻 돕슨, 조니 오츠, 로릭 해리슨과 함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오리올스는 그 대가로 얼 윌리엄스와 테일러 던컨을 받았다.[2] 1973년 브레이브스에서 존슨은 개인 통산 최다인 43홈런을 기록했는데,[3] 이는 로저스 혼즈비가 세운 2루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42개)과 타이를 이루는 대기록이었다 (43개 중 1개는 대타 홈런).[4] 이 기록은 48년 후인 2021년 마커스 세미엔이 45홈런을 기록하며 경신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존슨의 이전 시즌 최다 홈런은 1971년의 18개였다. 1973년 애틀랜타에서는 대럴 에번스(41홈런), 행크 에런(40홈런)도 40홈런 이상을 기록하며, 브레이브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한 팀에서 세 명의 선수가 40홈런 이상을 기록한 팀이 되었다. 존슨은 이 해에 MLB 올해의 재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5년 시즌 개막 후 4경기 만에 단 한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한 뒤 브레이브스에서 방출되었다.

이후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계약하여 1975년과 1976년 두 시즌 동안 뛰었다. 존슨은 15년 만에 자이언츠에 입단한 주목할 만한 외국인 선수였기에 일본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큰 압박감에 시달렸다. 첫 시즌에는 부상으로 고전하며 당시 자이언츠 감독이자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나가시마 시게오의 눈 밖에 나기도 했다. 1976년에는 훨씬 나은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이언츠로부터 재계약 제의를 받지 못했으며, 심지어 자이언츠가 다른 일본 구단과의 계약을 막았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5]

1977년 미국으로 돌아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했다. 유틸리티 내야수로 활약하며 78경기에서 타율 0.321, 8홈런을 기록했고, 필리스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게 패한 1977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한 경기에 출전했다.

1978년 시즌 동안 존슨은 대타로 나와 두 번의 그랜드 슬램을 기록하며, 한 시즌에 대타 그랜드 슬램을 두 번 기록한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되었다.[6] (이후 마이크 아이비(1978), 대릴 스트로베리(1998), 벤 브루사드(2004), 브룩스 콘래드(2010) 등 네 명의 선수가 이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7] 이 기록 직후 필리스는 그를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했고, 존슨은 컵스에서 마지막 24경기를 뛴 뒤 시즌 종료와 함께 은퇴했다.

선수 시절 올스타전에는 1968년, 1969년, 1970년, 1973년 등 총 4차례 선출되었다.

5. 2. 감독



은퇴 후 1979년부터 마이너 리그 감독을 맡았다. 1983년 노퍽 타이즈를 이끌고 리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 뉴욕 메츠 감독으로 취임했다.[44] 1984년에는 드와이트 구든을 A급 린치버그 힐캐츠에서 메이저 리그로 바로 승격시켜 재능을 발휘하도록 도왔고,[45] 팀을 NL 동부 2위로 이끌었다. 1986년에는 메츠를 1986년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메이저 리그에서 데이터 분석과 선수 기용에 컴퓨터를 활용하기 시작한 초창기 감독 중 한 명이었다.

메츠 감독 이후 신시내티 레즈 (1993년 5월 24일 취임) 감독을 맡아 1995년 지구 우승을 달성했고, 볼티모어 오리올스 (1995년 10월 30일 취임) 감독 시절에는 1996년과 1997년 연속으로 ALCS에 진출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감독(1999-2000)도 역임했다.

2003년부터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2005년에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미국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어 동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3위 결정전에서 일본 대표팀을 상대로 승리한 후 일본 감독 호시노 센이치에 대해 "교체 타이밍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호시노 센이치는 좋은 감독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46] 2006년 제1회 WBC에서는 미국 대표팀 코치를, 2009년 제2회 WBC에서는 미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2006년 6월 7일, 존슨은 부사장 겸 단장 짐 보든에 의해 고문으로 임명되어 워싱턴 내셔널스 프런트에 처음 합류했다.[24] 2009 시즌 후 마이크 리조 단장의 수석 자문관이 되었다. 2011년 6월 26일, 짐 리글먼 감독의 갑작스러운 사임 후 내셔널스 감독으로 취임했다.[47] 그는 2011 시즌 남은 기간 동안 팀을 이끌었고, 팀은 구단 워싱턴 이전 후 최고 성적인 80승으로 NL 동부 3위를 기록했다. 10월 31일, 내셔널스는 존슨이 2012 시즌에도 감독을 맡을 것이라고 발표했다.[25]

2012년 10월 1일, 존슨은 내셔널스를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인 1981년 이후 첫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 팀은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지오 곤잘레스, 이안 데스몬드, 브라이스 하퍼 등 신예 스타들의 활약을 바탕으로 구단 기록이자 그해 메이저 리그 최다인 98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팀은 UCL 수술에서 복귀한 스트라스버그의 이닝 제한(159⅓이닝) 방침에 따라 그 없이 포스트시즌을 치러야 했다. 79년 만에 워싱턴 D.C.에서 열린 NLDS에서 내셔널스는 전년도 챔피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맞붙었다. 1차전 승리 후 2, 3차전을 내주었으나 4차전 제이슨 워스의 끝내기 홈런으로 승리했다. 5차전에서는 6-0 리드를 잡았으나 추격을 허용했고, 9회 초 7-5 리드 상황에서 마무리 드류 스토렌이 2사 후 4실점하며 역전패, 탈락했다. 이는 존슨이 메이저 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하고도 월드 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세 번째 사례였다. 11월 10일, 존슨은 2013 시즌 감독 계약을 맺었고, 3일 후 내셔널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26][48] 존슨은 자서전에서 이 시기 구단주 마크 러너와 리조 단장으로부터 2013시즌 후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 대신 은퇴 서류에 서명하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27]

존슨은 2013 시즌을 "월드 시리즈 우승 아니면 실패"라고 공언했으나[27], 팀은 첫 10경기 중 7승을 거두며 출발했지만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48승 47패에 그쳤고, 9월에 18승 9패를 기록했음에도 와일드 카드 진출에 4경기 차 뒤진 86승 76패로 NL 동부 2위에 머물러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2013년 9월 29일, 존슨은 감독직 은퇴를 발표했다.[49] 그는 데이브 마르티네즈가 2021년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내셔널스 구단 최다승(224승) 감독이었다. 2014년에는 내셔널스의 고문으로 활동했다.[28]

존슨은 통산 1,372승 1,071패(승률 .562)를 기록했다. 이는 1,000승 이상 감독 중 10위에 해당하는 승률이다. 그를 제외한 상위 9명은 모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나, 존슨은 네 차례(2008년, 2010년 베테랑 위원회, 2017년, 2018년 투데이즈 게임 투표) 후보에 올랐으나 헌액되지 못했다.[29][30]

연도정규 시즌포스트시즌
경기승률지구 순위포스트시즌 승포스트시즌 패포스트시즌 승률포스트시즌 결과
NYM19841629072.556NL 동부 2위
NYM19851629864.605NL 동부 2위
NYM198616210854.667NL 동부 1위85.615월드 시리즈 우승 (BOS)
NYM19871629270.568NL 동부 2위
NYM198816010060.625NL 동부 1위34.429NLCS에서 패배 (LAD)
NYM19891628775.537NL 동부 2위
NYM1990422022.476경질
뉴욕 메츠(NYM) 통산1012595417.588119.550
CIN19931185365.449NL 서부 5위
CIN19941146648.579NL 중부 1위
CIN19951448559.590NL 중부 1위34.429NLCS에서 패배 (ATL)
신시내티 레즈(CIN) 통산376204172.54334.429
BAL19961628874.543AL 동부 2위45.444ALCS에서 패배 (NYY)
BAL19971629864.605AL 동부 1위55.500ALCS에서 패배 (CLE)
볼티모어 오리올스(BAL) 통산324186138.574910.474
LAD19991627785.475NL 서부 3위
LAD20001628676.531NL 서부 2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LAD) 통산324163161.50300
WSH2011834043.482NL 동부 3위
WSH20121629864.605NL 동부 1위23.400NLDS에서 패배 (STL)
WSH20131628676.531NL 동부 2위
워싱턴 내셔널스(WSH) 통산407224183.55023.400
통산[11]244313721071.5622526.490


6. 기타

존슨은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태어났으며,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알라모 하이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31]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와 텍사스 A&M 대학교에 다녔으며, 1964년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31] 선수 시절부터 야구에 통계적 접근 방식을 적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투수 동료들에게 스트라이크 존의 가장자리가 아닌 중앙을 공략하라고 조언하려다 '덤덤(Dum Dum)'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감독 얼 위버가 라인업을 최적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컴퓨터 분석 자료를 만들었지만, 당시에는 활용되지 않았다. 이후 감독이 되어서는 뉴욕 메츠를 이끌며 컴퓨터 기반의 세이버메트릭스를 선도적으로 활용했다.[32]

1993년 미래의 아내인 수잔을 만났고, 이듬해 1월 결혼했다. 당시 수잔은 청각 및 시각 장애를 가진 존슨의 아들 제이크와 그의 학습 센터를 위한 골프 토너먼트를 주최하고 있었으며, 존스홉킨스 병원의 자선 사업에도 전문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33] 존슨의 딸 안드레아는 1980년대 후반 전국적으로 순위에 오른 아마추어 서퍼였으나, 2005년 패혈성 쇼크와 정신분열증 합병증으로 사망했다.[34] 2011년에는 그의 의붓아들 제이크가 34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다.

2018년, 존슨은 에릭 셔먼과 함께 자서전 "My Wild Ride in Baseball and Beyond"를 출간했다. 이 책의 수익금은 그의 아내 수잔이 운영하는 비영리 단체 'Support Our Scholars'에 기부되었다.[35]

2021년에는 COVID-19에 감염되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했다.[3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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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웹사이트 メジャーで活躍!でも期待外れも…プロ野球「大物外国人選手」列伝 https://friday.kodan[...] 202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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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서적 助っ人列伝
[41]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3-03-19
[42] 서적 和をもって日本となす 角川文庫 1992
[43] 서적 助っ人列伝
[44] 서적 プロ野球助っ人三国志
[45] 서적 プロ野球助っ人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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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문서 デイヴ・ジョンソンは美しかった(『スポーツ批評宣言あるいは運動の擁護』所収)
[52] 간행물 多事正論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1-11-28
[53]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3-03-19
[54] 간행물 女性セブン 1976-08-18
[55] 서적 ニッポン野球は永久に不滅です ちくま文庫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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