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 크로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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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비 크로켓은 1960년대에 미국 육군에서 운용했던 전술 핵무기 시스템으로, 핵탄두 M388을 무반동포에 장착하여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1950년대 후반 냉전 시대에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되었으며, 보병 부대가 운용할 수 있도록 소형화된 것이 특징이다. M28 및 M29 두 가지 발사 장치가 있었으며, M388 핵탄두는 0.01kt 또는 0.02kt의 위력을 가졌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주로 서독을 비롯한 미군 기지에 배치되었으나, 실전에서 사용된 적은 없다. 정확도 및 사거리 문제, 방사능 노출 위험, 전술 핵무기 사용의 윤리적 문제 등의 논란이 있었으며, 1971년에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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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 크로켓 | |
---|---|
기본 정보 | |
![]() | |
명칭 | M28/M29 데이비 크로켓 |
종류 | 핵 무반동포 |
제작 국가 | 미국 |
사용 국가 | 미국 |
사용 전쟁 | 냉전 |
설계자 | 테드 테일러 |
생산 정보 | |
제조사 | 로스알라모스 연구소 |
생산 기간 | 1961년 ~ 1971년 |
생산 대수 | 2,100대 |
제원 | |
무게 | M28 (빈 상태): 49.2 kg, M29 (빈 상태): 143.3 kg |
길이 | 78.7 cm |
구경 | 279 mm |
승무원 | 5명 |
사격 제원 | |
사거리 | M28: 2 km, M29: 4 km |
발사각 | 5-800 밀리라디안 (0.3–45도) |
폭발 정보 | |
폭발 위력 | 10~20톤 |
기타 | |
상승 한계 | + |
2.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한국 전쟁과 같은 제한 전쟁이나 지역 분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핵무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NATO군에 비해 압도적인 병력을 보유한 소련군에 대한 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보병 부대가 간편하게 운용할 수 있는 소형 핵무기 개발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배경에서 1957년부터 1958년에 걸쳐 "BGADS"(Battle Group Atomic Delivery System, 전투군 원자(무기) 운송 시스템)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이는 당시 미국 육군 참모총장 맥스웰 D. 테일러 장군[36]이 추진한 '펜토믹 사단'[37]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2. 1. 개발 경위
1950년까지 리틀 보이(Little Boy)와 팻 맨(Fat Man)의 폭발 이후 핵무기 사용에 급속한 발전이 있었다.[5] 이러한 발전은 더 작은 크기의 핵탄두를 만드는 길을 열었다.[20]1949년 소련의 첫 핵폭탄 실험으로 핵무기 기술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핵무기의 크기가 크게 줄었다. 1957년, 미국 원자력 위원회(AEC)는 보병이 최전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형 핵분열 탄두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AEC는 존 H. 힌리히스(John H. Hinrichs) 소장을 배틀 그룹 원자 전달 시스템(BGADS) 프로그램의 탄두를 무기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이 프로그램은 1958년 1월 뉴저지주 피커티니 병기창(Picatinny Arsenal)에서 시작되었다.[20]
1958년 8월, 육군은 1836년 알라모 전투(Battle of the Alamo)에서 사망한 미국 민속 영웅의 이름을 따서 BGADS를 공식적으로 데이비 크로켓(Davy Crockett)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6] 알래스카의 그릴리 요새와 웨인라이트 요새, 그리고 애리조나주의 유마 시험장에서 4년간의 시험을 거친 후, M28/M29 데이비 크로켓은 1961년 5월 실전 배치되었다.[20]

데이비 크로켓 부대는 제7 미국 육군을 포함한 미국 육군 유럽(United States Army Europe)과 태평양 극장 제8 미국 육군(Eighth United States Army) 장갑 부대 및 기계화 및 비기계화 보병 대대에 배치되었다. 내독일 국경(Inner German border)의 훌다 갭(Fulda Gap)에 대한 경계 경고 중에 데이비 크로켓은 대대와 함께 배치되었다. 제7 육군의 제5 군단(제3 기갑사단 포함) 전투 기동 대대는 모두 훌다 갭에 사전 배치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GDP(일반 방어 계획) 위치로 알려져 있었다. 데이비 크로켓 부대는 이러한 방어 배치 계획에 포함되었다. 데이비 크로켓 외에도 제7 육군 제5 군단은 핵포병(nuclear artillery) 포탄과 원자 파괴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것들 또한 훌다 갭에서 사용될 가능성이 있었다. 한국 반도에서는 데이비 크로켓 무기를 배치받은 제8 육군 부대가 주로 장갑차를 유인하는 통로를 파괴된 전차와 기타 차량으로 막아 일시적으로 치명적인 방사능 지역을 만드는 살상 지역으로 계획했다.
1958년 8월 15일 설계 승인 후 피커티니 병기창에서 데이비 크로켓 생산이 시작되었다. 6,247개의 제조가 승인되었지만,[7] 실제로는 2,100개가 제조되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하와이섬의 포하쿨로아 훈련장(Pohakuloa Training Area)에서 714발의 M101 빈화 우라늄 날개 안내탄이 훈련에 사용되었다.[8][9] 이 무기는 1961년부터 1971년까지 미국 육군(US Army) 부대에 배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이 군사 행위를 감행할 경우 즉각 전략핵무기로 보복 공격을 가한다는 ‘대량 보복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략은 대국 간의 직접적인 전쟁은 억제할 수 있었지만, 한국 전쟁과 같은 대국들이 직접 전쟁 행위를 하지 않는 ‘제한 전쟁’이나 대국의 동맹국 간에 벌어지는 ‘지역 분쟁’은 억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제한 전쟁(지역 분쟁)’부터 ‘전면전’까지 다양한 단계에 대응할 수 있는 핵무기의 다양화가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보병 부대가 간편하게 운용할 수 있는 크기의 핵무기를 장비하는 것은, NATO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수적으로 우세했던 소련군에 대한 억제력으로 크게 기대되었고, 위력은 작더라도 일반 무기와 마찬가지로 사용할 수 있는 ‘간편한 핵무기’의 개발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57년부터 1958년에 걸쳐 기획된 계획은 "BGADS"(Battle Group Atomic Delivery System, 전투군 원자(무기) 운송 시스템)로 명명되었고, 이 계획은 당시 미국 육군 참모총장인 맥스웰 D. 테일러(Maxwell D. Taylor) 장군[36]이 추진한 ‘펜토믹 사단’[37]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BGADS 계획은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아 1958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기존의 무반동포의 탄두로서, 일반적인 무반동포 탄약과 같이 장전·발사되는 "무반동포용 핵탄두"였지만, 사람이나 경량 차량으로 운반할 수 있는 크기의 무반동포 탄두 크기의 핵탄두를 개발하는 것은 어려웠고, 또한 기존의 무반동포로는 필요한 사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핵탄두의 위력 반경을 밑돌았기 때문에, 계획은 전용 발사 장치로 개발하는 신형 무반동포를 이용한 외장식 탄두로 변경되었다.
발사 장치인 무반동포는 병사가 어깨에 짊어지고 운용할 수 있는 소형의 “경포형(light)”과, 삼각대에 싣거나 경량 차량에 탑재하여 운용하는 대형의 “중포형(Heavy)”이 구상되었고, 록 아일랜드 병기창(Rock Island Arsenal)이 개발을 담당했다. 경포는 '''XM28''', 중포형은 '''XM29'''라는 포 시스템 명으로 개발이 진행되었고, XM28용은 '''XM63 4.7인치 무반동포''', XM29는 '''XM64 6인치 무반동포'''로 시제품이 완성되었지만, 크기와 무게 면에서 XM63을 개인이 어깨에 짊어지고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XM28도 지상 설치 또는 차량 탑재형 무반동포로 완성되었다.
1958년 8월에는 "Davy Crocket"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최초의 발사 장치(무반동포)가 완성되어 납입되었다. 계획의 요체인 소형 핵탄두의 개발은 난항을 겪었지만, 1961년에는 미국의 핵무기 개발 권위자인 세오도어 브루스터 테일러(Theodore Brewster Taylor)에 의해 당시 세계 최소(장치 총중량 23kg)의 핵탄두인 W54가 완성되었고, 이는 즉시 이 계획에 응용되어, 1961년 5월, '''M388 데이비 크로켓'''으로 완성되어 제식 채용되었다.
2. 2. 개발 과정
1950년까지, 리틀 보이(Little Boy)와 팻 맨(Fat Man)의 폭발 이후 핵무기 사용에 급속한 발전이 있었다.[5] 이러한 발전은 더 작은 크기의 핵탄두를 만드는 길을 열었다.[20]1949년 소련의 첫 핵폭탄 실험으로 핵무기 기술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핵무기 크기가 크게 줄었다. 1957년, 미국 원자력 위원회(AEC)는 보병이 최전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형 핵분열 탄두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AEC는 존 H. 힌리히스 소장을 배틀 그룹 원자 전달 시스템(BGADS) 프로그램의 탄두를 무기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이 프로그램은 1958년 1월 뉴저지주 피커티니 병기창(Picatinny Arsenal)에서 시작되었다.[20]
1958년 8월, 육군은 1836년 알라모 전투(Battle of the Alamo)에서 사망한 미국 민속 영웅의 이름을 따서 BGADS를 공식적으로 데이비 크로켓(Davy Crockett)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6] 알래스카의 그릴리 요새와 웨인라이트 요새, 그리고 애리조나주의 유마 시험장에서 4년간의 시험을 거친 후, M28/M29 데이비 크로켓은 1961년 5월 실전 배치되었다.[20]
초기 BGADS 계획은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아 1958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기존 무반동포의 탄두로, 일반적인 무반동포 탄약처럼 장전·발사되는 "무반동포용 핵탄두"였지만, 사람이나 경량 차량으로 운반할 수 있는 크기의 핵탄두 개발은 어려웠다. 또한, 기존 무반동포로는 필요한 사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핵탄두의 위력 반경을 밑돌았기 때문에, 전용 발사 장치를 사용하는 신형 무반동포를 이용한 외장식 탄두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병사가 어깨에 짊어지고 운용할 수 있는 소형의 “경포형(light)”과, 삼각대에 싣거나 경량 차량에 탑재하는 대형의 “중포형(Heavy)” 발사 장치가 구상되었고, 록 아일랜드 병기창(Rock Island Arsenal)이 개발을 담당했다. 경포는 '''XM28''', 중포형은 '''XM29'''라는 포 시스템 명으로 개발이 진행되었고, XM28용은 '''XM63 4.7인치 무반동포(XM63 4.7inch recoilless rifle)''', XM29는 '''XM64 6인치 무반동포(XM64 6inch recoilless rifle)'''로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크기와 무게 면에서 XM63을 개인이 어깨에 짊어지고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XM28도 지상 설치 또는 차량 탑재형 무반동포로 완성되었다.
1958년 8월, "Davy Crocket"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최초의 발사 장치(무반동포)가 완성되어 납입되었다. 소형 핵탄두 개발은 난항을 겪었지만, 1961년, 세오도어 브루스터 테일러(Theodore Brewster Taylor)에 의해 당시 세계 최소(장치 총중량 23kg)의 핵탄두인 W54가 완성되었다. 이는 즉시 이 계획에 응용되어, 1961년 5월, '''M388 데이비 크로켓(Davy Crockett)'''으로 완성되어 제식 채용되었다.
데이비 크로켓 부대는 제7 미국 육군을 포함한 미국 육군 유럽(United States Army Europe)과 태평양 극장 제8 미국 육군(Eighth United States Army) 장갑 부대 및 기계화, 비기계화 보병 대대에 배치되었다. 내독일 국경(Inner German border)의 훌다 갭(Fulda Gap) 경계 경고 중에 데이비 크로켓은 대대와 함께 배치되었다. 제7 육군의 제5 군단(제3 기갑사단 포함) 전투 기동 대대는 모두 훌다 갭에 사전 배치된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GDP(일반 방어 계획) 위치로 알려졌다. 데이비 크로켓 부대는 이러한 방어 배치 계획에 포함되었다. 한국 반도에서는 제8 육군 부대가 주로 장갑차를 유인하는 통로를 파괴된 전차와 기타 차량으로 막아 일시적으로 치명적인 방사능 지역을 만드는 살상 지역으로 계획했다.
1958년 8월 15일 설계 승인 후 피커티니 병기창(Picatinny Arsenal)에서 데이비 크로켓 생산이 시작되었다. 6,247개의 제조가 승인되었지만,[7] 실제로는 2,100개가 제조되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하와이섬의 포하쿨로아 훈련장(Pohakuloa Training Area)에서 714발의 M101 빈화 우라늄 날개 안내탄이 훈련에 사용되었다.[8][9] 이 무기는 1961년부터 1971년까지 미국 육군(US Army) 부대에 배치되었다.
미 제82 공수사단 포병에 배속된 제55 및 제56 보병 소대는 M29 데이비 크로켓 무기 체계를 장착한 마지막 부대였다. 이 두 부대는 공수부대였으며, 소대당 약 907.18kg 트럭(소대당 3대)을 보유하고 있어 완전히 공수 가능했다. 이 부대는 1968년 중반에 해체되었다.
데이비 크로켓의 핵탄두인 M388은 1967년 8월 미국 육군 유럽(서독)에서 철수되었다.[10] 마지막 핵탄두는 1971년 퇴역했다.[21] 제3 기갑사단 부사단장인 앨빈 코완(Alvin Cowan) 준장은 이 무기가 기술적으로 "중요한 발전"이었고 담당 연구소가 "많은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육군이 이 무기를 퇴역시킨 이유는 인력 비용뿐만 아니라 "어떤 병장이 핵전쟁을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큰 두려움" 때문이라고 밝혔다.[11]
두 번째와 세 번째 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핵무기와 마찬가지로, 데이비 크로켓은 전투에서 사용된 적이 없다.[20] 퇴역 이후 데이비 크로켓 시스템은 미국 전역의 많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20]
2005년 육군은 데이비 크로켓의 불활성 탄환 사격 훈련에 사용된 훈련장에서 약 272.16kg의 빈화 우라늄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12405acre의 토지가 이 훈련으로 인해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12]
3. 설계
데이비 크로켓은 미국의 핵탄두 중 초소형인 W54 핵탄두의 파생형인 Mk54 핵탄두를 사용하였다.[13] M388 발사체에는 W54 Mod 2 핵탄두가 장착되었는데, 무게는 약 23.09kg였다.
M388은 사거리가 약 약 2.01km인 120mm M28 또는 사거리가 약 약 4.02km인 155mm M29 발사기 중 하나에서 발사될 수 있었다. 두 발사기 모두 동일한 발사체를 사용했으며, 별도의 약통을 사용하여 추진했다. 제한된 사거리는 핵탄두가 기존 포탄처럼 발사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며, 단거리 무반동포에서 발사해야 했다.[21]
발사기는 삼각대 발사기에 장착되어 M113 장갑 수송차나 지프차로 운반되었다. 지프차에는 필요에 따라 M28 또는 M29용 발사기가 부착되었고, 장갑 수송차에 실린 데이비 크로켓은 현장에서 수송차와 떨어진 곳에 삼각대에 설치되었다.
M28 발사기에는 20mm 조준 소총이 장착되어 있었다. 이 총은 고갈 우라늄[8]탄을 사용하는 단발식 무기로, 핵탄두와 비슷한 탄도를 날아가 착탄 시 흰 연기를 생성하여 사거리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5] 데이비 크로켓은 원격으로 발사되었으며, 5명의 승무원이 조작했다.
이 무기는 경량 금속으로 제작되었다. 삼각대는 알루미늄, 포신은 티타늄이었다.[30] M28 발사기의 무게는 84kg이고 더 큰 M29는 200kg이었다.[20]
3. 1. M388 핵탄두
W54 핵탄두는 미국의 핵탄두 중 초소형으로, 데이비 크로켓에 사용된 것은 W54의 파생형인 Mk54이다.[13]'''M388'''은 데이비 크로켓에 사용된 279mm 초구경 원자탄 발사체로, '''W54 Mod 2''' 핵탄두가 장착되었다. W54 Mod 2는 매우 소형의 순수 핵분열 장치로 무게는 약 23.09kg이며, M388 발사체에 장착되었을 때는 약 34.47kg이었다. 폭발력은 20tTNT이고, 약 11.79kg의 고성능 폭약을 함유하고 있었다.[35][14]
발사체에는 폭발 고도를 조절하는 두 가지 신관(각각 약 0.61m, 약 12.19m 공중 폭발)이 있었다. 또한 '안전' 및 '발사 준비' 위치를 갖는 안전 장치와, 신관 작동 전 1초에서 50초 사이의 시간 지연을 허용하는 시간 설정 다이얼이 있었다. 시간 지연이 비행 시간보다 길면 무기는 발사 준비 전에 지면에 떨어져 폭발하지 않았다. 시간 다이얼에는 '안전' 설정도 있어 두 번째 안전 장치 역할을 했다.[15][14]
M388 발사체는 길이 약 78.74cm, 최대 지름 약 27.94cm이었다. 탄피 후면의 소구경 피스톤은 발사를 위해 발사관 포신에 삽입되었다.[16] M388은 총열에 삽입된 스파이크에 총검식으로 장착되었다. 추진제 발사 시 스파이크가 M388의 발사 피스톤이 되었는데, 이는 핵분열탄이 강한 가속도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며, "추진관" 역할을 하는 스파이크/피스톤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17] 비행 중에는 끝부분의 네 날개가 펼쳐져 궤적과 비행을 안정화시켰다.[20]
M390 연습탄은 핵탄두와 겉모습, 탄도가 유사하게 설계되었다. 컴포지션 B 7.3kg을 함유, 지면 충돌 시 전기 스위치로 폭발하도록 되어 있었다. 연습탄은 자체적으로도 상당한 파괴력이 있어 비상시 전투용으로도 제작되었다. M421은 사격 훈련용 더미탄으로, 완전 불활성이며 발사용이 아니었다.[18]
1961년 5월, M388 데이비 크로켓이 완성되어 제식 채용되었다. 데이비 크로켓은 무반동포에 W54 핵탄두를 내장한 M388 탄두를 외장식으로 장착, 운용하는 외장식 포탄 시스템이다.
M388 탄두는 후미에 4개의 안정익이 달린 길이 31인치(약 78.75cm), 최대 직경 11인치(약 28cm)의 방추형 유익포탄으로, 무게는 76파운드(약 34.5kg)이다. 병사들은 그 외형 때문에 M388 탄두를 “원자폭탄수박(atomic watermelon)”이라고 불렀다.[43]
; M388
: W54-2 핵폭발장치를 내장한 외장식 탄두. 탄두 위력 및 폭발 고도는 각각 2단계로 조정 가능.
:: W54-2: 핵탄두. 폭발 위력은 0.01kt 또는 0.02kt (TNT(화약) 10/20톤 상당)으로 선택 가능.[47]
:: XM1117: 신관.
3. 2. 발사 장치
M388은 데이비 크로켓 무기 체계로 알려진 두 가지 발사기에서 발사될 수 있었다. 사거리가 약 약 2.01km인 120mm '''M28''' 또는 사거리가 약 4.02km인 155mm '''M29'''였다.두 무기 모두 동일한 발사체를 발사했으며, 별도의 약통을 사용하여 추진했다. 더 작은 M28은 5kg의 폭약 약통을 사용했고, 더 큰 M29는 원하는 사거리에 따라 5kg 또는 8.5kg의 추진체 장약을 사용했다.[22] 발사기 시스템은 화승식 무기였다. 매우 낮은 발사 속도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후장식 메커니즘은 불필요했다.[17]
데이비 크로켓 발사기는 삼각대 발사기에 장착되어 M113 장갑 수송차로 운반되거나, 지프차( M38 및 후기형 M38A1"D" 변형)로 운반되었다. 지프차에는 필요에 따라 M28 또는 M29용 발사기가 부착되었고, 장갑 수송차에 실린 데이비 크로켓은 현장에서 수송차와 떨어진 곳에 삼각대에 설치되었다. M113은 최대 10발의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었다.[23]
M28 발사기에는 20mm 조준 소총도 장착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갈 우라늄[8]탄을 사용하는 단발식 무기로, 고저 방식을 사용했다. 이 탄환은 핵탄두와 비슷한 탄도를 날아갔고, 착탄 시 흰 연기를 생성하여 사거리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5]
데이비 크로켓은 원격으로 발사되었다. 22미터 길이의 뇌관 끝에 있는 기계식 작동 뇌관이 추진체 장약으로 이어졌다.[26] M388 핵탄두는 총검 장착 방식으로 티타늄 피스톤에 부착되었다. 발사 시, 피스톤은 폭발하는 추진체에 의해 관에서 밀려나갔다. 피스톤은 속이 비어 있었고 폭발로 인한 고압 가스로 채워져 있었는데, 이 압력으로 피스톤을 핵탄두에 연결하는 전단 핀이 파손되어 발사 후 수 미터 후에 분리되었다.[27]
데이비 크로켓은 5명의 승무원이 조작했으며, 분대는 지휘관, 사수, 보조 사수, 장전수, 계산수로 구성되었다. M388의 지휘관은 몇 분 만에 무기를 사용하고 발사하도록 명령할 수 있었다.[29]
이 무기는 경량 금속으로 제작되었다. 삼각대는 알루미늄, 포신은 티타늄이었다.[30] 더 작은 M28 무기는 승무원이 운반할 수 있도록 세 개의 짐으로 분해할 수 있었다.[31] M28 발사기의 무게는 84kg이고 더 큰 M29는 200kg이었다.[20] 3명의 승무원으로 M28 또는 M29 버전의 무기를 조작하는 것도 가능했다.[32]
발사 장치인 무반동포는 병사가 어깨에 짊어지고 운용할 수 있는 소형의 “경포형(light)”과, 삼각대에 싣거나 경량 차량에 탑재하여 운용하는 대형의 “중포형(Heavy)”이 구상되었다. 경포는 '''XM28''', 중포형은 '''XM29'''라는 포 시스템 명으로 개발이 진행되었고, XM28용은 '''XM63 4.7인치 무반동포''', XM29는 '''XM64 6인치 무반동포'''로 시제품이 완성되었지만, XM28도 지상 설치 또는 차량 탑재형 무반동포로 완성되었다.
1958년 8월에는 "Davy Crocket"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최초의 발사 장치가 완성되어 납입되었다.
데이비 크로켓은 무반동포에 W54 핵탄두를 내장한 M388 탄두를 외장식으로 장착하여 운용하는 외장식 포탄 시스템이다. 발사에 사용하는 무반동포는 구경 4.7인치(120mm)의 '''M63'''과 6.1인치(155mm)의 '''M64''' 두 종류가 있었다. 포 본체의 무게는 M63이 185파운드(약 84kg), M64가 440파운드(약 199.6kg)이다.
M63/M64 모두 포 자체의 구조는 가스 분사식 무반동포로, 포신은 선조가 없는 활강포이며, 발사약은 측면에 많은 구멍이 뚫린 케이스에 수납되어 있으며, 점화·연소하면 한 단계 굵어진 약실에 연소가스가 일단 충만한 후 포미의 분사구에서 노즐을 통해 분사되어 반동을 상쇄하는 방식이다.[44]
탄두는 "launching piston" 또는 "spigot cylinder"라는 명칭의 분리식 미추관을 사용하여 발사하는 특수한 형식으로, 무반동포라기보다는 축발사식 박격포에 가까운 것이었다.[45] 장전은 포구에서 이루어지며, 발사약을 장전한 후 미추관을 삽입하고, 미추관에 탄두를 장착하여 장탄을 완료한다. 발포하면 발사약의 연소가스에 의해 미추관과 그 선단에 연결된 탄두가 발사되고, 발사 후 미추관은 분리되어 탄두 부분만이 목표 지점으로 비상하며, 설정된 소정의 고도에서 폭발한다.
M63에는 20mm, M64에는 37mm의 단발식 측거총(조준소총)[46]이 장착되어 있으며, 이 총은 탄두와 동일한 탄도를 그리는 예광탄을 발사했다.
; M28
: 경량 단거리형. '''M63 4.7인치 무반동포''', 20mm 거리측정총, 조준기, 삼각대 또는 차량 탑재용 포가 및 기타 부속 장비로 구성된다.
; M29
: 중량 장거리형. '''M64 6.1인치 무반동포''', 37mm 거리측정총, 조준기, 삼각대 또는 차량 탑재용 포가 및 기타 부속 장비로 구성된다.
; M2 발사 피스톤/스파이갓 실린더
: M64 무반동포용 분리식 후미관.
; M101 조준용 포탄
: M63 무반동포에 부속된 20mm 거리측정총에 사용하는 유탄. 탄체에 열화우라늄을 사용하고 있다.
; M76 ZONE I
: M94라고도 한다. 단거리(540-1,900m)용 발사약(장약).
; M77 ZONE II
: 장거리(1,700-4,000m)용 발사약.
4. 운용
데이비 크로켓은 3명의 포병이 조작했으며, 윌리스 M38 또는 M151 1/4톤 4륜 구동 차량에 탑재되어 운용되었다. 무게가 무거운 M29 시스템은 M113 장갑병원수송차나 M116 "허스키" 궤도식 화물 운반차에 탑재되기도 했지만, 이 경우에는 차량에서 내려 삼각대 포대에 설치해야만 사격할 수 있었다.
M63과 M64 발사 장치는 차량에 탑재하거나 지상에 삼각대를 설치하여 운용했다. 두 포 모두 구조적으로는 수평탄도로 직접 사격하는 "직사포"이지만, 핵포탄 운용 시에는 파괴 범위를 최대화하기 위해 최적 고도에서 탄두를 공중 폭발시켜야 했다. 따라서 사격 시에는 각도를 조절하여 야전 유탄포나 박격포처럼 큰 고각으로 발사했으며, 발사된 포탄은 곡사 탄도를 그리는 "곡사포"처럼 조준 및 발포되었다.[45] M63의 최대 사거리는 약 2.01km이고, M64는 약 4.02km이다.
W54 핵탄두의 핵출력은 0.01kt 또는 0.02kt(TNT 10ton~20ton 상당)로 조정 가능했다.[47] 탄두의 주된 위력은 강렬한 방사선 효과였다. 저출력 설정에서도 핵탄두는 150미터 이내 목표물에 즉사 수준(10,000렘(100시버트) 초과)의 방사선을 쬐게 하며, 400미터 거리에서도 거의 사망(약 600렘(6시버트))에 이르는 방사선 강도를 보였다.
핵탄두 발사 전에는 측정총을 발사하여 탄도, 풍향, 풍속을 확인하고, 목표물에 대한 탄두의 최적 폭발 고도를 계산했다. 발포 시 포구 폭풍과 무반동포의 후방 분사, 그리고 짧은 사거리로 인한 핵탄두 폭발 영향을 피하기 위해, 발사는 포에서 떨어진 곳에서 리모컨 스위치로 이루어졌고, 포병은 발사 후 즉시 참호나 은폐물에 몸을 숨겨야 했다.
4. 1. 실전 배치 및 훈련
1950년까지, "리틀 보이(Little Boy)"와 "팻 맨(Fat Man)"의 폭발 이후 핵무기 사용에 급속한 발전이 있었다.[5] 이러한 발전은 더 작은 크기의 핵탄두를 만드는 길을 열었다.[20] 1957년까지 미국 원자력 위원회(AEC)는 보병이 최전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형 핵분열 탄두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AEC는 존 H. 힌리히스(John H. Hinrichs) 소장을 배틀 그룹 원자 전달 시스템(BGADS) 프로그램의 탄두를 무기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이 프로그램은 1958년 1월 뉴저지주 피커티니 병기창(Picatinny Arsenal)에서 시작되었다.[20]1958년 8월, 육군은 1836년 알라모 전투(Battle of the Alamo)에서 사망한 미국 민속 영웅의 이름을 따서 BGADS를 공식적으로 데이비 크로켓(Davy Crockett)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6] 알래스카의 그릴리 요새와 웨인라이트 요새, 그리고 애리조나주의 유마 시험장에서 4년간의 시험을 거친 후, M28/M29 데이비 크로켓은 1961년 5월 실전 배치되었다.[20]
데이비 크로켓 부대는 미국 육군 유럽(United States Army Europe) 제7 미국 육군과 태평양 극장 제8 미국 육군(Eighth United States Army) 장갑 부대 및 기계화/비기계화 보병 대대에 배치되었다. 내독일 국경(Inner German border)의 훌다 갭(Fulda Gap) 경계 경고 중에 데이비 크로켓은 대대와 함께 배치되었다. 제7 육군의 제5 군단(제3 기갑사단 포함) 전투 기동 대대는 모두 훌다 갭에 사전 배치된 위치(GDP, 일반 방어 계획 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데이비 크로켓 부대는 이러한 방어 배치 계획에 포함되었다. 제7 육군 제5 군단은 데이비 크로켓 외에도 핵포병(nuclear artillery) 포탄과 원자 파괴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것들 또한 훌다 갭에서 사용될 가능성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제8 육군 부대가 데이비 크로켓 무기를 배치받아, 장갑차 통로를 파괴된 전차 등으로 막아 일시적인 치명적 방사능 지역을 만드는 살상 지역을 계획했다.
1958년 8월 15일 설계 승인 후 피커티니 병기창에서 데이비 크로켓 생산이 시작되었고, 실제로는 2,100개가 제조되었다.[7] 1962년부터 1968년까지 하와이섬의 포하쿨로아 훈련장(Pohakuloa Training Area)에서 714발의 M101 빈화 우라늄 날개 안내탄이 훈련에 사용되었다.[8][9] 이 무기는 1961년부터 1971년까지 미국 육군(US Army) 부대에 배치되었다.
미 제82 공수사단 포병에 배속된 제55 및 제56 보병 소대는 M29 데이비 크로켓 무기 체계를 장착한 마지막 부대였다. 이 두 부대는 공수부대였으며, 소대당 트럭(소대당 3대)을 보유하여 완전 공수가 가능했다.
데이비 크로켓의 핵탄두 M388은 1967년 8월 미국 육군 유럽(서독)에서 철수되었고,[10] 마지막 핵탄두는 1971년 퇴역했다.[21]
4. 2. 퇴역
M388 핵탄두는 1967년 8월 미국 육군 유럽(서독)에서 철수되었다.[10] 1971년에는 모든 핵탄두가 퇴역했다.[21] 제3 기갑사단 부사단장 앨빈 코완(Alvin Cowan) 준장은 이 무기가 기술적으로 "중요한 발전"이었고 담당 연구소가 "많은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평가했지만, 육군이 이 무기를 퇴역시킨 이유는 인력 비용 문제와 더불어 "어떤 병장이 핵전쟁을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큰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밝혔다.[11]두 번째와 세 번째 핵무기를 제외하면, 데이비 크로켓은 다른 모든 핵무기와 마찬가지로 전투에서 사용된 적이 없다.[20] 퇴역 후 데이비 크로켓 시스템은 미국 전역의 여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20]
M388은 1961년 개발 완료와 함께 생산이 시작되어 총 2,100발이 제조되었다. 생산된 탄두와 발사 장치는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주로 서독 주둔 미군에 배치되었다.

1961년 배치 시작 후, 사정거리가 짧은 M28은 점차 M29로 대체되었으며, 이후 실전 장비로는 M29만 사용되었다. 1962년 7월 7일과 17일에는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Little Feller영어 작전이라는 명칭으로 핵탄두 실사격 훈련이 실시되었다.[38][39] 1962년부터 1968년까지 하와이섬의 Pohakuloa Training Area영어 훈련장에서 측거총을 이용한 사격 훈련이 총 714회 실시되었으며, 이때 사용된 M101 20mm탄은 탄두에 빈화우라늄을 사용했다.[40]
M388은 1967년 8월 서독 주둔군에서 철수되었고, 다른 배치 지역에서도 순차적으로 실전 장비에서 해체되어 예비 무기가 되었다. 1971년에는 전량 퇴역했으며, 냉전 종식과 함께 미국은 1991년 9월 유럽에서의 지상 발사식 전술 핵무기 철거를 선언했다. 이로써 M388은 실전에 사용되지 않고 모두 폐기되었다.
M388의 모의탄과 M63/M64 발사 장치는 2018년 현재 일부가 남아 있으며, 미국 각지의 군사 박물관이나 기지 자료관 등에서 전시되고 있다.
5. 문제점 및 논란
데이비 크로켓은 핵무기로서 강력한 안전 프로그램이 필요했으며, 최초 탄두 인도 전에 폭발물 처리 요원에게 안전 처리 절차 문서를 제공해야 했다.[4]
냉전 시대 서독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은 데이비 크로켓에 큰 기대를 걸고 핵 공유 정책에 따라 독일 연방군에 제공해 줄 것을 미국에 요청했다. 그는 M388 핵탄두가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에 효과적인 전력이며, 1발로 일반 포병 40~50문의 화력에 상당하여 데이비 크로켓 1기로 2~3개 포병대대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NATO의 억제력을 높이고 군사 예산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41]
그러나 이는 "전쟁 발발 시 즉시 전술핵무기 사용"과 같으며, "재래식 공격에는 재래식 전력으로 대응하고 핵무기는 적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 결정을 내렸을 때만 사용한다"는 미국의 유연 대응 전략에 어긋났다. 또한 NATO 군사력에서 핵무기 의존도를 지나치게 높인다는 이유로 미국은 이 요청을 거부했다.[41]
5. 1. 정확도 및 사거리 문제
무반동포는 시험에서 우수한 명중률을 보였는데, 대부분의 훈련 사격은 목표 지점으로부터 약 3.05m 이내에 착탄했고, CEP는 50m 미만이었다.[4] 100% 즉각적인 사상자 반경은 160m을 초과했다. 이 포탄의 가장 큰 효과는 극도로 강력한 즉발 중성자 방사선으로, 이는 수 분 내에 그 원 안에 있는 적군 대부분을 사살했을 것이다. 폭발은 적군의 추적 차량에 거의 또는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더 멀리 있는 병사들은 폭발 지점으로부터의 거리와 방호의 두께에 따라 수 시간, 수일, 2주 미만 내에 사망했을 것이다.표준 절차를 따르는 한 무기의 폭발은 승무원에게 위험하지 않았다. 육군은 M388 발사 시 승무원이 따라야 할 표준을 만들었는데, 병사들이 경사진 언덕 뒤에 몸을 피하고, 목과 머리를 덮은 채로 땅에 엎드려 누워야 한다고 권고했다.[20]
5. 2. 방사능 노출 위험
데이비 크로켓 무기 체계에 사용된 빈화우라늄(Depleted Uranium) 탐지탄은 병사들의 방사능 노출에 대한 우려를 야기했지만, 연구 결과 무기 사용 중에는 방사능 물질에 노출될 위험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4]표준 절차를 따르는 한 무기의 폭발은 승무원에게 위험하지 않았다. 육군은 M388 발사 시 승무원이 따라야 할 표준을 만들었는데, 병사들이 경사진 언덕 뒤에 몸을 피하고, 목과 머리를 덮은 채로 땅에 엎드려 누워야 한다고 권고했다.[20]
핵탄두는 1962년 7월 7일 리틀 펠러 II 무기 효과 시험 발사에서, 그리고 1962년 7월 17일 약 2.74km 거리에서 데이비 크로켓을 실제로 발사한 리틀 펠러 I 시험 발사에서 다시 시험되었다. 이것은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마지막 대기 중 핵실험이었다.
W54 핵탄두의 핵출력은 가변식으로, 조정 범위는 0.01kt 또는 0.02kt(TNT 화약 10/20톤 상당)이었다.[47] 탄두의 위력은 주로 강렬한 방사선 효과에 의한 것으로, 저출력 설정이어도 핵탄두는 150미터 이내의 목표물에 대해 즉사 수준의 방사선(10,000렘(100시버트) 초과)을 쬐게 한다. 방사선 강도는 400미터 떨어져 있어도 거의 사망 수준(약 600렘(6시버트)에 달함)이다.
핵탄두 발사 전에는 먼저 측정총을 발사하여 탄도와 풍향·풍속을 확인하고, 목표물에 대한 탄두의 폭발 최적 고도를 산정하는 절차를 거쳤다. 또한, 발포 시의 포구 폭풍과 무반동포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후방 분사, 그리고 사거리가 짧기 때문에 핵탄두가 폭발했을 때의 영향이 발사 지점에 미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발사는 포에서 떨어진 곳에서 리모컨 스위치로 실시했고, 포병은 발사 후 즉시 참호 또는 은폐물에 몸을 숨기는 것이 지시되었다.
5. 3. 전술 핵무기 사용의 윤리적 문제
무반동포는 시험에서 우수한 명중률을 보였는데, 대부분의 훈련 사격은 목표 지점으로부터 약 3.05m 이내에 착탄했고, CEP는 50m 미만이었으며, 100% 즉각적인 사상자 반경은 160m을 초과했다. 이 포탄의 가장 큰 효과는 극도로 강력한 즉발 중성자 방사선으로, 이는 수 분 내에 그 원 안에 있는 적군 대부분을 사살했을 것이다. 폭발은 적군의 추적 차량에 거의 또는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더 멀리 있는 병사들은 폭발 지점으로부터의 거리와 방호의 두께에 따라 수 시간, 수일, 2주 미만 내에 사망했을 것이다.[20]표준 절차를 따르는 한 무기의 폭발은 승무원에게 위험하지 않았다. 육군은 M388 발사 시 승무원이 따라야 할 표준을 만들었는데, 병사들이 경사진 언덕 뒤에 몸을 피하고, 목과 머리를 덮은 채로 땅에 엎드려 누워야 한다고 권고했다.[20]
탄두는 1962년 7월 7일 리틀 펠러 II 무기 효과 시험 발사에서, 그리고 1962년 7월 17일 약 2.74km 거리에서 데이비 크로켓을 실제로 발사한 리틀 펠러 I 시험 발사에서 다시 시험되었다. 이것은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마지막 대기 중 핵실험이었다.[20]
냉전 시대 서독에서 아데나우어 정권 하에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전반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데이비 크로켓에 큰 기대와 지지를 보이며 미국에 대해 서독군(독일 연방군)에 핵 공유 정책에 기반한 데이비 크로켓 제공을 희망했다.[41]
그에 따르면, M388 핵탄두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에 대한 효과적인 전력이며, 그 위력은 1발로 일반 포병 40문에서 50문의 전력 사격에 상당하기 때문에 데이비 크로켓 1기로 2개 또는 3개의 포병대대를 대체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NATO의 억제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동시에 군사 예산을 대폭 감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전력 증강과 군비 감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41]
그러나 이는 사실상 "동진과의 전쟁 상태에 돌입할 경우 즉시 전술핵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동의어이며, 전술핵무기를 중요한 전력으로 위치지우면서도 "적이 일반 전력으로 공격을 가했을 경우, 우선 최대한 일반 전력으로만 대응하고, 핵무기 사용은 적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을 결정했다고 판단한 후에 결정한다"는 당시 미국의 기본 전략(유연 대응 전략)에 반하는 동시에 NATO 군사력에서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과도하게 편중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큰 반발을 받았고, 최종적으로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다.[41]
6. 대한민국과의 관계
냉전 시대 서독에서 아데나우어 정권 하에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전반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데이비 크로켓에 큰 기대와 지지를 보이며 미국에 대해 서독군(독일 연방군)에 핵 공유 정책에 기반한 데이비 크로켓 제공을 희망했다.[41]
그에 따르면, M388 핵탄두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에 대한 효과적인 전력이며, 그 위력은 1발로 일반 포병 40문에서 50문의 전력 사격에 상당하기 때문에 데이비 크로켓 1기로 2개 또는 3개의 포병대대를 대체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NATO의 억제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동시에 군사 예산을 대폭 감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전력 증강과 군비 감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41]
그러나 이는 사실상 "동진과의 전쟁 상태에 돌입할 경우 즉시 전술핵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동의어이며, 전술핵무기를 중요한 전력으로 위치지우면서도 "적이 일반 전력으로 공격을 가했을 경우, 우선 최대한 일반 전력으로만 대응하고, 핵무기 사용은 적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을 결정했다고 판단한 후에 결정한다"는 당시 미국의 기본 전략(유연 대응 전략)에 반하는 동시에 NATO 군사력에서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과도하게 편중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큰 반발을 받았고, 최종적으로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다.[41]
데이비 크로켓은 전 세계 미군 기지에 배치되었지만, 미국이 통치하던 시절의 오키나와에도 배치되었다는 사실이 1999년 미국의 환경보호단체인 (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 NRDC)이 공개한 미국 국방부의 핵무기 배치 현황 목록을 통해 확인되었다.[42]
7. 기타
데이비 크로켓 발사관은 아래의 박물관들에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명 | 위치 |
---|---|
미국 육군 국립 박물관 | 포트 벨보이어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
미 공군 우주 및 미사일 박물관 | 케이프커내버럴 우주군 기지 (플로리다주) |
국립 핵 과학 및 역사 박물관 | 커틀랜드 공군기지 인근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
국립 보병 박물관 | 포트 무어 (조지아주) |
미국 육군 병기 훈련 및 유산 센터 | 포트 그레그-아담스 (버지니아주 프린스 조지 카운티) (일반인 출입 금지) |
워터블릿 병기창 박물관 | 워터블릿 (뉴욕주) |
웨스트포인트 박물관 | 미국 육군사관학교 (뉴욕주 웨스트포인트) |
국립 원자력 시험 박물관 | 라스베이거스 (네바다주) |
돈 F. 프랫 기념 박물관 | 포트 캠벨 (테네시주 클락스빌) |
7. 1. W54 핵탄두의 다른 용도
데이비 크로켓에 사용된 279mm 초구경 원자탄 발사체 XM388에는 W54 Mod 2 핵탄두가 장착되었다. 이 핵탄두는 매우 작고 순수한 핵분열 장치로 무게는 약 23.09kg이며, M388 발사체에 장착되었을 때는 약 34.47kg이었다. 폭발력은 20tTNT이었고, 약 11.79kg의 고성능 폭약을 함유하고 있었다.[35][14]발사체에는 폭발 고도를 조절하는 두 가지 위치의 신관이 있었는데, 약 0.61m 및 약 12.19m 공중 폭발로 설정할 수 있었다. 또한 '안전' 및 '발사 준비' 위치를 갖는 안전 장치와, 신관 작동 전 1초에서 50초 사이의 시간 지연을 허용하는 시간 설정 다이얼이 있었다. 시간 지연이 비행 시간보다 길면, 무기는 발사 준비가 되기 전에 지면에 떨어져 폭발하지 않았다. 시간 다이얼에는 '안전' 설정도 있어 두 번째 안전 장치 역할을 했다.[15][14]
완벽한 발사체는 길이가 약 78.74cm이고 가장 넓은 지름은 약 27.94cm이었다. 탄피 후면의 소구경 피스톤은 발사를 위해 발사관의 포신에 삽입되었다.[16] M388 원자탄 발사체는 총열에 삽입된 스파이크에 총검식으로 장착되었다. 추진제가 발사되면 스파이크가 M388 원자탄 발사체의 발사 피스톤이 되었다. 이는 핵분열탄이 강한 가속도의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필요한 조치였으며, "추진관" 역할을 하는 스파이크/피스톤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17] 비행 중에는 끝부분의 네 개의 날개가 펼쳐져 궤적과 비행을 안정화시켰다.[20]
W54 핵탄두는 처음에 데이비 크로켓과 AIM-4 팔콘 공대공 미사일을 위해 XW-51이라는 명칭으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1959년 1월 핵탄두 개발은 로스앨러모스 과학 연구소로 재배정되었고 XW-54로 재지정되었다. 이는 팔콘과 데이비 크로켓에 각각 사용되는 Mark 54 mod 0과 Mark 54 Mod 2 핵탄두를 만들어냈으며, 이들은 사용된 환경 감지 장치에 의해서만 구별되었다. 나중에 특수 원자 파괴 무기(SADM – 때때로 B54로 지정됨)가 개발되어 1964년부터 1989년까지 사용되었다. SADM은 W54 핵탄두와 너무 달랐기 때문에 고유한 마크 번호를 사용하여 무기를 재명명하는 것을 고려했다. Mark 54/W54와 B54/SADM 간의 Mod 번호는 공유되지 않는다. W54의 후속 개발품은 AGM-62 월아이 TV 유도 활공 폭탄 시스템을 위한 W72 핵탄두였다.[35][16]
7. 2. 박물관 전시
다음은 데이비 크로켓 발사관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 목록이다.
박물관명 | 위치 |
---|---|
미국 육군 국립 박물관 | 포트 벨보이어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
미 공군 우주 및 미사일 박물관 | 케이프커내버럴 우주군 기지 (플로리다주) |
국립 핵 과학 및 역사 박물관 | 커틀랜드 공군기지 인근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
국립 보병 박물관 | 포트 무어 (조지아주) |
미국 육군 병기 훈련 및 유산 센터 | 포트 그레그-아담스 (버지니아주 프린스 조지 카운티) (일반인 출입 금지) |
워터블릿 병기창 박물관 | 워터블릿 (뉴욕주) |
웨스트포인트 박물관 | 미국 육군사관학교 (뉴욕주 웨스트포인트) |
국립 원자력 시험 박물관 | 라스베이거스 (네바다주) |
돈 F. 프랫 기념 박물관 | 포트 캠벨 (테네시주 클락스빌) |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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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fety Rules for Peacetime Operations with the DAVY CROCKETT/MK54 Mod 2 Atomic Weapo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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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quarters, Department of the Army
196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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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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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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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ia National Labs
1968-02-01
[36]
문서
テイラーは後にジョン・F・ケネディ大統領の下でアメリカ統合参謀本部議長に就任している。
[37]
문서
1957年にアメリカ陸軍が考案した、将来想定される戦場において戦術核兵器に対応する能力を付与させた歩兵師団の編制案。
[38]
문서
この実射訓練は、アメリカが行った最後の大気圏内核実験であった。
[39]
문서
リトルフェラー作戦におけるデイビー・クロケットの実射には、ジョン・F・ケネディ大統領やテイラー大将(この実験に列席した際の肩書は「大統領軍事顧問」)も列席した。
[40]
웹사이트
M101 20mm Davy Crockett Spotting 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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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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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1-01 # November–December로 추정
[43]
웹사이트
The M28/M29 Davy Crockett Nuclear Weapo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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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7
[44]
문서
この方式は無反動砲の形式分類としては「無反動砲#クロムスキット式」もしくは「無反動砲#バーニー式(バーニー砲)」に類するが、それらとは砲尾に閉鎖器がないことや、ノズルが砲尾真後方にあることが異なる。
[45]
문서
そのため、デイビー・クロケットを「核迫撃砲」と称している資料もある。
[46]
웹사이트
Watervliet Arsenal Museum - Nuclear Weapons / 07M64_155mmDaveyCrockettRecoillessAtomicGunSpottingGunBre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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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7
[47]
문서
資料によっては最大出力は0.025kt(TNT火薬換算25トン相当)となっている。1962年7月7日および17日に行われた、デイビー・クロケット唯一の実射実験であるリトルフェラー作戦の際に観測された推定爆発威力は、0.018/0.022kt(リトルフェラーI/リトルフェラ-II、TNT火薬換算18/22トン相当)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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