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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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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르트 총회는 1618년 네덜란드 도르트에서 열린 국제 종교 회의이다. 이 회의는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사후 그의 추종자들인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제기한 칼뱅주의 교리에 대한 반론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정치적 음모와 종교적 갈등이 얽힌 가운데, 총회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배척하고 칼뱅주의 교리를 확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회의는 칼뱅주의 5대 강령으로 알려진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교리를 제시했으며, 네덜란드어 성경 번역을 시작하는 등 종교적,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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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 총회
기본 정보
도르트 총회 문장
도르트 총회 문장
다른 이름도르트 회의, 도르트 신조
유형국제 교회 회의, 신조 채택
소집네덜란드 개혁 교회
날짜1618년 11월 13일 ~ 1619년 5월 9일 (율리우스력)
장소네덜란드 도르트레흐트
의제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
의장요하네스 보거르만
참석자개혁 교회 대표, 아르미니우스주의 대표
결과도르트 신조 채택
아르미니우스주의 정죄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추종자 추방
배경
주요 쟁점칼뱅주의 5대 교리 (TULIP)
관련된 교리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영향
결과적 영향칼뱅주의 교리 강화 및 확산
관련 문서
주요 문서도르트 신조

2. 역사적 배경

도르트 총회는 스페인과의 네덜란드 전쟁 중 12년 휴전 기간 동안 발생한 정치적, 신학적 논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2]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사후, 그의 추종자들은 1610년 항의서를 통해 벨기에 신앙 고백, 존 칼빈, 테오도르 베자 등의 가르침에 반론을 제기했다. 이들은 '항의파(항의자)'로 불렸으며, 예견된 믿음에 따른 조건부 선택, 제한 없는 속죄, 거부할 수 있는 은혜, 은혜로부터의 타락 가능성 등을 주장했다. 반면, 레이덴 대학교의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를 중심으로 한 칼뱅주의자들은 '반항의파(반-항의자)'로 불리며 이에 반대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거짓 교리를 퍼뜨리고 스페인과 타협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아 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반역으로도 간주되었다. 1617~1618년에는 팜플렛 전쟁이 벌어졌고, 프란시스 판 아르센스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스페인 펠리페 4세를 위해 일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1618년 3월, 아드리안 파우에 의해 전국 시노드 계획이 시작되기 전, 시노드의 성격을 두고 반항의파는 전국적인 시노드를, 항의파는 홀란드의 지방적인 시노드를 주장하며 논쟁을 벌였다. 이 문제는 1617년 영국 대사 더들리 칼턴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국 시노드로 결정되었다.[2]

2. 1. 칼뱅주의-아르미니우스 논쟁의 역사

이전에도 도르트에서는 지방 시노드가 열렸고, 1578년에는 전국 시노드가 열렸다.[2] 이러한 이유로 1618년 회의는 때때로 ''제2차 도르트 시노드''라고 불린다.

시노드의 결정은 스페인과의 네덜란드 전쟁 휴전 기간인 12년 휴전 기간 동안 발생한 정치적 음모와 관련이 있었다.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사후, 그의 추종자들은 벨기에 신앙 고백과 존 칼빈, 테오도르 베자 및 그들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이러한 반론은 1610년 항의서라는 문서로 출판되었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항의자''로도 알려졌다. 그들은 예견된 믿음에 근거한 조건부 선택, 제한 없는 속죄, 거부할 수 있는 은혜, 은혜로부터의 타락 가능성을 가르쳤다. 이에 반대하는 칼뱅주의자 또는 고마르주의자들은 레이덴 대학교의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를 중심으로 ''반-항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거짓 교리를 전파하고 스페인과 타협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반역으로도 간주되었다. 1617~1618년에는 팜플렛 전쟁이 벌어졌고, 프란시스 판 아르센스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스페인 펠리페 4세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1618년 3월 아드리안 파우에 의해 전국 시노드 계획이 시작되었다. 그 전에는 시노드가 반-항의자들이 원했던 대로 전국적인 것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항의자들이 주장한 대로 홀란드의 지방적인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 결정은 1617년 영국 대사 더들리 칼턴의 외부 의견을 받아 결정되었다.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사후, 그의 지지자들은 벨기에 신앙 고백, 장 칼뱅과 그의 후계자 테오도르 드 베자의 가르침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다. 이 반대 의견은 1610년의 레몬스트란스(Remonstrance)에 의해 발표되었으며, 그들은 레몬스트란트파로 알려졌다. 이에 반해, 칼뱅주의자들은 라이덴 대학교의 프란키스쿠스 고마루스 교수를 지도자로 하여 반 레몬스트란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레몬스트란스와 그 후의 출판물에서 알미니우스파는 벨기에 신앙 고백의 칼뱅주의 교리 개정을 발표했고, 믿음의 예지(豫知)에 의한 선택에 근거하여 보편 구원론, 저항 가능한 은총, 은혜로부터의 타락 가능성을 가르쳤다.

시몬 에피스코피우스(1583-1643)는 1618년 교회 회의 전에 소집된 레몬스트란트파 13인을 대표하는 대변인이었다. 회의는 칼뱅주의자와 알미니우스주의자로 구성되어야 했지만, 알미니우스주의 대표는 회의 일원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또한 판사는 이미 알미니우스주의자를 부정하는 인물이었다. 이 회의에서 레몬스트란트파가 패배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2. 2. 정치적 상황

도르트 총회의 결정은 12년 휴전 기간 동안 발생한 정치적 음모와 관련이 있었는데, 이는 스페인과의 네덜란드 전쟁의 휴전 기간이었다.[2]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가 사망한 후, 그의 추종자들은 벨기에 신앙 고백과 존 칼빈, 테오도르 베자 및 그들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이러한 반론은 1610년 항의서라는 문서로 출판되었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항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거짓 교리를 전파하고 스페인과 타협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신학적으로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1617~1618년에는 팜플렛 전쟁이 벌어졌고, 프란시스 판 아르센스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스페인 펠리페 4세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1618년 3월 아드리안 파우에 의해 전국 시노드 계획이 시작되었다. 그 전에는 시노드가 반-항의자들이 원했던 대로 전국적인 것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항의자들이 주장한 대로 홀란드의 지방적인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 결정은 1617년 영국 대사 더들리 칼턴의 외부 의견을 받아 결정되었다.

3. 회의 목적

도르트 총회가 소집된 목적은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사후 그의 추종자들이 1610년 레몬스트란스(Remonstrance)를 통해 벨기에 신앙 고백, 장 칼뱅과 그의 후계자 테오도르 드 베자의 가르침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명하면서 네덜란드 교회에서 일어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1] 레몬스트란트파로 알려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믿음의 예지(豫知)에 의한 선택에 근거하여 보편 구원론, 저항 가능한 은총, 은혜로부터의 타락 가능성을 가르쳤다.[1]

이에 반해, 라이덴 대학교의 프란키스쿠스 고마루스 교수를 중심으로 한 칼뱅주의자들은 반 레몬스트란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1]

시몬 에피스코피우스는 1618년 교회 회의 전에 소집된 레몬스트란트파 13인을 대표하는 대변인이었다.[1] 회의는 칼뱅주의자와 알미니우스주의자로 구성되어야 했지만, 알미니우스주의 대표는 회의 일원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판사는 이미 알미니우스주의자를 부정하는 인물이었다.[1] 이러한 이유로 이 회의에서 레몬스트란트파가 패배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1]

4. 참가 대표

총회에는 유럽 대륙과 영국 제도의 개혁주의 교단을 대표하는 27명의 대표가 참석했다.[3] 이들 중에는 잉글랜드 성공회[4]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온 성공회 대표들도 있었다.

5. 회의 진행 과정

시몬 에피스코피우스는 1618년 총회에 소환된 14명의 항의자 대표였다. 총회 개회 시 에피스코피우스는 발언을 요청했다.[1]

에피스코피우스는 칼빈주의 교리, 특히 예정론에 대한 반박으로 시작하는 것을 허용해 줄 것을 주장했는데, 이 교리에 대한 반대를 다른 모든 것보다 먼저 제기함으로써 그 시스템의 다른 조항들에 대한 편견을 불러일으켜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총회는 항의자들이 개혁 신앙에서 벗어났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므로, 먼저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성경적 증거를 제시하여 자신을 정당화해야 한다고 상기시켰다. 알미니우스파는 이러한 절차에 따르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의 모든 논쟁 체계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떠난 후, 총회는 그들 없이 진행되었다.[2]

그는 회의 조직에 대한 불만을 표명했고, 반항의자들이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알미니우스파 지지자들을 총회 투표에서 정확하게 대표하지 못하게 했다고 결론지었다.[3] 버나드 아렌츠 드윙글로와 요하네스 아놀디 코르비누스로 구성된 에피스코피우스 대표단은 잉글랜드 교회 대표들과 외부에서 온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하고 상황에 대한 서면 설명을 제공했다. 그 후 한 달 동안 항의자들에 대한 절차적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1월 14일 57차 회의에서 총회에서 축출되었다.[4]

6. 도르트 신조

도르트 신조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견해를 거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며, 각 항목에 대한 개혁주의 교리를 제시했다. 즉,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선택된 자만을 위한 것이고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이다. 이것들은 때때로 칼뱅주의 5대 강령이라고 불린다. 이 명칭은 칼뱅주의의 모든 것을 단지 5가지 강령으로 축소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권에서 도르트 신조의 가르침을 위해 나중에 개발된 약어인 TULIP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칼뱅주의 입장을 요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도르트 신조로 알려진 ''네덜란드에서 논쟁이 된 교리의 다섯 가지 주요 쟁점에 대한 도르트 신조의 결정''은 신조의 사법적 결정에 대한 설명이다. 원래 서문에서, 그 ''결정''은 다음과 같이 불린다.

> 위에 언급된 교리의 다섯 가지 쟁점에 관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진실된 견해가 설명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거짓된 견해가 거부되는 판단.

회의는 레몬스트란트의 주장을 물리치고 끝나, 쟁점에 관해 개혁파의 교리를 기술했다.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이다. 이것은 종종 칼뱅주의의 5대 강령으로 TULIP이라고 불린다.

7. 회의 결과 및 영향

도르트 총회는 레몬스트란트파의 주장을 반박하고, 쟁점이 되었던 개혁파 교리를 5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하였다. 이를 칼뱅주의의 5대 강령 또는 TULIP이라고 부르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리내용
전적 타락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이다.
무조건적 선택하나님은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정해 놓으셨으며, 이는 인간의 어떠한 조건과도 관계없이 이루어진다.
제한 속죄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만을 위한 것이다.
불가항력적 은혜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인간이 거부할 수 없다.
성도의 견인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총회는 또한 원어 성경을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시작하여 1637년에 국역성경을 완성했다. 이 번역본은 표준 네덜란드어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3세기 이상 개신교 교회에서 표준 번역본으로 사용되었다.[1]

7. 1. 종교적 영향

아브라함 판 데르 에이크(1721)의 ''알미니우스파와 그 반대자들 간의 신학 논쟁의 우화''는 많은 알미니우스파 사람들이 총회에 대해 생각했던 바를 우화적으로 나타낸다. 알미니우스파 측의 성경은 국가 권력을 나타내는 칼에 의해 무시되었고, 반대편에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가 놓여 있다.


에피스코피우스를 포함한 13명의 레몬스트란트 목사들은 도르트에 머물라는 지시를 받았다. 1619년 5월 20일, 이들은 총회의 평신도 위원회에 소환되어 설교, 권면, 성례전 집행, 병문안과 같은 목회 활동을 삼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에피스코피우스는 레몬스트란트의 교리를 홍보하는 편지나 책을 쓰지 말라는 명령도 받았다.[1] 레몬스트란트파는 정부 지정 교회에서의 목회는 자제하되, 사람들이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교리를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1619년 7월 5일, 레몬스트란트파는 국가 총회에 소환되어 목회 중단 명령을 합법화하는 '정지 행위'에 서명할 것을 요청받았다. 이들이 서명을 거부하자 "공공의 평화를 교란하는 자"로 선고받고 네덜란드 연합주에서 추방되었다.[1] 그러나 18세기에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은 잉글랜드로 퍼져 감리교회 신학의 핵심이 되었다.[2]

7. 2. 정치적 영향

는 알미니우스파가 총회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우화적으로 보여준다. 알미니우스파 쪽의 성경은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칼에 의해 무시되었고, 반대편에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가 놓여 있다.

에피스코피우스를 포함한 13명의 레몬스트란트파 목사들은 추가 지시가 있기 전까지 도르트에 머물라는 지시를 받았다. 1619년 5월 20일, 이들은 총회 평신도 위원회에 소환되어 설교, 권면, 성례전 집행, 병문안 등 목회 활동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에피스코피우스는 레몬스트란트파 교리를 홍보하는 편지나 책을 쓰지 말라는 명령도 받았다. 레몬스트란트파는 정부 지정 교회에서의 목회는 자제하겠지만, 사람들이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교리를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3]

1619년 7월 5일, 이들은 국가 총회에 소환되어 목회 중단 명령을 합법화하는 '정지 행위'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았다. 서명을 거부하자 "공공의 평화를 교란하는 자"로 선고받고 네덜란드 연합주에서 추방되었다.[3] 그러나 18세기에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은 잉글랜드로 퍼져 감리교회 신학의 핵심이 되었다.[4]

총회는 레몬스트란트파의 가르침이 개혁 신앙 고백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부했다. 이후 레몬스트란트파의 보호자였던 정치가 요한 판 올덴바르네벨트가 정치적으로 단죄되었다. 그는 "교회와 국가 모두에서 국가의 일반적인 혼란"(반역)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총회 마지막 회의 4일 후인 1619년 5월 13일에 참수되었다. 아르미니우스파의 패배 결과, 법학자 휴고 그로티우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아내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판 올덴바르네벨트와 그로티우스는 1618년 8월 29일부터 투옥된 상태였다.

7. 3. 성경 번역

도르트 총회는 1637년에 완료될 원어에서 공식적인 네덜란드어 성경 번역(국가 번역본 또는 '네덜란드 공인 번역본')을 시작했다. 번역가가 임명되었고 연방 총회는 이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하고 문학적 전통을 발전시키고 있던 표준 네덜란드어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1] 이는 3세기 이상 개신교 교회에서 표준 번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여전히 네덜란드 개혁 교회 연합 및 이와 유사한 더 작은 교단에서 사용된다.[1]

제네바 성경킹 제임스 성경(공인 번역본)과 같은 자매 번역본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목사-학자들은 마소라 본문에서 구약성경을 (70인역을 참고) 그리고 텍스투스 레셉투스에서 신약성경을 (다수 텍스트를 참고) 작업했다.[1]

1645년,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테오도어 하크를 임명하여 "주석이 있는 국역성경"(''도르트 성경과 그 주석'')을 더 널리 배포하기 위해 영어로 번역했다. 이 작품은 1657년 런던에서 헨리 힐에 의해 출판되었다.[1]

7. 4. 대한민국 개신교에 미친 영향

도르트 회의는 레몬스트란트파의 주장을 반박하며 종료되었고, 이 회의를 통해 개혁파 교리가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이 교리는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으로 구성되며, 흔히 칼뱅주의의 5대 강령 또는 TULIP으로 알려져 있다.

참조

[1] 서적 The five points of Calvinism: defined, defended, documented Presbyterian & Reformed Publ. Co 2002
[2] 간행물 Select Acts from the Synod of Dordrecht, 3–18 June 1578 https://dutchrevolt.[...] W. van 't Spijker, 'Acta synode van Dordrecht (1578)', in: ''De nationale synode van Dordrecht 1578'' ed. D. Nauta et al. (Amsterdam, 1978) 142–84
[3] 서적 The five points of Calvinism: defined, defended, documented Presbyterian & Reformed Publ. Co 2002
[4] 간행물 The British Delegation and the Synod of Dort (1618–1619) Church of England Record Society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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