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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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정궁은 조선 중종의 아들이자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 이초의 사저이자 선조의 출생지이며, 대원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한 종택이다. 1538년 창건되었으며, 1569년 덕흥대원군이 추존된 후 후원에 덕흥궁을 건립하였다. 158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선조의 명으로 복원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건 및 보수를 거쳤다. 1913년 화재로 인해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일부 건물과 건국대학교 캠퍼스 내 경원당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7남이자 14대 왕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 이초의 사저로, 1538년(중종 33) 50칸으로 창건되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여 덕흥대원군의 3남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였고, 1569년(선조 2) 생부 덕흥군을 북송 영종의 생부 복왕 고사를 따라 대원군으로 추숭하고 잠저 후원에 불천신위 6위를 모신 가묘(덕흥궁)를 건립하게 하였다. 4대까지 대군(大君) 예로 작위를 주고, 그 이후 사손(嗣孫)들에게는 당상관 돈녕부 정3품 도정(都正) 벼슬을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가 순조조에 와서 종친부 정1품 군(君) 벼슬을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
조선 왕실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도정궁은 여러 차례 화재와 도시 개발로 인해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건국대학교 캠퍼스 내로 이건한 도정궁 경원당은 서울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이는 도정궁이 지닌 역사적, 건축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2. 역사
1588년(선조 21)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되자 선조의 명으로 5개월 만에 복원되었다. 대원군의 사손들은 대대로 당상관 정3품 돈녕부 도정 벼슬을 받았다. 제9대 사손 판돈녕부사 이풍(이례)(李澧)은 자신의 호를 딴 매은정(梅隱亭)과 담연정(澹然亭)을 건립하였다. 중건과 보수를 거듭해오다가 1865년(고종 2) 문조의 비인 신정익황후 조씨가 "도정궁의 사손이 영체(零替)됨으로 인하여 무너지는 대로 보수를 하지 못해서 장차 허물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옛날을 돌이켜 생각할 때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이 집의 소중함이 다른 곳과는 아주 다르니,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어갑주전(御甲胄錢) 5000냥을 하사하여 호조에서 복원하도록 명하였다.
1913년 12월, 다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150칸 중 20~30칸만 남기고 대부분 소실되었다. 1920년 도정궁 장행랑은 서울의 5대 명물 중 하나였으나, 현재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현재 도정궁은 화재와 도시 개발로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사직동 도정궁터에 현대그룹 회장가와 고 운경 이재형가(운경재단) 안채[연비려천(鳶飛戾天)]와 사랑채[긍구당(肯構堂)]가 개보수된 채 남아있으며, 건국대학교 캠퍼스로 이건한 도정궁 경원당(예전 사직동 정재문가)은 서울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2. 1. 건립과 초기 역사
조선 중종의 7남이자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 이초(德興大院君 李岹)의 사저(私邸)이자, 선조가 태어나고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이며, 대원군의 역대 사손(嗣孫)들의 사저(私邸)이자 종택(宗宅)이다.
1538년(중종 33) 덕흥군의 사저로 50칸 규모로 창건되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였다. 1569년(선조 2) 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북송 영종의 생부 복왕의 고사를 따라 대원군으로, 생모는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숭하고, 잠저 후원에 가묘(德興宮)를 건립하였다. 4대까지는 대군(大君)의 예로 작위를 주고, 그 이후 사손들에게는 당상관 돈녕부 정3품 도정(都正) 벼슬을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 이후 순조 대에 이르러 종친부 정1품 군(君) 벼슬을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
1588년(선조 21)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도정궁이 소실되자, 선조의 명으로 5개월 만에 복원되었다. 대원군의 사손들은 대대로 당상관 정3품 돈녕부 도정 벼슬을 받으며 살았다. 제9대 사손 판돈녕부사 이풍(이례)(李澧)은 자신의 호를 딴 매은정(梅隱亭)과 담연정(澹然亭)을 건립하였다. 이후 중건과 보수를 거듭하다 1865년(고종 2) 문조의 비 신정익황후 조씨는 "도정궁의 사손이 영체(零替)됨으로 인하여 무너지는 대로 보수를 하지 못해서 장차 허물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옛날을 돌이켜 생각할 때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이 집의 소중함이 다른 곳과는 아주 다르니,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호조의 경비가 아직도 구차한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단지 어갑주전(御甲胄錢) 5,000 냥을 특별히 획하(劃下)하여 호조에서 속히 수리하라"라며 복원을 명하였다.
2. 2. 화재와 재건
1588년(선조 21) 도정궁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자, 선조의 명으로 5개월 만에 옛 모습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1865년(고종 2)에는 문조의 비 신정익황후 조씨가 도정궁 복원 명령을 내렸다.
1913년 12월, 도정궁에 다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150칸 중 20~30칸만 남기고 대부분 소실되었다.
2. 3. 현대
1913년 12월, 도정궁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150칸 중 20~30칸만 남기고 대부분 소실되었다. 1920년 도정궁 장행랑은 서울의 5대 명물 중 하나로 꼽혔으나, 현재는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현재 도정궁은 화재와 도시 개발로 인해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사직동 도정궁터에는 현대그룹 회장가와 고 운경 이재형가(운경재단) 안채[연비려천(鳶飛戾天)]와 사랑채[긍구당(肯構堂)]가 개보수된 채 남아있다. 건국대학교 캠퍼스로 이건된 도정궁 경원당(예전 사직동 정재문가)은 서울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3. 역대 주인
순서 이름 생몰년 비고 덕흥대원군 1530년-1559년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아버지 제1대 의헌공 하원군 이정 1545년-1597년 호성원종2등공신 제2대 종실 당은군 이인령 1562년-1615년 제3대 종실 응천군 이돈 1579년-1617년 제4대 동지돈녕부사 이정한 1601년-1671년 제5대 동지돈녕부사 이홍일 1640년-1718년 제6대 돈녕도정 증 참판 이세정 1661년-1721년 제6.5대 진사 이명좌 1681년-1722년 임인사화 연좌 제7대 돈녕도정 증 이조판서 이명회 1685년-1727년 임인사화 연좌 제8대 돈녕도정 증 좌찬성 이형종 1706년-1759년 제9대 판돈녕부사 이풍(이례) 1727년-1795년 제10대 진안군 이언식 1752년-1819년 제11대 완성군 이희 1771년-1830년 제12대 완창군 이시인 1805년-1843년 제13대 증 경원군 이하전 1842년-1862년 헌종, 철종조 왕위 물망 제14대 창산군 이해창 1865년-1945년 제15대 비서원승 이덕주 1887년-1962년
4. 가계도
대 이름 생몰년 비고 1 덕흥대원군 1530년 ~ 1559년 선조의 사친 2 하원군 이정 1545년 ~ 1597년 호성원종 2등공신 3 당은군 이인령 1562년 ~ 1615년 4 응천군 이돈 1579년 ~ 1617년 5 이정한 1601년 ~ 1671년 동지돈녕부사 6 이홍일 1640년 ~ 1718년 동지돈녕부사 7 이세정 1661년 ~ 1721년 돈녕도정, 증 참판 7.5 이명좌 1681년 ~ 1722년 진사, 임인사화 연좌 8 이명회 1685년 ~ 1727년 돈녕도정, 증 이조판서, 임인사화 연좌 9 이형종 1706년 ~ 1759년 돈녕도정, 증 좌찬성 10 이풍(이례) 1727년 ~ 1795년 판돈녕부사 11 진안군 이언식 1752년 ~ 1819년 12 완성군 이희 1771년 ~ 1830년 13 완창군 이시인 1805년 ~ 1843년 14 경원군 이하전 1842년 ~ 1862년 증 경원군, 헌종·철종조 왕위 물망 15 창산군 이해창 1865년 ~ 1945년 16 이덕주 1887년 ~ 1962년 비서원승
5. 도정궁의 문화적 가치
현재는 도정궁의 옛 모습을 온전히 찾아보기 어렵지만, 남아있는 건물들과 기록들을 통해 조선 왕실의 생활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도정궁 터에 남아있는 현대그룹 회장가와 운경 이재형가(운경재단)의 건물들은 도정궁의 역사적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5. 1. 건축
중종의 7남이자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 이초의 사저인 도정궁은 1538년(중종 33)에 50칸 규모로 처음 지어졌다. 1569년(선조 2)에는 선조가 즉위하면서 생부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숭하고, 잠저 후원에 가묘인 덕흥궁을 건립하였다.
1588년(선조 21)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선조의 명으로 5개월 만에 복원되었다. 이후 대원군의 사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받으며 살았고, 제9대 사손 이풍은 매은정과 담연정을 건립하였다. 중건과 보수를 거듭하다 1865년(고종 2)에는 신정왕후 조씨의 명으로 대대적인 수리가 이루어졌다.
1913년 12월, 다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150칸 중 20~30칸만 남기고 대부분 소실되었다. 1920년 당시 도정궁 장행랑은 서울의 5대 명물 중 하나로 꼽혔으나, 현재는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현재 도정궁은 화재와 도시 개발로 대부분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사직동 도정궁터에 현대그룹 회장가와 운경 이재형가 안채[연비려천(鳶飛戾天)]와 사랑채[긍구당(肯構堂)]가 개보수되어 남아있다. 건국대학교 캠퍼스 내로 이건한 도정궁 경원당은 서울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5. 2. 역사
도정궁은 조선의 제11대 왕 중종의 7남이자 제14대 왕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 이초(德興大院君 李岹)의 사저(私邸)이자, 선조가 태어나고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이며, 대원군의 역대 사손(嗣孫)들의 사저(私邸)이자 종택(宗宅)이기도 하다. 본궁 후원에는 불천신위 6위를 모신 덕흥궁(德興宮)이 있었다.
1538년(중종 33) 덕흥군의 사저로 50칸 규모로 창건되었으며, 제13대 왕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였다. 1569년(선조 2) 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북송 영종의 생부 복왕의 고사를 따라 생부와 생모를 각각 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숭하고, 잠저 후원에 가묘(家廟, 德興宮)를 건립하게 하였다. 그리고 4대까지 대군(大君)의 예로 작위를 주고, 그 이후 사손(嗣孫)들에게는 당상관 돈녕부 정3품 도정(都正) 벼슬을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 이후 순조의 명으로 종친부 정1품 군(君) 벼슬을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
1588년(선조 21) 도정궁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되자 선조의 명으로 5개월 만에 옛 모습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대원군의 사손들은 대대로 당상관 정3품 돈녕부 도정(都正) 벼슬을 받고 살아 내려왔다. 제9대 사손 판돈녕부사 이풍(이례)(李澧)은 자신의 호를 딴 매은정(梅隱亭)과 담연정(澹然亭)을 건립하였고, 중건과 보수를 거듭해오다가 1865년(고종 2)에 문조의 비 신정익황후 조씨가 복원 명령을 내렸다.
1913년 12월, 도정궁은 다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150칸 중 20~30칸만 남기고 상당수 불에 타 소실되었다. 1920년 도정궁 장행랑은 서울의 5대 명물 중 하나였다.
현재 도정궁은 화재와 도시 개발로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사직동 도정궁터에 개보수된 현대그룹 회장가와 고 운경 이재형가(운경재단) 안채[연비려천(鳶飛戾天)]와 사랑채[긍구당(肯構堂)]가 개보수된 채 남아있다. 건국대학교 캠퍼스로 이건한 도정궁 경원당(예전 사직동 정재문가)은 서울민속자료 제9호로 문화재 지정 및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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